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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순교자기념주일

관리자 2022-03-22 (화) 13:20 2년전 416  

본문) 마 23:13~28, 사 30:8-18, 계 3:1-6 


사순절 넷째 주일이다. 완연한 봄기운이 온 천지에 가득하고, 곳곳에 잠들었던 대지에 새순과 

꽃들이 생명의 살아있음을 풍성하게 드러내면서 활기를 주고 있다. 그런 중에, 우리 총회에서

는 오늘을 순교자기념주일로 지킨다. 우리 신앙조상들이 복음과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던진 일에 대하여 우리 후손들이 그 의미와 가치를 기억하며 되살려가자는 취지에서 기념하는 

주일이어서, 매우 뜻 깊은 주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중에 우리나라는 지금 뜻 밖에 희한(稀罕)한 일을 맞이하고 있다. 그것은 제20대 대통령 

당선자가 국민들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는 미명 하에 관저인 청와대 입주를 거부하고 국방

부가 있는 용산 지역으로 옮기겠다고 해서, 새로운 국민적 논쟁의 큰 불씨를 붙이고 있다. 그 

바람에 그곳에 있는 각종 국가시설과 부대들의 이동 및 미군들과의 장소 사용문제와 주변의 

방어망 등의 수많은 뒤처리 건들이 얽히면서, 국가는 대 혼란의 늪 속으로 빨려 들었다.


기껏해야 5년 만기의 최고위 국가공무원인 대통령이 벌리는 일치고는 너무 엄청난 일들을 취

임도하기 전에 벌리고 있다. 이런 모습은 평생 집권자인 왕정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일들인데 

지금 당선인과 그 일행이 겁 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그렇잖아도, 그런 그들 부부의 친 무속(巫

俗)들과의 오랜 밀착행보에 깊은 의심과 우려를 표명해왔던 우리들로서는 그의 이런 돌발적인  

행태에, 충격과 함께 우리나라의 앞길에 찾아들어온 어둔 그림자로 인한 탄식을 금할 수 없다


당선자는 진실하고 정직했으면 좋겠다.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 도망하듯하는 행보를 취하는가? 

자신의 안위와 우려 때문에(?) 그 엄청난 국비를 소모시키면서, 국가의 시스템의 근간을 흔들

어도 되는가. 대통령이 정직하고 떳떳한 정치를 하면, 청와대는 재앙의 처소가 아니라 안식과 

존경의 처소가 될 것이다. 5년 후의 후임자가 다시 청와대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그 때 우리 

국민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제는 장소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 살 사람이 문제이다! 


겸손하고 정직하며 의로운 대통령은 절대로 청와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죄인과 악행자

만 두려워할 뿐이다. 그 이유는 국민의 불꽃같은 눈들이 그들의 행보를 계속 감시해 왔기 때

문이다. 그 바람에 우리 국민들은 그곳이 들어선 대통령들 때문에 가슴앓이 하면서도, 그 열

매로 민주주의를 함께 일구어 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어디로 피하려는가? 국정 운영에 그

토록 자신 없으면 빨리 결단하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국민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빼지 말라!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도 당시에 거짓되고 위선적인 종교인들(복음서)과, 위정자들과 그

의 백성들(구약), 그리고 타락하여 명색만 교회인 교회(서신서)를 향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매섭게 질책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신 내용들도 가득하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보면, 왜 그 

시대 시대마다 순교자들인 의인들이 잇달아 나오게 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1. 복음서 / 마 23:13-28 /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이웃을 향한 사랑도 함께 해야 한다”


본문은 예수께서 당시의 유대교의 최고 지도부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겨냥하여 매우 날

카롭고 격정적인 비판을 가하신 내용들이다. 7가지로 이루어진 예수의 <불행 선언>인데, 이런

화(禍)들 대부분은 그들의 외식적인 행태에 집중되었다(13,15,23,25,27절). 여기에서의 ‘외식’

(휘포크리시스)은 ‘가면’,‘가장’이란 표현으로서, 속은 바꾸지 않고 겉만 꾸미는 행위로서, 남 

뿐 아니라 자신까지 속이는 이중(二重) 죄를 말한다. 이제 그들의 외식의 내용들을 살펴본다. 


1) 첫째 화(13절)와 둘째 화(15절)는, 자신은 물론 구원을 얻으려는 다른 사람들마저도 실족하

게 한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가? 한마디로, 율법에 대하여 무식하고 

내용을 잘못 가르치기 때문이다(눅11:52참조). 그 바람에, 가르치는 장본인은 물론 그들의 전

도를 받아서 믿음의 자리에 들어온 사람들까지 천국에 못 들어가게 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생명의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하는 복음으로 받게 하지 못하고, 의인과 죄

인으로 갈라 치는 심판과 저주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바람에, 이런 일들이 발생한 것이었다.   


