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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7-11 (수) 11:06 5년전 1103  

본문)  롬 13: 1-7, 신 8: 1-20, 마 22: 15-20 

 

지난주일 말씀에서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성령 받은 우리의 최대의 삶의 지침은 ‘깨어 있는 삶’이어야 함을 확인했다. 하지만, ‘깨어 있다’는 말은 사실 어떻게 사는 것인지 한마디로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삶이 깨어 사는 삶일까? 물론 이전에 들은 대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에 대한 분별을 통하여, 그의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좇아 사는 삶도 그 답(答)도 된다. 하지만 그런 답들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의 전체적인 삶의 영역이 그 분의 본 뜻에 부합되게 하려면, 아직도 우리는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대응해야할 영역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에 주신 세 본문 말씀들은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의 깨어 사는 삶을 위한 지평(地平)을 보다 폭넓게 대처하도록 우리를 안내해준다. 그를 위해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 인생의 대표적인 뿌리 영역이랄 수 있는 두 곳, 즉 하늘과 세상에 대응할 말씀들을 제공한다. 본래 우리 인간은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발은 땅인 세상에 디디고 사는 존재’가 아닌가? 그 믿음 안에서 살고 있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기에 믿는 우리에게는 두 개의 시민권(市民權)이 있다. 하늘의 시민권과 세상 나라의 시민권이다. 이 둘은 어느 것 하나도 소홀이 할 수 없다. 어느 한쪽 만으로의 삶은 불구(不具)의 모습이어서 바람직하지 않게 되어 있다. 

 

간혹 믿음이 신실한 이들이 이 세상 것을 하잖게 생각하여, 세상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무시하고 살려는 유혹에 빠지곤 한다. 요즈음 성직자의 납세(納稅) 문제로 교회와 세상이 상당한 갈등을 하고 있는 일도 그런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솔직히 반대하는 성직자들의 의식 속에서는 자신들이 별나라 사람들인 듯, 착각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또 있다. 일부 평신도들 중에 양심(良心)에 따른 행동이라는 미명하에 입영(入營)을 거부한다. 헌법재판소에서는 최근에 이 부분을 인정하는 판결을 하고 대체 입법을 요구했지만, 그것도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종교적 이유에서 나온 것이라면 문제는 많다. 개인의 양심이 공동체성의 중요성을 외면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도 큰 문제인 까닭이다. 아무튼 나는 이런 종교와 세상의 갈등 사항들이 ‘보다 나은 질서’를 향한 진통으로 보고 있으나, 그러나 교회의 행동들이 세상에 독선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납세 사례가 하나 있었다. 마17:24-27에만 소개된 곳인데, 성전에 바치는 세금(稅金)(성전세)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제자 베드로가 성전세를 받는 자들로부터, ‘너희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라고 질문을 받았다. 아마도 그 때의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대인 성인(成人)들에게 의무화된 성전세인 ‘반 세겔’을 납부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출30:13참조). 그러자 베드로는 즉시 ‘내신다’라고 답변하고 예수께 나아가자,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먼저 아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네 생각은 어떠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서냐 타인에게서냐’ 베드로가 답변합니다. ‘타인에게나이다’ 

 

예수님이 그 때 하신 의미심장한 말씀은 이렇다.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稅)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失足)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나가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주님의 이 세금납부 명령에는 몇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1) 예수님은 당신과 제자들이 창조주이신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는 입장에서, 당신의 아버지가 통치하는 이 세상을 위해 자녀인 자기들이 납세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격에 맞지 않다)는 것이 기본 입장임을 드러내셨다. 

 

2) 그런데도, 주님은 결국 제자에게 납세하라고 지시하셨다. 그것도 어부(漁夫)가 본업이었던 제자 베드로의 그 바다에 나가 낚시하여(노동을 통하여) 획득한 첫 열매(입속에 담긴 한 세겔)가 한 세겔은 될 터이니, 그것으로 예수 당신 것(몫)과 고기 잡은 베드로의 것을 동시에 해결하라고 지시하신 것이다. 

 

3) 그러면, 왜 예수님은 납세에 대한 기본 원칙과 현장의 대응에 그런 차이를 보이신 걸까? 자칫 이율배반적인 행동처럼 보이신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가 그들을 실족(失足)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라는 주님의 '선교적(missional) 입장' 때문이었다. 그렇잖아도, 요즈음에는 교회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여야 한다는 입장이 강조되고 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교회가 사람을 얻고 또 생명을 구원해내려면, 내가 낮아지고 손해보고 양보하고 자기 변신(變身)까지도 서슴지 않아야 된다는 입장을 말한다. 최대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이 평생 취한 입장이기도 하다(고전9:19-23참조). 

 

그런 시각으로 오늘의 세 본문을 보면 좋겠다. 하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늘의 하나님에게는 분명히 복종하는 입장을, 세상 사람들과 질서를 향해서는 그들의 구원을 견인하기 위한 선교적 입장을 좇아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한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롬13장 본문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논할 때, 꼭 거론되는 곳이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 문제를 로마교인들을 향해 거론했을까? 특히 그 당시는 인간 신(神)인 황제 가이사 숭배 신앙이 주류였을 때여서, 세속 권력의 힘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그 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대응할 지침을 제공한 일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었다!  

