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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2-02-15 (화) 23:29 2년전 413  

본문)  눅 9:57~62, 수 1:1-9, 고전 10:1-13


주현절 일곱째 주일이다. 제주 한 달 살이 후 되돌아 온 서울살이가 다소 어색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 다시 금세 익숙해졌다. 제주에서의 짧았던 삶이 나에겐 기후와 환경면에서 너무 강렬한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그러나 이곳 도시 생활은 내 삶의 오랜 기반이었던 연고로, 다시 순응하는 데에 그리 힘들 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세나 초미세 먼지와의 숨바꼭질도 익숙하고, 현재 대유행 중인 코로나 오미크론과의 줄다리기에도 유연함을 발휘하면서 말이다.  


요즈음 연예계가 10년-20년 떠났던 옛 스타들의 복귀전이 활발하여, 그들의 옛 모습을 찾기 위한 몸부림을 지켜보면, 매우 눈물겹다. 그러면서도 ‘역시 스타’라는 느낌도 준다. 그들의 증언 속에는 이런 말이 새삼 의미 있게 들린다. ‘비록 오랜 세월 무대를 등지고 살아서 육체는 굳어 있으나, 그래도 정작 그 무대에 서니 내 몸이 알아서 말을 듣는다’. 이는 세월이나 거리 간격도 예전의 거기에 익숙해져 있던 자신들의 몸이 알아서 좁혀주더라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훈련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은 것이 사실이다. 신앙과 각종 훈련도 조기 교육의 효과는 크다. 나이 들어 시작한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 지난주일 말씀에서 예수께서 당신에게 오는 어린이들을 제지하던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어린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다’(막10:14절)라고 하신 말씀도, 어린이의 교육과 훈련이 가장 효과를 낼 대상으로 보셨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교육의 특성도 조기 교육이었다. 그 탁월한 모델은 바로 어린 사무엘이었다. 엄마로부터 젖 떼면서 하나님께 바쳐진 아이 사무엘은 결국 격동의 시대를 이끈 이스라엘 민족의 대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삼상1:21참조). 그 흐름은 계속됐다. 지금도 저들 이스라엘은 3살부터 아빠에 의한 토라교육에 들어가잖은가? 우리도 물론 조기 교육에 눈이 뜬 민족이다. 큰 차이라면 그게 신앙이 아닌 기능 위주의 조기 교육이란 점이 크게 아쉬울 뿐이다.  


다시 주목할 부분이 있다. 대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다수가 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상속하지 못한 체, 그들의 생애를 황량한 광야에서 끝낼 수밖에 없었는가? 왜 그들이 아니고, 그들의 후대들인 20세 이하의 젊은이들 세대에게 넘어간 것이었을까?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길이 얼마나 멀어서 그랬던가? 아니다. 가나안으로 직행하려면, 단 열 하루 길에 불과한 짧은 코스였다. 그러면 거리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였나? 


혹,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부족해서였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이 애굽의 바로의 압정(壓政)도 뚫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며, 하늘과 땅에서 장관으로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대 장관(壯觀)의 쇼를 직접 몸으로 체험한 주인공들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의 원색적인 은혜와 능력을 맛본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들의 문제였나? 


사도 바울도 그런 그들의 화려했던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은혜 체험들에 관하여 이렇게 확인해 주었다. ‘그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라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전10:2-4절). 그럼에도 그들 다수(多數)는 하나님의 배척을 받게 되어, 끝내 약속의 땅이 아닌 광야에서, 그들 삶의 최후를 맞게 된다. 심지어 그들의 리더였던 모세까지도 그들과 함께 제지를 당하고, 젊은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대임을 넘겨야했다(수1장,신3:26-27참조). 


대체 왜 그랬나? 그들 절대 다수가 하나님의 기쁨에 들지 못한 까닭이다(고전10:1-5참조).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또한 광야에서의 신앙 훈련의 과정을 잘 감당하지 못한 체 각 가지 욕정과 배신적 행위에 빠져 살다가 그런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고전10:5절,하). 그들의 구체적인 타락과 탈선의 모습들에 대하여서도 바울은 비교적 상세히 전하였다(7-10절).     


그런 점에서 오늘의 메시지는 매우 도전적이다. 곧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숱한 은혜와 축복들을 받았다는 것이 곧 구원을 보장한 것은 아니다’는 점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본래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주시기를 기뻐하셔서 만민 누구에게나 동일한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다 깊은 관심은 당신이 주신 그런 은혜와 사랑을 누가 잘 감당하며 따르냐에 있다. 이 점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0절)라는 말씀과 연결되는 내용들이다.  


