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성령강림후(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맥추감사주일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성령강림후(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맥추감사주일

관리자 2018-06-26 (화) 14:37 5년전 1248  

본문)  벧후 3:8-13, 습 1: 14-18, 눅 17: 20-37 

 

우리는 지금 2018년도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면서 벌써 여섯 번째 주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한 가지만 다시 확인해보자. 

 

성령이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 성령이 오셔서 나에게는 어떤 도움을 주셨고, 어떤 삶의 변화를 주셨는가? 마침 오늘은 전반기의 우리의 삶을 돌보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맥추(麥秋)감사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성령의 오심이 나에게는 어떤 도움과 변화와 성장을 주셨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지를 묻는다. 

 

사실 우리의 보편적 관심사는 건강하게 살고, 넉넉하고 부유하게 살며, 자녀들이 잘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도 성령이 여태껏 나에게 도움이 되셨다고 생각되면, 물론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나의 오늘의 감사의 이유가 모두 그 정도의 육신적(肉身的)이고도 일시적(一時的)인 것들에서 나온 것이라면 유감이다. 그 정도는 불신자들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사는 그 이상의 차원에서 나온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의 한계를 넘어설 영원한 나라를 상속(相續) 받게 된 귀중한 존재가 되었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진정 나에게 관심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도 더 가난하고 병약하고 외롭다는 인간적인 조건들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인간인 나 자신 전체(全體)를 관심하며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 내가 누구이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인가? 

 

인간은 본질상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形象)대로 지음 받은, 그래서 하나님을 닮은 유일한 피조물이다. 그래서 하나님과는 같지 않으면서도, 가장 하나님을 닮은 기묘(奇妙)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마치 부모 된 우리에게 자식들과 같은 존재 말이다-! 이 점이 하나님이 인간을 다른 피조물들보다 더 사랑하신 이유이다. 

 

그런데 결과가 어땠나? 조물주인 하나님께 가장 큰 기쁨과 희망도 준 존재였지만, 동시에 가장 뼈아픈 배신과 분노를 안겨 준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다. 여러분 부모들도 깊이 느낄 것이다. 자식 때문에 웃고 우는 부모들의 기막힌 신세를 말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오신 성령은 다시금 인간인 나를 겨냥하셨다. 어떤 기대 때문인가? 물론 하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실 참 인간이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에 앞서 오신, 인간되신 하나님이셨던 예수를 닮은 인간임을 목표하신다. 그렇다. 성령은 작은 예수요 또 다른 예수를 찾아 세우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 닮은 인간이 하나 등장하면, 세상이나 공동체에는 구원의 물결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몸’으로 세워진 교회(敎會)의 목적도 분명하다. 교회의 목적은 사람을 예수 닮은 인간으로 세우고자 한다. 부자 되고, 출세하고, 건강하게 하는 일들은 앞줄에 두지 않는다. ‘사람을 예수 닮은 참 사람 되게 하는 일’이 교회의 맨 앞줄에 있다. 

 

그러면 ‘인간이라면 어떤 인간인가’? 그것이 문제 중의 문제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당시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가 그의 교우들에게 보낸 목회서신(牧會書信)에서 증언한 부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1절을 함께 읽자. -“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

 

초대교회 신도들의 당시의 최대의 관심사는 금방 오실 예수의 재림(再臨)에 있었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언제 어디에 다시 오실 것이냐’는 것이 그들 신앙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런 신앙의 관심사는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에만 붙잡혀 있으면 그 사람은 이런 위기에 빠져들고 만다. 

 

1) 자기중심의 신앙이라는 벽에 갇힌다. 그 입장은, ‘내가 주님 맞이할 준비가 되었기에, 주님은 지금 당장 오셔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해서 복음의 근처에도 오지 못한 수많이 영혼들은 그냥 버림당해 지옥가도 된다는 것이냐’는 반론에 부딪치게 된다. 그렇다. 하나님을 자기 계산법으로 상대하면, 누구든 100% 시험에 들어 나가떨어지게 된다. 거의가 주님과 말씀을 의심하여 나가떨어지게 된다!

 

2)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시간 이해에도 무지해서, 스스로 무너지고 신앙의 부작용도 일으켜, 자신과 남에게 골치 거리가 되기도 한다(8-9절 참조). 사실, 당시의 열정적인 재림신앙인들 중에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겠다는 이유로, 가정을 떠나고 노동도 포기하는 바람에, 교회와 주변 사람들에도 골칫거리가 된 이들이 많았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신도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그날과 그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건강한 종말론적(終末論的) 신앙인이 되도록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우리 다같이, 벧후 3:8-10절까지를 가슴에 새기며 함께 읽자. 

 

사도 베드로의 관심은 역시 신도들 자신이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11절)

이것은 인간이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하나님의 오실 시간과 장소를 알고 싶어 하는 일에 목을 매지 말고, 그 대신에 주님이 예기치 않게 언제 어디에 오시더라도,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며 기꺼이 맞이할 수 있도록 ‘지금 여기에서의 내 삶’을 회개하며 깨어 사는 인생이 되는 일이 마땅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증언은 그의 스승이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복음서 본문을 보면, 더욱 그렇다. 

