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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1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8-24 (금) 22:11 5년전 1110  

본문)  약 5: 13-20, 왕하 5: 1-14, 막 5: 1-12 

 

오늘은 금년도 성령강림절기의 마지막 주일이다. 이번 절기에도 주의 성령은 당신의 다양한 역사를 우리에게 풍성히 보여 주셨다. 그것은 매 주일 강단의 선포를 통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어떤 분으로 오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늘 아버지와 그 아들이신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여 함께 일하도록 역사하셨지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특히 교회 공동체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앞세워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 거리들을 주었다. 우리가 끝까지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 오늘의 말씀들도 우리를 그 영역에로 인도하신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묻는다. 우리가 섬기는 주님의 교회를 건강하고 튼튼하게 세우는 보다 본질적인 요인(뼈대)은 무엇일까? 우리 교회를 굳게 하는 요인은, 어떤 것일까? 기적이나 신비나 능력 같은 ‘은사’일까, 아니면 인격이나 말씀이나 믿음을 좇아 사는 ‘열매’일까? 이런 질문은 이렇게도 가능하다고 본다. 즉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에게 은사와 능력을 주어서 우리를 능력자가 되어 힘 있게 살게 하려 함인가, 아니면 우리를 하나님의 제대로 된 구원 받은 온전한 백성으로 살게 하고자 함인가’ 

 

물론 교회는 이 둘이 모두 필요하다. 능력자도 필요하고 참 사람도 필요하다. 하지만 우선순위(優先順位)는 피할 수 없다. 만약 그 순서가 잘못되면, 교회는 잘못된 길에 빠지기 되고, 생명력도 짧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묻는다. 성령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을 앞세우실까, 능력자인가 인격자인가? 생각해 보자. 지금의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위기(危機)는 이 둘 중에 어느 것 때문일까? 왜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등을 돌리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건가? 교회가 보이는 능력과 기적을 잃어버려서인가, 아니면 인격과 사랑과 존경심을 잃어버려서인가? 새삼 다시 물어야할 대목이다. 

 

개인에게도 이 둘이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러나 분별해야 한다. 우리가 받고 싶어하는 능력과 권능은 모두 기능적(技能的)인 요소들이다. 하지만 인격과 사랑은 존재적(存在的) 요소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어떤 유형의 사람을 더 원하시고 기뻐하실까? 능력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당신을 닮은 인격과 사랑을 갖춘 사람일까?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능력자보다도 당신을 닮은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구원하신다. 하나님께는 우리에게 능력이 부족한 것이 흠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혹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신과 존재(存在)와 본질(本質)이 다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언제든지 그런 자는 당신을 배신할 수 있기에, 그런 인간은 하나님께서 신뢰하지 못하신다. 이점을 꼭 꼭 명심해야 한다.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거듭남을 강조하시고 믿음을 강조하신 까닭도, 바로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즉, 거듭남)를 통하여만 하나님의 인정(認定)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우리 한국 신도들은 성령 받을 때, 먼저 성령의 기능적인 부분에만 집중했다. 성령이 정작 원(願)하신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의 변화, 즉 높은 수준의 인격자와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아주 소극적이었다. 그 바람에 한국 기독교의 수준은 구원의 고등(高等)종교를 믿는 무리답지 않게, 고차원(高次元)의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아주 낮은 차원의 수준에 머물며, 마치 자기들만의 리그를 즐기는 동네 축구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패거리 수준을 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바람에 한국교회가 훌륭한 지도력을 생산하지 못하고 세상에 감동(感動)도 주지 못해, 세상의 기대를 포기하게 하였다. 바로 성령 이해에 대한 잘못된 접근의 후유증(後遺症)이랄 수 있다. 

 

우리는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성령을, 더 이상 병을 고치고 각종 놀라운 은사를 주시는 기적의 신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이제 우리는 성령께서 고도의 인격의 힘과 사랑의 능력을 보유하셨기 때문에, 지금처럼 교회와 선교가 가능했고 우리의 구원도 가능했다는 점에 다시 눈을 떠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시고, 또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골1:18)의 영이신 성령은 근본적으로 지고(至高)한 인격(人格) 신이시기에 우리에게 구원을 안겨 주실 수 있는 분이었음에도 눈이 떠야 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성령이 겨냥했던 대상은 처음부터 사람 자체였고, 그것도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은 예수를 닮은 인간 생산에 있었음을 믿어야 한다. 게다가 성령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합(統合)하시고 이끌어 하나 되게 하시는 공동체(共同體)의 영이었다. 바로 이런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는 신도와 교회가 되면, 그곳에서는 자연히 최고의 양질의 인간과 교회들이 탄생하게 된다. 마침, 오늘 세 본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토록 만들어 내시려는 인간과 교회들이 잘 소개되고 있다. 어떤 내용들인가? 

