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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제주4.3참사 기념주일

관리자 2022-03-30 (수) 09:55 1년전 286  

본문) 요 13:31~35, 신 6:1-15, 요일 3:11-24 


사순절 다섯째 주일이다. 때는 마침 4월에 접어 들어서 완연한 봄기운이 온 누리에 흘러넘친

다. 천지의 분위기도 바뀌고 색(色)깔도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밑에서 올라오는 새 생명의 돋

아남과 솟구침의 힘이 엄청나다. 지난겨울 추위를 누런 낙엽의 옷을 입은 체 꿋꿋하게 버텨왔

던 갈대들도 밑과 속에서 밀고 나오는 새 순과 싹의 힘 앞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체, 속절

없이 쓰러지는 것이 눈이 띈다. 대지의 세대교체라고 할까! 어린 생명들의 힘을 새삼 느낀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그 어떤 새 생명들도 독자적인 것은 없고, 모두가 그 뿌리

와 근원에서 솟아나온 존재라는 점이다. ‘조상 없는 후손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죽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가 낳은 후손들 속에 그의 염색체(染色體)와 기질과 틀과 경

향들이 ‘닮음’의 모습으로 꾸준히 상속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좋은 DNA’를 후대에 

넘겨주는 일은 선대(先代)로서의 막중한 소임이 된다. 그러면 좋은 DNA를 어떻게 남겨 줄까?

     

방법은 있다. 우리가 거듭나면 된다. 이는 인간의 단순한 의지와 각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

라, 하늘의 신령한 선물인 물(세례)과 성령에 의하여 되는 것이다(요3:5). 그래서 육신의 조상

들로부터 이양(移讓) 받았던 모든 가인(Cain)적인 것들(창4:3-)인 것, 곧 미움과 혐오와 질시

의 배척의 마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이자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서 주신 사랑과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주입(注入)받으면 그게 가능해진다(마11:28-30 참조). 


오늘은 제주4.3참사 기념주일이다. 이는 동족이 동족을 대학살했던 불행한 일을 잊지 말고,  

더는 우리에게서 재현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이다. 이런 동족 대살상의 가장 치명적인 

요인은 무엇이었나? 해방 후 남북 간에 형성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란 이념들의 대립과 갈등

이 첨예하게 부딪친 데 있었다. 그 바람에 그곳 아름다운 섬 제주는 수만 명의 양민과 이웃들

을 쳐죽여서 피바다를 이룬 곳이 되었다. 지금도 저 아름다운 섬 제주에는 한(恨)이 서려있다.


특히 그곳 중산간 중심의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소탕한 이들은 서북청년 단원들이었

는데, 그들 대부분은 남하(南下)했던 기독교인들이었다고 한다. 이는 한국기독교회로서는 너무

도 부끄러운 흑(黑)역사이다! 더 큰 문제는 그때의 그런 멸공(滅共)사상에 포로 된 기독교인들

의 행동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들은 그 후 6.25 민족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힘을 얻더니, 8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오히려 신앙화(信仰化) 되어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특히 매 선거 때에는 이런 ‘반공신앙’이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민주 진영의 정적들을 공산주

의자요 빨갱이도 매도하고 있다. 심지어 5.18광주사태까지도 북한군의 소행이라면서 빨갱이 

개입론으로 폭력진압의 본질을 흐리더니, 최근에는 문대통령과 그의 정부를 종북세력이네, 빨

갱이들이네 하면서, 그들을 타도하자며 전광훈과 같은 극우 기독교인들이 국민들과 교회들을 

선동해오고 있다. 이번 20대 당선자도 그런 이념 공세에 계속 편승하고 합세했었다. 


알고 보면 다 허풍이고 가짜 뉴스인데도, 여전히 지금까지 ‘이념 팔이’가 통하고 있다는 것이 

통탄(痛歎)스럽다. 그것도 전통 기독교 안에서 이런 이념 장사가 더욱 활기차다는 점이다. 이

제 선거가 끝났고 자기 진영이 승리했으니 이 문제는 한 동안 침묵할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 

선거에도 전세가 불리해지면, 극우들은 또 다시 이 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다. 더러운 술책이

며, 치졸한 국론분열의 도구이다. 이래서 언제 우리가 건강한 나라가 될 것인가? 도대체 언제

까지 이래야 되겠는가? 특히 한국의 보수교회들은 언제 이 망령의 늪에서 벗어나겠는가? 

        

이래서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요원하다. 교회의 건강한 성장이나 성숙한 교회에 대한 기

대도 어렵다. 대체 지금의 한국교회 어느 교파가 종북이고 친북이란 말인가? 다만 남북의 평

화와 화해란 큰 그림을 실현하기 위하여, 복음과 힘을 가진 우리가 그들 북쪽과 더욱 교류하

면서 친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런데 잘못된 정치세력과의 연대해온 보수 측은 ‘반공 신앙을 

내세워, 주님께서 주신 ‘내 원수를 사랑하라’(마5:44)라는 최고의 계명을 완전히 외면해 왔다. 