 

예수님도 당시의 바리새인들로부터 오실 하나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표징들에 대한 질문을 받으셨다(20절). 주님의 답변은 이러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21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23절) ”

 

이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나의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내 안에서 찾으라는 말씀이 되는데, 이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 담긴 놀라운 뜻들 둘은 이렇다 :

 

1) 하나님 나라는 남의 것들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다. 마치 남의 작품을 감상하듯, 남의 솜씨와 체험에 빠져서 지내는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그것이 비록 겨자씨 같이 아주 적은 것이라도, 바로 내 영혼에, 내 가슴에, 내 마음 중심에, 그 나라의 샘물이 고이고 터지며 자라고 커가야 비로소 맛볼 수 있는 나라임을 말씀한 것이다. 곧 ‘나의 하나님 나라’여야 했다!

 

우리는 종종 그 나라에 대한 다양하고 은혜로운 증언들에 매료되곤 한다. 하지만 그게 참고는 되지만, 나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먼저 내 것이 있어야하고, 내 세계가 마련되어야만 한다. 남의 것에 마냥 박수만 친다고 해서, 나의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내 샘물의 맛을 볼 수 있어야만 한다. ‘눈과 귀의 부자’가 부자가 아니라, 비록 적어도 ‘단 한 평의 내 땅, 내 소유’가 있는 자가 진짜 부자란 말이다. 

 

2)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는 다른 데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시작된 그 나라를 통하여 온다. 다른 통로는 없다. 내 안에 있는 그 나라가 하나님 나라로 직행하는 통로이다. 왜 그런가? 본래 그 나라는 씨앗처럼 작다. 마침 산모 뱃속의 아기 씨앗처럼 작다. 그러기에 보이지도 않고 양도 차지 않는다. 하지만 새 생명과 새 나라가 바로 그로 인하여 오지 아니한가? 그 안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그게 신비다. 그렇다. 지금 내 안에 그 나라가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는 바로 내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 누구도 대체해 줄 대상이 없고, 오직 내 안에 있는 그 나라의 실체만이 내 구원의 답이 된다. 

 

이제 오늘 성경이 예(例)로 든 인물들을 다시 보자. 노아의 하나님 나라(26-27절)가 어디에 있었나, (전주 증언의 대상이었던) 룻의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었나, 반면에 참변을 당했던 롯의 처(妻)의 지옥(地獄)의 세계는 어디에 있었는가(28-30,32절)? 아마도 여러분은 그 나라를 그들의 결과에서만 찾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이제 그 사건 앞에 있고 그들 속에 있었던, 그 나라에서부터 그들의 하나님 나라와 그들의 지옥 세계가 있었음을 볼 수 있어야만 한다.  

 

노아의 하나님 나라는 바로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며 오랜 세월 묵묵히 방주를 만들던 그 흔들리지 않았던 그 행동과 자세 속에 있었다. 모압 여인 룻의 하나님 나라도, ‘모두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라’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요구를 뿌리치고 자기가 만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붙좇아서, 그 고난(苦難)의 자리에 들어섰던 바로 그 삶의 모습 속에서 이미 와 있었다. 

 

반면에 소돔의 롯의 아내에게 떨어진 불의 지옥(地獄)은 어디에 있었는가?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떠나가던 소돔 성을 돌아본 행동에서 확인된 것이지만,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그녀의 평상시의 신앙의 자세 인, ‘두고 온 물질에 대한 미련과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경망한 태도’속에 이미 지옥의 불의 씨는 담겨 있었던 것이다. 

 

성령 받은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무서운 심판은 언젠가 막연한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여기서의 내가’ 바로 그 날의 심판과 운명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알고 살면 된다! 특히 지금 내가 의지하고 사는 물질이나 세상의 지식이나 권력이 ‘그날의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님도 명심하라(습1:18참조). 그러기에 또 다시 묻는다. ‘누가 그 날에 데려감을 얻고, 누가 그 날에 버려둠을 당할 것인가?(34-36절).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벧후3:11절). 

 

이제 남은 일는 ‘나의 영원을 결정지을 현재의 나’를 다시 생명의 말씀 위에 세우는 일이다. 벧후 3:11-13에 제시된 두 가지 지침들이 바로 그 내용들이다. 

 

1) 내 인생은 죄를 떠난 거룩을 늘 추구하며, 하나님을 언제나 두려워하며 사는 경건(敬虔)한 삶에 헌신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 뜻을 앞세우지 말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선하신 뜻을 좇는 일에 전념하고 사시라. 

2)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영원히 펼쳐지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마음 깊이 앙망하면서, 그 나라가 이곳 아니 내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사시라. 

 

나는 그렇게 잘 준비한 인간들이 금방 다가 올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되리라고 믿는다! 나태하고 게으른 자에게는 구원 받을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도 확신한다. 이런 말도 있다. ‘건강한 인간이 보낸 세월은 짧다. 그러나 병든 인생이 보낼 세월은 길다.’ 


지금은 기회주의적(機會主義的) 인생을 거부하고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때로 살아야 할 때이다. 오늘 우리의 감사(感謝)도 그 나라를 향해서 준비된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되었음을 생각하면서 드려지는 감사일 때,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감사가 될 것이다. 부디 그런 분들 되시라!!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