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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2-03-16 (수) 12:19 2년전 398  

본문) 마 23:1~12, 전 9:11-18, 고후 11:19-30


사순절 셋째 주일이다. 반가운 봄비가 왔고, 매화나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리며 새 봄을 알

리는 반가운 기간이었다. 하지만 작금의 국민적 관심사는 지난 주간에 있었던(3.9) 제20대 대

선의 결과와 그 뒷얘기들에 관한 일들이었다고 보인다. 그 이유는 승패가 겨우 0.7% 정도에 

불과해서, 그 최종 결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전 국민들이 뜬 눈으로 날을 샐 정도로 치열한 선

거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번 대선은 후보에 대한 양측의 기대치와 경계심이 컸던 선거였다.  


하지만 여기에도 분명한 진리가 있다. 선거 승리가 곧 정의나 진리(진실)의 승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당선자는 선거 승리로 자신이 그간의 각종 혐의(嫌疑)들로부터 자유해진 것처럼 

생각하고 싶겠지만, 그러나 역사는 결코 그런 기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불의나 

거짓 세력들도 얼마든지 각종 선거에서 승리할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여 자신과 역

사에 심대한 부끄러움과 아픔을 안겨준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집권이 복일까 화일까? 


예수님 시대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위선이 진리를 가렸고, 거짓이 진실을 뒤덮었으며, 폭력이 

평화를 짓밟고 죄인이 의인을 죽였다. 뻔뻔함이 부끄러움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부자가 가난

한 자위에 군림했고, 강자가 약자를 이용하며 부리고 살았다. 가장 뼈아픈 일은, 종교가 백성

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도(誤導)하며 지옥문으로 인도하고 있었고, 가난한 자와 약자들은 

그런 강자들의 지도와 가르침을 쫓는 것이 자기들의 살 길이라고 맹종하며 따른 일이다.    


이런 흐름과 경향은 문화와 종교로 공고히 고착되면서 대세를 이루었고, 그 시류(時流)를 좇아

서 형성된 기득권층과 피(被)지배자층의 어긋난 흐름으로도 고착화되었다. 그래서 모두가 죄인

이 되었고,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 실로 절망과 칠흑 같은 어둠의 시대였

다. 바로 그런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성육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오신 예수의 말씀이나 가르침이나 각종 선교적 행보는 그런 기존의 질서들과는 정반대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했으니-, 그 내용 하나하나가 실로 위험천만(危險千萬)하기 그지없었다. 실로 살

려고 오신 분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언행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으셨다. 전혀 

새로운 질서, 가치관, 뉴 모럴이 예수에게서 샘솟듯 터져 나왔다. 따라서 그 언행 하나하나는 

기득권자들과는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의 미움과 질시와 보복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오늘 복음서의 내용도 그런 맥락위에 있다. 끊임없이 높아지려는 세상 사람들의 행보에 대하

여, 예수께서는 그것의 문제점들을 지적하시고 도리어 새로운 높아짐의 차원을 제시하셨다.  

모두를 섬기는 자가 크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9-12절). 그런 일은 

밑에 있고 뒤에서 사는 이들에게는 희망과 꿈을 안겨주는 말씀이었으나, 이미 앞에 있고 위에

서 사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행위를 평가 절하하는 말씀이었다. 귀하고 소중히 받지 못했다.

   

구약의 전도서 내용도 그렇다. 모든 인간은 제한된 삶의 여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낫고 우월하고 탁월한 일을 보면 그걸로 으스대고 교만해지고 뽐내며 살려하지만, 그러나 그

런 자랑거리들도 금방 허무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11절). 그것은 기본적으로 

골짜기를 돋우고 언덕마다 고르고 평탄하게 하시는 조물주의 절묘한 손길이 어느 누구에게나 

홀연히 밀려오기 때문이다.(12절, 사40:3-5절 참조). 과연 누가 그때를 대비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겠는가? 서신서에서 사도 바

울은 고린도교인들의 집단적 어리석은 공세에 직면하면서, 우월한 논리적 방어로 대항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부족했던 모습과 그들을 위해 평생 겪어온 수고와 고난의 역정들을 전하는 

것으로 대처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약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남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오늘의 세 본문이 주려는 메시지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취하려는 열망과 욕망을 거부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삶의 또 다른 측면인 큰 자와 높아짐에 원리에 눈이 뜨

고 마음이 열려서, 그곳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갈 주역이 되라는 것이다. 


1. 복음서 / 마23:1-12 /  “ 너희를 섬기는 자가 너희의 큰 자가 되리라 ”


유대 사회에서 종교지도자는 하이 클레스로 존중을 받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말씀을 가르치

는 위치의 서기관(율법사)이나 율법 전문가들로서 ‘랍비’(=나의 큰 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사회의 선생이요 지도자로 공인을 받고 있었다. 물론 예수님도 제자들은 물론 다양한 사람들

로부터 랍비로 부름을 받기도 하셨다(막10:17, 요3:2, 4:31등등).   


