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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성찬주일예배 용

관리자 2018-09-27 (목) 12:49 5년전 1385  

본문) 출 16:1-8, 13-15, 요 6:26-35, 고전 11:23-26

 

창조절 다섯째 주일이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어떤 류(類)의 창조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실까?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과연 어떤 말씀을 주시리라고 기대하시는가? 

 

오늘은 우리가 먹는 음식(飮食/Food)에 관한 말씀을 주신다. 그것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매일 매끼마다 먹는 그러한 육체적(肉體的)인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인 그리스도인들만이 먹는 매우 특별한 영적(靈的) 음식에 관한 말씀들을 주신다. 

 

본래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에 앞서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의 양식거리들부터 이 지구촌에 넉넉히 마련해 놓으셨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체들은 누구나 먹고 살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을 먹여 살리시는 분이시다. 

 

그런데도, 그런 누구나 먹을 보편적(普遍的) 음식 이외에도, 아무나 먹을 수 없는 매우 특별(特別)한 음식이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마련되어 있다는 소식을 오늘의 말씀들은 전하려고 한다. 마침 그것을 제시하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 속에 나와 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친히 구별(區別)해서 언급하신 두 가지 양식들에 관한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같이 읽자.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永生)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印)치신 자니라’(요6:27)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양식에는 아주 대조적(對照的)인 두 가지 것들이 있다. 하나는 ‘썩을 양식’이요,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다. 이 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썩을 양식은 아무래도 우리 몸(육체)를 위한 양식을 말하셨다고 본다. 매일 매일의 육신의 생존을 위하여 먹는 일시적인 음식이다. 이것은 땅(대지)을 통하여 제공된 것이다. 반면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은 우리의 영혼(靈魂)을 위한 양식을 말하신 것이다. 이것은 땅에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썩을 양식은 우리의 겉 사람을 위한 것이고, 영생을 위한 양식은 우리의 속사람을 위한 양식이다). 

 

양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먹지 않고 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는 것이다. 어떤 음식을 먹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건강할 수도 있고, 병들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음식의 중요성은 음식이란 것이 그 사람의 체질도 형성하게 하고, 성격에도 영향을 주며, 몸의 형태와 크기나 기능 형성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음식 문화만 깊이 살펴보아도, 그 집안이나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특성과 기질들까지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들로 택하시고 살도록 부르시면서, 매우 중요하게 더불어 창조하신 부분도 바로 이 특별한 음식 문화(文化)의 제정(制定)이었다. 세상의 썩을 육체의 양식만으로는 그들의 체질을 예수 닮은 자들로 변화시킬 수가 없음을 아셨기에, 그보다도 상위(上位)에다 오직 당신의 백성들만 취할 수 있는 구원의 식탁(음식)을 따로 마련하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가족과 백성들로 하여금, 모이면 당신이 제정해주신 식사를 먹고 마시면서, 영원한 나라를 상속(相續)하기에 합당한 공동체와 한 민족을 이루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실로 식사의 놀라운 힘을 알고,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식사가 우리 몸의 체질에 영향을 주게 하려면, 우선은 규칙적으로 음식을 먹어야 된다. 가끔 먹는 음식이 되면, 식사를 통한 변화는 아예 기대하기 어렵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제공해 주신 공동식사의 주 메뉴들이 있다. 어떤 것들인가? 크게 보면, 성격상 두 가지이다. 

 

하나는 ‘듣는 식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듣기’이다. 이 식사를 위해 우리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고 공부하며 산다. 주일 성수도 그 까닭이다. 이 때의 식탁의 주관자는 생명의 주이신 예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마련된 설교란 식사를 통하여, 구원의 주 예수를 배우고 그의 음성을 경청하며 그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고 산다. 매 주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그의 이야기와 교훈들을 들어야만 사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한 삶은 이미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 자체가 되었다. 한 주간의 식탁이라도 듣고 먹지 못하면, 그 때부터는 길 잃은 양으로 헤매는 슬픈 인생이 된다. 

 

다른 하나는, ‘먹는 식사’로서의 ‘주의 성찬(聖餐)’을 받은 일이다. 이는 매우 특별한 식사로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직접 먹고 마시는 영적 음식을 취하는 행위이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그 상징적 표지로서, 포도주와 떡을 통하여 예수의 피와 살로 받고는 있지만, 이 성찬 받기는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가장 엄숙한 순간이다. 성찬을 받으면서 내가 당신과 하나이며, 당신이 나의 구주이시며, 내가 당신의 사람이 된 ‘혈맹(血盟)의 가족’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거룩한 식사에의 지속적인 참여를 통하여, 우리는 죄인의 속성과 저주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하늘의 영원한 나라를 상속할 체질(DNA)을 입게 된다. 마치 부모와 자식이 같은 디엔에이를 공유하듯이, 우리도 성찬의 식탁을 통하여 주님의 체질을 닮은 존재가 되는 길이란 말이다. 이런 힘만큼 강한 것이 또 있을까-!