 

서신서-구약-복음서를 어떻게 함께 보아야하나

 

전체적으로는 교회 공동체의 허약성과 그것을 극복해낼 길에 대하여 지침을 주신 말씀들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주님을 머리로 둔 그의 거룩한 몸을 이룬 그의 백성들의 집합체이다. 몸은 본래 다양한 지체들로 이루어졌기에, 늘 건강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크고 작은 아픔들을 경험하게 된다. 문제는 건강할 때가 아니라, 병들고 힘들 때이다. 그 때에 몸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너무도 중요하다. 감사하게도, 오늘의 말씀들 속에는 우리를 보호해 주실 주님이 확실히 계심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대처하는 자는 그 누구나, 구원을 받게 되는 방법들이 두 가지 차원에서 제시되어 있다. 

 

첫째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 치유의 도움을 청하며 기도(祈禱)하라고 요구하신다(13-16절). 주님에게는 인간의 어떠한 무서운 질병이나 어둠의 세력들도 능히 제압하고 온전하게 하는 치유(治癒)의 능력자이시기 때문이다(17-18 참조)!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몸 된 지체인 우리가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면, 그는 우리에게 몸의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은 물론, 그에 따른 또 다른 다양한 보너스들까지도 함께 얹혀 주시는 분이다. 오늘 구약의 본문과 복음서의 본문들은 주님의 그 놀라운 모습들까지도 상세히 소개해 준다. 

 

1) 열왕기하의 내용을 보라. 시리아의 국방장관인 나아만을 괴롭히고 불행으로 내몰던 나병(癩病)이 이스라엘의 여호와의 종인 엘리사 예언자를 만나자, 한순간에 쫓겨난다. 나병이란 어떤 병인가? 문둥병으로 불리던 치명적인 피부병으로서, 옛날에는 치료약도 없어서 한번 걸리면 사람들이나 가족들과도 분리당하면서, 외롭고 고독하게 생을 마감하게 만든 병이었다. 천형병(天刑病)이라고 불리던 아주 더럽고 저주스러운 병이었다. 종교적으로도 가장 무서운 천벌(天罰)로 간주될 정도였다. 

 

그런 무서운 질병이 임자를 만난 것이다. 하나님의 종인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그를 찾아 온 시리아의 나아만을 향하여 ‘요단강에 가서 네 몸을 일곱 번 씻어라’라는 지시에 그가 결국 순종하자, 그 나병이 그 순간 나아만을 떠나버리고 만 것이다(14절).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일, 오직 전능자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그를 그렇게 살려낸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곳에서 나아만이 받은 축복은 완치(完治)된 몸만이 아니었다. 그 병이 걸리지 않았으면 전혀 불가능했던 영적인 축복인, 이스라엘 여호와를 믿는 신앙을 얻어서, 구원의 축복을 보너스로 받기까지 하였다. 어디 그 뿐인가? 충분히 추측 건데, 그 치유 사건으로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관계는 전쟁이 아닌 평화에도 기여했으리라! 

 

2) 복음서도 보라. 이방인의 땅인 거라사 지역에 아주 무섭고 더러운 귀신들린 자가 있었는데, 그는 노상 무덤 사이에서 지내면서 괴성을 지르며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제어하려고 고랑과 쇠사슬로 매어 놓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가진 ‘레기온이란 군대’ 정도의 강한 힘(=로마군 6,000명의 힘) 때문에 쇠사슬도 끊어버리고 날뛰는 형국이어서, 그야말로 그의 문제는 거라사 지역의 최대의 난제 중의 난제였다(3-4절). 

 

하지만, 결국 그런 천하의 레기온 귀신도 임자를 만나고 말았다. 그곳을 찾아오신 나사렛 예수 때문이었다. 본문 6절 이하의 내용은 그곳 상황의 대 역전을 상세히 전한다. 그곳 마을을 제압했던 그 귀신이,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하며 부르짖어 간구하는 초유의 놀라운 대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의 크신 권능을 그 귀신은 생생히 보았기 때문이다. ‘귀신이 간구하였다’는 표현이 몇 차례 강조된 이 장면이 얼마나 통쾌한 내용인가!

 

결국 그 소란했던 지역은 평온해졌다. 그리고 그 귀신에 붙들려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던 그 사람은 온전함을 회복하고,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자기 이방 지역에 전하는 주인공이 되는 보너스도 얻었다(18-20절 참조). 

 

o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바로 이런 분이 우리의 질병과 환난을 제거해 주실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질병에 시달리고, 어두운 영에 시달릴 때, 서로 도우며 기도하라고 요구한 것이다(14-16절). 게다가 지금의 우리들 역시 각종 육체적-영적-정신적 질병들에 걸려 있고, 치유와 해방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이 아닌가? 거라사 귀신들은 사라진 존재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더 다양한 변종(變種)이 되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늘 깨어 주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간구할 이유이다!

