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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1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평화통일주일

관리자 2018-08-08 (수) 08:35 5년전 1137  

본문)  롬 10: 5-17, 사 42:18-43:7, 막 7: 31-37 

 

우리 기독교인들은 회복(回復)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돌아가다, 돌리다. 돌아가게 하다’는 등의 표현인데, 대체로 이전(以前) 상태로의 복귀(復歸)나 복원(復元)을 말한다. 그러기에  회복이란 영역은 잃어버리거나 깨어진 것을 되찾거나 되돌렸다는 의미여서, 완전한 새 것을 만들어가는 창조(創造)라는 영역과 함께, 우리에게는 매우 소중한 구원의 개념이 되었다. 

 

회복과 창조가 차이를 보이는 것은, 회복이란 회개(悔改)나 각성(覺醒)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창조란 전도(傳道)나 새 것과의 접촉을 통하여 경험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그런 점에서 회복은 이미 믿는 자가 그 과정에서 어긋난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되돌아가는 작업이라면, 창조는 전혀 믿지 않은 자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게 된 신생(新生)의 작업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회개를 통해서 잃어버린 낙원을 경험하게 되지만, 전도를 통해서는 낙원을 새로이 맛보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이 두 가지 구원의 작업들인 회복과 전도의 사역을 끊임없이 펼쳐가고 계신다. 지난 주일의 복음서의 마지막 대목을 보라 -‘우리가 다른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을 내쫓으시더라’(막1:38-39). 예수님은 전도를 통하여 창조의 세계를, 귀신을 내쫓는 사역을 통하여 회복의 사역을 이 땅에서 쉼 없이 펼치셨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12번째 주일인데, 오늘의 세 본문 내용들은 모두가 어긋난 당신의 백성들을 온전히 회복시키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체적인 구원의 행위들이 집중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들, 복음서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 ‘귀먹고 말 더듬는 자’, 그리고 서신서의 로마교회의 신도들 모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매우 심각한 장애자(障碍者)들이었다. 치료받고 회복되지 못하면, 그 장애로 인하여 구원의 기쁨을 향유할 수 없는 장애자들이었다. 대체 그들의 장애 상태는 어떠했나? 

 

모두가 시청각(視聽覺) 장애였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귀가 열려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장애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사42:18,막7:32,롬10:9-17). 즉 원래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정상적인 지체(肢體)들로 받았는데, 그들이 살면서 그들의 그 기능들이 퇴락(頹落)되었고, 그 바람에 그들의 삶도 무너져서 지금은 매우 불행한 존재들로 살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삶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러기에 이제 그들은 ‘시청각적 회복(回復)’을 받아야만 했다. 생각해보자. 도대체 그들을 그렇게 장애에 빠지게 한 것이 무엇이며, 그 문제 해결책은 무엇인가? 

 

잠시 우리들의 경험들을 나누어 보자. 대체로 언제 우리가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며, 언제 우리가 상대가 하는 일들을 보지 못하고. 언제 우리가 상대를 향하여 할 말이 없어지는 걸까? 마음이 없어서가 아닌가!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 다시 말하면 상대에 대한 내 사랑이 식어서가 아닌가! 나하고 관련 없다고 판단하고, 나에게 이익이 되지 못한다고 보고, 나에게 부담을 준다고 보니까 결국은 상대를 향한 나의 시청각 기능이 작동을 중지하는 것이다. 그것도 습관(習慣)이 된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가족들 사이에서나, 심지어 부부 사이에서도 그렇다. 친구나 이웃이나 교우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하물며 생명의 말씀을 전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까지도 그렇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되는 태도인데-, 무심하고 건성으로 대하고 잘못된 전제들로 내 마음이 빠져 들었다면, 별 수 없다. 그 때부터 나는 뜻하지 아니한 장애자가 된다. 그래서 고립되게 되고, 나중에서 남 탓하며 신세타령하다가 죽게 된다. 얼마나 불행한 존재인가! 그러면 그런 자가 가진 희망과 구원은 무엇인가? 

