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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6)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종려주일/ 씨뿌림주일

관리자 2022-04-05 (화) 23:40 1년전 386  

본문) 요 12:12~19, 슥 9:9-12, 빌 2:1-11



  어느 덧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 되었다. 우리 주님께서 최종 선교 여행의 마지막 목표 지점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당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 일정에 들어가신다. 제자들로부터


의 배신(背信)과 이별의 만찬(晩餐), 견딜힘을 구하신 겟세마내에서의 기도(祈禱), 체포된 후의 


고문(拷問)과 가시관을 쓰는 아픔, 빌라도 선고 후 당신의 십자가를 매고 홀로 골고다로 향하


셔서 그곳에 겪으신 고난(苦難)과 죽음, 그리고 매장(埋葬)되기까지의 한 주간이 이어진다. 




그러기에 세계교회는 이 주간을 주님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로 지키며, 그의 고난과 죽


음을 묵상하는 한 주간으로 보낸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런 예루살렘에서의 최후의 일정들을 


온전히 소화시킴으로서,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와 고난으로 죽게 되실 당신이 비로소 영광(榮


光)을 받게 되었다고 미리 예고하셨지만-(요13:31 참조), 그로 인하여 죄인이었던 우리 인류는 


그에게 ‘영원한 사랑의 빚을 지게 되는-, 실로 운명(運命)의 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때는 마침 우리 국가적으로는 지난 8년 전에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서 304명의 안산 고교 


학생들이 허망하게 수장(水葬)당했던 참사의 그 때를 맞이한다. 그날의 충격을 누가 잊을 수 


있을까! 다만 아직도 제대로 된 원인 규명이 되지 못한 체 맞이하게 되어서 더욱 가슴이 아프


다. 앞으로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문책은 필히 있어야 하겠지만, 국가의 국민보호란 책무가 더


욱 깊이 각인되어 다시는 이런 참사가 재발되지 않도록 다짐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겠다.  




이런 중에 우리 교단은 오늘 주일을 씨뿌림주일로 맞이한다. 씨앗은 우리 인간에게 생명과 풍


요를 안겨주는 열쇠요 문이다. 하나님의 생명 구원도 씨앗을 통하여 시작되고 확산되어 간다. 


씨앗이 땅에 뿌려지면서, 농부는 한 해 농사의 부픈 꿈을 구체화시켜 간다. 씨앗은 곡물들을 


제공한다. 인류에게 식량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때마침 세계의 곡창(穀倉)지대로 알려진 우크


라이나의 전쟁바람으로 세계의 식량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다. 식량과 평화가 하나란 생각이다    




우리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대속(代贖)적 사역을 감당하실 당신 자신을 ‘한 알의 밀(씨앗)’로 규


정하신 바가 있다(요12:24절 참조). 씨는 그 열매들로 자신이 누구임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예


수께서 자신을 통하여 무슨 열매들을 겨냥하신 것일까? 그의 오심은 분명히 이스라엘 하나님


의 백성들의 오랜 기다림과 고대 속에서 구세주로 오신 것인데, 그렇다면 그가 원하신 열매들


은 대체 무슨 열매였을까? 우리는 오늘의 세 본문들 속에서 그 답변을 얻게 된다.    




한 알의 밀알로 오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심겨지고 또 열매로 되살아나서 번성하게 하고자 하


신 일은 바로 생명(生命)과 평화(平和)였다. 이런 모습은 세상의 열망과는 아주 다르다. 세상


은 영웅호걸의 등장으로 온 세상을 힘으로 제압하고 모두에게 군림하는 강자의 등장을 추구한


다. 하지만 예수가 접근하신 곳들은 저 베들레헴 말구유였고, 갈릴리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일터였으며, 당시 세상과 종교로부터 소외당하고 차별당해서 밀려나 살던 작은 자들속이었다.  




온 세상과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분 치고는 정말 낯선(?) 면모만을 보여주셨을 뿐이다. 그의 삶


의 면모가 어땠는가? 그의 이 세상 삶은 정말 가난했고, 무주택자였으며, 떠돌이였고, 머리를 


둘 곳이 없는 나그네요 방랑자의 모습이었다. 오늘이 종려주일인데, 명색이 왕으로 오신다는 


분의 행세(行勢)는 그가 어떤 인물로 사셨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결국 그는 이 세상에서 재산, 소유, 가족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자기 것이 없었다. 완전 무소유


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유일한 소유 욕심이 하나 있으셨다. 바로 당신의 뜻과 생명과 가치관


을 공유할 사람들만은 힘써 찾으셨고 챙기시며 만들고 당신의 것들로 소유하셨을 뿐이다. 그


것도 영원한 소유로 말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당신의 그 사람들(제자들)을 통하여 온 세상을  


당신의 품에 깊이 품으셨다. 그래서 온 세상 만민의 구세주(救世主)가 되신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하늘 씨앗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그의 제자 된 우리들이, 어떤 존재로 부름을 받았는지를 재확인하면서 우리


의 남은 삶도 보다 더 그 분을 닮은 삶이 되도록 결단하는 시간이 되게 해야 하겠다.  




