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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총회선교주일

관리자 2022-06-07 (화) 22:04 1년전 365  

본문)  갈 5:16~26, 신 30:15-20, 막 4:1-20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이다. 본격적인 강림절기가 시작되었다. 교회의 절기도 본격화되었다. 마침 오늘 주일은 본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약칭-기장)가 지난 1953년 6월 10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출애굽하여 역사적인 새 신앙공동체로 출범(出帆)을 한 지, 제 69년째 맞이하는 기념주일이기도 하다.  


우리 교단인 기장(基長)의 역사는 지난 70여 년 간의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더불어 숱한 역할들을 감당하면서 교회로서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 왔었다. <정의.생명.평화>란 기치(旗幟) 아래 뭉친 우리 교단은 한국교회의 갱신과 성숙한 신학 만들기에 늘 선봉에 섰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성서나 교회당 안에만 갇혀 있게 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삶의 현장의 소금과 빛으로의 정체성을 추구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심는 일에 꾸준한 노력과 도전을 해 왔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사회와 역사 신학적 선교정책(Missio Dei-하나님의 선교)을 한국교회 안에서 앞장 서 추구하고, 또 산업화에 따른 민중(民衆)신학과 민중교회 운동이 활성화되어 가면서 사회적으로도 크게 관심을 끌게 되자, 주변의 보수적 교회들로부터의 거센 비판과 매도를 당하는 역풍도 있었다. ‘기장은 세속적 집단’이라거나 ‘노동자 그룹의 좌편향이고 친공 이념 집단’이라거나, 나중에는 아예 ‘구원이 없는 교회’라는 등이 공격도 제법 있었다. 


그 일로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기장 교단에 대한 부정적 프레임’이 우리의 성장을 크게 훼손했다. 그러자 이를 극복하려는 교단 내 일부 교회들은 세칭 성령운동에서 출구를 찾으려했다. <성풍회>란 조직을 통하여 교회의 부흥 운동에 매진하기도 했다. 그 노력의 열매들도 컸던 것도 사실이다. 수도권에 위치한 제법 큰 규모의 교회들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한신,가리봉,동광,영신,남성,발음,공능교회 등, 기타 적잖은 교회들이 힘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은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것은 교단의 신학이 그런 성령운동을 기꺼이 포용할 품이 부족했고, 교단의 지도부 역시 성령운동 그룹과 인권운동 그룹 모두를 하나로 묶어낼 역량도 부족했다. 해당 교회들 역시 성령운동이 교회부흥의 차원을 넘어서 나아갈 건설적 방향을 제시할 힘도 부족했다. 그러면서 내부의 분열이나 갈등 현상까지 조성되기도 했다. 세칭 <성풍회파 & 종로5가-인권파>란 용어까지 나돌기 까지 했기 때문이다.  


세상과 역사도 변화가 이를 덮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력도 많이 떠났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우리가 붙잡고 씨름해왔던 선교적 과제들인 민주화, 인권, 통일, 연합과 일치, 환경 등은 미완의 것들로 남겨진 상태이다. 그렇다고 이제 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끝낼 수도 없다. 여전히 해결해야만 할 과제들이다. 어찌 보면 지금이 또 다른 기회이다. 무엇을 해결해야 하나? 


성령의 교회화(化)와 사회화의 양면을 통전(通典)할 신학 수립과 그것을 밑받침할 영적 능력 확보가 우리가 해결할 과제이다. 곧 성령이 교회부흥도 이끄시고, 성령이 정의로운 사회 건설과 인권 선교도 하게 하시는 동시적 과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이것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일과 그 능력에 우리 모든 교회와 신학이 눈이 뜨고 마음이 모아지면 능히 가능한 일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가 많이 허약해진 지금이, 그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있는 때로 보인다. 이 해결의 실마리는 역시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집중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이러한 우리의 염원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주제들을 제공한다. 서신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따라 살라’고 권면한다. 그것만이 우리 육체의 욕심들을 이겨낼 수 있다고 본다. 구약에서는 ‘생명과 복을 선택하라’고 강조하신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함정인 사망과 저주의 늪을 피하여 구원 받으라 하신다. 복음서는 우리 가슴에 뿌려진 ‘말씀을 좇으라’고 지시하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도록 하라고 촉구하신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는 성령(聖靈)을 따르고, 생명(生命)을 택하며, 말씀을 좇는 삶의 틀에 의하여 보호되고 유지되며 승리하게 됨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성령, 생명, 말씀>이란 영적 구도(構圖)는 본 교단이 계속 추구해 오는 세 가지 선교적 삶의 명제인 <정의(正義), 생명(生命). 평화(平和)>를 충분히 포괄할 수 있는 영적 과제들이다. 성령께서 정의와 평화의 차원을 포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의 말씀에서 그 점들을 확인해 보자. 

