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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2-03-02 (수) 09:53 2년전 415  

본문) 마 6:16~18, 시58:1-9, 고후 7:2-13


사순절기를 맞이한다. 예수께서 세상 죄를 걸머지시려고 당신의 죽음의 자리인 십자가가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40일 행진을 전개하신다. 이 절기를 맞이하면 모든 세상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나타난 ‘요나의 표적’을 묵상하면서(마16:4), 고난의 행진에 다양한 모습

으로 동참한다. 참회와 비움과 기도와 금식과 절제 등의 경건의 수련과정에 참여한다.   


시기도 삼월 첫 주일이면서 완연한 봄에 접어든 때이다. 죽은 자 같았던 땅의 생명체들이 하

늘이 준 새 생명의 기운을 받으며, 다시 일어나는 회복과 부활의 시기를 맞이하는 때이다.  


예수께서 보여주시라는 ‘요나의 표적’은 무엇이었나?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

고 다시스로 도망하는 중에, 하나님이 보내신 지중해의 대풍(大風)을 만나 온 배에 승선한 무

리들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고, 제비뽑기를 통하여서도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이 드

러나자-, 그가 결국 ‘당신들 모두를 위하여 나를 버려라’(욘1:11-15참조)라는 결단을 한 사건

을 연상시킨 말씀이었다. 그 결과 버려진 요나를 통하여 모두가 살았고, 요나도 다시 살았다.  


이런 숭고한 정신과 영성 훈련에 들어가는 절기가 바로 사순절이다. 자기를 버려서 세상과 모

든 죄인들을 살리시겠다는 예수의 삶과 영성을 익히고 본받고자 훈련하는 절기가 사순절이다. 

실로, ‘회개해야 산다, 버려야 산다’는 깊은 고백과 삶의 훈련에 집중하는 때이다. 특히 삼 년

째 계속되는 전 세계적인 코로나 판데믹의 공습(대풍) 앞에서는, 요나의 표적이 더욱 절실한 

순간이다. 나를 버리고 희생하여 모두를 살리겠다는 삶의 고백들이 풍성해져야할 시기이다.   


그런데 이런 뜻 깊은 사순절기에, 역사의 시계를 퇴행시키는 불순한 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도 세계교회의 한 축인 러시아 정교회를 국

교로 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력으로 침공하면서 수백 명의 사상자와 소중한 자연과 생명

체들을 파괴하는 참담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참으로 힘없는 교회의 전형을 본다. 이 일로 

지금 온 세계는 불온한 강자의 횡포와 그 질서 파괴에 망연자실하고 있다. 


이 일을 보면서, 이번 주 수요일(9일)에 있을 우리의 제20대 대통령선거가 더욱 절실해졌다. 

어떤 지도자가 우리의 국방과 안보, 그리고 나라의 화합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 지가 

더욱 절박해졌다. 특히 분단의 아픔과 위협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에게서 최고 지도자의 판

단과 지도력에 대한 선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평화

의 힘을 드러내고, 상대에 대한 포용력까지 갖춘 지도자가 필요해졌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과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요나처럼 내 놓을 수 있는 헌신적인 지

도자 선택이 우리에게 더욱 절실해 졌다. 만에 하나라도 힘자랑하다가 마찰을 유발하는 사태

가 발생하면, 우리의 지금까지의 공든 탑이 일거에 무너질 공산이 대단히 커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할 때이다.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꾼이 뽑히기를 기도해야 하겠

고, 우리 국민들도 최상의 분별력을 발휘해서,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하겠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사순절 첫 주일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자. 어떤 내용들인가?  

내용 전체는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행동들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 결과는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과 행동에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것이 있고, 외면하실 것이 있

었다. 그러면 무슨 경건들이었나? 금식(禁食-fast)이었다(복음서-구약). 그리고 사도에 대한 성

도들의 오해와 해명에 얽힌 교회 공동체의 긴장을 해소하는 문제이었다(서신서).  


유대인들에게 금식은 그들이 하나님께 취하는 가장 강력한 기도 행위 중의 하나였다. 오랜 역

사를 갖고 있었고, 예수 시대에까지도 유대교의 경건한 신앙들이 지속적으로 유지해온 강력한 

기도 행위였다. 그러기에 금식하는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그의 경건성을 공인 받

게 하는 행위로 각인되는 일이기도 했다.   


구약시대에서 모세의 호렙산에서의 금식, 자녀 문제 해결을 위한 한나의 금식(삼상1:9-18참조

), 선지자들의 금식, 에스더의 금식 등등이 있었으나, 저들이 금식을 일상화한 일은 아무래도 

바벨론에 예루살렘 성전이 폐허가 되고(b.c 587) 70년간의 포로생활에서 부터로 보인다(에스

더 참조). 그 때부터 저들은 귀환한 이후에도 계속 금식을 규율화했고(슥7장,8:18-19참조), 그 

흐름이 예수 시대에까지도 계속되었다. 