1. 복음서 / 요 12:12-19 /  “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 ”




그 날 그 때의 예루살렘 분위기는 범상치 않았다. 이미 전국적으로 백성들로부터 특별한 존재


로-, 아니 고대하던 그들의 메시야로 인정받게 된 나사렛 예수가 과연 이번 유월절 제사에 참


여하려고 도성(都城)에 입성하실 것인지가 최대의 이슈가 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국민적 희망이 된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예수께서 죽은 자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


어 살려내신 사건 때문이었다(요12:17-18). 이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던 큰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당당히 입성에 임하셨다. 그것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시려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와 함께 이루실 구원의 계획에 부응하기 위함이었다. 입성은 그에게 선택의 문제


가 아니라 필연(必然)이었다. 따라서 그의 입성을 확인한 무리들의 반응은 뜨겁게 고조되었다.   




1) 명절은 민족 최대 명절이요 해방절인 유월절로서, 그곳엔 이미 전국적으로 모여든 순래객


들로 들끓고 있었다. 그 해 최고의 관심사는 역시 ‘예수가 입성하실건가, 입성하면 언제인가’


라는 점에 집중되어 있었다(12절). 그런 중에 오신다는 것이 확인이 되자, 숱한 무리들이 입성


하시는 예수를 환영하는 일에 돌입하였다. 그 일은 이미 군중들의 일이 되어 있었다.   




2) 그들의 환영과 영접 행사는 다채로웠다. 첫째는 종려나무 가지들을 가지고 연호하면서 흔


들었다(13,상). 종려나무 가지로 환영하는 일은 전쟁에서의 승리자에게 백성들이 영광을 돌리


는 행위였고, 쟁취된 승리를 선포하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오랜 기간 강대국들의 


치하에서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을 면치 못한 유대인들로서의 모처럼 갖게 된 쾌감만족의 시간


이었다. ‘우리에게도 이제는 구원자가 나타났다’고 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그러면 그들은 과연 예수를 누구로 간주했던 것일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


엘의 왕’으로 보고 있었다(13절,하). 이는 그들이 예수를 갑자기 등장한 스타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여호와께서 보내시겠다고 예고하신 바로 그 그리스도로 보았고, 그들은 이제는 강자의 


속박과 굴레에서 신음하는 자기들을 해방시킬 구주요 왕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예수의 메시아 사역 기간에도 백성들은 몇 차례 예수를 그들의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


임도 있었다(요6:15참조). 하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철저히 외면하며 그 기대를 무산시켰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그들의 외침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이’라는 외침을 묵묵히 수용


하셨고, 나중에 빌라도의 심문 중에서도 왕이란 지위 문제를 시인하신 바가 있었다. 비록 진


리(眞理)의 왕이란 조건이 붙기는 했어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왕이심을 밝히셨다(요18:37). 




4) 본문에서의 예수님이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신 행동은 왕 되신 메시야의 면모를 보이신 


장면이다. 일찍이 스가랴와 스바냐 선지자들이 오실 왕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것을 예고하


였는데, 예수님의 그 행동은 그 예고를 확증해 주신 것이었다(슥9:9-10, 습3:14-17참조). 나귀 


새끼를 타시는 장면은 분명히 세상 임금들과는 아주 다른 임금이심을 확증해주신 것이다. 무


력 행사를 취하는 왕이 아니라 세상 만민에게는 평화(平和)를 안겨줄 분임을 계시하신 것이다. 




5) 제자들도 이런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행보의 의미를 처음엔 알지 못했다. 나중에 고


난당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의 영광을 취하게 되시면서 성령께서 일깨워주신 이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일이었다(16절). 그 때는 백성들의 예수의 열망만이 가득했고, 바리새인들은 서로에게 


‘너희 하는 일이 쓸 테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른다’라며(19절) 그 예수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하던 기세(氣勢)에 그들 전체도 주눅 들어 있었던 실정이었다.    




2. 구약 / 슥9:8-12 / “내가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인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스가랴 예언자가 활동하던 주전 4세기는 페르시아 제국이 시들고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의 제


국의 위협이 전 세계에 군림하면서 전쟁과 영웅의 힘들이 압도하던 시대였다. 그런 강대강의 


제국들의 흐름의 틈새에서 신음하던 약소국들, 그 중의 하나인 팔레스틴의 유대국 역시 기를 


펴지 못한 체, 오직 자신의 신인 여호와의 크신 자비와 보호를 호소하며 지내고 있었다. 




이런 곤고할 때, 선지자 스가랴가 여호와로부터 매우 중요한 기쁘고 놀라운 계시를 받았다. 