 

특히 바울이 납세에 관해 이렇게 긍정적 대응을 요구하는 데에는, 당시 로마교인들 중에서 최고의 권세자이신 하나님께 자기들이 헌금하고 사는데, 그 낮은 위치의 세속 권력자에게까지 이중적으로 납세해야 하느냐는 입장을 취한 이들이 있었음도 연상이 된다. 그럼에도 바울은 신도의 납세를 긍정적 입장을 표명하였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경우처럼 선교적 입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납세 거부로 복음전파의 문이 닫혀서 얻게 될, 보다 엄청난 피해를 원치 아니했기 때문이었다고 보인다. 바울의 증언을 다시 보자. 

 

1) 세상의 모든 권세들(authorities)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것이지 인간의 것은 아니다(1절). 여기에서 사도는 인간 권세의 한계와 범위도 제시한다. 하나님 밑에 속한 권세들임을 강조한다. 로마 황제의 권세도 여기에 포함된다(1절). 바울의 이런 입장은 자기의 권위를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는 모든 인간적 입장을 견제(牽制)하고 있는 것이다! 

 

2) 세상의 권세는 신께서 부여한 소명임을 명심하고 그 뜻대로 수행해야 한다. 백성들에게는 선(善)을 격려하고 악에게는 칼(경찰권-징벌권)로 다스릴 줄 아는 신의 대리인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 기본적 입장 때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권위에 양심껏(성실히) 복종해야 한다(2-5절). 거부는 곧 심판(審判)을 불러오게 된다. 

 

3) 세상을 위한 조세(租稅)는 신도들로서도 당연한 것이다(6-7절). 적법한 조세와 관세에 협력하는 일은 당연한 의무이다. 무엇보다도 조세에 대한 신도들의 접근은 선교적 안목으로 함이 좋다. 조세는 권세들이 하나님의 정의로운 뜻을 펼치는 데에서 소중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혹, 권세자들이 총체적 불의로 국가를 전락(轉落)시키면, 그 때는 그 사안에 따른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바울의 세상 권세에 대한 입장에 영향을 준 나사렛 예수의 입장을 담고 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께 협공을 펼치면서, ‘가이사에게 세금(稅金)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17절)라며 양자택일의 답변요구로 시험을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1절)며 응답하셔서 그들의 시험을 뿌리치셨다. 여기에는 어떤 메시지들이 담겨 있는가?

 

1)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도, 세금에 대한 이해가 극히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이해관계에서만 말하는 입장을 예수께서 반박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지 아니했던 영역인 ‘하나님께 바치는 것’에 관하여서도 직접 거론하고 나오셨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조세를 바치며 사는 무리들이다. 하나는 하늘 백성이기에 하나님께 조세를 드려야 하고(십일조 및 헌물로), 또 하나는 세상 백성이기에 땅의 권세에게도 조세를 바치며 산다. 그러기에 신도가 조세를 말하려면, 이 둘을 함께 말하여야 할 터인데-, 그들은 지금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따라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것의 정당성만 물으며, 예수를 시험하며 옭아매려고 했다. 

 

2) 예수의 이 답변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세상에 비신앙적이고 무책임적인 자리에 빠져 살고 있는 지를 폭로하신 것이 되었다. 그들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불균형 속에서 신앙과 사회생활을 하고 있음에 대해 부끄러움을 안겨주셨다

 

3) 예수님의 납세에 대한 긍정적 입장도, 주변 사람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는 선교적(missional) 입장이 크게 반영되었다고 보인다. 예수께서 가이사나 헤롯과 같은 당시의 권세들을 지지해서가 아니다. 헤롯을 ‘그 여우’라고 지칭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세 입장은 다른 차원을 담고 있다. 세금은 세상을 돌보시려는 하늘 아버지의 자원이기도 하고, 또 납세 거부로 선교의 영역을 제약시킬 필요가 없다고 보신 것이다. 

 

구약의 율법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 부분은 세상이 아닌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의 백성들이 취할 행동 지침들이다. 곧 있으면, 광야 40년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된 당신의 백성들에게 ‘결코 잊지 말고 기리 명심하고 살아야할 삶의 지침들’을 지도자 모세를 통해 주셨다. 여기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믿고 기억하며 행하는 길만이 살 길이다. 잊거나 청종치 않으면 곧 죽음이요 멸망일 뿐이다. 지침은 하나님이 주시되, 그에 대한 선택이나 거부는 인간의 몫이다. 그 지침의 핵심들을 다시 본다. 

 

1) 살고 번성하며 약속의 땅을 상속하는 길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데 있다 (1).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의 말씀으로 사는 줄 알아야한다(3, 마4:4참조). 시험과 시련도 인간의 순종 여부를 확인하려는 것이면 축복이 된다. 

 

2) 여호와와 그의 은혜를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記憶)하며 교만(驕慢)하지 말라. 특히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 분을 기억하라(2,11,14,18절). 

 

3) 하지만 여호와를 잊고,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聽從)하지도 않으며,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19-20절). 

 

우리는 구원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계명이 십계명임을 안다. 그 틀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다. 두 날개 사랑을 제대로 하는 일이 곧 우리에게 구원을 준다는 것이다.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 절대 균형 있게 둘 모두를 온전히 실천해야 한다. 예수의 오심도 우리의 무너진 구원의 삶의 틀을 온전히 다잡아주시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이 일들은 이제 성령 받은 우리들이 반드시 실천해내야 할 과제이다. 성실히 감당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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