 

하지만 거기에도 단 하나의 가능성은 있다. 그의 가슴에 사랑의 마음이 되살아날 때이다. 엄마와 아빠가 자식을 사랑함 같은 사랑이 일어나면 가능하다. 아니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이 가슴에 일어나는 것과 같으면 된다. 애인(愛人)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어도, 모든 시청각은 다시 소생하게 된다. 즉 누구나 사랑이 있으면 그의 시청각 기능은 다 발휘될 수 있으나, 그 사랑이 사라지면 병들거나 급격히 쇠퇴한다. 

 

삼위일체 우리 하나님을 다시 보라! 그는 당신이 낳은 자식과 같은 이스라엘로부터 그토록 외면당하시고 배신당하는 행위에 크게 진노하시면서도, 그러나 끝내 그들을 버리지 못하시는데, 그 까닭은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여전하기 때문이었다. 즉 인간들에 대한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이 전혀 식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43:4참조). 바로 그 점이 범죄한 인류가 낙망하지 않고 희망(希望)할 수 있는 요인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하나님의 인간사랑을 이 땅에서 맛보게 하는 곳은 역시 부모의 자식 사랑에서이다. 자식은 변해도 부모는 여전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슴앓이는 그 사이에서 생긴다. 그러면 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그런 차이가 날까? 왜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그런 차이가 날까? 그것은 존재와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과 부모와, 외형적인 조건과 대우(待遇)를 놓고 자신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논하려는 자식의 접근 방식에 대한 차이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님과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지만, 자식과 인간들의 하나님과 부모 사랑은 조건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그렇다. 이 겝(Gap)을 메우면서 양쪽의 관계와 거리를 좁히는 것이 바로 선교요 설교이며 구원이다. 

 

서신서를 어떻게 볼까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있는 유대교 출신 기독교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義)’를 인정한다(5,레18:5참조).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더욱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보다 실질적인 통로(通路)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것을 준수하는 자의 진정한 마음의 차원을 담아내지 못한 체, 외형적인 복종만으로도 의의 길에 들어선 인간처럼 보이게 할 수 있어서, 위선적(僞善的) 인간들을 양산한다. 그 점에서 바리새인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에게서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란 핀잔을 심하게 받기도 했다. 하지만, 믿음은 귀로 들은 말씀을 마음으로 공감하며 그 깨달음의 내용을 입으로 시인하고 그 내용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어서, 율법에 의한 것보다는 훨씬 구원에 적합(適合)한 의를 담고 있다고 본 것이다(10:5,8참조).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 받은 이들은 두 가지 특징(特徵)이 있음이 드러났다. 첫째는 그들의 시청각적 기능이 활발하다는 점이다. 자신의 귀로는 예수가 만민의 주(主)이심을 듣고, 마음으로는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셨음을 믿으며, 입으로는 예수가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실 주님이심을 시인하며 살았기 때문이다(롬10:9-13,17). 둘째는 구원을 율법처럼 유대인에게만 매이게 하지 아니하고, 세계 만민에게까지 차별 없이 전도하고 선교하며 그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논 것이다(12-13절).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도록 잘 안내한 것이다(13,17절). 

 

하지만 그 길은 형통의 길만은 아니다. 깊은 애로(隘路)도 있었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도 탄식했던 일인데(사42장에서), ‘자신들이 전파한 하나님의 말씀을 도무지 들으려고 하는 자가 없다’는 절벽과 같은 느낌을 상대에게서 갖게 되는 일이었다. 전도자 바울도 그 내용을 인용하며 자신의 고민을 전했다(16절). 바울의 그 고민은 왜 나온 걸까? 그가 이사야의 탄식을 인용한 것을 보면, 바울 역시 신도들이 자신의 설교에 타성화 된 반응을 보이며, 시청각적 장애에 빠져 든 연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솔직히 목회자의 최대의 난관이 무엇일까? 새 신자 찾는 일(전도)못잖게, 제대로 구원 받은 신자 만들기(설교와 양육)가 아닌가! 어느 것 하나, 변함없는 예수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예언서와 복음서를 어떻게 볼까

