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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신학교육주일

관리자 2022-02-08 (화) 21:27 2년전 371  

본문) 막 10:13~16, 신 4:32-40, 고전 3:18-23


주현절 여섯 째 주일이다. 우리 총회는 이 주일을 신학교육주일로도 정했다. 모든 교육 자체가 언제나 중요하지만, 그 중에 하나님 교육의 중요성은 너무도 막중하기에, 우리는 이 주일을 귀하게 엄수하려 한다. 하나님 교육, 즉 신학(神學)교육은 모든 교육의 머리 교육이다. 마치 모든 인간들에게 부모가 존재의 뿌리이듯이, 생명체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와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기고자 함이다.  


안타까운 일은 요즈음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 운동과 그로 인한 모임들이 다양한 제재(制裁)들을 당하면서, 교회의 집회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훈련과 교육에도 많은 악영향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런 영향이 최근 교회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을 생산하는 모든 신학대학교들의 지원자 급감(急減)으로도 이어지는 현상도 초래하고 있어서, 그 안타까움도 커졌다. 참으로 한국교회들이 긴장하고 기도해야할 일이다. 


부디 이런 신학교육의 위축 현상이 길게 이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비록 일시적 인원의 축소는 불가피할지라도, 이럴 때 일수록 신학교육의 질적 수준은 더욱 향상되고 개발되며, 양질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생산되도록 범(凡)교단적으로 방안들이 강구되어야 하겠다. 그래서 머잖아 새 시대를 열어가는 데에서 우리 교회의 신학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창조적이고 선도적 영향을 공급해 주어야 하겠다. 모든 교회들은 이를 위하여 기도와 지혜를 모아주어야 하겠다. 


올바른 신학과 신앙은 인간의 영혼과 삶을 매우 풍요롭고 건강하게 한다. 그러나 잘못된 신학이나 신앙은 인간의 삶을 매우 폐쇄적으로 전락시키고 몰락하게 한다. 그러기에 모든 교회나 성도는 항상 학도의 심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힘써 배우고 익히며, 그를 사랑하고 전하기에 힘써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가정들의 자녀 신앙교육도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가정과 가문이 중단 없이 믿음의 가계를 튼튼히 이어가게 해야 한다. 최고의 복이 될 것이다.


그러면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어떤 측면에서 우리 삶에 필요한 하나님 교육(신학교육)을 제공하는가? 큰 틀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신앙교육의 내용들을 제기한다고 보인다. 


복음서에서는 성자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요한 마음가짐이 무엇인지를 어린이들을 모델로 삼아서 일깨워 주신다. 구약 신명기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이 반드시 갖추어야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신론)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상세히 가르쳐 준다. 서신서에서는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교회를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소유해야할 지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지침을 제공한다.  

    

1. 복음서 / 막 10:13-16 /  “하나님 나라를 어린이처럼 받들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


예수님의 아이들을 보시는 시선은 아주 밝고 따뜻했다. 당시의 기성세대들(어른들)이 가진 아이들을 향한 시선과는 아주 달랐다. 당시는 아이들을 ‘이등 시민’ 수순으로 얕잡아본 것이 현실이었다. 이런 모습은 –지금은 다소 개선된 것이지만-, 얼마 전까지의 우리 한국사회의 아이들을 보는 시선과도 흡사하다. ‘어린 것’, ‘아무 것도 모르는 것’, ‘철부지’, 심지어 ‘건방진 것’ 등등의 매우 열등하고 부정적인 시선들로 아이들을 뒤로 밀어내던 일반적 인식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시선과 평가는 매우 높고 따뜻하다. 비록 나이와 경험과 체력에서 부족한 세대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탄탄한 미래성을 보유했고, 어른이나 기성세대들이 세상에 빼앗겨버린 변화의 가능성을 강력히 보유하고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님에게 아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맑은 영성을 소유하고 있어서, 당신의 나라를 전수시키기에는 훨씬 더 유연성과 수용성이 좋은 존재들이였다. 즉 미래성과 가치면에서 하이 레벨에 있었다.       