1. 복음서 / 눅 9:57-62 /  “쟁기를 쥐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복음서의 성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자들의 조건에 대하여 매우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입장을 제시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志向)하는 삶의 가치가 세상의 그 어떠한 내용들보다도 훨씬 더 우위(優位)에 있음을 알고 있는 지의 여부와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주를 따르는 일이 ‘얼마나 엄중(嚴重)하고 외통수의 자리(?)’에 서 있는 지를 깨달지 않으면 안된다. 곧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나 주님을 따르겠다는 자들은 누구나 이 말씀을 끌어안고, 그 부르심에 숙고(熟考)하며 순복(順服)하겠다는 절대적 헌신(獻身)하는 시간이 선행되어야만 하겠다. 주를 따르려는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따르는 일에 이런저런 조건이 개입되면, 그 의지와 의미는 퇴색(退色)되기 때문이다. 


옛 생각이 난다. 내가 목사로 임직하는 날, 새벽 개인기도 시간에 나는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한동안 억제할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아닌 뺨을 적시는 서늘하게 한 눈물이었다. 뭔가와 작별하게 되고, 새로운 영적 지평에 내가 들어가게 되는 순간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후의 내 삶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공인(公人)의식과, 사(私)보다는 공(公)의 가치를 중시하는 변화의 삶을 좇아 살게 되었다.  


본문에는 세 가지 경우의 주를 따름에 얽힌 사례들이 교훈(敎訓)을 담아 제시되고 있다 :


1) 첫 경우는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라며 예수께 따름을 자원(自願)하고 나선 경우였다(57절). 학자들은 이 인물이 제자단 밖에 있던 인물로서, 아마도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신분과 안정된 삶을 누리던 자로 보고 있다. 당시의 서기관 중의 한 사람으로도 본다. 이런 사람이 혹 제자단에 합류한다면, 제자단의 역량과 사역엔 큰 힘이 될 수도 있었던 자였다. 


☞ 이에 주님은 당신의 처지와 형편을 열어 소개하시는 것(여우나 새도 자기 굴과 집을 갖고 살지만 나에겐 머리 둘 곳조차 없다/58절)으로서, 무방비적 삶을 취하여 사시는 당신의 모습을 소개하신 것으로 대답하셨다. 무엇을 전하려 하신 것일까? 부자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자에게도 하나님 나라는 열려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당신의 처지처럼, 낮고 천한 자리에까지 낮아짐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함을 통보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과연 주를 따를 수 있었을까! 


2) 둘째 상황은 전혀 다르다. 주님이 그를 필요로 하셔서, 직접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것이다(59절). 아마도 그는 제자단에 속한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그에겐 마침 부친 별세로 인한 상중(喪中)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요구에도,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는 주님에 대한 불신과 거부에서 나온 답변이 아니었고, 일반인에게는 율법에서까지 허용한 경우였고, 후손으로서의 최고의 선행으로도 간주된 일이었다. 

       

☞ 하지만 주님은 단호하셨다. 일반인과 다른 제자의 삶은 죽은 자에 대한 이별보다는 산 자를 위한 선포와 봉사가 보다 우선(于先)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이는 율법에서의 제사장과 나실인들에게 부여된 수준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이다(레21:11, 민6:6-7참조). 그래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라고 명하셨다(59절). 이는 가족들을 향한 소명인의 태도의 기준점이기도 하여서, 늘 새겨 두어야할 대목이다.


3) 셋째의 경우는 누가복음에만 나온 것이다. 역시 무명의 자원자였는데, 그는 주를 따르기는 하겠는데, 그 전에 가족들에게 하직 인사는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61절). 주님의 대답은 어떠했나? 역시 단호하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답하셨다(62절). 인정이나 예의에 이끌려 다니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어서는 아니 됨을 확실히 하신 것이다. 그 나라 선포에 투신한 이에게는, 사사로운 작별 인사도 불허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내 거신 따름의 엄격한 조건에 가장 합당할만했던 모델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하나님은 구약의 여호수아를 하늘 소명을 좇는 모든 자들의 모범으로 제시하여 주셨다.  


