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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5-22 (화) 18:36 5년전 1205  

본문)  고전9:13-18, 사52:7-10, 눅10:1-16

 

지난 주 성령강림주일의 말씀에서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성령께서 당신이 직접 데리고 일하실 교회 시대의 핵심 파트너로 본토의 히브리인들이 아닌 해외 교포들인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을 상대하기 시작했음을 목격했다. 여러 면에서 해외 교포들은 본토인에 비하여 해외 선교에 적합한 역량과 입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그들 디아스포라들은 말세에 ‘하나님의 큰 일’을 떠맡은 주역이 되었다. 결국 그들의 활발한 움직임과 함께, 주님의 복음은 온 세계에 급속히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예수의 교회들도 온 세계로 확산(擴散)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러한 새로운 복음 전파의 가파른 상황 전개를 밑받침하기 위해, 자연히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 복음을 전하고 목회하도록 훈련된 전문적인 인력(人力)을 찾아 세우는 일, 그들이 전할 복음의 내용(內容)을 교육시키고 무장시켜 파송하는 일, 그리고 그 복음 사역이 중단 없이 추진되고 성취되도록 밑받침할 재정적인 조직(組織)들이 필요했다. 

 

생명 구원을 위한 복음 선교의 일들은 마치 농사(農事)일과 같아서, 한번 시작하면 지속적으로 전하고 관리하면서 키워내야 할 일들이기에, 그런 사역을 지속적으로 감당할 제반 시스템은 더욱 필요했다. 그렇다. 선교와 복음 사역은 이런 삼위일체(三位一體)적인 상호 유기적(有機的) 협력체계가 갖추어져야만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오늘 세 본문들은 모두 그런 필요에서 나온 증언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도 서로 유기적 보완관계를 통하여 당신의 온전하신 하나를 이루셨듯이, 오늘 그 분들의 뜻을 담은 말씀들 모두도 우리를 그런 세계로 인도하고 계신다.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언제나 필요한 사람을 택하여 일하신다. 결코 단독(單獨) 처리(處理)하신 분이 아니시다. 성부께서는 족장들, 예언자들, 왕들, 제사장들, 의인들, 지혜자, 남은 자들 등을 택하여 일하셨고, 성자께서는 제자들을 택하여 일하셨으며, 성령께서는 사도들과 교회들과 그의 일꾼들을 세워서 일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당신이 홀로 결정짓는 몫이 있다! 바로 복음전파자 선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선택하시는 데, 그 누구의 조언이나 협력이 없이, 오직 당신 홀로 결정하셨다. 그러기에 그렇게 선정된 일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특별하시다. 마치 자식에 대한 부모의 독점적 관심과 돌봄과 같은 차원이랄까-! 소위 ‘기름 부음 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특별하기에, 그들의 개별적 잘잘못에 대한 인간적 심판과 정죄도 조심할 사항이 되었을 정도이다. 그 점에서 유명세를 탄 분(?)이 바로 다윗이다. 그는 그토록 자신을 죽이려고 쫓던 사울 왕에 대한 개별적 응징을 아예 포기한 사람이다. 그 이유는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기에, 사울에 의한 자기의 억울함도 하나님께서 맡겨서, 하나님이 친히 해주시리라고 믿었다(삼상26:9-10참조). 그 결과를 보면, 다윗의 믿음대로 하나님이 그 숙제를 친히 풀어주셨다. 

 

남은 문제는 선택 받은 이들의 응답하는 자세이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정을 받았으니, 더욱 겸손하고 감사하며 충성으로 응답함이 마땅한데도, 실상은 너무도 부실한 대응자들이 많다. 에서가 그런 사람이었고, 이스라엘의 사울 왕이 그런 사람이었으며, 제자 유다가 그런 사람이었다. 이스라엘의 숱한 왕들이 그런 불량한 대응자들이었다. 그런 목자(왕)들의 탈선과 오만이 백성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불행을 안겨주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한국교회 문제들도 성도들의 문제라기보다는 부실한 목회자들의 문제 때문이어서,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오늘 세 본문 말씀들은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위한 행동 지침(指針)이다. 다시금 새롭게 들여다보아야 할 지침서이다. 과연 이 속에서 무엇을 볼 수가 있을까?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본문은 바울 사도를 통하여,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소명 받은 이들이 맡은 사역들이 무엇이며, 그의 생활 대책은 어떠해야 하고, 또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여야 하는 지를 일깨우는 세 가지 차원의 내용들로 제시되었음 본다. 

 

1) 당시 초대교회에서도 복음 사역을 위해 여러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일하게 된 일꾼들이 있었다(13-14절).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과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란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러나 맡은 분야들은 다양하며 전문성을 갖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조금 세분화 한다면, 성전관리(管理)와 예배(禮拜)인도와 복음전파 영역을 맡은 이들이 각 분야에서 입체적으로 일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2) 이들의 전업(專業) 사역을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활 대책도 확립되었음도 확인된다(13-14절). 그들은 모두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 올라오는 제물을 함께 나누고, 복음 사역에서 수입되는 헌금이나 헌물 등으로 생활하는 것이 규례화된 것이다. 초대교회의 그런 지침은 지금의 현대교회에까지 전승되고 있다. 