그런데 예수께서는 유대교 랍비들의 행태에 매우 비판적이셨다. 그들은 언제나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로부터 대접을 받고자 했으며 그들의 언행을 가르치는 자로 처신하는 모습에 주

님이 제동을 걸고 나오신 것이다. 왜 그런지 그들의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들여다보자


그들은 언제나 모임에서 상석(上席)인 모세의 자리를 도맡았고(2,6절), 말만하고 행하지는 아

니 했으며(3절), 자기들은 손가락하나 까딱도 않은 체, 오직 백성들이 지켜야할 무거운 업무들

만 어깨에 메게 하였다(4절). 몸은 모두에게 자신의 경건함을 보이려고 경문 띠와 웃슬로 치장

했으며(5절), 백성들로부터 ‘랍비와 아버지’란 존칭 받기를 즐겨했다(7-9절).     


그런 행보는 모두를 섬기고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나사렛 예수님에게는 매우 역겨운 모습

이었다. 특히 지도자와 신앙인들로서는 더더욱 경계(警戒)해야할 처세들이었다. 그런 행동들은 

특히 당신의 제자들이 본받게 되지 않도록, 더욱 날카롭게 비판하고 경계하셨다. 참된 지도자

의 길은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모두를 섬기고 낮아지는 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는 

입장을 주님이 견고히 갖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온 주님의 비판적 대안은 이것이다.  


1)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행위는 본받지 말라(3절). 지도자들이 행함의 모범으로 지도하

지 못하고, 입술만으로 지도하려는 행태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그렇게 표하신 것이다. 


2)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모두 형제(兄弟)이다(7-8절). 

집단에서 특출한 인물로 존경받으려는 마음은 큰 유혹이다. 교만, 과시하려는 경향도 조심해

야 한다. 겸손과 온유로 옷 입고 살아야 한다.(마6:2,5,16 11:29, 18:1-5, 요5:44참조) 


3)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9절). 아버지는 한 분 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

다. (당시는 율법교사를 ‘아버지’라고 존경스럽게 불렀다). 지도자라 칭함도 받지 말라(10절). 

지도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4) 그러면서도 주님은 그들 중에 큰 자와 높아질 자가 나타날 것임을 암시하시면서, 그런 자

격자가 누구일 지를 분명하게 일깨워 주셨다(11-12절). 공동체를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될 것

이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누구든지 높아지리라고 언명하셨다(마18:4,눅14:11, 잠29:23,겔

21:26, 벧전5:5-6 참조). 누구든 진정한 큰 자와 높은 자를 원하면, 꼭 명심해야할 말씀이다.  


2. 구약 / 전 9:11-18 /  “ 지혜자의 조용한 말들은 우매자들을 다스리는 호령보다 낫다 ”


인간은 자기가 가진 능력과 재능과 탁월함에 자부심도 갖고, 뽐내면서 살아간다. 그러면서 그

렇지 도 못한 이들을 향해서는 우월감을 드러낸다. 빠른 경주자, 용사, 지혜자, 명철자, 지식

인들이 그런 자들이다. 하지만 정작 세상은 그들의 그런 능력만이 통용되도록 허용된 독무대

(獨舞臺)는 아니다. 정작 자신이 가진 은사들을 발휘할 수 있도록 주어질 때와 기회는 모두에

게도 허용된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11-12절 참조).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런 능력과 수고가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는 점을 

말한다. 이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도 어느 순간에 재앙과 고

난이 찾아와서 자기의 모든 기회를 허망하게 할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 넓은 바다와 강에서 

의 물고기들만 그물에 걸리고, 창공을 나는 새들만 올무에 걸려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

도 어느 순간에 찾아온 온갖 재난의 올무에 걸릴지 모른다. 그런 인생임을 대비하란 말이다   

       

전도자는 자신이 놀랍게 깨달은 사실 하나를 소개한다(13-15절). 어느 작은 성읍에 주변의 큰 

왕이 공격해 와서 큰 위기를 맞게 되자, 그곳에 사는 가난한 지혜자가 지혜를 발휘하여 그 성

읍을 건졌다. 앎의 힘이 빛을 발한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 기념할 일이었겠나? 하지만 그 성

읍에는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지혜는 성읍을 구했지만, 가난한 자에 

대한 선입견에 쌓여있는 성읍 사람들에게 그의 말과 능력은 철저히 무시당했다는 이야기이다.


