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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6-14 (목) 08:25 5년전 1220  

본문)  갈 3:23-29, 룻 1: 8-18, 요 4: 7-26 / 참조) 사11:1-9

 

‘변방(邊方)’에서 ‘중심(中心)’으로! ---- !!

지난 12일, 싱가포르에서의 역사적인 북미(北美) 정상회담이 끝났다. 그 결과는 두고보아야하겠지만, 적어도 그 회담의 진행 과정에서 보여 준 변화의 물결과 파고는 엄청났다. 지구촌 온 세계가 숨을 죽이며 지켜 본 가운데, ‘도저히 서로 만날 수 없었고 어울릴 수 없는 두 세력’이 어깨와 양 국기(國旗)를 나란히 하면서, 정중한 예의와 존중 속에 역사적인 회담을 무사히 치러 냈다. 

 

김정은 국방위원장 자신의 말대로, 그 둘 정상의 만남은 실로 ‘공상과학영화’(SF)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이었는데, 그런데도 그들은 이 일을 해냈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한 일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세상은 중대한 변화를 볼 것‘이라고 공언하게도 했다. 믿고 기대해도 충분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나는 이번 일이 이사야 예언의 성취가 우리 땅에서 펼쳐진 일이라고 본다. 사11장의 예언의 성취, 그 중에서도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7절)의 증언이 지구촌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 한반도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본 것이다. 맹수의 왕 앞에서의 초식(草食) 동물인 소는 한갓 먹잇감에 불과하다. 하지만 강한 사자가 그 잇빨과 발톱을 접고, 소의 풀을 먹으며 함께 어울리는 ‘공존의 미학’이 가능함이 이번에 과시된 것이다. 평화란 강자의 일방적인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약자와 손을 잡을 때 이루어지는 것임도 확실히 보여 주었다. 그 바람에, 지금의 한반도 우리 민족은 세계 역사에 끌려 다니던 변방세력에서 새로운 평화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어가는 중심 세력으로 화려하게 거듭나고 있다. 실로 충격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는 이번 지방선거의 민주당 압승이 그렇게 변화된 우리 자신에 대한 자부심의 표출이라고 본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보았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해 졌기 때문이다’(2,9절.하). 그것도 우리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에게 임한 여호와를 아는 충만한 지식, 즉 섬김과 평화와 화해를 원하시는 여호와의 지식과 간절한 마음이 미국의 트럼프와 북한의 김정은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처럼 이 시대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 받고 있는 종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무엇보다도 우리 문재인 대통령이 예수의 모퉁이 머릿돌 영성으로 이 둘을 하나 되게 헌신하고 있음에 반가움을 갖는다(엡2:12-20참조). 그의 ‘한반도 운전자론’은 알고 보면 성서의 ‘예수의 모퉁잇돌 영성’과 맥이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진정한 박수는 그의 영을 보내셔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신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께로 돌려야 한다. 그게 지금 성령강림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와 그의 복음과 성령은 그를 영접한 자들은 누구나 역사의 무대(舞臺) 위로 높이 올려 세우셔서, 주인공이 되게 하신다. 변방의 인물을 중심의 인물이 되게 하신다. 그게 하나님의 식탁에 초대에 오른 자들의 공통적인 면모(面貌)이기도 하다. 적어도 다음의 분명한 원칙과 기준 아래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은혜의 식탁에 참여하게 해 주신다. 그 원칙과 기준들은 무엇인가? 의외로 매우 단순하다. 

 

1) 어떤 세상의 특권(特權)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별(性別)상의 특권도 없다. 인종(人種)적인 특권도 없다. 출신(出身)상의 특권도 없다. 종교(宗敎)상의 특권도 없다. 기타 어떠한 육체적인 기득권(旣得權)도 용납되지 않는다. 유대인들과 종교 권력자들이 모두 이 문제 때문에, 그 나라에서 배제를 당하는 무리들이 되었다. 

 

반면에 예수와 그의 나라에는 그런 연고로 은총의 햇빛을 받은 신흥 세력들이 많다. 예수의 제자(弟子)들이 대표들이다. 예수를 따랐던 당시의 민중(民衆)들도 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은혜와 은총의 선택을 받았던 이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은 아예 없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오직 감사와 충성만으로 살았다, 그 점이 믿음으로 살게 된 신흥 세력들의 특성이었다. 

 

또 다른 대표적 신흥 세력들은 있었다. 바로 이방인(=외국인)들이었다. 복음의 땅 끝 선교의 최대의 수혜자들이다. 이들 역시 자기 공로에 의한 것은 전무하다. 오직 은혜와 은총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다. 그 자리에 지금의 우리들이 있는 거다!