 

겉으로 보기에는, 이 두 말씀은 시청각 장애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귀먹고 말 더듬는 장애우 개인의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그 장애인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전체적 표상(表象)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 둘은 내용상 하나이다. 그러기에, 이제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사건으로 정리하여 말씀드리겠다. 

 

1)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먼저 본다(사40:27참조). 그들은 자신의 오랜 포로생활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듯한 여호와에 대하여 탄식하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여호와에게서 벗어난다’며 하나님의 외면하시는 일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자신의 죄를 통감하지 못하는 죄인들의 통념들이다-! 

 

2) 그런 이스라엘의 책임을 묻는 여호와의 질책은 정말 통렬하다. 그들은 여호와께 귀먹어리요 맹인이었다!(18절). 그토록 많은 것을 보여주어도 유의하지 않았고 경청하지도 아니하였다(20절). 그들에 대한 여호와의 본심은 당신의 그 놀라운 세계와 교훈을 전해주어서, 그들을 모든 자들 위에 존귀하게 하고자 하심이었으나(21절), 그들은 그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들을 무시하면서 세상에 다 도둑맞고 탈취 당하며 노략질을 당하며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22절). 

 

그 바람에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당신이 지으신 이스라엘을 약탈자에게 넘기셨으며,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의 세례를 쏟아 부으셨는데-, 그런데도 그렇게 당한 이스라엘은 끝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25절). 심한 매를 맞아도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서 무슨 희망이 있을까? 

 

3) 하지만 희망은 그 패역한 자식의 회개나 스스로의 갱신에서가 아니라, 그런 자식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에게 있다. 스스로 못 돌이키는 자식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차라리 당신의 자식 사랑의 방법(方法)을 바꾸어서라도 다시금 제대로 된 자식을 얻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 의지에 희망이 있다. 이게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늘 아버지의 모습이다. 우리 그 내용을 함께 읽으며 확인해 보자(43:1,4,7참조). 

 

4) 복음서의 증언인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예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33절) 치유해 주신 에바다(열리라) 사건은, 예수야말로 그에게 믿음을 갖고 찾아 와 도움을 구하는 모든 자에게는 그 누구나 차별 없이 그의 불구된 시청각 기능을 회복시켜 주셔서, 그로 하여금 당당한 인간으로 살게 하신다는 점을 확증시켜 준 내용이다(롬10:13참조). 그래서 그를 믿는 자들은 모두가 바르게 듣고 이해하고 전하며 살게 하신다. 

 

(마침 오늘 주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에서 해방되어 기념하는 평화통일주일이다. 우리 민족에게 '에바다'의 은총을 허락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불구의 장애를 가진 몸이다. 여전히 에바다의 은총을 간구한다. 최근에 우리 민족에게 임한 촛불혁명과 그로 인한 새 정부의 민족화해정책은 에바다의 은혜의 노상에 있음이 분명하다. 다시 불가역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루는 기회가 되게 전력하여 기도할 때이다)

 

결론이다

 

이제 우리의 시청각도 확인하자. 내 귀는 말씀을 제대로 듣고 사는가, 내 입술은 예수가 우리 주이심을 전하는 것인가, 그 둘 사이에 있는 내 마음은 예수가 내 생명의 구주되심과 영생의 주이심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가를 확인하자. 무엇보다도 주의 말씀을 농담이나 상투적인 것으로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된다. 내 마음이 거기에서 병들면, 그때부터 내 삶은 시청각에 장애자가 되어, 불행과 저주의 늪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내 귀와 입과 가슴에 주의 성령의 도구가 되도록 더욱 겸손히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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