 

둘째, 교회 공동체는 서로를 돕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생활화하라고 하신다(16절).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피차 부족한 사람들끼리 모여 산다. 따라서 서로 겸손하고, 서로의 부족을 이해하며, 피차 돕고 협력하며 살아야만 한다. 서로를 헐뜨지 말고 대신 세워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에 부여된 운명(運命)이다. 특히 교회 에서의 갑(甲)질은 절대 금물이다. 원수 맺거나 원수 보복의 장으로 생각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이해타산으로 서로를 경계하고 따돌리며 배제시키는 일도 없어야 한다. 오직 이곳은 장차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활을 할 사람들의 훈련의 장이어야 한다. 어떤 훈련이어야 마땅한가? 그런 면에서 두 분문의 내용들은 큰 지침을 제공한다. 

 

1) 열왕기하를 보라. 특히 이스라엘에서 나아만에게 포로로 끌려와서, 나아만의 아내의 종으로 살게 된 어린 처녀를 주목하라(2절). 그녀에게 나아만은 누군가? 인간적으로는 자기와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불행을 안겨 준 원수가 아닌가! 그런데-, 그녀의 인격과 신앙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나아만의 불행을 지켜보면서, 원수의 몰락을 즐겨하지 아니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며 그의 살 길을 제시하는 관용을 보여준 것이다(3절). 

그녀의 소중한 한 마디는, 나아만과 그의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질병에서 나아만이 치유 받게 하였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게 하였고, 두 나라 사이에도 좋은 기운이 흐르게 만들었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그녀의 미래에도 말할 수 없는 영광(?)과 위로가 부여되었으리라---! 만일 그녀가 처음부터 원수에 대한 적개심과 보복감에 사로 잡혀 있었더라면, 그녀 자신은 물론 나아만과 그의 모든 것은 불행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교회는 이래야만 한다. 서로의 아픔과 고통에 외면하지 말고 나누어 질 때 교회이고, 또 하늘의 복이 임하게 된다. 

 

2) 복음서의 경우는 어떤가. 거라사의 광인(狂人)이 예수를 만나 큰 은혜를 입었으나, 그것을 받는 그곳의 분위기는 아주 달랐다. 회복된 자를 마음으로 기뻐하고 축하할 줄 몰랐다. 오히려 그곳 주민들은 예수에게 어서 자기들을 떠나 달라고 요청하고 나왔다(17절 참조). 왜 그랬을까? 예수를 부담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가 자기들과 더 함께 있으면, 또 어떤 재산상의 손해가 자기들에게 초래될지 모른다는 이해타산적인 어두운 마음이 끼어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래서는 안 된다. 함께 울어주고 웃어줄 마음을 잃게 되면,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교회는 진리에서 미혹된 자라도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마땅하지(약5:19-20참조), 무심하면서 이해관계만 따지면 절대 안 된다. 주의 말씀은 바로 우리의 그 점을 경계하신다. 

 

결론은 이렇다

 

이제 우리는 은사 중심이나 기적 중심의 성령 운동보다는, 인격과 말씀과 사랑 중심의 성령 운동에 더욱 매진해야만 한다. 기적과 은사들은 그 뒤를 따라오게 하면 된다. 교회를 바르게 섬기는 일도 그렇다. 성숙한 예수의 인격을 닮은 이들이 모여 있으면 교회는 된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준의 헌신된 마음과, 모두를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비우고 희생할 수 있는 십자가의 영성을 실천할 교회가 되면 되는 것이지, 기적과 신비한 능력 중심의 영성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매달리는 교회는 안 된다.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때는 대부분 어려움을 겪고 난 후이다. 거기에서 얻게 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크고 작은 몸의 질병들을 경험한다. 질병으로 고통 할 때 우리는 내 자신의 약함과 한계, 그리고 인간은 죄와 죽음 아래에서 언제나 살아가고 있는 부족한 존재임을 깊이 체험하지 아니한가-!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을 통과하면서 다 성숙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가 없는 사람,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처지와 형편의 의미를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그 일로 많은 것을 잃고 끝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의 아픔과 고통 속에 기도라는 매체를 통하여, 전능하신 분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되면, 그는 성령의 거룩한 만져주심과 그 고통을 통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 자신의 죄악도 보게 되면서 회개도 하면서 영혼도 치유 받고, 육체의 질병에서도 치유도 받아, 한층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거듭나는 기회를 맞이하게도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내부 고통에 대하여 취할 지혜로운 대처 방법이 아니겠는가! 부디 성령의 거룩한 목표인 성숙한 주의 백성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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