 

2) 이들에게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조건(條件)만 있다. 그것은 믿음(Faith)이다. 믿음도 그냥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인간되신 하나님과 그의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다. 그 믿음 여부가 관계 정립의 절대조건이다. 그 믿음의 문만 열리면,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가 믿는 자 속에 흡수되어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음지의 세계에서 양지의 세계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그 믿음이 없으면, 전혀 불가능하다. 오직 믿음으로 열리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들은 이방인의 그늘과 성차별의 그늘 속에 있던 이들이 어떻게 우리의 신앙의 조상들이 될 수가 있었는지를 공통적으로 전하여 준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갈라디아서는 예수와 그의 복음이 어떻게 무명의 이방인들을 신앙의 모델로 등장시켰는지를 보여 준 곳이다. 본문에는 그들이 신앙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전하고 있다. 

 

1) 지금의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 지역에 위치한 갈라디아는 비(非) 유대인 지역이다. 

이곳은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중에 이방인 중심 교회가 되었다(행16:6참조). 초기엔 이곳에 신령한 능력도 나타나면서 든든히 서가던 교회였다. 그런데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 중, 이 갈라디아 교회가 위기를 맞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첨가하려는 유대인 거짓 교사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 준수와 할례의식을 구원의 조건으로 추가시켜서, 이방인의 유대인화(化)를 도모한 것이다. 그래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2) 바울은 그 ‘다른 복음’에 반격하면서(1:8), 율법과 할례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어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겠느냐며 율법에 의한 구원론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오히려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임무가 끝났으며, 오직 믿음으로서만 구원에 이름을 힘써 역설했다(23-24,26). 그들에게 믿음만 있고, 율법과 할례가 없었는데도 성령을 주셨던 까닭과 그 믿음만으로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었음을 근거로 제시했다. 따라서 결코 다시는 율법의 종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당부했다(25,28-29참조). 

 

구약의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방인이요 무명의 과부였던 모압의 여성 룻이 어떻게 유대의 다윗 왕의 조상이 되었고, 그것도 인류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의 반열에 들게 되었는지를 전한다. 

 

1) 룻은 자기 땅에 식량 이민을 온 유대인 가족인 기룐(나오미 부부의 둘째아들)을 만나 결혼한 여자였다. 룻은 시댁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게 되었다. 하지만 큰 시련이 왔다. 시아버지와 시숙과 남편까지 잇달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집안엔 힘없던 과부 여성들만 세 명이 살게 된 것이다. 

 

2) 시어머니 나오미가 결단을 했다. 여자들 모두는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 살도록 하자는 것이다. 자기는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귀향하고, 두 며느리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재가하여 살라는 것이었다. 늙고 힘없는 시어미를 따라올 며느리들을 불행하게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두 며느리의 운명이 갈리게 된다. 큰 며느리 오르바는 자기 백성과 신들에게로 돌아갔으나(15절). 룻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3) 룻은 홀로 돌아갈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았다. 그 이유는 그가 만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백성이 자기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와 생사고락을 함께 할 것이다. 만일 자기가 죽은 일 이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벌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란다’며 뜨거운 고백과 결심을 한 것이다(16-18절). 실로 이방 여인 룻의 신앙이 유대인 시어머니 나오미를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하나님께서 룻에게서 바로 그 아름다운 신앙을 높고 크게 보신 것이다. 최고 수준의 응답을 받기에 합당한 차원 높은 신앙을 보유한 룻이었기에, 결국 하나님은 다윗과 예수의 조상의 반열에 그녀의 이름을 올려주시는 최고, 최상의 배려를 베풀어 주셨던 것이다! 

 

복음서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본문의 주인공은 이름도 없고 신분도 부끄러운 미천한 여인이었다. 그것도 아무도 외출을 피하는 가장 뜨거운 대낮에 먼 길의 우물에 찾아와야할 정도의 인간이었다. 그것도 사마리아라는 비 유대인이었다. 그러기에 그녀란 존재는 각종 사회적 종교적 편견과 차별과 장벽들에 쌓여 살아 온 외롭고 고단한 인생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얼마 후에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이다! 그 바람에 그녀의 동네인 수가 성(城)의 사람들이 대거 예수께 돌아오는 초유의 기적(奇蹟)이 발생하였다(4:39-42 참조). 왜 그랬던가? 

 

야곱의 우물가에서 그녀가 예수를 만나서, 예수께서 주신 생수의 성령의 물을 흠뻑 받아 마셨기 때문이었다(10,13-15참조). 그리고 어떤 규정된 처소가 아니라, 오직 성령과 진리의 말씀만으로도 하나님께 예배가 가능함을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면서 그녀의 가슴이 큰 기쁨과 해방의 감동에 압도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와 그의 성령이 그런 지하에 있던 인물을 해방시키고 높이 올려 귀한 사역을 하게 하신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여러분은 혹 지금의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부정적으로 보고 살고 있지는 아니한가?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나를 복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보고 믿어야 한다. 그 분의 거세고 놀라운 힘과 지혜를 받게 되면,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이다. 예수에게는 길이 있다. 우리 인생살이가 대전환의 햇빛을 보게 할 길이 있다. 

바울의 선언처럼,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 삶과 상황을 안겨주시는 초자연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전1:27-29). 이제 그의 영으로 충만하자. 예수는 우리에게 참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음이다(고전1:30 참조).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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