  

생각해 보라. 원수 사랑이라는 지상 계명을 외면하는 데, 우리의 신앙이 건강해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원수사랑은 본래 하나님과의 원수였던 우리를 구하시려고 예수께서 당신의 목숨

을 버리시면서 창안해내신 지엄한 계명(誡命)이었다. 그의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의 빚’을 영

원히 안게 된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의 원수 사랑의 명령

을 외면하고 살 수 있겠는가! 이 사랑 외면하고 그의 축복에만 매달리는 것은 뻔뻔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마치 원수 같은 저 북한, 사마리아와 같은 북한을 주의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우

리 중에는 ‘부담되는 그들을 왜 우리가 품어야 되느냐’고 항변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바로 

그들이 우리의 형제이면서도 그러나 사랑을 받아야할 원수들이기에, 우리 한국교회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다. 마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적대국인 사마리아를 찾아들어간 그런 행보로 우

리는 그들을 찾아야 한다. 강도만난 이웃을 대하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세로 대해야 한다. 


오늘은 주현절 다섯째 주일이다. 마침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이 오늘 세 본문의 

핵심이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알곡이며 생명에 해당한다. 이제 우

리는 이 사랑의 계명에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 이 말씀을 듣고 무심히 흘려서는 안 된다. 한

국교회가 주님이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정직하고 온전히 응답하지 못하면, 결국 죽정

이 집단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 살아 있는 우리가 되기 위하여 다시 주의 말씀에 들어가자.  


1. 복음서 / 요 13:31-35 /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제자인 가룟 유다가 배신의 떡을 받은 후 바깥으로 나아가자, 당신의 때가 임박하셨음을 아신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집중하셨다. 주님은 우선 그 때를 바로 당신과 당신을 보내신 하늘 

아버지 모두가 영광(榮光)을 받으실 때로 보신 것이다(31-32절, 17:1,4-5참조). 십자가로 인한 

죽음의 멍에를 당신이 받으실 최후의 명예(名譽)로 간주하신 것이다. 세상에 죽임 당하심이 패

배가 아니라 승리요 영광이 되리라는 판단 속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제 남아서 당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미션을 수행하면서 평생을 살아갈 제자들이 절대적으로 

서로 간에 준수해야할 지렛대로서의 새 계명(誡命) 하나를 제시하셨다. 그게 무엇이었는가?  


1)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사랑은 본래적 새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율법에서도 이미 이런 종류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레19:18참조). 그런데도 주님의 

이 말씀이 새 것이 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서로 사랑의 기준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34절)란 내용 때문이다. 새로운 사랑의 척도(尺度)를 제시하셨다는 점에서 새 계명이

었다(요일3:16-18, 4:9-11참조).


2) 구약의 레위기에서의 것은 그 기준이 ‘네 자신과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으나, 예수의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 둘은 어떤 차이인가? 레위기의 것은 사람의 

자기 본능이 기준이어서 사랑하는 일도 가변적이고 매주 조건적이지만, 예수의 것에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조건 없이 내어주셨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 


3)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새 계명을 좇아서 사랑하려면, 방법은 딱 하나가 있다. ‘상대가 나에

게 어떻게 하느냐, 상대가 누구냐‘를 따지고 가리기 전에, 그 상대에게 먼저 사랑부터 시작하

고 보는 것이다. 그 상대가 마음에 들던, 원수같이 미운 상대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다. 이런 

방식을 좇아서 산 공동체가 바로 초대교회였다(행4:32-35참조). 이들은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

를 주실 때, 그 어떤 인간에게도 차별 없이 고르게 내려주시는 방법과 똑 같은 방법이었다. 


4) 제자들은 이 사랑을 직접 맛보고 체험한 자들이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버리신 스승 예수님

의 온몸 사랑을 뜨겁게 맛보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주님의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얼마나 위력적인 힘을 내게 되는 지도 체득하였다. 그러

기에 그들은 계명에 대한 자신들의 순종을 바탕으로, 세상과 교회를 향하여 ‘서로 사랑하자’고 

담대히 선포하며 외칠 수 있었다. 그런 증언으로 온 세상에는 예수의 새 제자들이 탄생했다.  


2. 구약 / 신 6:1-15 /  “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 ” 


여기에서는 인간의 서로 사랑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영역인 하나님 사랑을 다룬다. 이를 위해  

본문은 그 유명한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으라)의 본체이다. 이스라엘의 영원한 교육

헌장(敎育憲章)이다. 그들 유대인들의 교육은 전적으로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사랑하

며, 그의 말씀들인 명령과 율례와 법도를 배우고 실천하며 사는 일을 지향한다. 그럴 때 자신

들이 복을 받고, 또 주신 땅에서의 삶이 장구(長久)하고 크게 번성하리라고 믿었다(1-3절).  