무슨 뜻일까? 지혜나 명철은 분명히 인간 삶의 최고의 가치요 능력이지만, 그것이 제대로 발

휘되고 제 능력을 드러내는 데에는, 또 달리 넘어야할 산들이 많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분명

히 지혜는 칼이나 무기들 보다는 나은 것은 사실이지만, 엉터리 실수를 범할 수 있는 죄인(권

력자/지도자)이 나타나면 그 지혜가 쌓아올린 모든 공든 탑을 일시에 무너지게 할 수 있기에, 

그렇게 되면 그의 지혜가 더 나을 것도 하나도 없었음을 말해 준 내용이다.  


☞ 그렇다면, 우리의 세상의 자랑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한 문제들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교만 제거를 위해 부여하신 걸림돌과 같다는 판단에서 

우리의 믿음의 대응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하겠고, 또 종종 걸림돌처럼 주어지는 난관들을 어떤 시각으로 대처하는 것이 좋은 지

를 살려야만 하겠다. 이 점에서 사도 바울의 경우는 우리에게 영원한 지혜를 제공해 준다.  

   

3. 서신서 / 고후 11:19-30 /  “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바울과 그의 사역을 폄하하는 자들과의 <자랑 경쟁>을 펼

쳤던 부분이다. <어리석은 자 연설>(11:22-12:10)로 알려진 부분이기도 하다. 바울이 떠나 온 

이후, 교회에서는 그가 펼쳐 온 선교 활동과 그 기반들을 부정하려는 시도들이 그곳에 들어온 

일련의 선교사들을 통하여 번지고 있었다. 사탄의 대반격이었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혹 

제기는 물론, 그의 육체적 약점들까지도 폄하 대상이었다(10:10-11참조). 교회가 흔들렸다. 


바울이 본 당시 교우들의 행태는 이랬다. ‘평소 똑똑하다고 생각하던 그들이 지금은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고 있다. 그들이 누군가? 결국 자신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먹을 것이며 

빼앗으며 교만하여 뺨도 칠 자들인 데에도-, 그걸 모르고 용납하고 있었다’(19-20절). 그 일의 

결과는 뻔했다. 그들은 이리에게 먹히는 양의 신세가 될 것이고, 그들의 사술에 빠진 영혼들

은 죽게 될 것임을 바울이 통렬하게 지적하였다. 집단적 어리석음에 대한 매서운 책망이었다.     

그러면서 바울은 교우들이 그 전체 판을 다시 볼 수 있도록, 또한 누가 진정한 거짓이고 진짜

인지를 분별할 수 있도록,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참 사도의 모습을 섬세하게 상기시켜주었다 


그것은 자신의 강함이 아닌 약(弱)함에 대한 자랑을 내세우는 접근이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바울에게서 찾으려는 강함 대신에, 그 어떤 사도들도 접근할 수 없었고 오직 바울 사도만이 

안고 산 약함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 성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걸머진 나약한 모습이었다. 바로 십자가에서 가장 약한 모습

을 보이신 예수의 그 모습이었다(21,23-30절 참조). 바울안에 비쳐진 그리스도를 보게 했다.  

  

1) 바울이 내세우지 아니한 자랑거리들도 무척 화려했다. 그는 정통파 히브리인(팔레스틴에 기

원하는 가문출신)이었고, 이스라엘 사람(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자)이었으며, 아브라함의 후손

(약속의 상속자/창17:7)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리스도인이기도 했다(22-23절). 그러기에 바울

은 그 누구와 견주어도 육체적인 강점들을 완벽히 갖춘 자였다. 하지만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

가의 복음만을 전해오던 그에게는 그런 것들이 진정한 자랑거리일 수는 없었다. 


2) 사도의 참 표지인 ‘수고(受苦)와 고난(苦難)’만이 자신을 제대로 대변할 것으로 본 것이다. 

(4:7-15,고전4:9-13참조). 그런 약함들은 누가 진정한 선교사이며 주의 종이며 사도인지를 생

생히 입증해 준다고 본 것이다. 그 약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항상 나타났음을 보아온 것이

다. 그게 주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큰 자요 높은 자의 자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마23:11-12).

   

☞ 최근 대선의 두 후보들은 서로 다른 접근으로 승패가 갈렸다. 하지만 패장인 이재명 후보

의 인사말, <내가 부족했습니다.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돌려주십시오>은 승자의 여운을 준다. 


o 예수의 십자가는 이 세상과 인생의 길을 전혀 다르게 보게 해 주셨다. 잃어버린 낙원을 어

떻게 찾을 수 있는 지도 잘 보여 주셨다. 지고도 이기는 길이 있음과 이기고도 지는 길도 있

음도 알려 주셨다. 현세의 질서와 문화와 전통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열 수 없다(롬12:2). 

삶을 밑에서부터 볼 수 있어야하고, 위로부터도 볼 수 있어야 하며, 이웃(너)의 눈으로도 볼 

수 있어야 가능해진다. 가장 낮은 곳에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의 마음과 웃을 입어야 

길이 보이고 삶이 살아난다. 우리에게 한계는 있으나, 그래도 그 방향으로 가야만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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