2) 셋째 화(16-22절)와 넷째 화(23-24절)는, 하나님 앞에서 전도(顚倒)되고 편향된 가치관을  

드러낸 일에 대한 경고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눈 먼 인도자’요 맹인으로 규정하시며 책망하셨

다. 그 까닭은 그들이 신자들을 맹세시키는 과정에서 너무도 가치 지향이 아닌 물질 편향적인 

입장을 취하는 바람에, 교인들이 ‘크고 우선적인 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17,19절), 소중

한 가치 선택도 못하게 되면서, 백성들 모두가 길 잃은 맹인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뿐 아니다. 그들의 극심한 물질편향적 가르침은 온전하신 하나님도 못보게 만들고 말았다.  

그것은 철저하고도 완벽한 십일조를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이 정작 당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시

는 삶의 기준인 정의, 긍휼, 믿음(신실성)등에는 외면한 것이다(23-24절). 그 바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물만 받고 복과 영생을 주시는 신(神)으로 각인되면서, 정의롭고 자비를 베풀며 신

뢰를 주는 인간이 되는 일에는 무심(無心)한 신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둘 전체를 함께 취

하여야 마땅한데, 물질인 십일조만 강조하면서 결국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이다(미6:6-8참조).  


3) 그들은 왜 그렇게 선교의 터전을 균형을 잃은 기우어진 운동장으로 만들었나? 다섯째 화

(25-26절)와 여섯 째 화(27-28절)를 선포한 예수님의 그런 외식주의자들의 불법적 행태들을 

주목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 삶이 표리부동(表裏不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 외모는 

경건하게 보였지만, 그 마음은 탐욕과 간음이나 도둑질과 같은 부도덕한 삶으로 가득하였다

(26절). 종교의 탈을 쓰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불법적인 행동을 자행하고 있었다(27-28절 참

조). 그러기에 그들에게서는 처음부터 균형 있는 건강한 생활 신앙교육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 이런 모습은 오늘의 한국교회에도 큰 경고가 된다. 교회부흥과 전도 열정은 남달리 뜨거워

서 숱한 새 식구들이 교회로 와서 구원의 문을 두드리고 있으나, 문제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가진 심각하고 엄중한 장애 문제들 때문이다. 


저들은 성서에 대한 몰이해와 빈곤한 신학지식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편협한 신관과 구원

관, 그리고 목회를 소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직업화된 전문인처럼 접근하면서 벌어진 숱한 부

끄러운 타락상들 때문에-, 결국은 자신들은 물론 찾아 온 교인들까지도 천국문이 아닌 지옥문

으로 인도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현상 때문이다. 주님의 책망을 생각하면 너무도 두렵다-!    


2. 구약 / 사30 : 8-18 /   “ 정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 ” 


본문은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유다가 당신에게 저지른 패역한 행태들에 대하여 매우 

분노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배경은 유다의 제13대 왕인 히스기야가 북방의 앗수르 제국

의 침략을 두려워한 나머지(b.c 701), 남부의 제국인 애굽에게 자신의 운명을 의뢰한 동맹을 

맺은 일 때문이었다(사30장 참조). 하지만 그 일은 결국 치명적인 패착(敗着)이었다. 


당시의 애굽의 바로 샤바코는 전 애굽 통일을 이룬 지 10여년도 되지 못해 강력한 통수권을 

발휘하지 못한 상태였고, 자신들의 하나님에게는 주권을 무시한 행위여서, 분노와 심판을 피

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에게 애굽은 어떤 곳인가? 자기 조상들을 노예로 부리던 곳이었다. 하

나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으로 털고 나온 곳이었다! 그런 곳에 유다가 동맹을 청하며 허리를 굽

힌 것이다. 하나님께는 그런 모습이 분별력이나 자존심이 없어도 너무도 철없는 행위였다.  


더 심각한 점은 이런 유다의 패역한 모습이 그만큼 여호와를 향한 그들의 오랜 불신과 배신이 

쌓여 있다가 터져 나온 것이었다는 점이었다(13절 참조). 오죽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

야에게 그들의 죄악의 흑(黑)역사를 서판(書板)에다 기록하여 후대에 영원히 알리라고 하셨겠

는가(8절)! 여호와께서 지목하신 그들의 죄악상을 정리해 본다.  


1)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들이며 여호와의 법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었다(9절). 

2) 선견자(=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듣기도 싫고 부담되는 말도 하지 말

   라고 압박했다. 그 대신 듣기에 좋은 말만을 요구했다. 거짓된 것을 요구할 정도다(10절).

3) 바른 길을 거부했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자기들에게서 떠나시게도 요구했다(11절). 


4) 그러자 여호와의 1차 냉엄한 심판의 경고가 발했다(12-14절). 즉 이 죄악이 너희를 무너지

게 하리라고 예고하셨다. 마치 무너지려고 터진 담이 불쑥 나와 순식간에 무너짐 같게 되리라

고! 여호와께서 이 나라를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내쳐버리실 것이라고 통보하셨다.  


5) 그런데도 유다의 완고한 저항이 계속되자, 하나님의 추가적 대응(反應)은 어떠하셨는가? 

