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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3)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지방선거주간

관리자 2018-06-06 (수) 08:24 5년전 1243  

본문)  고전 1:18-25, 호 2:14-23, 눅 14:15-24

 

지금의 우리가 사는 땅, 대한민국은 거대한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있다. 촛불혁명으로 시작된 국가 대변혁이 소위 <적폐청산(積幣淸算)>이란 이름하에, 옛 것과 새 것의 치열한 영적, 정신적 대 전쟁을 치루고 있기 때문이다. 매우 의미 있는 싸움이다!

 

가장 두드러진 내부 전쟁은 이념(理念)과 안보 논쟁이었다. 민족을 하나 되게 하려는 평화통일 입장을 가진 자들은 노상 ‘종북세력, 친북세력, 빨갱이’로 매도되어 몰렸다. 그런 흐름은 지난 70여년의 오랜 세월을 강고하게 우리를 분열시켜온 적폐였다. 그런데 그것들이 지금 심판대에 올랐다. 금주엔 북한-미국 정상이 회담하며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하고, 서로 평화롭게 살자고 하는 한 마당을 차릴 터이기 때문이다. 

 

성(性)평등의 세상을 회복하려는 소위 <미투/Me,Too!>운동도 우리 사회의 성차별로 인한 부끄러운 적폐들을 청산하기 시작한 대혁명이다. 그 동안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되는 일들이 많았고, 여자는 항상 남자의 종속(從屬)적 존재와 성적 파트너로 인식되어 왔던 통념적 관례들이 청산되기 시작했다. 그 바람이 대 폭풍처럼 불어와, 각 분야에서 일거에 유력인사들을 멀찍이 날려버리는 진풍경을 생생히 목도하게 하였다.

 

사회적 신분상의 갑을(甲乙) 관계에서의 을(乙)의 반란과 역습도 적폐청산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대한항공의 사주 가족들의 사례는 정말 충격적인데, 이런 갑들의 횡포가 꺾이게 된 것은 그 동안의 갑의 횡포에 신음하던 을들의 저항 때문이다. 

 

더 깊이 주목할 대목이 있다. 바로 직전 대법원장이 피소(被訴)된 사안들이다. 이 일 역시 사법부 사상 처음 있는 일로서, 한국의 법의 심장부가 얼마나 부패하고 적폐의 온상이었는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그 동안 우리는 지난 대법원장 시절에 왜 그토록 대법원이 강자와 부자와 집권자의 편에만 유리하게 판정함으로서, 이 땅의 힘없는 약자들을 절망하게 하였는지를 궁금해 했는데-, 요즘에서야 그 원인을 알게 된 것이다. 공의로워야할 재판부가 불의한 정치권력과 유착(癒着)하여, 국가의 법이 정의와 평등과 공의에서 벗어나 항상 강자를 웃게 하고 약자를 절망 속에 빠져들게 한 것이었다. 최고 수준의 적폐를 국가의 최고 법원이 내밀히 저질러 온 것이다. 그 바람에, 대통령은 국민 주권 시대를 열기 위하여 항상 낮은 곳을 향하고 있는데, 법원은 그런 이질적인 적폐의 행태를 보여왔으니-, 이 어찌 나라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마침 금주는 지방정부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한 총선거에 들어간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맞이해야 하고, 어떤 정신으로 새 시대를 열어갈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할 지를 생각하며 냉철한 마음으로 투표에 참여해야만 한다. 

 

오늘의 세 본문들도 모두가 때맞춰, 낡고 묶은 시대를 끝내고 구원의 새 시대를 어떻게 열어갈 수 있는가에 대한 소중한 증언과 방향제시를 해주고 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시대는 대 방향전환과 함께 오는 것이고, 그것도 하늘의 신령한 영을 받은 이들로 인하여 오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말씀들을 깊이 경청하고 결단해야 하겠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바울 사도는 헬라문화의 중심지였던 고린도지역을 선교하면서, 그들 세계와 백성들을 지배해온 두 개의 상호 대립적인 이데올로기들을 발견했다(22절 참조). 그게 무언가? 

