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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남신도회주일

관리자 2018-09-14 (금) 00:11 5년전 1266  

본문) 사 55:6-13, 마 6:5-15, 벧전 1:13-21

 

우리는 이미 지난 창조절 첫째 주일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出生)에 대하여 놀라운 증언을 들은 바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낳으신 분’이었다는 점이다(잠8:24-25, 요1:14, 골1:15,18참조). 그러면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함께 이 만물 창조 사역에 처음부터 함께 하시며 동역하신 바를 확인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런 탄생에 관한 첫 증언을 시작과 함께 온 세상에 띄웠던 목적(目的)이 무엇이었을까? 

 

결국은 만들어진 것이 아닌 낳은 것이 갖게 되는, 본질적 차이(差異)로서의 힘과 그 결과(열매)들을 전하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피조물(被造物)로서의 안 되지만, 자녀(子女)로서는 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그 분명한 차이와 차별을 선명히 전하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 

 

제조자에게는 자기가 만든 모든 제조물(피조물)이 물론 다 귀하고 소중할 것이다. 그래서 애정과 돌봄이 손길이 강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다 한계가 있다. 만든 것에 대한 기대와 목표치가 사라지면, 그 때는 미련 없이 포기하거나 버린다. 패기처분 되는 쓰레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피조물이나 제조품이 갖게 되는 어쩔 수 없는 한계(限界)이다.

 

하지만, 대상이 내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면, 그 경우는 이야기가 아주 다르다.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된 관계가 되었기에, 어떤 경우에도 버릴 수는 없는 대상이 된 것이다. 운명(運命)을 같이하게 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식은 다른 집 자식과도 비교 대상이 아니다. 부족해도 못났어도, 결국 평생을 끌어안고 품으며 살게 된 유일한 대상들일 뿐이다. 종종 혼내고 매질도 하지만, 그것은 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온전하고 강한 자녀로 삼기 위함이다. 자식 잘되는 일이라면, 부모는 목숨같이 귀한 재산까지도 내려놓는다. 심하면 목숨도 내어 놓는다. 그게 부모-자식 관계이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면류관(冕旒冠)이라고 까지 불리지 아니한가!

 

여러분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만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의 자녀로 살고 있는가? 이 점이 중요한 까닭은 그 대답이 바로 나의 구원에 대한 답변으로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신분이 전부라면, 나의 구원의 보장은 없다. 유용성이 유지되는 순간까지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종이나 청지기의 신분 정도라면, 그것 역시 전망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크게 착각한다. 행위와 덕을 쌓아서 뭔가 선한 일에 힘써야만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선과 덕을 쌓아야 구원이 보장된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느 정도를 해야만 그 구원의 수준에 달한단 말인가? 정말 밑도 끝도 없는 허황된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물음이다. 그러기에 구원은 행위를 놓고 접근하면, 처음부터 불가능함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차원으로 결정지어질 수만 있다면, 구원의 이야기는 매우 분명해진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식 역시 부모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구원의 문제를 행위나 업적 차원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란 관계(關係) 차원에서 확인해야 될 이유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왜 그토록 당신을 섬기는 인간들에게,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지도하셨는지에 관하여 주목해야 한다. 그는 당신 홀로 독점해야 마땅할 그의 하늘의 아버지를, 연약하고 변덕스럽고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 모두의 아버지’로 기꺼이 내어 주신 것이다. 왜 그러하셨을까? 그게 바로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그 어떠한 복잡한 조건들보다도 훨씬 더 간편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일단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순한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닌,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정착되면, 그 때는 서로가 새롭게 맺게 된 소중한 관계로 인해, 자체 의식(意識)도 달라지고 상대에 대한 대우(待遇)도 달라지면서 존재 자체도 새 판을 짜야만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예수님의 ‘하나님을 향한 아버지’라는 호칭 부여(附與)는 벽에 부딪힌 진정한 인간 구원문제 해결을 위한 대담하고도 창조적인 발상의 산물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당연히 우리는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우리가 살 길임을 믿고 이 호칭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활용해야만 한다. 언제 사용하는가? 매일 드리는 기도(祈禱)를 통하여서다! 예수님도 바로 그 기도 방법을 통하여, 우리가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도록, 교제하도록 지도해 주셨다. 이제 바로 그 눈으로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을 깊이 숙고해 보자. 

