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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어버이주일

관리자 2022-05-03 (화) 22:08 1년전 299  

본문)  요 5:19~29, 사25:1-9, 고후4:7-18

주제) “ 보배를 질그릇에 담고 사는 사람들 ”


부활절 넷째 주일이다. 요즈음은 하루가 다르게 그간의 앙상했던 나무 가지들이 사라진다. 대신 모든 나무들은 초록의 풍성한 잎들로 옷 입고, 자기 나름의 꽃과 향기로 고유한 자태와 자기들만의 독자성을 뽐내면서도, 이웃의 다른 나무들과도 잘 어울리면서 불어오는 바람에 멋진 춤과 아름다운 노래도 한다. 게다가 자신의 몸으로 신선한 산소도 뿜어내면서, 피곤에 지친 우리 인간들을 그의 품에 거하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실로 인간에겐 최고의 벗들이다!


이렇듯 자연의 생태계를 이룬 나무의 모양과 그 특성을 보면, 바로 이 나무들이 마치 인간의 탄생과 성장과 번영과 퇴락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投影)해 주는 생명체들이다는 생각이 든다. 저들은 춘하추동의 사계절이란 일 년이란 틀 속에서 자신의 변화의 모습을 압축해서 드러내지만, 우리 인간들은 아기로, 소년으로, 청장년으로, 그리고 노인으로 한 시대를 살다가 가는 존재라는 시간적 차이에서만 다를 뿐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도 보인다. 바로 그들은 떠나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후대를 남기고 떠나는 존재라는 점이다. 바로 씨앗을 통해서 자신과 자신의 정체성을 후대에 남기고 떠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떨어져 죽음을 밑거름으로 삼아, 자신과 닮은 또 다른 생명체들의 부활(復活)과 생성(生成)의 기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과도 매우 흡사하다. 


마침 오늘은 한국교회가 어버이주일로도 지킨다. 어버이는 인간은 인간이로되, 단순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전대(前代)와 후대(後代)의 중간에서, 역사와 가계를 이어주는 연결자로서의 소임을 맡은 존재이다. 사실 어버이 없이 존재하는 인간은 없잖은가! 특히 어버이의 소중함은 그 안에 있는 신적(-아가패적 사랑, 神的) 사랑 때문이다. 모든 것을 주고도 더 못주어서 아픔을 느끼는 그런 사랑 말이다. 그 사랑이 있어서 인간도 사회도 인류도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이런 인간의 생명 역사를 유지하고 보전하시려고 그 핵심 요원으로 부모인 어버이를 세우신 분은, 다름 아닌 세상 만물의 창조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첫 사람 아담과 이브를 흙으로 만드실 때,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과 함께 그들을 닮은 자식을 낳는 부모(父母)가 되는 기능도 부여하셨다(창1:27-28,4:1,시127:3참조). 그를 위해 창조주는 그들 부모가 될 이들에게 당신의 아가패적인 사랑의 속성까지도 부어 주셨다.


그 까닭은 이 아가패적 사랑이 있어야, 사람이 자기가 낳은 자식을 끝까지 품고 양육하며 키워낼 에너지가 나오고, 인간 역사의 흐름까지도 단절이 아닌 지속으로 견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곧 오직 이런 사랑의 힘이 세대에서 세대로 흐르게 하여, 이 역사가 어떤 인위적 충격과 시련을 맞더라도, 생명들이 꾸준히 생산되고 역사도 지속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창조주의 아가페적 사랑은 우리 예수의 십자가 사랑으로 그 날개를 온 세상에로 퍼졌다.  


그것은 혈육에만 머무는 사랑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향한 사랑으로, 뺏기고 고통하는 이웃을 돌보는 사랑으로, 심지어 원수도 용서하는 사랑으로, 당신을 배신한 자들을 품는 사랑으로도, 세상 모든 죄인들을 감싸주는 사랑으로도 번져나갔다. 그러면서 십자가에 속죄(贖罪)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사랑으로 승화시키면서, 부활과 영생으로 이어지는 원동력으로 자리하였다. 사랑이 그 어떠한 세상의 법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윤리와 구원으로 자리하였다.


그래서 예수와 그의 십자가의 사랑까지를 받아서 살려는 자는 누구나, 부모 사랑의 보편적이고 육신적 차원을 넘어설 참 사랑을 자신의 혈육에게는 물론 이웃과 온 생명체에게까지도 펼치는 선행(善行)을 실천할 수 있게 되어서,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게 되었다(요5:29절).  