그것은 머잖아 새로운 왕(王)이 그들에게 오실 것이라는 예고였다! 다만 오실 왕의 존재와 역


할은 기존의 세상의 왕들과는 전혀 차원이 달랐다. 그는 제국들과 강대국의 힘의 과시에 맞서


서 전쟁하며 싸워 이길 왕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상의 그런 병거와 말(싸움)을 끊어 


내고, 전쟁(戰爭)의 활도 끊어내는 진정한 힘을 드러내실 분이라는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무슨 힘으로 그런 온 세상의 힘들을 중단시킬 것인가? 바로 힘 중의 힘인 평


화(平和-peace)였다! 그 평화로 온 세상을 진정시키고 지배하게 할 메시야가 그들에게로 오실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놀랍고 신비한 힘을 가지신 분이 누군가? 바로 나사


렛 예수이시다! 그렇다. 이 예고를 바탕으로 오늘 복음서의 예수께서는 평화의 주로 그 실체


를 생생히 보이셨다. 그러면서 당신이 평화의 주요 왕이심을 행동으로 보이기 시작하셨다.      




1) 유대와 예루살렘 백성에게 소개된 그들의 왕은 이런 분이었다. 곧 그는 공의(just)로우시며 


구원(salvation)을 베푸시며 겸손(lowly)하여서 나귀를 타시는데, 그것도 새끼 나귀이다(9절)




☞ 예수님의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은 바로 그가 이 예언이 말한 주인공임


을 입증하신 것이었다. 그는 정의(正義)로우신 데다 구원(救援)을 이루시고 겸손(謙遜)하기까지 


하심은 진리(眞理-참)의 세계가 바로 그의 것임도 입증한 것이기도 하다(요18:37참조). 




2) 그가 수행하실 역할은 놀랍고도 기이하다. 그가 세상과 제국의 군사적 무력의 힘과 그들이 


저지른 전쟁들을 끊어내실 것인데, 그런 그의 힘은 바로 그가 드러내신 화평(평화)의 힘 때문


이다. 그의 평화 통치는 온 세상에까지 미친다(10절). 그의 평화의 힘은 그가 십자가에서 세상 


모든 죄인들의 죄악과 저주를 끊고자 죄인들을 위하여 흘리신 피로 인함이었다(11절.상). 그 


능력은 물 없는 구덩이에 갇힌 자들을 놓이게 한다(창37:24,렘38:6,행16:26 참조). 




그에게는 오직 사랑과 말씀으로 평화를 이루실 권위가 있다(사2:4,11:10,미5:5참조). 그에게는 


전쟁이 더 이상 정치적 수단이 되지 못한다. 이런 예언의 실천은 주후 313년 로마황제 콘스탄


틴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면서 매우 구체화되면서 실현되기 시작했다. 비록 오


늘날에도 전쟁의 기운이 세계 일각에서는 여전하지만, 그러나 더 큰 전쟁을 억제하는 평화의 


힘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리신 선교 명령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다(마28:18-20 참조).      




3. 서신서 / 빌 2:1-11 /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섬기는 신앙 집단이다. 그러기에 그의 모든 백


성된 성도들은 마땅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교회의 현실은 


꼭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거듭나지 못하여 제일 아담의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바울이 개척한 빌립보 교회의 내부 사정도 비슷했다. 




교우들 대부분이 복음과 교회를 위해 정성과 사랑의 봉사를 감당했지만, 그 중 일부 교우들은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드러내면서 불협화음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접한 바울은 서


신을 통하여, 주의 마음을 품어 서로 하나 되어 살도록 권고했다. 그 주요내용을 살펴본다. 




1) 성도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들인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이 주신 교제나 긍휼로, 같


은 마음과 같은 사랑 안에서, 서로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자기 보다 낫게 여기며(갈5:26,


롬12:10), 각각 자기 일을 돌봄과 같이 타인의 일도 돌보아야 한다.     




2)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5절). 주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


시지만 하나님과 동등(同等)됨을 스스로 거부하시고, 자신에게는 종의 형체를 입히셔서 사람들


과 같이 되셨고(사53:3,요1:14,고후8:9참조), 최후는 자기를 낮추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


하셨다(7-9절, 눅14:11,히12:2,5:8참조). 주님은 이런 겸손의 모습으로 평화의 주가 되셨다.   




3)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그에게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


늘과 땅과 지하의 있는 모든 자들이 그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요5:23,롬14:11참


조), 입으로는 예수를 주(主)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9-11절, 행2:21참조)




o 평화의 주이신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자. 생명과 평화의 씨앗되어 오신 주님의 겸손의 옷을 


입고 살아가자. 주님은 겸손과 온유로 자신을 낮추어 살면서 세상에 사랑과 평화와 구원의 길


을 마련해 주시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만민의 구주로 높여 주심을 받게 되신 분이다. 우리도 


당연히 주님의 그 마음을 품고, 그의 행동을 본받아 살아야 하겠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높


여 주시는 삶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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