 

역사상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숱한 박해들이 있었다. 그 박해의 가장 큰 원인은 뜻밖에도 이 성찬 문화 때문이기도 했었다. 기독교는 인간의 살과 피를 먹는 식인(食人) 집단이라는 오해 때문이었다. 실로 ‘오해 치고는 큰 오해’였지만, 그만큼 기독교의 성찬은 세상에게는 매우 이질적이고 낯선 식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애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결코 그 식탁을 포기하거나 외면할 수 없었다. 오직 말씀과 성찬만이 구세주에게 나아갈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2천년 역사 속에서 ‘듣는 말씀’은 물론, 이 ‘먹는 말씀’인 성찬을 견고하게 지키고 취하며 그 속에서 영생을 맛보며 살아 왔다. 마침 오늘의 말씀들은 하나님이 제공하신 특별한 성찬의 기원과 역사와 음식에 담긴 메시지들을 집중(集中)해서 전해 준다. 마침 다음 주일(10.7)은 세계성만찬 주일인데, 오늘 말씀 잘 들어서 그 주일을 복되게 맞이하도록 하자. 

 

구약, 출애굽기를 어떻게 보아야하나

 

출(出)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그 험난한 광야에서 40년을 살게 한 특별한 음식이 있었다.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였다. 이것들은 굶주림의 공포에서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베풀어주신 양식들이었다. 그들이 이제까지 애굽에서 먹고 지내왔던 고기와 떡과는 아주 성격이 다른 새로운 음식물이었다(출16:3참조).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그것들이 아주 낯설어서, ‘이것이 무엇이냐’(만후)라며 놀라워했던 것이었는데, 그 의문에 대하여 모세가 이렇게 답(答)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먹게 하신 양식이다’(6-8,15절)

 

그 때부터 그들은 밤에는 동물성 식품인 메추라기를, 아침에는 식물성 식품인 만나를 꾸준히 공급받으며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근 40년간 그들을 살리는 유일한 음식이 되었다(1,8,13절). 그 공급 정량(定量)은 일용할 양식 정도였는데, 다만 안식일 직전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로 두 배로 공급해 주셨다(5,16절). 

 

사실 이 광야 식품공급은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담은 표적(標的)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생명을 책임 있게 먹이시고 살리시는 여호와이심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온 세상 만민들의 생명을 위해서도 먹거리를 공급해 주시는 주이심을 알게 하면서, 동시에 모든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을 향(向)한 삶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건이 되었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복음서의 기자는 예수의 오병이어를 통한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신 사건을 접하면서, 옛날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광야 백성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살리신 일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먹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를 원했다. 그것은 지금의 예수가 모세 시대의 광야에서 그의 백성들을 먹이셨던 ‘바로 그 분’이셨고 ‘그의 아버지’였음을 동시에 알리고자 한 뜻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32-33절 참조). 

 

그러기에 예수님 자신도 당신을 향한 제자들의 접근을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기를 요구하셨다. 즉 세상 사람들은 빵 문제(경제적) 해결자로 예수를 좇고 있지만, 당신의 백성들인 제자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접근을 원하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접근인가? 바로 세상이 구하는 썩어질 양식을 바라는 차원에서 당신을 좇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당신이 추구하고 계신 것처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추구하려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바로 그곳에서 일하고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27절). 즉 나무로 보면, 가지와 같은 역할이 아니라 뿌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인물들이기를 원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궁금해졌다.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서슴없이 주님이 답하셨다. ‘하나님의 일이란 그가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29절). 주님의 요구는 인간의 행위 우선이 아니라 믿음 우선이었다. 주님은 인간들이 하나님께 저지르는 실패의 근원이 어디에서 일어나는 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더욱 행동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우선이었다.  

