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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3.1절 기념주일

관리자 2022-02-22 (화) 23:36 2년전 430  

본문)  눅 14:25~35, 삼하 24:18-25, 행 4:32-5:11


주현절 여덟 번째 주일이며 절기 마지막 주일이고, 사순절에 들어가기 직전 주일이기도 하다. 이 때는 우리가 세상과 인간 구원을 위해 성육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얼마나 닮고자 살아왔고, 또 얼마나 좇아왔는지를 성찰(省察)해 보아야할 때이다. 마침 오늘은 기미년 3.1독립만세 사건을 103주년으로 추념(追念)하는 주일이기도 하다. 이 때를 어떻게 맞이하면 좋을까? 


두 가지로 집중해 보려고 한다. 첫째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들의 면모(面貌)와 그 가치이다. 그들 모두는 종교인들이었다. 그 중 최다수인은 우리 민족종교인 16명의 천도교도(天道敎徒)였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15명이었고, 나머지는 2명의 불교인이었다. (당시 천주교도는 전무였는데, 그 점에 대하여 지난 100주년에 천주교 김희중 대주교가 당시의 교회가 깨우치지 못하여 그 만세 운동에 불참한 일을 참회하는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그 참여의 열정과 헌신성에 있다. 천도교의 민족사랑은 이미 종교화되었으나, 당시의 기독교는 아직 소수 종교에 불과했다. 소규모의 교회들과 신도들이 전국으로 서서히 번져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그들과 그들의 교회들이 바로 전국 방방곡곡의 독립만세의 확실한 불쏘시게기 된 것이다. 그 운동에 얼마나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참여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일제로부터 집중적으로 박해와 탄압, 배제와 감시를 받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덕분에 기독교회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 가장 주목받는 종교로서, 기존의 모든 종교들을 제치고 민족과 나라에 희망을 주는 신앙 집단으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라 사랑하는 수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이 교회를 피난처로 모여든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한국교회의 품은 크고도 넓었다. 그래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는 능력 있는 인물 양성소가 되기도 했다. 무지한 민족을 깨우는 영혼의 산실이 되었다. 실로 살아있는 교회들이었다. 


참고로 기리 기억해둘 15인의 신앙 선배들을 소개한다 – 리필주(목사), 김창준(교사), 양전백(목사), 리갑성(병원), 리명룡(목사), 박희도(청년), 박동완(청년), 신흥식(목사), 신석구(목사), 오화영(청년), 최성모(전도사), 길선주(목사), 김병조(목사), 유여대(목사), 정춘수(목사).<경성일보>       


둘째는 기독교인 유관순 열사의 순국이다. 그의 순국은 단순히 개인적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조선예수교회의 마음이었고 신앙이었기에 중요하다. 그는 마지막 교수형을 당하던 순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에게서 가장 유감스러운 점은, 내 조국을 위하여 바칠 수 있는 내 목숨이 단 하나뿐이라는 점이다’ 아, 이런 순결하고 결기에 찬 최후의 진술이 어떻게 가련한 소녀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을까? 그 속이 무엇으로 가득 차있기에, 그런 불후의 진술이 나온 것일까? 


그 속에 예수와 그의 십자가와 부활의 영에 가득 찼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제 이런 모습을 대하면서,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을 보려고 한다. 예수의 제자 되기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싸구려들이 발붙일 공간은 전혀 없다. 무조건 예수와 함께 있다거나, 그와 함께 가고 온다고 해서 그냥 제자가 되는 법은 없다. 그보다는 뼈 속 깊이에서 예수쟁이가 되어야만,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은 요즈음의 대학입시에 전력투구하는 수험생들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다. 


적어도 예수에게 자신의 삶과 미래를 맡기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계산이 나와야만 한다. 내가 예수를 좇을 때,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valuable), 실질적인가(realistic), 영적인가(spiritual), 정의로운가(justice), 그리고 영원한가(eternal)라는 차원을 두고, 치밀하게 따져보고 검증을 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예’라는 대답이 확실하다면, 그 다음엔 전적인 복종과 헌신과 충성을 바치면 되는 일이다.  


이런 검증이나 비움은 메시아 예수에 대한 의심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의 따름이 자기 소유나 목숨보다도 훨씬 가치 있고 기쁜 일임을 확증하게 하려는 데에서 나왔다. 이와 관련하여 성자 예수님도 당신을 좇으려는 자들에게 계산해보도록 친히 요구하셨다(26-33절). 성부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서도 복을 누릴 길을 제시하셨다(24절). 성령께서도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세상과 자신을 뛰어 넘어설 참된 기쁨의 삶이 있음을 보여주셨다(4:32-37절). 