 

구약, 이사야 예언서를 다시보자

 

본문은 오랜 바벨론 포로생활에 지치고 힘겨워하며 자기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도 ‘별 수 없는 신’이요 ‘자기들을 돕지 못하는 무기력한 신’이라는 깊은 회의(懷疑)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을 대한 여호와의 강력한 반론(反論)이며 일깨움의 말씀이다. 

 

그 시기는 누구를 원망이나 하고 무기력에 빠져 절망할 때도 아니라, 오히려 가장 희망(希望)할 때임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제 그들의 범죄로 인한 형벌로서의 포로생활이란 형기(刑期)가 마감할 때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일찍이 렘25:11을 통하여,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를 70년간으로 마치 죄수의 형기처럼 예고한 바가 있었는데, 그 때가 바로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복역을 마친 죄수들의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출소 후에 바깥 생활에 대한 비전과 대책이 없으면, 그는 세상살이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재범하고 또 다시 감옥에 들어올 확률이 높다. 비극의 연속일 뿐이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지금 누굴 원망이나 하고 자신들의 신세타령이나 하고 지낼 때가 아니었다. 포로생활 후, 새롭게 펼쳐질 새 생활에 대한 대비를 강구하고 준비해야만 할 때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유대인 자체의 힘과 의지로는 그 자립책이 불가능했다. 누군가 도와주고 붙들어 주어야 일어설 수가 있었다. 그 중요한 절대적 역할을 누가 할 것인가? 버림당했던 자식 같은 그들을 누가 챙길 것인가? 결국 그들을 낳으셨고 지금껏 자녀로 품고 지내오신 아버지 여호와이셨다. 자식의 타락에 매를 드셨어도, 그러나 결코 버릴 수는 없는 당신의 자식같은 유대인들의 난감한 상황에 해결책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요구는 ‘하나님을 찾고, 나와서 부르며,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었다(6-7절). 그게 출소(환국)를 준비하는 그들에게는 가장 우선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회복은 그들의 출소 후의 모든 행보를 복되고 안전하게 유지해 가는 데, 핵심 사항이기 때문이었다. 목자의 인도에 회의하는 양의 운명은 결코 안전할 수 없지 않는가! 게다가 하나님은 출소하고 나온 이스라엘을 더 이상 옛날의 범죄자요 사고뭉치처럼 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긍휼과 용서로 그들을 너그러이 품어주실 선(善)한 아버지 목자로 인도하실 터이니, 믿고 나오라고 요구하셨다. 

 

8-11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은 돌이킬 수 없는 반드시 시행될 것이고, 그것도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계산된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하신 방법으로 당신의 말씀을 확정하여 이루실 것을 강조하신 내용이다. 따라서, 이제는 믿음의 대응으로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부르고 찾는 것만이 이스라엘의 살 길이다. 양의 방법은 목자에게 있음을 믿으면 된다. 그러면 모든 환경은 그들의 새 출발을 축하하고 돕는 상황으로 전개될 것이다(12-13절 참조). 

 

복음서, 마태복음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그런 놀랍고 틀림없는 좋으신 하늘 아버지이시기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의 택한 모든 자들이 바로 그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맺고 살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인 ‘주의 기도’까지 가르쳐 주시면서 저들의 구원의 문제를 확고히 해주려고 하셨다. 