 

왜 그랬을까? 믿음이 부족하거나 부재한 상태에서의 행위란 그 결과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믿음 없는 행위는 모두가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자기중심이며 자기를 위한 일이 되어, 죄악으로 흐르고 말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일수록, 그 첫 단추는 반드시 믿음이어야 된다. 즉 믿음이 기초 음식이어야 한다. 그 다음은 거칠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함께 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유대인들이 ‘자기들로 하여금 당신을 보고 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계속 요구했다(30절). 그러자 예수님은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먹이셨던 사례를 소개하시다가, 급기야는 당신을 ‘하늘 아버지가 그들에게 내려주신 참 떡’임을 밝히시면서(31-33절), 당신에 대한 소개를 다음과 같이 하셨다 :

 

-‘나는 생명의 떡(the Bread of Life)이니 네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이 예수님의 ‘자기 계시(啓示)’는 당신이 요나의 표적처럼, 십자가에 죽고 사흘 후 다시 사는 표적으로 자신을 세상에 내어주심으로서, 그를 믿고 몸 사역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부여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후에 주님께서는 다시금 당신의 최후의 만찬(晩餐) 석상에서 제정의 말씀을 친히 더하여 주셨다(마26:26-28,막14:22-24,눅22:19-20참조). 

 

서신서인 고린도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교회의 사도인 바울이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소중하게 전수(傳受) 받아서, 신학적으로 정리하여 온 교회에 반드시 지켜 행하도록 전(傳)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증언이 예수의 식탁에 직접 참여하였던 친(親) 제자들인 12 사도들에 의해서가 아닌, 간접 경험자일 수밖에 없었던 바울에 의해서 전달된 장면은 매우 새롭고 특별하게 보인다(23절 참조). 그만큼 바울은 주의 이 성찬이 그리스도인에게서 절대 중요한 영적 식탁이고, 자신의 생명이 구원에 이르렀음을 확인시켜 줄 매우 구체적인 영적 매체(媒體)로 본 것이 아니었겠는가! 

 

성만찬의 특성에 대하여 스티븐 브라운은 이렇게 정의해 주었다. “세상은 잊기 위하여 마시지만, 성도는 기억하기 위하여 마신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놀라운 주의 거룩한 식탁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聖餐)에는 다음의 세 가지 메시지들이 담겨 있음을 알려준다.

 

1) 기억(記憶)하고 기념(記念)하는 일이다(24절,b). 그냥 주의 살을 먹는 일이 아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저 십자가에서 제물(祭物)되어 살을 찢어 떼어 주셨음을 믿음으로 받으며, 기억하고 기념하며 식탁에 참여해야 하는 메시지가 담긴 떡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2) 피로 맺은 언약(言約)이 주님과 나 사이에 굳게 맺어졌음을 고백(告白)하는 일이다(25절). 

예수의 피는 본래 흠(欽)없어서, 그 자체가 거룩하고 순결하다. 바로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죄악과 저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저 십자가 형장에서 당신의 거룩한 피를 제물로 제공하신 것이다. 그 바람에 나는 그저 아무런 공로가 없어도, 흉악한 죄에서 속죄 받아 주님과 함께 기리 살 수 있는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피의 혈맹 가족’이 된 것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은 바로 그 점을 입술과 가슴으로 고백하여야 한다. 

 

3) 전(傳)하고 선포(宣布)하는 일이다(26절). 좋은 음식은 그냥 먹고 끝날 수 없다. 나만 즐기고 말 수도 없다. 전하고 알리는 일이 자연스럽게 따른다. 자신이 누린 혜택을 이웃과도 나누고자 함이다. 하물며 나를 영생하게 하는 특별한 음식과 그 주체인 그리스도 예수의 피의 사랑을 전하지 않으면, 누가 이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알릴 수 있겠는가-! 

 

결론은 이렇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특별한 양식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세상의 썩어질 양식과는 아주 다른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특별한 마련된 음식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이 음식들은 매일, 매주 계속 먹고 마시면서 우리를 살리고 있다. 그게 어떤 음식들이었나?

 

예수의 말씀을 듣는 양식이다. 매 주일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말씀의 식탁을 교회 예배를 통하여 받으며 먹고 마신다. 그 순간, 우리는 믿음 안에서 생명의 빵인 예수를 공급받는다. 그러면서 평생을 산다. 하나님나라에 갈 때까지 그렇게 산다. 그러기에 우리의 주일 성수는 생명을 걸고 열심을 내셔야 한다. 식탁에 참여하듯 말씀 앞에 와야 한다.  

 

예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의 양식도 우리의 특별 메뉴이다. 성도들은 이 시간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참여해야 한다. 몸과 마음도 깨끗이 하시고, 감사도 드리며, 주님의 날 위해 죽으신 일을 기억하고 고백하며 선포하는 우리가 되게 하자. 영원한 생명은 이러한 영적 행진을 중단 없이 계속하는 이들에게 부여되는 하늘의 응답이며 선물이다. 이 음식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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