어린 소녀, 유관순의 그런 최후의 증언은 그가 저 스테반 집사처럼 주님의 제자 됨의 영으로 가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보인다(행7:54이하). 바울은 이런 말을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도다’(고후5:14). 이제 주현절을 지나 주의 십자가를 향할 사순절을 앞두고 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의 마음과 영을 좇아 사는 가를 점검하자.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위해, 나는 어떤 값비싼 헌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해보자. 


1. 복음서 / 눅 14 : 25-35 / “ 소금은 좋은 것이나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5:13)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셨다. 이는 제자들이 세상에 대하여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상기시킨 소중한 말씀이다. 주님의 이 소명 부여는 소금이 가진 특성을 알면 금방 이해가 된다. 소금은 그 자체로서는 귀하지 않다. 하지만 놀라운 사회성(social)을 가지고, 다른 음식물들에 투여되어 침투하면, 놀라운 가치를 발휘한다. 자기를 조용히 희생시키면서, 상대의 맛과 품질을 보전하거나 변화를 주어서, 모두를 유익하게 한다. 그 때의 소금은 정말 귀물(貴物)이다! 


그렇다면 언제 소금이 귀물이 아닌 천물(賤物)이 될까? ‘짜게 하는 제 맛’을 상실할 때이다(34절). 올바른 사회적 기능을 상실할 때이다. 그러면 소금된 제자가 사회적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때가 언제이며, 사회적 기능이 퇴화될 때는 언제인가? 오늘의 예수님의 교훈은 그런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신자에게서 그 사회적 가능이 가장 활발하고 건강하게 발휘될 수 있는 때는, 아무래도 그 마음에 예수와 그의 나라의 영으로 충만해 있을 때가 아닐까.   


만일 예수보다도 그의 부모를 더 위하고, 처자를 사랑하고, 형제자매를 위하고, 나아가서 자기 목숨을 더 사랑한다면, 나의 진실하고 건강한 사회적 기능 발휘는 불가능해 진다. 그 때에는 내 안에 자리한 사적이고 육체적인 얽힘과 사랑이 주는 집요한 이기심 때문에, 내 안에서 발휘될 공정한 사회적 기능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우리도 유관순처럼 자유한 영혼으로 그 나라를 위하여 불씨가 될 것이다.  


1) 따라서 진심으로 주의 제자가 되려는 자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따라야 한다. 곧 예수와의 관계가 자기 가족들과의 관계 차원보다 언제나 우선적으로 자리하고 있어야 하며, 그렇다고 자기 가족을 버리거나 외면하지 않고 책임도 감당할 줄 알아야 된다는 점을 제시한 내용이다(26-27절 참조).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란 말은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이다(히브리, 아람어식). 언뜻 보면, 두 내용은 양립이 불가한 듯하나, 그렇지 않다. 예수 따름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하면, 전능자의 은혜로운 보호의 손길이 우리 가족들을 지켜주실 터이기 때문이다(마6:33 참조), 


2) 이어진 두 가지 실례(實例)들은 그 나라를 위한 치밀한 성찰과 거기에 따른 완전한 복종의 행동들이 매우 필요함을 일깨워 준다. 


☞ 건강한 신앙은 반드시 합리성과 타당성을 보유하고 있다. 무조건 ‘믿습니다’라고 외치며 밀어붙이는 마구잡이 신앙이 아니다. 특히 주님을 평생 따르고자 할 때에는(혹 성직의 길) 사전 준비성이 탄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를 우습게 만들고 예수의 사역까지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게 된다(28-29절).      

☞ 임금들이 싸움터에서 싸우기 전,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판명될 경우에는 미리 사신을 보내어 상대와 화친(和親)을 누리는 것이 지혜임을 상기시키면서(31-33절), 그리스도를 향한 제자의 처신도 어떠해야할 것인지를 말씀한다. 여기서 강한 이 상대는 그리스도 자신으로 보인다. 즉 강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를 겸손히 내려놓고, 주의 뜻과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일이 바로 제자 된 자의 삶이며, 세상의 소금의 삶도 가능하다는 내용으로 보인다.

   

2. 구약 / 삼하 24:18-25 / “ 값없이는 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


다윗 왕이 아라우나 타작마당을 방문한 일은 국가와 자신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였다. 자신의 잘못된 인구 조사로 여호와의 분노를 받아,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무려 70,000여명이 죽게 되는 대 참사가 발생하자, 다윗은 그 벌(罰)을 자기와 자기 집에다 쳐달라며 간구(제사)드리고자 방문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자 다윗은 자신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고 생명을 버릴 각오로 여호와 앞에 찾아 엎드린 곳이었다(16-17절 참조).   


땅 주인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였다. 그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왕 다윗 일행을 맞이하여 왕이 자기 땅을 사서 여호와께 제사 드리려 한다는 뜻을 확인 후, 왕에게 자기의 땅과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거져 드릴 터이니 마음대로 사용하시라고 표명하였다(18-23절). 


