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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2-05-23 (월) 22:11 1년전 377  

본문)  요 17:11~19, 창 28:10-22, 롬 8:33-39

주제) “ 그 사랑에 힘입어 넉넉히 이기리라 ”


오늘은 부활절기 마지막인 일곱째 주일이다. 이때는 부활하신 주님이 이미 승천(昇天)하여 당신의 아버지 집인 본향(本鄕)으로 오르셨기에, 이 세상에는 그의 제자들과 그를 사랑하는 무리들만 함께 모여 지내고 있었다.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120여명의 무리들이 바로 그 당사자들이었다(행1:12-15참조). 이들은 그 누구 하나 흩어지지 아니하고, 모두가 하나 되어 함께 있었다.  


또한 부활절기의 마지막 때인 이 주간은, 낡고 생명 없는 종교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생명 구원의 종교를 탄생시키려는 해산 직전의 시기이다. 그러면 새로운 생명 공동체란 어떤 생명체인가? 바로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원의 주(主)로 섬기는 무리들이 모이는 교회(敎會)가 탄생함을 말한다. 유대교란 율법 종교의 껍질을 벗고, 그리스도교회란 새로운 인류 구원의 복음 공동체가 지구촌에 태어나는 대전환(轉換)의 순간이 도래했음을 말한다.  


이렇게 교회라는 새 생명 공동체가 태어나기 직전(直前)되는 시점에서, 성경은 이 새 생명체를 받게 될 인간들과 그것을 세상에 안겨주시려는 하나님, 그 양측(兩側)의 활동 내용을 함께 전한다.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 - 양측의 증언들을 이렇게 균형 있게 전하는 까닭은, 그만큼 교회를 통한 세상 구원의 일은 하나님으로서도 지고(至高)의 가치를 가진 중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그 생명체를 몸으로 받으려는 이들은 바로 예수의 제자들을 비롯한 120여명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그런 회동은 그들 스스로의 결의나 다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들에게 ‘머잖아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리니, 기다리라’는 약속과 함께 명령으로 주신 말씀 때문이었다(행1:4-5절). (이들에 대한 상세한 증언은 성령강림절기에 더욱 상술될 것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 공동체의 생산을 위하여 진정 어떤 노력과 작업을 하셨는가? 바로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이 그 점을 집중적으로 증언한다. 그래서 교회란 구원 공동체가 이 지구촌에 태어나게 된 과정을 입체적으로 설명해 주려고 한다. 곧 교회는 부름 받고 훈련 받은 인간들의 응답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원래의 기획자이시고 주도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아주 조밀하게 개입하여 성취되도록 추진하셔서 이룬 생명임을 밝힌 것이다.


복음서는 교회 공동체의 탄생을 위하여 성자 예수께서 교회의 씨앗이 될 그의 제자들을 얼마나 애지중지(愛之重之) 돌보시고 보전하시며 기도하셨는지를 뜨겁게 소개한다. 구약의 창세기 이야기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따라, 성부 하나님이 그의 후손이자 이스라엘의 머리가 될 야곱의 일생에 어떻게 개입하셔서 그의 큰 구상을 차질 없이 이루려 하셨는지를 소개한 내용이다. 

서신서인 로마서의 말씀은 택(擇)하신 자들을 향한 성부의 확고한 의지와 그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기도해 주시는 성자의 은혜와 돌보심이, 그의 성령을 통하여 그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인 성도들에게 모아졌기에, 그 사랑을 받고 사는 성도들은 결국 그 어떠한 세상과 악들에 대하여서도 넉넉히 이길 수밖에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를 저 거칠고 사악한 세상에 대하여도 결국은 이길 수밖에 없도록 승리할 밑판을 깔아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수고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복음서 / 요 17:11-19 /  “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당신의 제자들을 위한 성자이신 예수님의 기도(祈禱)는 매우 구체적이고 간절했다. 당신이 본래 하나님이시면서도 정작 성육하셔서 친히 인간(人間)되어 살아보시고 나니-, 그들 제자들이 인간으로서 너무나 허약하고 부족하며 순간적으로 배신하며 흩어지기 쉬한 존재인지를 잘 알게 되셨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약한 제자들을 남기고 이제 당신은 본향(本鄕)으로 떠나야 하셨기에, 주님의 기도에는 더욱 하늘 아버지의 개입과 도움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기도는 결코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제대로 세움으로서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깊이 구상(構想)해 오신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교회 공동체를 제대로 출범시키기 위함이었다. 소위 복(復)낙원을 위한 프로젝트의 성취를 위한 것이요, 교회 생명체를 생산하기 위한 산모(産母)의 수고를 주께서 그렇게 수행하셨던 것이다. 