예수 자신도 40일 금식으로 당신의 시대를 여신 분이셨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을 했

고, 바리새인들도 금식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서는 금식을 요구하지 않으셨

다(막2:18절).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

였다. 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금식할 때가 아님을 말씀하셨다. 당신(예수)과 함께하는 동안에

는 금식은 필요 없지만, 당신을 빼앗긴 후에는 금식이 필요하리라고 보셨다(1:18-20절).   


그러면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보이는 잘못된 금식 행위들이 그 금식의 효과들을 무효화시키

는 일에 대하여 깊은 아픔을 느끼셨다. 그래서 제대로 된 금식은 어떤 금식이어야 할 것인지, 

또 금식이 안겨 줄 하나님의 보상에 대하여서도 믿음을 갖도록 제자들에게 교육하셨다.   


사실 우리도 금식에 관심을 갖는다. 또한 필요하다면, 금식도 한다. 그리고 금식할 정도의 믿

음은 확실히 차원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마구잡이 금식은 안 된다. 제대로 

된 금식이어야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사실 앞으로의 우리의 미래엔 어떤 우리의 목숨을 

건 기도를 요구하는 때가올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면 당연히 금식해야 하기 때문이

다. 그런 기회에 미리 대비하는 일도 지혜일 것이다.     


1. 복음서 / 마 6 : 16-18 /  “ 은밀한 중에 금식하는 기도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당시의 금식 기도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난 가장 결정적인 잘못은, 금식을 자신의 신앙 수준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과시(誇示)용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금식 기도가 

상대할 대상을 잘못 설정하고 말았다. 기도를 받으실 하나님이 아니라, 평가할 세상의 사람들

이 된 것이다. 그 바람에 그들은 금식에 필요한 마음가짐보다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몸가짐과 외모 갖추기에 더 신경을 썼다. 곧 외식(外飾)에 집중한 것이다(16절).     


1) 그들은 금식하고 있다는 표식을 내려고 얼굴에 슬픈 기색을 보였다. 얼굴 모양을 흉하게 

꾸몄다. 머리에 기름도 바르지 않아서 까칠하게 보이게 하였고, 세수도 하지 않았다(16-17절).  

그래서 누구나 그를 보면, ‘아 저 사람은 금식하는 사람이구나. 매우 경건한 자로구나’라는 인

식을 갖게 하였다. 하나님의 응답보다는 사람들의 신임이나 평가에 더욱 신경을 썼다. 


2) 결과는 무엇일까? 혹 사람의 평가를 취했을지 모르나, 그는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

는 자였을 뿐이다. 주님의 평가를 보자. ‘그들은 자기 상(賞-reward)을 이미 받았느니라’. 도

대체 하나님이 외면하신 금식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육신의 몸에나 하나님 앞에서나 모두가 

백해무익(百害無益)할 뿐이다. 기도나 금식은 반드시 그 대상을 하나님으로 해야 한다.     


3) 그러면 어떤 금식이 하늘 아버지의 상이 지급될 금식일까? 앞에서 말한 사람에게 보이려는 

일체의 행동들을 금하고(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도 씻는 등), 대신 은밀한 중에 계신 하늘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고 몸과 마음을 집중하면 된다.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늘 아버지

께서 갚으신다(18절). 금식은 그 마음과 그 행위에 부과하는 값어치가 중요함을 말씀했다. 


2. 구약 / 사 58:1-9 / “자기만을 위한 금식보다는, 모두에게 유익을 주는 금식에 집중하라” 


바벨론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매우 경건한 자들이었다. 오랜 포로 생활의 고단함을 

극복해낸 영성도 훈련되어 있어서, 그들의 신앙은 진지했다. 특히 포로 생활 속에서 익힌 금

식을 통한 기도의 전통은 소중했다. 탄식과 죄의 고백과 간구가 포함된 진지함이 강렬하였다. 

매사에 하나님의 규례를 좇아 행하는 듯 보여서, 기대될 만한 신앙인의 자세를 보였다(1-2절 

참조). 그들은 자신들의 금식에 하나님께서 번영(繁榮)으로 갚아주시기를 기대하였다. 


1)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의 입가에서는 감사가 아닌 불만(不滿)이 떠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

슨 불만이었나? 그것은 자신들의 금식에 주께서 전혀 응답해 주시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3

절,상). ‘금식해도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괴롭게 하는 데에도 알아주지 않으신다’는 불만들이

쌓여 간 것이다. 기대와 열심이 큰 만큼, 거기에 따른 실망과 좌절감도 컸다. 왜 그러했는가?     


2) 하나님께서는 왜 외면하셨는지를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풀어놓으셨다. 

하나님에게는 그들의 금식에 불응하실 충분한 이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들이었

는가? 본질적으로 그들의 금식은 잘못된 것이며 오해에 기반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곧 하나

님이 기뻐하실 수 없는 부실한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 일방적 요구만 해왔기 때문이었다. 