 

하나는 헬라인들의 지혜 만능 사고였다. 헬라인에게는 고도의 인문학적 지혜들이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자존심이었다. 사실 당시의 헬라 지혜와 지식은 정치, 철학, 의학, 신화, 건축, 인문, 수사학 등 모든 계열에서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자랑거리들이었다. 그 시절의 자랑거리들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전승이 될 정도의 차원 높은 것들이었다. 그들의 새 것을 향한 목마름은 진정 소중한 은사였지만, 그러나 그것들의 한계는 모두가 인간의 가능성과 탁월성에서만 찾아내려는 데에 있었다. 그들은 또 다른 인위적 신화들 창조로 인간 한계까지 극복 하려 들 정도였다. 그런 사고 때문에, 그들은 바울이 전한 십자가의 구원의 도를 어리석게 본 것이다(23절)

 

또 하나는 유대인의 표적(標的/이적)중심 신앙이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의 나라 잃은 수난과 슬픔을 겪으면서,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초월적이며 압도적으로 오시리라 믿고 살아왔다. 하늘에서 구름타시고 나팔 불며 오실 초월자 메시아가 그들의 믿음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메시아론(論)을 꺼리며 거부했다(23절). 

그 바람에 그들은 진짜 초월자의 모습인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인자/人子)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죄 값을 대신 치르시려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임을 당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결국 유대인은 늘 표적을 구했으나, 진짜 자기 곁에 있는 참 표적은 못 본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이 두 세력들은 그 누구도 그들이 추구한 참 지혜와 참 표적에 이르지 못했다. 헬라인은 너무도 인간적인 능력에 매달렸고, 유대인은 너무도 초월적인 영역에만 집착한 것이다. 바울은 이런 자세를 ‘세상의 자기 지혜’로 규정했다(20-21절). 그러면서 그것들 자체는 본질상 ‘미련한 것’이어서, ‘하나님의 참 지혜’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18-18절). 그러면 이 둘을 모두 다 구원할 길은 없을까? 있었다. 그게 무엇이었나? 

바로, 십자가의 도(道)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였다! 그들이 찾는 대답들이 그곳에 다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제시했다(18,24-25참조). 누구든 자기 입장을 고집하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보기만 하면(24절,상), 거기에는 유대인이 찾는 하나님의 능력과 헬라인이 찾는 지혜가 가득히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증언했다. 세상의 눈으로는 한없이 어리석고 비참한 십자가의 방법을 택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의 묘미와 모든 죄인들을 형벌로부터 구원하실 능력을 다 담아 주셨기 때문이다(25절). 

 

바울은 그 누구든 예수의 십자가 앞에만 서면, 세상이 설치한 모든 차별과 편견의 높은 장벽들이나 바벨탑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또한 그 앞에서는 탁월한 인간에게나 있을 교만도 무너지고, 능력이 부족하여 열등감에 떨어지는 아픔과 비극도 치유되는 능력도 보았다. 결국 십자가는 겸손과 헌신으로 무장된 새 인류를 창조해 내는 참 표적과 지혜가 샘솟게 하는 신비의 현장임을 확인한 것이다(24절 참조). 이 점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을 구원받은 새 존재의 기조로 보았다. 

 

구약의 말씀은 어떻게 보아야할까

 

첫 사랑인 여호와를 버리고 허황되고 거짓된 정부(情婦)인 바알(Baal)에게 시집가버린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와 그 여호와와 새롭고 영원한 부부의 연(緣)을 맺도록, 여러 필요한 조건들이 제시되었다. 그것도 배신(背信)을 당하신 여호와에 의해서 말이다!