 

예수님은 기도를 무엇으로 보셨는가? 나약한 인간들이 전능자의 은혜를 입는 것은 물론, 그의 자녀로까지 관계가 정립되고 또 교제(交際)가 가능한 방법으로 보셨다. 기도야말로 전능자와 피조물이 서로의 한계를 뛰어 넘어, 서로의 좋은 관계를 맺을 은혜의 통로로 보신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 기도를 들으실 분에 대한 호칭(呼稱)이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매우 정공법(正攻法)을 취하셨다.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오직 당신만이 독점하여 특권처럼 사용해왔던 그 ‘아버지’(아빠)란 호칭을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아낌없이 허용하셨다. 그것도 기도 내용 속에 무려 7번이나 집중하면서, 당신의 아버지를 아예 인간들 품에 떠안겨 주셨다! - 이제는 '내 아버지'가 바로 ‘너희 아버지’이시다 라며! 

 

그렇다. 제자 된 우리들도 기도할 때나 평상시에도 주님의 이 가르침을 반드시 적극 활용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우리 아버지여’라고 분명하고도 확실히 불러야 한다. 그래야 내 마음에도 하나님 자녀의 의식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사랑도 뜨겁게 받게 된다.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종이나 일꾼처럼 스스로 위축(萎縮)이 되어 사는 것은 후회(後悔)만 남게 될 것임을 잊지 말자. 하나님 나라 상속(相續)도 이 좋은 관계에서 가능하여 지는 것을 잊지 말자. 

 

주님은 이 부자 관계 속에서, 삶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아버지께 아뢰기를 요구하셨다. 외식적인 기도나 중언부언(重言復言)의 기도는 아버지 앞에서 절대 피해야 하나(5,7절), 은밀한 중에 계시면서 기도하는 자녀의 형편을 헤아리시는 아버지께서는 그의 기도에 꼭 응답하시기에(6절),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도에서 필히 고려(考慮)하도록 말씀하셨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신뢰 속에서, 기도의 방향과 내용은 정해져야 한다. 자기 유익 중심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와 그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먼저 있어야 하고(9-10절), 그 후에는 제자 공동체에 필요한 제반 청원 사항들-(일용할 양식, 상호 이해와 용서, 시험에 빠져들지 않기 등등)-의 문제 해결을 구하는 기도 올리기를 일깨워 주셨다(11-15절).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된 제자들에게서는 어떤 삶과 정체성에 변화가 일어났을까? 서신서의 내용은, 그런 점에서 보다 경험된 영적 환경을 보여 주고 있다. 

 

서신서, 베드로전서를 다시 보자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사도 베드로는 스승 예수께로부터 기도를 배운 분이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주님의 지도를 잊지 않고 실천하며 지내 온 이였다. 그러기에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이들에게, 그들의 새롭게 형성된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하고 일깨우면서, 거기에 맞는 품격(品格)과 삶을 보전하고 유지하도록 권고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흠 없는 보배로운 피로 대속(代贖)함을 받은 자들이다. 창세전부터 계셨던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말세에 오셔서, 불의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으나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서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가 되셨는데,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을 믿고 소망을 그에게 두며 살게 된 자들이다(18-21절 참조). 물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친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17절.중).

 

따라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은 우리의 삶을 이 땅에 맞추어 살지 아니하고, 궁극적인 은혜인 하나님의 나라에다 맞추어 새롭게 살게 된 존재가 되었으며(13절,하),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순례자(pilgrim)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17절,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기에, 거기에 걸 맞는 품격(品格)이 중요하다. 사욕(私慾)에 좇는 삶은 안 된다(14절). 아버지의 거룩하신 품성을 좇아 자녀인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16절). 하나님은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명심하고, 자녀라 할지라도 방종이나 오만에 비치지 않도록, 차라리 두려움으로 지내는 게 좋겠다(17절).  

 

결론은 이렇다

 

그리스도인은 전능자요 영원자 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축복 받은 자들이다. 이 소중한 관계 유지가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이제부터는 그 관계 유지와 발전이 중요하다. 

 

그를 위하여 우리는 기도하며 하늘 아버지를 담대하고 꾸준하게 부르자. 그래서 하늘 아버지의 진정한 자녀들이 되자. 그러한 특권과 은혜는 전적으로 우리의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다. 부디 자녀다움 품격과 정체성 유지에도 유의하자. 어떤 경우에도 내가 다시 불순종의 시절로 다시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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