그러자 다윗은 그의 제의를 거절하고 정당한 값을 주어 직접 구매(購買)하겠다고 하면서, 은 50세겔을 주고 그 타작마당과 소를 산 후에, 그곳에서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 내리신 재앙을 끝내신다(24-25절). 이 때의 땅 지불금은 상당한 액수였다(렘32:9 참조). 그만큼 다윗은 그 곳에서의 제사에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그런 건강한 모습은 다윗과 이스라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다윗이 백성의 희생을 막고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희생적인 모습을 취하므로서, 그의 존재는 모세와 같은 존재가 된다(출32:11-14,30,32절 참조).  


2) 귀한 것일수록 공짜가 아니라,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취해야 그 가치가 영원하다는 점을 각인시켜주는 행위가 되었다. 만일 땅 주인 아라우나의 후의를 받아 자기 땅으로 삼아서 제사에 임하였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와 기도를 그리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특히 이런 행동은 그의 조상 아브라함의 행보를 답습한 것이어서(창23:16절 참조), 더욱 무게와 가치가 컸다. 지금까지도 헤브론의 막벨라 무덤의 실소유자는 여전히 ‘아브라함’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3) 무엇보다도, 다윗이 비싼 돈을 주고 직접 구매한 땅에 대한 권위와 후손들의 애착은 영구적이다. 까닭은 그곳이 바로 이스라엘의 첫 성전인 솔로몬성전 터가 되었기 때문이며(대하3:1참조),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에 흩어진 그의 후손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눈물로 기도하고 성인식과 각종 중요한 행사들을 진행하는 ‘통곡(痛哭)의 벽’이 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구매한 아라우나의 땅이 그토록 역사적인 가치를 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 어찌, 다윗의 경우만이겠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나 봉헌물이나 인물들의 가치와 무게도 시공을 초월해 빛을 발하게 될 것임을 우리는 주목하며 믿어야 하겠다. 


3. 서신서 / 행 4:32-5:11 /   “ 이제 선택하라! 바라바냐, 아나니아와 삽비라냐 ”


본문은 예루살렘의 초대 원시교회 안에 주의 백성들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두 모습으로 응답한 일들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한다. 우리에게도 결단도 촉구한 말씀이다!  


전반부(4:32-37절)는 교회 대부분의 신도들이 열린 마음으로 공생, 공영, 공존의 신앙공동체를 이루면서, 마음과 뜻이 하나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물도 필요를 따라 나누어 사는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소개한다. 이 일은 예수의 부활신앙의 힘 때문이었다(32-35절). 그 바람에 그 교회 안에는 서로가 자기의 것을 사도들 앞에다 내어 놓았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어서,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 놀라운 지상 천국의 현장이었다. 

   

1)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헌신자가 있었다. 바로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 바나바였다. 디아스포라였다. 그는 그의 소유의 전 재산인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내어 놓았다(36-37절). 그 바람에 그는 사도들과 교회 공동체의 큰 신뢰를 얻게 되면서, 교회 부흥과 선교 활동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부상(浮上)하게 되었다. 특히 사도 바울의 핵심 선교 파트너로 활동하기도 했다(9:27,11:22-26,13-15장, 고전9:6,갈2:1,9,13 골4:10 참조). 


2) 반면에 불행한 인물들도 있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였다(5:1-11절). 그들도 자기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두었으나, 일부를 감추고 내놓으면서 전부를 바친 양 행세를 하였다(2-3,8-9절). 이를 아신 성령께서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그들을 책망한다. ‘성령을 속이며,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다’는 거였다. 이것은 거짓과 위선에 빠진 그들에게 저주가 되어 사망하게 되면서, 교회가 장례로 그들을 떠나보낸다. 주의 단호함에 온 교회가 두려움에 빠졌다(11절). 


o 예수 제자의 길의 요건은 철저한 자기 부정이며 자기 것의 내려놓음이다. 아나니아 부부와 같은 거짓과 위선은 발붙일 수 없다. 횡재(橫財)를 바라는 태도로는 결코 천국 문을 열 수 없다. 소금처럼 모두에게 자신을 내어주려는 헌신과, 최상의 귀한 것으로 주님께 나아가려는 다윗과 바나바와 같은 선택이어야 그 문은 열린다. 이런 영성이어야 삼일정신도 계승할 수 있다


봄과 함께 사순절의 문턱에 다다랐다. 인류 구원의 문을 여시고, 닫혔던 낙원의 문을 여시고자 예루살렘 갈보리를 향해 올라가시는 주님의 행진을 다시 주목하자. 겸손과 진정으로, 참 제자 됨의 모습을 회복할 절기가 되게 기도하자. 특히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국민의 우려를 씻어줄 구원의 절기가 되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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