유대인은 유대전쟁 후, 나라가 로마에 망하고 온 세상으로 흩어져 나라 잃은 백성 디아수포라

로 살아갈 때에도,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끝까지 잃지 않고 여호와의 믿음을 지키며 2천

년을 견디어냈다. 본문 쉐마 이스라엘은 그 중심 잡기의 결정적 근간이 된 내용이다. 그들은  

이 말씀에 따라 신앙 3대(나-아들-손자)를 견고히 보전하는 방식으로 신앙과 민족을 지켜냈다

(2절). 하나님 사랑이 자신과 후대를 살리고, 역사에서 뛰어난 민족이 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1)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 살게 될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지켜야할 뉴 모럴(new 

moral)로서 명령(命令)과 규례(規例)와 법도(法道)를 제시했다. 이것들은 가족의 삼대(三代/본

인-아들-손자)가 평생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들의 날을 장구(長久)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여호와께로 복을 받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크게 번성하기 위한 것들이었다(1-3절).    


2) 4-9절의 ‘쉐마 이스라엘’은 오늘날까지 경건한 유대인들이 아침 저녁기도에서 낭송하는 이

스라엘의 기본신앙 고백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좇아 살려는 뜨거운 열정을 확인할 문건이다. 


☞ 여기에서 그들은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를 마음(heart)과 뜻(soul)과 힘(might)을 다하여 

사랑할 것을 다짐한다(4-5절). 특히 받은 말씀은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는 부지런히 가르치

되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강론한다(6-7절). 

그 말씀을 손목에도 매어 기호삼고, 미간(眉間)에 붙여 표를 삼으며,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기록해둔다. 정통 이스라엘의 가정 문에는 이 <매주자>가 다 표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3) 모세는 그들이 조심해야할 부분도 챙겨주었다(12-15절 참조). 첫째는 출애굽의 은혜를 안

겨주신 여호와를 잊지 않고, 오직 그 하나님 여호와만 경외하고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

하는 일이다(12-13절). 특히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의 신들을 따라서는 안 된다. 그런 행위는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하게 되어, 진노를 불러들여 그들이 지면에서 멸절당할 수도 있기 때문

이다(14-15절). 이런 점만 잘 준행하면, 그들은 약속하신 땅에서 복을 누리게 된다(10-11절).   

3. 서신서 / 요일 3:11-24 /  “ 예수 이름을 믿고, 그가 주신 계명 따라 서로 사랑하자 ”


여기서는 제자들의 서로 사랑의 계명이 어떻게 세상과 교회로 확대 재생산된 건지를 다룬다. 

그 핵심 매체는 바로 교회였다. 교회는 하나님 사랑만을 위해 모인 공동체는 아니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함께 믿게 된 교우들과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할 공동체이기도 하다. 또한 동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소중한 자녀이며 현실적으로도 지금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

는 가족들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당연히 서로 사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함께 받은 무리들이다. 그

리고 주님께서 친히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분부를 함께 받은 자들이다(요13:34). 

그러기에 성도들의 양심에는 자신이 사랑에 빚진 자라는 자의식과 함께, 내가 받은 사랑과 축

복을 받지 못한 이웃 형제자매들과도 공유하며 살아야 한다는 불가분리의 공속(公贖) 의식이 

있다. 이런 양심과 의식이 온전하게 실천이 되면, 그는 주님 앞에 담대함과 응답들을 받는다. 


이 점에서 요한 기자는 믿는 자들인 우리들에게 몇 가지 유의할 신앙상의 지침을 제시한다. 


1) 가인 같이 하지 말라(창4:3-12참조). 그는 동생 아벨을 죽였는데, 그것은 자기와는 달리 의

롭게 사는 형제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심의 노예가 된 까닭이었다. 사랑하면 누구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지만, 사랑하지 않고 살면 그는 사망에 머물고 있어서 범죄하기가 아주 쉽다. 


2)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를 본받아, 우리도 형제 사랑에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말과 혀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여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에게

서 태어난 자녀임을 확증하고, 또 주 앞에서의 담대함을 얻고 사는 편을 택하여야 한다(17-22

절 참조). 주의 이름을 믿고 그가 주신 서로 사랑의 계명을 좇는 자에게 주님은 함께 하신다. 


o 예수 믿는 자들이 자신이 서야 할 자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핵심적 영역 안에서 

살지 못하면 금방 불행해진다. 예수 안에 있으면 생명이고 구원이지만, 그 주변에서 맴돌 면 

사정은 나빠진다. 쉽게 마귀의 종이 되어, 그릇된 이념이나 편견에 빠져들면서 사람을 미워하

고 정죄하면서 결국엔 가인이나 저 서북청년단처럼 형제를 살인하는 데에까지 나아가게 된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기에 오직 그가 주신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제대로 받아서, 

그의 사랑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가자. 서로 사랑은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행사할수록 좋다. 

부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이제 참 이웃 사랑으로 참 하나님 사랑까지 입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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