 

3) 복음 사역자들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누(累)가 되지 않도록 그 언행과 삶의 자세를 분명해야 한다. 즉 복음 사역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의 문제로 인하여 자신이 전해 온 복음과 그 본질이 훼손되거나 왜곡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일에 목숨을 기꺼이 걸어야만 했다(15-18절 참조). 

 

본래 성령의 소명을 받은 자들은 복음을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 죽는 자리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돈벌이 위해서나 자기 명예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들어선 자들이 아니다. 부름과 선택도 자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하셨다(17절참조). 따라서 그들의 삶의 첫 목표는 자신의 만족과 성취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며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빛이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소명자들은 당연히 자신부터 먼저 엄격해야 한다. 육정이 아닌 성령의 인도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그럴 때, 소명자들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은혜’를 받게 된다(마6:33). 

 

바울 사도의 정당한 생계비 수령거부와 자비량(自費量) 선교의지 표명은 분명히 대중적이 아니다. 바울의 이 증언 때문에, 모든 복음사역자들의 생계비 수령이 매도당하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다만 바울의 그런 증언에는 큰 이유가 있음을 참고는 해야 한다. 즉 바울은 자신의 교회를 통한 생계비 수령이 두 가지 측면의 오해와 역작용을 불러오는 일이 될 것을 예견하며, 스스로의 엄격한 방어책을 그렇게 세웠던 것이다. 

 

1) 사도권(使徒權)에 관련된 오해에 발목이 잡히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예수의 사도직(職)에 대한 정통성 문제로 시달린 사람이다. 직계 12 제자들처럼, 그는 평생 나사렛 예수를 모셔 본 적이 없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임명 받았기 때문이다(행 9장 참조). 게다가 핍박자란 어두운 전력도 있었다. 따라서 그가 개척하여 많은 교회들을 세우고 많은 부흥을 이루었어도, 그는 그곳의 생활비를 받지 않고 탠트를 만들어 생활비를 마련하고 남는 돈은 구제 및 선교비로 사용한 까닭은, 그가 돈벌이 위해 교회 목회와 선교를 한다는 식의 오해의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복음과 그 사역의 본질 지키기에 목숨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2) 사도가 정통성을 의심받거나 잃게 되면 그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인가? 그가 전한 모든 증언들도 의심받거나 무효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생애를 바쳐 증거한 모든 복음이 자신의 직분상의 오해로 손상됨을 극도로 경계했다(15-16절 참조). 복음이 소멸되거나 무효화됨은 바로 양무리들의 피해로 직결되는 최악수(最惡手)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의로운 자세를 평생 견지했기 때문에, 바울은 영원한 바울일 수 있었고 그가 전한 복음은 모든 전도자들의 지표가 되었고, 진리의 정수로 빛을 발하게 되었다! 

 

구약 내용을 어떻게 보아야하나

 

본문 자체는 오랜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는 놀랍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의 내용과 가치를 드러낸 말씀이지만, 여기에서는 바울과 사도들이 그토록 목숨 걸고 전하려던 복음의 성격을 소개할 전거(典據)로 보는 게 좋다. 

 

1) 전달의 내용은, 복된 좋은 소식(복음), 평화, 구원, 기쁨 소식, 위로와 능력이다. 

2) 전달자는 파수꾼이기에, 오시는 하나님의 동정(動靜)에 아주 민감해야 하며, 그 행위에 백성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8-9절). 즉, 하나님에 대한 놀라움과 경이(驚異)가 늘 살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듣는 무리들도 놀랍게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하나

 

형식상으로는 예수님의 70인 전도자 파송(派送)이야기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초대교회의 전도자 파송의 정황과 원칙을 온전히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전도자 바울의 모델을 바탕으로, 교회 전도자들을 위한 지침의 말씀으로 삼도록 하자. 

 

1) 무엇을 외치고 전할 것인가? - 그 주제는 ‘다시 오실 예수’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9,11절). 상대의 입장에 불문하고 외칠 내용은, ‘그 나라가 가까이 왔다’이다.

2) 복음 증언자가 갖추어야할 안팎의 선결(先決) 조건들도 있다. 

- 그 어떤 지참물. 소유물에도 초연해야 한다(4절). 거기에 연연하면 정신과 자세는 머리 깎인 삼손처럼 무너진다. 바울의 자비량 선교 정신을 크게 배워야 한다. 

- 평화(平和)와 축복(祝福)을 비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5절). 빈부귀천, 남녀노소 차별 없이 듣는 자에게 평화를 빌어주고, 열린 마음으로 복을 빌어주라. 

 

결론은 이렇다

 

오늘날의 한국교회 현장은 복음과 진리를 훼손하며 그 가치를 하락시키는 일들이 범람한다. 교회와 복음 전파가 힘을 잃고 있다. 그것도 전달자의 탈선된 행태가 주범이라서 더욱 슬프다. 소명감을 잃은 삯꾼의 횡포들 때문이다. 나와 우리 교회들은 어떤가? 다시 깊이 성찰해야할 때이다. 

 

성령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우리는 이제 다시금 복음의 가치와 무게에 진중한 응답을 해야 한다. 복음과 그 복음이 지닌 평화와 구원의 생명력은 나의 인간적 계산과 욕망 때문에, 훼손되게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고백대로,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와 그 복음이 높임 받게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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