만일 제자들이 부실(不實)하여 교회 생산이 좌절(挫折)되면 어찌되는가? 지금까지의 당신의 세상 오신 일이나 제자 훈련이나 십자가 속죄 사역과 부활하심 등의 세상 구원을 위한 모든 일들이 한갓 헛것으로 판가름 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주님의 심정은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주님에게 제자를 온전히 세우기 위한 기도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의 문제였다. 그러면 주님이 아버지에게 올리신 간구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어떤 것들이었나?  


1) 가장 시급한 점은 그들이 서로 하나 되는 일이었다(11절). 그것도 당신이 하늘 아버지와 하나 되어 지내오신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하나 되어야만 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정말 강한가? 모두가 서로 하나되어 있을 때이다. 언제가 가장 약한가? 서로 분열되어 갈라져 있을 때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비극이 바로 남북 분열에서 나온 것 아닌가! 가정의 힘은 부부가, 가족들 서로가 하나 되는 데에 있다. 교회의 힘도 성도들 모두가 서로 하나 될 때에 나온다.  


이것이 예수님이 바로 제자들의 하나됨을 보전해 달라고 간구하신 이유이다. 여러분들도 가족들이나 자녀위해 기도할 때, ‘공부 잘하게 해 달라, 돈 잘 벌게 해 달라’보다도, 더 우선해야할 기도는, 저들이 ‘서로 하나 되게 해 달라’, ‘우리 가족 서로 하나 되게 해 달라’여야 한다.  


2) 주님은 당신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잘 보전하셨음을 보고드렸다. 멸망의 자식인 가룟 유다 의외에는 모두 잘 지켜내셨음을 말씀드렸다(12-13절). 사실 제자들은 자기들끼리도 틈만 있으면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갈라지려 했으나, 그 때마다 주님은 ‘섬기는 자가 큰 자다’라는 하늘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말씀으로 교정해 주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주신 그런 아버지의 말씀만이 그들을 하나로 보전할 수 있었다고 보셨다(14절).  


3) 주님의 제자들을 향한 또 다른 관심은 당신이 떠난 세상에서 당신에게서 받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살고, 선포하며, 살아갈 제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복음과 예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계속적인 미움과 배척을 받으며 시달릴 것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이 점 역시 아버지의 적극적인 개입과 도우심으로, 당신의 제자들이 그런 세상에 무릎 꿇지 않고 끌려 다니는 등의 악(惡)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달라며 간곡하게 기도를 올리셨다(15절). 


4) 결국 주님은 제자들이 불의한 세상과 맞서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진리와 거룩에서 나와야 할 것으로 보시면서,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해달라고 간구하셨다(17절).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떠한 미움이나 박해의 힘보다도, 하늘이 준 진리와 거룩의 힘은 훨씬 더하여 끝내 승리를 안겨 주리라고 보셨기 때문이었다. 이런 논리, 즉 진리와 거룩의 힘으로 세상과 악마의 힘을 이긴다는 사실은, 당신 예수의 세상살이를 통하여 결국 입증(立證)될 것이어서, 그렇게 당신의 제자들에게까지도 적용되게 되도록 간구하셨던 것이다(18-19절 참조). 


이 점은 매우 주목할 승리의 방법이다. 많은 이들이 악과 불의의 위협에 겁을 먹고 두려워하며 타협해야 살아남을 것처럼 생각하며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힘들어도 그럴수록 진리와 거룩의 힘에 의지하며 맞서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한번 끌려가기 시작하면, 그 뒤는 완전한 어두움뿐이잖은가!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왜 제자들에게도 절대 필요한 요건인지를 헤아리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다. 진리와 거룩은 우리가 반드시 무장해야할 참된 힘이다. 


2. 구약 / 창 28:10-22 /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본문은 너무도 고단한 한 인생 야곱의 여정(旅程)과 그에 관심하며 그를 추스르고 붙들어 세우셔서 당신의 큰 뜻을 펼치시려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뜨거운 만남이 소개된 곳이다. 