  

1. 서신서 / 갈5:16-26 /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의 삶이 죄악과의 투쟁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고 있는 상태에 있기에, 세상과의 관련된 이기적 욕망의 개입을 계속 받으며 살기 때문이다. 그 육체의 욕망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도록 계속 유혹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과는 달리(롬7:5,15-24참조), 성령이 그 안에서 선한 작용을 하시기 때문에 그런 죄의 강제에 무기력하게 당하도록 내맡겨져 있지 않다(24절 참조)


그럼에도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그 안에 계신 성령은 악을 저지하고자 하지만, 육체는 선을 막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성도는 한 사람 안에서 서로 상반된 법들(죄의 법과 하나님의 법)의 싸움 속에 살고 있다. 이는 자신을 ‘사망의 몸을 가진 곤고한 사람’이라며 탄식(歎息)한 사도 바울의 고백의 근거이기도 하다(롬7:22-24 참조). 문제는 자기를 견인하려는 그 둘 중에서, 결국 누가 최종적인 것을 선택하느냐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 아니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그 선택권을 우리에게 위임하셨을 뿐이다. 즉 최종 선택에 따른 결단(決斷)은 전적으로 인간의 몫으로 넘긴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방을 받는 사람이기에, 선택에도 바르게 할 것을 신뢰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이런 말씀으로 대변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自由)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5:25)” 


1) 바울의 우리들을 향한 전적인 권고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16절). 그 까닭은 그래야 내 안에 도사려 있는 육체의 욕심을 극복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우리 안에는 성령과 육체의 욕심이 불편한 동거를 하면서 서로 대적하고 서로 거스르고 있는데-, 선택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아예 성령의 요구들을 선택해 버리면, 결국 남은 육체의 소욕은 힘을 잃고 그 기세가 꺾이어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16-17절). 율법의 제약까지도 벗어나게 된다(18절).  


2) 이와 함께 바울은 ‘육체의 일들’이 무엇인지를 상세히 밝힌다(19-21절). 그 내용은 이렇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기타 등등이다. 

-이런 일들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결코 유업(遺業)으로 받지 못한다(21절). 

-이런 일들은 모두가 생명을 해치고, 말씀을 거스르는 일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3) 아울러 바울은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서 맺게 되는 아홉 가지 열매들도 소개한다(22-23절). 

-사랑, 희락, 화평(=평화),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다. 

-이 열매의 특성들은 이것들 모두가 하늘의 것이어서, 세상에는 금지할 법이 없다는 점이다. 

-이 열매들은 모두가 생명을 살리고, 말씀을 따르는 일들이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특히 본 성령의 열매에는 우리 교단의 선교 이념인 <정의 생명 평화>의 내용들을 온전히 담고 있다. 이런 모습은 왜 우리가 우리의 선교 이념에 하위 개념인 <정의와 평화>보다도 상위 개념으로서 이 모든 개념을 포함한 <성령>을 더 앞세워야 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생명>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본성을 드러낸 상위 개념이다(신30:20, 요1:4 참조)


2. 구약 / 신 30:15-20 / “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生命)을 택하고 ”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상속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과 눈을 일깨운다. 그들 앞에서는 보이는 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영적 양식들도 있음도 보게 해준다. 그게 무엇인가? 그들 앞에 놓인 생명과 복, 사망과 화(禍)이다. 서로 완전 상반된 두 양식들이다. 모세는 이것들이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두신 것이라면서,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그 중에 생명(生命)을 택하라’고 뜨겁게 권고한다(19절).  


이것을 보면 우리는 다시금 에덴동산의 선악과(善惡果) 앞에 선 아담과 이브가 된 느낌이다. 그들 앞에는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나무도 있었고, 먹으면 죽게 되는 선악과도 있으며, 또 그것들에 대한 엄중한 하나님의 사전 주의사항도 있었기 때문이다(창2:8—9,15-17참조). 그런 데에도 그들은 결국 선악과를 선택하여 낙원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후손인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불행을 안겨준 실패한 조상이 되고만 것이다. 그러면 이 불행을 끊어낼 방안은 없는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 다시 기회를 주셨다. 처음엔 아브라함을 중심한 개인적(個人的) 접근을 하시면서 그게 성공적 결과를 거두게 되시니까, 후에는 그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집단적(集團的) 접근을 시도하신 것이다. 그게 바로 지금의 본문이다! 여기에는 오랜 준비할 예비기간이 있었다. 홍해를 건넌 일, 광야에서의 40년의 혹독한 영적 훈련, 그리고 가나안을 향한 믿음의 행진 등이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은 다시 ‘그 선택의 결단 앞에 섰다’ 