 

이스라엘이 사랑을 준 바알은 무슨 신(神)인가? 실체는 한갓 돌덩어리이며 나무로 깎아 만든 신상이다. 하지만 번영과 풍요를 얻으려면 누구나 그를 믿어야 된다는 가나안 토족들의 아주 오랜 이데올로기적 풍설이 씌워진 신상이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번영을 자극하여 다른 건강한 가치관들을 허망하게 무너뜨린 변신의 옷을 입은 신이다. 여기에 빠진 이들은 물질만능주의, 풍요란 욕망의 기복주의, 성적 괘락주의 등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이 그 바알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스라엘의 참 신랑이 되고 싶어 하는 여호와의 마음은 참 이채롭다. 펼펴 보이는 보상 약속들(지참금) 내용도 물량공세로 일관했던 바알과는 너무도 다르다. 공의(公義)와 정의(正義)와 은총(恩寵)과 긍휼(矜恤)과 진실(眞實)함으로 이스라엘에게 장가들어 그들과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이다(19-20절). 이 언약의 무대도 놀랍다. 거친 들이요(14절), 아골 골짜기이다(15절). 한마디로 십자가의 한복판을 혼인 마당으로 정하셨다. 게다가 들짐승과 자연 생태계를 들러리로 삼고 전쟁이 없는 평화의 환경을 약속했다(18,22절 참조). 하늘의 복과 땅의 복들로도 덧붙여 약속하셨다(21-22절). 특히 그 세계에는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사랑) 때문에, 도저히 초대받을 수 없었던 고멜의 자식들인 로암미나 로루하마 같은 자들도 초대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하는 놀라운 기적의 세계가 펼쳐질 것도 예고되었다(23절). 

 

최근 우리나라 세 명의 대통령들에게서 이 역사의 교훈을 다시 본다. 전직 두 대통령들은 오직 경제부흥을 집중적으로 약속했지만 결과는 당사자들이 부정부패와 국정농단의 주역이 되어 탄핵당하거나 사법처리를 당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주권시대를 선언하면서 정의. 생명. 평화를 바탕으로 나라를 나라 되게 하고 국민을 잘 섬기려드는 새 대통령은 지금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 남북의 평화정착과 정의로운 나라건설의 문을 활짝 열어 가고 있다. 그렇다. 구원의 길은 어느 곳에서 열리는가? 풍요와 번영을 추구하는 곳에게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과 정의와 평화의 길에서 이다!  

 

복음서 말씀은 어떻게 보아야할까

 

누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될 것인지를 묻고 대답을 하는 곳이다. 처음 초대받았던 자들은 얼마 후 주인의 초청이 왔을 때, 모두가 그 초대를 기피한다. 그 연유인즉, 처음 약속과 초대가 왔을 때의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주로 소유가 많아져 관리할 일들과 가족관계로 인한 일들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이런 자들은 결국 예기치 아니했던 새 인물들에게 그 잔치상을 넘겨주어야만 되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일에 기본이 안 된 까닭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초청에의 응답을 삶의 최우선에다 두고 사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그 우선권을 세상의 물질에나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일에 빼앗기는 자들에게는 합당하지 못한 곳이다. 

 

특히 신령한 자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초청에 매우 민감해야 한다. 물론 세상일들과 가정사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은 이미 삶에서 무엇이 최우선적인 것인지를 배웠고 알고 지켜야할 사람이기에, 그 초청에는 엄중히 응답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한다. 우리의 필요한 것들은 이 질서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고 응답하며 산다(마6:33). 제자들과 사도들과 성도들은 모두 여기에서 승리했다. 

 

결론은 이렇다

 

하늘과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일은 우리 성령 받은 자들의 지고의 가치요 목표이다. 나에게는 이 일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어야 한다. 그 일은 바알의 영에 의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영인 공의, 정의, 은총, 긍휼, 진실의 마음과 자세로 섬길 때에야 가능하다. 그 십자가 정신은 세상의 적폐도 청산시키고 건강하고 새로운 세상을 견인도 한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까지 상속하게 한다. 흔들리지 말고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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