①처음엔 살 길을 제시해 주셨다(15절) -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다’


②그런데도, 그들의 여호와를 향한 저항의 강퍅함이 얼마나 지속됐는지-, 여호와가 쫓아오면 

  도망할 것이고 그것도 부족하면 말 타고 더 빨리 도망할 것이라고 조롱할 정도였다(16절).

  자신들의 기마병(騎馬兵)과 마병(馬兵)의 실력을 의지한 말이었다(31:1-3참조). 

③그러자 여호와는 그들의 참담한 패배와 참혹한 멸망의 그 날 그 모습을 이렇게 통보하셨다. 

- 그들은 결국 남은 자가 ‘산꼭대기의 깃대와 같고, 산마루 위의 기치(旗幟)와 같으리라’(17절)  

- 흔적만 남고 처연한 버림받음만 남게 될 유다의 미래를 그렇게 풍자하며 예고하셨다.

☞ 유다의 바벨론 제국(帝國)에 의한 참담한 멸망(滅亡/b.c603-598)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소위 바벨론 포로기 70년의 유수(幽囚)생활이 예고된 것이다. 누굴 원망할 수 있으랴.

  

6) 하지만 이런 여호와의 멸망 통보에도 그들 유다의 멸망 시기는 한 세기 가까이나 늦추어졌

다.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그들의 회개와 돌이킴을 기다린 것이었다. 그 때의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말씀으로 올라와 있다.   

-‘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正義)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

리는 자마다 복(福)이 있도다’(18절, 마23:23절 참조) 


3. 서신서 / 계3:1-6 /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요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리라”                                                       


책망과 멸망을 받게 될 대상은 유다와 유대교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만이 아니었다. 소아시

아의 교회들 중의 하나인 사데(Sardis) 교회도 그 대상이었다. 그 까닭은 그들 대부분이 믿음

으로 주님과 복음을 영접한 이래, 그 믿음을 굳건히 보전하지 못하고 주위의 유혹들에 흔들리

면서 죄악에 빠져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리디아 왕국의 옛 수도였던 사데는 전통적으로 부와 철학과 법률과 음악의 도시로 널리 알려

진 곳이었고, 아데미 여신을 숭배한 도시였다. 금화를 만들어 이웃 도시 국가들에게로 보급하

던 곳이기도 했다. 위치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에 있어서, 양쪽의 침공과 다스림을 받아오

기도 했다. 사데 교회는 이 도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부흥과 쇠퇴의 우여곡절을 경험하였다.

초대교회 박해 시에는 테라폰이나 아폴로니우스와 같은 순교한 그리스도인들도 배출하였다. 


그런 그들이 첫 신앙을 상실한 데에는 지역의 부요한 환경 때문으로 보인다. 돈, 환락, 연회와 

축제, 미녀와 오락 등의 화려함과 쾌락에 많지 않은 성도들 하나하나가 무너져갔다. 돈과 세

상을 사랑함과 성적 무절제함에 자신을 거룩히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다행한 것은 그런 중에

도 일부의 성도들은 그런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보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4

절, 고후7:1절 참조). 주님의 평가를 직접 들어보자. 


1) 그들 신앙의 현 주소(住所)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였다’(1절). 그것은 그

들이 믿는 자답지 못한 행위들(works)에 빠져 살았기 때문이었다(2절). 그게 무엇이었을까?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는 표현이 답을 준다. 바로 성적 무절제 행위로 보인다(2:14, 

20-22참조). 곧 성적 탈선과 타락이 사데 공동체에 결정적인 타락상을 안겨준 일로 보인다. 

세상의 소금과 빛되어야할 그들이 도리어 세상 속에 빨려 들어가서 탈선하고 만 것이었다.   


2) 하지만 주님은 그런 탈선한 자들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셨다. 그것은 이전의 처음 신앙을 

회상하여보고 어서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오실 주님을 

‘도둑처럼’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3절, 마24:43-44 참조)


3) 동시에 주님은 소수의 믿음의 지킨 자들을 확실하게 구별해 주셨다. 그들을 ‘이긴 자요,  

흰 옷 입은 자’로 규정하시면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 다닐 자가 될 것이고 당신이 그들의 이

름도 생명책에서 기록해 남길 뿐 아니라, 그 이름을 하늘 아버지와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

(是認)하시겠다고 공언해 주셨다(4-5절). 고난 중인 남은 자에 대한 배려의 말씀이기도 했다.   


o 순교자의 자리는 아무나 들어가거나 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오직 예수의 마음과 인격과 

삶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걸고 선택한 사람들만이 취할 자리이다. 그러기에 예수와 하나님의 

이름을 팔면서 실상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들이나. 자기 편의로 주님의 것을 편협하게 

선택하는 자들이나, 하나님 사랑만 강조하고 이웃을 미워하며 사는 이들이나, 자신의 선별된 

소명의식을 세상에 빼앗겨서 온갖 타락으로 사는 자들은 결코 넘볼 수 없는 자리이다. 우리 

모두 깨어 살자. 그의 오실 나라를 위하여, 예수와 그의 말씀과 그의 영으로 깨어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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