그러기에 세상의 모든 부모 된 이들은 알아야 한다. 자신 안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가패적인 사랑이 들어 있어서, 지금처럼 자식들을 무한히 사랑하며 양육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인지해야 한다. 동시에 그 사랑이 성격상 본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과도 연계되어 있음도 깨달아서, 자신의 자식 사랑이 비(非)혈육인 이웃 사랑에게까지도 확산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랑의 열매로서의 부활 생명도 얻게 될 것이다.


마침 우리는 오늘 본문들에서 예수님의 아버지 사랑에서 얻어낸 열매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의 부활은 당신의 능력 과시 차원이 아니라, 그를 믿고 사랑하는 모든 자들을 심판 없이 영생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심에 있다. 구약의 예언서는 주를 높이고 찬송하며 사는 자들에게 열어주실 하늘 아버지의 영생의 세계가 어떤 지를 폭넓게 소개한다. 서신서는 그런 부활신앙을 보유한 이들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 지에 대한 특별한 증표들을 제시한다.  


1. 복음서 / 요5:19-20 /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 원하는 자를 살린다”


성자 예수께서는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자신의 부활 능력의 원천(源泉)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이 행하시는 모든 것을 다 아들이신 당신에게 보이시고 또 ‘더 큰 일’까지도 보여주신 이유 때문이라고 하셨다(19-20절). 여기서 ‘더 큰 일’이란,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이요 심판 없이도 구원을 받게 하시는 일이었다(21-22절). 


이런 초월적 권능을 아들에게 전수하신 하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세상 만민이 당신을 공경하듯이, 아들 예수에게도 공경하게 하시려 함에 있었다(23절). 따라서 이런 아버지의 뜻과 능력을 전수받으신 예수께서는 온 세상 만민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24-27절) 


1) 이 내용에서 가장 두드러진 내용은 아버지의 압도적인 아들을 향한 사랑과 신뢰에 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완벽한 의존과 복종에도 있다. 아들은 고백한다.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며, 또 아버지에게서 본대로 행하므로서 나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19절).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운 모습이다. 어찌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완벽하게 하나일 수 있을까? 우리 인간들에게도 진정 가능한 일인가? 


사실 이런 문제는 이 어버이주일에 가장 관심 가져야할 대목이기도 하다. 이 부자간의 완벽한 합일(合一) 때문에, 하늘 아버지는 땅의 아들을 추호도 의심 없이 완벽하게 신뢰하셔서 당신의 모든 깊은 것들을 그 아들에게 다 보여주며 믿고 맡기셨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무한히 사랑하며 아버지의 뜻에 완전한 복종으로 당신을 드릴 수 있었다. 이런 절대적인 부자 관계 때문에,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이 세상 구원을 위한 당신의 일들을 직접 펼치실 수 있었다. 

   

2)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여주시고, 또 믿고 위탁하신 핵심적 권세는 무엇이었나? 바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심이요, 살아난 이들에 대한 심판권까지 위임하신 일이었다(20-22절).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는 점이다. 이 점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같은 피조물로서의 우리는 죽으면 끝으로 보고 산다. 하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는 산 자나 죽은 자 모두가 당신의 소관(所管)안에 들어 있다. 그러기에 당신의 판단과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은 의로운 판단을 내리셔서, 죽은 자(죽음에 빠진 자-11:23-26참조)도 살리시고 또 당신이 원치 아니하는 자는 버리기도 하신다. 심판의 전권자이기 때문이다. 

    

3) 아들에 대한 전적인 신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당신의 아들을 온전히 믿고 섬기며 사랑하는 자들을 크게 선대하신다. 아들을 향한 공경을 당신에 대한 것으로 받으신다! 동시에 아들을 버리고 외면하는 자들에게도 당신을 향한 것으로도 간주하신다. 그러기에 모든 피조물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그의 아들로 오신 예수의 말씀을 전심으로 경청하고 믿음으로 대응해야만 한다. 그것이 살 길이요 종국에는 심판 없이도 영생을 취하게 될 길이다(24절).  


4) 심판(審判)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가 오시기 전, 무덤에 먼저 들어갔다고 해서 면하지 못하는 것이 심판이다. 화장(火葬) 처리되었다고 해서 그의 존재가 조물주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다. 머잖아 재림(再臨)의 주가 오셔서 그를 부르시면, 누구든 일어나 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8절). 최종적 심판의 지침(指針)도 분명하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29절). 사정이 이러하기에, 우리의 소원은 오직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자가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21절 참조) 


2. 예언서/ 사25:1-9/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연회를 베푸시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다”


그러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만한 자를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참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그런 여호와의 진면모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아주 오래 전에 아래와 같이 상세히 소개되었다. 