2. 구약 / 수 1:1-9 / “ 강하고 담대하라. 율법을 지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


오래 전부터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한 최종 진군(進軍) 명령이 여호와로부터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떨어졌다. 그 때는 모세가 죽은 직후였다(1-2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2절,하). 그러면서 여호와는 여호수아가 그 과정에서 시험에 들 수도 있는 그 어떠한 가능성도 미연에 차단시키고자,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씀들을 전해 주셨다(3-9절).    


1) 그들이 들어갈 땅 가나안은 여호와께서 일찍이 그들 조상에게 맹세하며 주시리라 언약하셨던 땅이다(2-3,6절). 따라서 이제 때가 되어, 여호와가 들어가 취하라는 명령에 믿음으로 응답하면 되었다. 그 땅들은 정차 다윗과 솔로몬 시대까지도 포함된 영역(광야-레바논-강 유브라데-헷 족속의 온 땅-지중해 등 포함/3절)들이었다(4절).   


2) 이제는 지도자와 백성들의 마음이 중요했다. 어떤 마음인가? ‘오직 강하고 담대해야 했다’(5,6,9절)! 주신 하나님보다 더 강한 대상이 없음을 굳게 믿어야만 했다(9절). 좌고우면(左顧右眄)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 땅을 주신 분이 그들과 동행하셔서 그들의 행진에도 함께 하실 터이기에(5절), 더욱 일사 분란한 믿음의 행동들이 필요했다.  


3) 법(율법)에 대한 순종은 절대적이다. 그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주야로 묵상하며 그 율법을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고, 좌우(左右)로 치우지지 말아야 했다(7-8절).  


4) 그렇게 말씀에 순복하는 신앙의 결과도 약속되었다. 바로 ‘형통(亨通-good sucess)’이다!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잘되고 형통하는 복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었다(7-8절). 


3. 서신서 / 고전 10:1-13 /  “감당치 못할 시험은 없다. 피할 길과 감당할 능력도 주신다”  


고린도교인들은 헬라인의 우수성에다 신앙적으로도 많은 은사와 능력들을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풍요로운 영적 상황은 뜻밖에도 육체적이고 인간적인 자랑들을 내세우는 흐름으로 변질되면서, 서로 자기 식견과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흐름에 빠져들면서, 공동체의 일치가 파괴되고 분열의 아픔에 빠져 드는 바람에, 성령의 큰 걱정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에 바울 사도는 서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은혜와 기적의 능력을 입고 살았던 조상 이스라엘의 광야교회 40년의 생활을 소환하면서, 그들이 결국 왜 하나님의 배척을 받아서 가나안에도 못 들어간 체 죽게 되었는 지를 구체적인 실례로 들면서, 그들의 대 각성을 촉구하였다.


1) 바울은 조상들의 출애굽을 세례로, 광야에서의 만나 공급에 따른 생존을 성찬으로 비유하면서, 그들이 그토록 하나님의 세례와 성찬이란 놀라운 은혜와 배려를 받고서도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배제되어 광야에서 멸망 받게 된 일들을 고린도교인들에게 상기시킨다. 그 까닭은 조상들의 실패 사례가 지금의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행태를 향한 경고용 본보기가 되며, 말세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각성제가 되리라고 본 것이었다(1-5,6,11절,롬15:4 참조).


2) 광야에서 악에 빠져 죽은 조상들의 행태도 지적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 있었고(7절), 음행으로 하루에 23,000명이나 죽기도 했으며(8절,민25:1,9절), 주를 시험하다가 불뱀들에게 물려죽기도 하였고(9절,민21:4-6절), 원망하다가 멸망당하기도 하였다(10절,민14:35-36참조). 


3) 이를 거울삼아 바울은 모든 성도들에게 뜨겁게 권면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2절)면서, 다음의 말로서 그의 백성들을 향하신 선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을 의심하지 말고, 어떤 경우에도 주어지는 시험들에 넘어지지 말고 피할 길을 주셔서 감당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라고 권면했다(13절, 8절 참조).


o 때마침 대선 국면에서 시험당할 일들이 우리를 흔든다. 거짓과 진실 공방을 정치적 논란차원으로 치부하면서, 자신의 위선과 정치적 잘못된 선택을 호도하려고도 한다. 주님의 말씀인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라’는 말씀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특히 기독교의 타락한 위선 세력과 낡은 거짓 예언자들의 행보가 개탄스럽다. 교회의 얼굴을 심히 부끄럽게 한다. 이럴수록 미래를 위하여, 진리의 말씀 위에 서는 새로운 무리를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빠를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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