청년 야곱의 하란 행(行)은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하는 도피였고 피난길이었다(창27장 참조). 비록 그곳은 외갓집이긴 하였으나 초행길이었고, 그가 그곳에서 과연 어떤 일을 만날 런지, 그리고 언제 어떤 모습으로 귀향하게 될 런지도 전혀 모르는 안개 속의 나들이였다. 따라서 그날 그가 취한 노숙(露宿)자의 밤은 더없이 고단하고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야곱의 막막한 고단함을 일거에 해소시키고 새로운 꿈과 희망으로 가득 채워 주면서, 그의 나아갈 발걸음을 활기차게 해 준 이가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여호와이셨다. 여호와께서 그 밤에 그를 찾아서 꿈과 약속을 채워주셨기 때문이었다. 그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안겨 주신 내용은 그의 20여년 하란에서의 험난한 세월들을 불평불만 없이 넉넉하게 극복해 갈 동력과 에너지가 되었다. 그러면 그가 받은 놀라운 영적 에너지가 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1) 일명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으로 그는 자신의 지상에서의 삶이 하늘의 하나님과 연결된 것임을 확인해 주신 일이 되었다(12절). 그 하나님은 낯선 분이 아니라 자신의 조부와 부친의 하나님이셨기에 더욱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13절,중)


2) 그 여호와가 야곱에게 주신 약속 또한 조부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언약(言約)에 대한 재확인이었고, 그것도 그 언약이 자신에게로 지정되고 상속(相續)될 것임을 약속하신 것이어서, 야곱의 기쁨과 위로는 충만할 수밖에 없었다(13,하-14절). 그리고 여호와는 그 때 야곱이 듣고 싶어 하는 최고의 약속도 선물하셨다. 곧 ‘언제 어디서나 늘 같이 있겠다’는 임마누엘(Immanuel)의 약속과 함께, 책임지고 귀향(歸鄕)하게 하시리라는 약속과 그 모든 일이 성취될 때까지도 그를 떠나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까지 주셨기 때문이었다(15절). 


3) 그러니 이러한 완벽한 약속을 받은 그에게 또 무슨 염려와 두려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믿고 또 믿으면 되는 일만 남게 된 것이다. 그 바람에 잠에서 깬 야곱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보고 듣고 바라며 생각하며 사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받기 위해서 칭얼대기만 하는 인물일 수는 없었다. 대신 그 약속과 일들이 자신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도록, 책임 있는 응답을 하며 살아가야 될 자신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4) 그래서 그는 우선 그곳을 성별(聖別)하였다. 하나님을 뵙게 된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는 점에서, ‘벧엘(Bethel)’이라 명명(命名)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그런 언약들이 자신에게서 성취되리라는 믿음에서, 자신도 거저 받지 않고 반드시 응답할 세 가지 서원(誓願)을 드렸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격적이며 하나님 중심으로 정립한 것이다. 첫째는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신다. 둘째는 그가 세운 돌기둥이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될 것이다. 셋째는 주신 모든 것의 십일조(十一條)를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18-22절 참조).  


이 야곱의 여호와와의 서원들은 천지의 전능자와의 관계 강화책으로 연결되면서, 그때부터 지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지표가 되고 지침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3. 서신서 / 롬 8:33-39 / “ 모든 일에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리라 ”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악에게 반드시 승리(勝利)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감격해 하면서, 승리의 함성(喊聲)을 터뜨린다. 그러면 그가 본 그리스도인들의 승리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가 말한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연유를 찾게 된다. 그가 말한 분석(分析)들 몇 가지를 보자.    


1) 그리스도인들은 최후의 재판장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택(擇)하시고 의(義)롭다고 인정하신 대상들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그의 판단에 이의를 걸고 송사(訟事)할 수 없다(33절).  


2)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성자 예수님께서 친히 변호(辯護)해 주시고 기도(祈禱)까지 해 주시는 존재들이다(34절, 요17:11-19 참조). 그러니 그 누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정죄할 수 있겠는가-?  


3)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진리와 능력에 힘입어, 예수의 삶과 사랑으로 세상의 악과 불의에 맞서 싸우면서도 모든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등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며 사는 무리들이다. 그렇다면 그런 주님과의 사랑과 거룩성으로 결속된 이들을 누가 감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있으랴? (35절, 요17;15-19참조). 이겨도 넉넉히 이길 것이다.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주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o 우리에게 복음과 교회를 주셔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영접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특히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셔서 먼저 당신의 아들의 몸된 교회로 보내셔서 말씀으로 훈련받고 영생을 누릴 제자가 되게 하시고, 하늘 백성이 되어 살도록 돌보시고 보전하신 하나님이심을 찬양하자. 그것도 부족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셔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하시고, 진리와 거룩으로 무장시키셔서 악한 세상에 대하여서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싸워 승리할 능력까지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하자. 이런 우리를 누가 송사하고 정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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