1) 세상 강대국들이 영원히 존재하지 못하게 하시고, 결국은 당신에게 굴복하게 하신다(2-3절). 모든 시대에는 나름대로의 제국이나 강대국이 존재하였지만, 그들 모두는 다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이 사라지곤 했다. 이런 흐름은 오직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의 솜씨이다. 지금도 세상은 강대국의 힘자랑이 한창이지만, 하나님의 심판 역시 그들을 겨냥하는 것도 사실이다


2)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 치하에서 고통하고 신음하던 약자(弱者)들과는 항상 함께 하시고 지켜주셨던 분이시다. 빈궁한 자와 환난 당한 자의 요새(要塞)로, 피난처로, 그늘이 되셔서 그들로 하여금 폭행자들의 횡포를 극복하게 하셨다. 폭양을 제함과 가림으로 함께 하셨고, 소란을 잠재우셨으며, 포악자이 승리의 노래를 못 부르게 하셨다(4-5절).    


3) 당신의 나라에는 택하신 무리들을 위한 위로와 기쁨의 큰 잔치판을 마련해 두셨다(6-8절). 

그 연회(宴會)의 메뉴는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 오래 저장된 포도주 이외에도, 매우 특별한 메뉴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것은 새 시대와 새 생명이 완전히 도래(到來)했음을 확인해 주신 증표로서, 그 동안 지상에서 널리 활용해온 가리개(장례식용)와 열방들의 낯을 덮었던 덮개(수의)를 제거하시고, 모든 인간에게 최후의 원수로 군림했던 사망(死亡)까지도 영원히 멸하시는 일이었다. 


그 순간은 그 연회 행사에 참여한 모든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영원한 위로의 시간이었고, 오랜 세월 쏟아왔던 눈물과 수치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게 되는 때이기도 했다(6-8절, 고전15:26,계21:4참조). 하나님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 곳이었다. 


4) 이 하늘 행사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이런 환상적인 하늘 구원 잔치에 참여한 자들의 감사와 찬양과 함께, 다음과 같은 감격의 고백이 있었다(1-5, 9절 참조).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들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3. 서신서 / 고후4:7-18 /  “ 겉 사람에서 속사람 중심으로, 잠깐 중심에서 영원 중심으로 ”


바울은 부활 신앙을 보유한 그리스도인들을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이들’로 규정한다(7절). 이제 아래의 내용을 통하여 나의 부활 신앙인으로서의 현재의 내 모습을 재점검 해보자.   


1) 보배는 부활과 영생을 뜻하고, 질그릇은 연약하여 깨지기 쉬한 내 육체(몸)를 말한다. 우리 안에 담겨진 불변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하여, 성도들의 몸가짐 마음가짐은 특별해야 하고 끝까지 잘 보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보배를 잘만 유지. 보전하면-, 그는 결코 욱여쌈도 당하지 않고 낙심도 없으며 버림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도 않는다(8-9절).   


2) 이는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사는 무리임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의 죽을 육체(몸)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19-11절). 이는 부활생명을 몸으로 전하는 선교적(宣敎的)생명으로 살게 되었음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그 바람에 전하고 보여주는 자안에는 죽음이 머물고 있지만, 그 수혜와 혜택을 받게 되는 자 안에는 생명이 채워진다(12절). 

      

3) 우리들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셔서, 종국에는 모두가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실 줄 아는 믿음에서 산다(14절).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믿는 자로서 낙심은 없다. 겉 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것이기에 그렇다(16절). 잠시 받는 환난은 가볍지 만, 영원한 영광은 지극히 크고 무겁기 때문이다(17절). 따라서 우리의 시선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데에 있다. 그것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다(18절).  


o 우리는 이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부모과 자식의 관계를 배우고 익히자. 그리고 어버이인 우리 안에 조물주께서 부어주신 아가패적 사랑을 주목하면서, 그 사랑이 결코 훼손되지 않고 올바르게 활용되도록 힘쓰자. 건강한 가정과 가계는 건강한 부모와 자식관계에서 유지되고 발전된다. 아울러 그 사랑이 부활의 주의 십자가 사랑에 접하여서, 이웃 사랑과 나라 사랑에로까지 확대되어 증거 되도록 기도하자. 부활 신앙도 우리의 사랑으로 입증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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