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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7-05 (목) 11:12 5년전 1176  

본문)  엡 1: 3-14, 사 64: 1-9, 막 13: 28-37 

 

우리나라 제일 야당이 지금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지방선거에서의 참패 후에, 당을 새롭게 이끌어 줄 비상대책위원회을 이끌어 줄 새 지도자를 청빙하는 일이 난항을 겪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국회 전체 의석의 1/3 정도를 보유한 제일 야당이 저토록 지도력을 못 세워서 휘청거리는 모습은 우리 국민들을 위하여서도, 불행한 일이다. 정부 여당을 견제할 제일 야당이 든든해야, 나라도 든든해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야당도 야당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이들이 야당을 해야 한다. 명색만 야당만으로는 안 된다. 지금과 같이 국정(國政)의 대안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는 무정란(無精卵) 정당과 같아서는 안 된다. 대통령 하는 일에 무조건 반대하고, 북한에 대한 맹목적 적개심과 배타심만으로 야당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하고, 주변의 강대국의 옷자락만 붙잡고 매달리며, 그리고 생산적인 역할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국민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야당은 결코 설자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세계의 변방에 있다가 중심에 들어선 나라이다. 얼마 전,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우리 축구가 세계 최강 독일 팀을 2:0으로 침몰시키는 저력을 과시한 일은 지금의 우리가 지구촌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지금처럼 남북이 어깨동무하고 손에 손 잡고 나아가면, 앞으로도 세계는 우리 한민족들의 ‘큰 일’들을 통하여 엄청난 감동과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세계는 지금 한국인들이 무엇을 하느냐에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다. 주변의 4대 강국들도 남북한 지도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자 노력한다. 역사 이래 우리 한민족에게 이런 놀라운 기회가 있었던 적이 있었나? 이것은 하나님의 명백한 축복이며, 우리나라를 들어 세계 평화공동체를 견인하려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의 손길이라 믿는다. 

 

특히 촛불혁명을 통해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려는 문재인과 그를 신뢰하며 손을 잡은 김정은과 트럼프를 이 시대의 평화의 일꾼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손길은 가히 놀랍다! 그래서 그런 건강한 기운이 이번 월드컵 경기에서도 우리와 함께 함으로서, 우리는 세상이 본 1%의 가능성으로 200%의 완성체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인 방탄 소년단(BTS)이 빌보드챠트 1위를 차지한 것도 이에 못잖게 자랑스럽다.

 

진짜 걱정은 한국교회이다. 백성들의 영혼을 구원해 내야할 교회가 정말 큰 위기이다. 어찌 보면, 저 제일 야당(野黨)처럼, 한국교회도 이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큰 문제이다. 대부분의 보수교회들이 그 동안 한국당에게 오랜 세월 맹목적으로 박수치며 협력해 왔던 터라, 지금의 새 정부의 개혁정책에도 마음을 열고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염려스럽다. 세상을 심판하고 그 변화를 견인해야할 교회가 세상을 쫓아가기가 버거운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해 분열(分裂)이 체질화되었고, 반공(反共)을 사랑보다 절대 우위의 것으로 신앙화 해왔으며, 타락한 세속 권력과 결탁한 종교 권력(權力)의 맛에 취해 왔고, 사람보다는 물질과 규모 중심이며, 낮은 곳보다는 높은 곳을 향해 왔고, 말씀 추구보다는 패거리정치 중심에 빠져 지내왔으며, 포용과 일치보다는 혐오(嫌惡)나 배척(排斥) 대상들을 더 많이 만들어 놓았고, 윤리적으로도 타락의 깊은 늪에 빠져 들어갔으며, 정의. 평화. 생명을 추구해야할 교회의 존재 이유와 성령의 진정한 역사에 무지하고, 그 크신 하나님을 제대로 전할 줄 모르는 까닭이다. 그 바람에 ‘세상의 소금과 빛’은 커녕,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부담과 걱정거리가 된 것이다. 

 

이사야의 현실에서 본 우리 교회들

 

선지자 이사야(제3)의 쓰리고 아픈 가슴이 우리까지 흔든다. 바벨론 포로의 멍에에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를 받고 본국에 귀환했지만, 그러나 무기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당시 이스라엘의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 선지자는 전율(戰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잘못된 것일까?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다행히 선지자의 눈은 범죄의 무서움과 함께 그것을 이겨낼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비와 사랑에 호소하는 길에서 해답이 있음을 보았다. 다른 길은 없었다! 그는 자신들의 주인 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크게 범죄(犯罪)하였음을 깊이 고백한다(사65:5.b)! 주인이 맡기신 권한과 직무를 방기(放棄)하고 나태하게 지내온 까닭임도 확인한다(막13:34).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하면 요나처럼, 무기력과 깊은 잠에 빠져 든 한국교회와 목회자들과 내 자신들을 깨울 수 있을까? 