1) 아담의 실패를 반복할거냐, 그 단계를 극복해 낼 거냐? 초긴장 상태이지만, 원리만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모세의 권고도 매우 뜨겁다. 생명과 복을 택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취할 때 주어질 영광스러운 열매들이 무엇인지를 상세히 설명해준다. 소위 그 누구도 몰라서 잘못 선택했다는 변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손에 쥐어주듯이 그 길을 알려주었다’. 뿐만 아니다. 그래도 잘못을 선택하면, 그 결과는 씻을 수 없는 나락(奈落)뿐임까지도 알려주었다. 


2) 그러면 생명과 복을 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길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일이다. 자신의 삶의 모든 길이 하나님 중심, 그의 말씀과 명령을 좇아서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일이다(16절). 이는 하나님의 속성이 오롯이 담겨있는 그 분의 말씀을 힘써 받드는 것을 말한다(요일5:3 참조).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를 의지하는 삶을 택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자신들의 생명이시고 장수(長壽)이시기 때문이다(20절).   


☞ 그러면 이런 선택을 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복이 부여되는가? 생존(生存)과 번영(繁榮)이다! 특히 그들 조상들에게 허락하신 그 땅을 상속하며 복(福)을 기리 누리게 될 것이다(16,20절). 


3) 그럼에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끝내 잘못 선택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질 것인가? 반드시 멸망(滅亡)한다.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도 그 날이 결코 길지 못하다(17-18절 참조).   


3. 복음서 / 막 4:1-20 / “옥토(沃土)의 사람은 말씀을 듣고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한다 ”


앞에서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일과 생명을 선택하는 일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절대적 선택 사항임을 알았다. 그런 선택을 위한 방법도 살펴보았다. 마침 본 복음서는 예수의 ‘씨 뿌림의 비유’를 통하여, 그 방법을 보다 확실히 전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복종(服從)하며 사는 일’이다.  


예수께서 사신 팔레스틴의 농사법은 매우 특이하다. 씨를 뿌릴 때에는 우리처럼 먼저 땅을 갈아엎기 전에, 그냥 맨 땅에다가 먼저 씨부터 뿌리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갈아엎어서 묻는다. 그 바람에 씨는 길 가에도, 가시덤불에도, 바닥에 돌이 묻혀 있는 곳에도 뿌려진다. 물론 좋은 땅에서 뿌려진다. 그리고서 쟁기로 땅을 갈아서 씨를 덮는다.  


주님은 이 씨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셨고, 땅은 그 말씀을 받는 인간의 마음으로 보셨다(14절). 그러면서 떨어진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은, 네 가지 형태로 말씀에 반응한다고 보셨다(3-8절). 먼저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새들과 같은 길 가의 마음들이다.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위 같은 마음들도 있다. 모든 것을 질식시키는 장애물에 짓눌려 있는 가시덤불의 마음들도 있다. 그리고 말씀을 온전히 받아서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하는 좋은 마음도 있다. 


여기에서 주님은 주변의 어려움 속에서도 여러 개의 줄기를 내고, 씨알 하나에 100개의 낟알을 풍성히 생산하는 옥토(沃土)의 인물들에게 관심을 집중하신다. 그들은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빈곤에 빠진 자들까지도 먹여 살리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o 따라서 우리는 말씀 듣기와 받는 일에 마음과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말씀은 성령이 오시는 통로일 뿐더러 구원의 은혜가 들어오는 문이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의 비유를 다시 보면, 온통 말씀에 대한 강조가 가득하다(14-20절 사이에 7번이나 올라 있음). 나에게 들려진 주의 말씀은 나에게서 그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사탄의 온갖 방해들에 휘말리지 않기를 원하신다.  


o 목표는 말씀을 좇는 일이다(20절). 시몬 베드로처럼 말씀을 받들며 살아야 한다(눅5:5, 요6:68 참조). 이 일에 내 인생의 운명도 걸려있음을 알고 진실히 매달여야 된다. 말씀 듣는 일, 겸손히 순종하는 일,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에 내 인생의 미래를 맡겨야만 한다. 그런 이에게 성령이 도우시고 생명이 제공되면서 30배, 60배, 100배의 복 받는 인생살이가 놀랍게 펼쳐질 것이다. 이제 다 함께 복창해 보자. <성령, 생명,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인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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