① 금식하면서 그들은 오락(娛樂)을 구하며 온갖 일들을 시키고 있었다(3절,하). 그 바람에 금

식이 아닌 굶는 것이 되었고, 육신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하여서는 오락을 하며, 자신이 손 놓

고 일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강하기 위하여서는 집안의 종들과 가축들을 더욱 부리는 행태를 

취하였다. 그 바람에 주인의 금식은 종들에게는 더 고통하는 때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어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의 금식을 기뻐하시겠는가?    


② 그 뿐 아니다. 금식하면서도 친구나 주변과 논쟁하고 다투며, 심하면 주먹질도 서슴치 않

았다(4-5절). 도무지 금식하는 자의 경건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으로 채

워져 있어야할 가슴엔 시기와 분노와 자기주장의 기세만 가득하였다. 실로 금식에 합당한 마음

이나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그런 금식에 응답할 이유가 있겠는가? 


3) 하지만 긍휼이 크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어리석은 기도자들과 불만에 가득한 자들에게도 

제대로 돌이킬 수 있는 가르침을 주셨다.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금식은 어떤 것인지를 자세

히 가르쳐 주셨다(6-7절). 그 핵심은 금식자의 비움과 낮아짐과 내려놈이 바로 주변의 연약한 

자들인 집안의 종들과 이웃들, 그리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는 자유와 휴식과 여유를 받

아 누리게 될 기회가 되도록, 마치 요나가 주변 모두를 위하여 자기를 내려놓았던 모습처럼, 

선행(善行)을 베푸는 금식이 되게 하는 일이었다(61:1-2 참조). 


4) 그런 금식이 이루어질 때, 그 응답은 즉각적으로 따라올 것이었다(8-9절,마6:33참조). 그의 

빛이 새벽빛같이, 치유가 급속하게, 공의(구원과 번영)도 바로 앞에,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뒤

에 호위하게 되고, 그가 부르거나 부르짖을 때는 여호와가 즉시 응답하며 함께 하신다. 결국 

금식이란 귀중한 경건이 자기 사랑이란 차원을 넘어 이웃 사랑이라는 사회성을 담게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놀랍고 신속하게 받아낼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3. 서신서 / 고후 7:2-13 /  “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함이라 ” 


사도 바울은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 이유는 자기가 개척하여 생명을 쏟아 섬겼던 고린도교회

가 자기가 떠난 이후,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자에 의하여 바울의 사도권(使徒權)을 의심하게 

되면서, 일부 교인들이 거기에 부화뇌동하면서 신앙의 위험에 빠진 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

하였기 때문이었다. 곧 바울은 예수의 직계 제자가 아니면서, 사도로 행세하였다는 의혹 때문

이었다. 그 일은 실로 중요한 문제였다. 사도권의 의심은 그의 모든 가르침과 사역 자체에 대

한 의심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그를 통해 받았던 구원의 신앙도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세 가지 접근으로 반전의 길을 찾았다. 하나는 그들을 정죄가 아닌 감싸 안으려

는 따뜻한 마음의 편지를 보내면서 설득하는 일이었고(2-4절), 젊은 동역자인 디도를 현지에 

직접 보내서 그들을 잘 권고하며 지도하게 하였다(6절).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께 깊이 매달렸

다(10-12절). 그로 인하여 디도가 가져온 선물은 최고요 최상의 결과물이었다(6-7,12-13절).    


1) 바울이 교인들에게 접근한 마음은 이것이었다. ‘자신들은 그들 누구에게도 불의를 행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속여 빼앗은 일이 없다. 오직 그들을 마음으로 함께 품고 함께 죽고 함께 살고

자 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담대할 것도 많고 그들을 위한 자랑거리도 많으며 환란에서의 위로

와 기쁨도 자기에겐 가득하고 넘친다’라며 그들을 향한 자신의 애정과 자부심을 가득히 전했다. 


2) 편지를 보낸 바울은 한편으론 심각하게 걱정한 듯하다. 하지만 바울의 그 편지 내용은 동역 

자 디도의 협력과 함께, 최상의 긍정적인 반응을 안겨 주었다. 즉 바울과 교회의 관계가 피차에 

위로와 사모함까지 안겨줄 상황으로 분위기의 반전을 안겨 주게 되면서, 완전 회복 관계로 돌아

선 것이다(5-7절). 그 바람에 바울은 자신의 근심이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이었음과, 그 결과

는 서로의 깨끗함을 나타낸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하게 했다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o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경건한 삶의 자세는 무엇인가? 금식이란 비상한 기도의 자리에 들어

서느냐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 성도들의 경건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것이 되어야 한다. 절대 

인간을 향한 외식적 행위가 되면 안 된다. 동시에 나의 기도와 경건이 나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이웃과 생명들에게도 복이 될 수 있어야만 한다. 아울러 교회와 

이웃의 문제 해결에는 언제나 비난보다는 따뜻한 가슴과 품는 기도가 있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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