 

희망은 있었다! 우리 자신은 죄악으로 인해 결국은 소멸될 수밖에 없는 신세이지만-(사65:7c), 그러나 우리를 상대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와 어리석은 피조물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일을 기뻐하시는 그 분의 사랑에 호소하는 마지막 길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 근거하여,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절박(切迫)하게 부르짖었던 죄의 고백과 탄원 기도를 다시 보자.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고 함께 읽자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善待)하시거늘, 우리가 범죄 함으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되었아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5절).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8-9절)

 

이런 호소와 함께, 우리는 이제 하나님 여호와를 향한 나의 인식과 믿음에 대한 고백을 보다 새롭게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하나님이 나에 대한 어떤 계획과 경륜을 품고 계신지를 깊이 아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동시에 그 은혜를 입은 내가 어떻게 대응하며 깨어 살 것인지를 다짐하는 약속도 드릴 필요가 있다. 그 점에서 에베소서는 나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어떤 것들인지를 재확인해 주면서 내 믿음을 무장시켜주는 말씀이며, 복음서는 그러한 나를 어떤 삶 위에다가 세워갈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말씀(자료)이다. 

 

서신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에베소교회가 해결해야할 당시의 현안(懸案)들은 두 가지였다. 구원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는 식으로 기능적인 접근을 하는 이단 영지주의(Gnosticism)를 극복하는 일과 교회에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하나 되게 하는 일이었다. 

 

사도 바울이 제시한 해결책은 무엇이었나? 이 두 가지 난제(難題)들을 동시에 풀어 줄 그의 핵심 코드는, 바로 ‘창세 전(前)에 그리스도 안에서(통해서=In Christ) 하나님의 자녀들로 예정(豫定)되고 선택(選擇)된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이 바로 우리였다’는 것이다(3-5절 참조). 이 내용으로 사도는 영지주의의 거짓 된 구원론도 견제(牽制)하였고, 갈라진 유대인-이방인 신도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었다. 

 

영지주의는 타락하고 무기력한 인간이 신을 아는 지식의 빛을 받는 순간, 그는 불가역적(不可逆的)인 구원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다. 체험이 강조되어 힘은 있었다. 하지만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허황된 공식과 그로 인해 구원 받은 이들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할 책임적인 삶에 대한 메시지가 없었다. 그 바람에, 영지주의 신자들은 십자가에 죽임당한 그리스도가 없었고, 성령이 이끄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무시되었으며, 잘못된 이원론에 빠져 무책임한 삶으로 세상과 교회에 유해세력이 되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이 못보고 살아왔던, 창세 이전부터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예정론을 진지하게 펼쳐 보였다. 그 핵심 코드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였다! 그의 증언을 주의해서 보라. 8절,14절을 빼고는 그는 전체 구절들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말미암아)’를 충만하게 강조한다. 그리스도 없는 선택이나 구원도(3-4절), 모든 신령한 복들이나(3절), 모든 하나님과의 관계나(5절), 그 어떠한 세상의 영광이나 지혜나 총명도(6-8절)-, 다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相關)이 없는 것들임을 역설하였다. 

 

사도가 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제공하신 모든 신령(神靈)한 복들은 이렇다:

1) 그의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사는 당신의 아들들(자녀들)이 되게 예정하셨다. 그래서 범죄에서 떠나 당신의 은혜와 영광을 찬양하며 살게 선택하셨다(6절). 이런 증언은 곧 자녀의 생명은 부모와 교제(交際)함에서 존재하듯,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말씀.기도.찬송 등)를 통하여 확인되는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은총의 선택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 없이도, 그리스도 밖에서도 구원이 가능함을 가르친 이단 영지주의에 대하여 명백히 ‘아니요’를 말한 것이다

 

2) 그의 풍성하신 은혜에 따라, 아들의 피로 인한 구속함을 믿는 자는 누구나 다 속량, 곧 죄 사(赦)함을 받았다(7절). 

 

3) ‘그 안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통일(統一)되게 하셨다(10절). 유대인들은 일찍이 그의 기업이 되었고(11절), 예수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 성령의 확인(인침)까지 받은 이방인(외국인-에베소교인)도 그의 기업이 되게 하셨다(13-14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 어떠한 조건상의 차별은 없다. 신도들이라면 모두 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되었음을 감사하며 찬양하면 된다(12,14절.c). 

 

복음서는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제자(弟子) 공동체(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 부응하여, 어떻게 환란 날에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주님의 구체적 방안이 제시된 곳이다. ‘그리스도 안에’있는 자에게는 최소한 두 가지 지침이 제시되었다. 

 

1) 깨어 있어야 한다(33,34,35,37절). 주의 재림의 때를 계산하려는 얄팍한 인간적인 모든 시도들에 끌려 다니지 말고(32-33절), 그 보다는 시대를 분별하고 역사를 보는 눈으로 그 날을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28-30절). 가장 정확한 심판의 지침은 주님의 말씀 자체이다(31절). 그러기에 신도들은 자신의 운명을 특정 인간이나 세상적 상황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영원히 존재할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거기에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말씀이 영원하듯, 그 말씀을 좇은 자들의 삶도 기리 보장받을 것이다. 

 

2) 주인이 권한을 주어 맡게 된 일(사무-직업-사역)에 충실함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34-36절). 소임에 대한 충성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의 표지이다(계2:10.c참조). 나태함과 기회주의적 태도는 잠자는 행위이기에, 오시는 심판자의 형벌과 버림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지켜보시는 분임을 명심하자! 

 

결론은 이렇다.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와 성령의 인침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요 일꾼으로 예정 받고 선택된 우리는 이제 감사와 찬양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며, 그 분이 부여한 고귀한 직임(職任)에 충성하는 자들로 깨어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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