즉 아이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영성과 수용성이 좋은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예수를 접하면 접할수록, 그의 미래는 더욱 밝고 희망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만큼 가감 없이 민감하고 순수하게 주님의 말씀과 그의 나라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이렇게라도 속성으로 부흥한 데에는, 어린이 교회학교에 대한 활발한 교육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이 어린이 교육부분에서 지금 한국교회는 큰 기로에 있어서 큰 위기다.  


1) 제자들은 스승 예수로부터 뜻밖의 책망을 당했다. 그것도 모여드는 아이들로부터 선생이신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아이들을 제지하며 꾸짖다가 받아낸 스승의 책망이어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어쩌라는 것인가? 주님의 책망의 이유는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였다(13-14절). 어린 세대를 용납하는 문제였다. 

   

2) 이는 제자 교육용으로서, 제자들의 전통적인 어린이관에 큰 변화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앞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어린이들의 순수하고 열린 마음과 자세야말로, 가장 기성세대들이 본받아야할 내용임을 일깨워주고자 하신 것이다(15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후, 그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按手)하시고 축복(祝福)하셨다(16절). 미래 세대에 대한 대 포용이셨다.  


3)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어린이 같은 마음과 자세가 기본이요 필수이다. 하나님은 주시고 베푸시면서 기뻐하시는 아버지요, 우리는 받기 위해 손 벌리고 매달린 그의 어린이여야 한다. 어른들은 잃어버린 그 순수함과 열린 자세를 아이들에게서 다시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경계심이나 의심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는 가장 치명적인 적(敵)이다.   


4) 아울러 우리 자녀들이 일찍부터 하나님의 자녀들로 자라고 성장하도록 적극 응원해야한다. 



2. 구약 / 신 4:32-40 /  “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라 ”


본문은 출애굽 3-4세대를 향한 모세의 하나님 교육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그것도 광야40년 생활 과정에서 자라고 태어나서, 성장하여 이제는 미래의 이스라엘을 책임져야할 세대들을 위한 하나님 교육이었다. 그들 앞에는 가나안족들이 오랫 동안 섬겨왔던 토종이자 풍요의 신인 바알(baal)이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기에, 모세는 그 이전에 더욱 철저한 신론(神論) 정립이 시급함을 절감한 것이다. 빠를수록 효과는 크다. 


여기서 지도자 모세는 지금까지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펼쳐 보이신 놀라운 일들을 기저(基底)로, 백성들이 가슴에 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다음과 같은 정리된 신론을 가르쳤다. 


1) 먼저 온 세상 전체를 만드신 창조주로서 그 어떠한 신들에게서 감히 찾아볼 수 없는 놀랍고 크고 기이한 일들을 펼치신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한다(32절). (그 범위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로 표현한 것은 당시의 세계관의 표시이기도 하다. 둥근 지붕 모양의 하늘이 땅과 마주 닿은 것을 땅의 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모세는 어떤 면에서 세상 그 어떤 신들과는 달리, 그렇게 놀랍고 크시고 두렵고 살아계신 분이신 지를 보다 상세히 언급한다. 

  

2) 꺼지지 않은 불 가운데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임을 증언한다. 자신의 호렙산 경험과 십계명 받음에서 나온 생생한 체험 때문이었다. 그 일로 그는 불 가운데에서 소명을 주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던 것이다.(33,36절, 출3:2-5,20:1,18,20 렘23:29참조).   


3) 출애굽 때에 한 민족(이스라엘)을 다른 민족(애굽)에서서 빼내어 인도하시면서 보여주신 놀라운 역사들 때문이었다. 그 때 여호와는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을 애굽의 바로와 그의 백성에게 펼치시면서, 결국은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어 히브리백성의 애굽 출국을 허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대미(大尾)를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시는 초자연적 능력으로 그 일을 끝내신 일 때문이었다(34절, 신7:19,11:2-3,26:8,34:11-12참조). 


4) 이런 능력과 크고 놀라운 당신의 모습을 자신들에게 보여주신 까닭에 대하여 모세는 이렇게 정리하여 백성들에게 밝힌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려 하심이다’(35절). 곧 ‘여호와는 참 신이요 신중의 신인 유일(惟一)한 신임을 알게 하려하신 것’이었다. 신들은 많지만, 참 신이요 살아계신 진짜 신은 오직 여호와뿐임을 밝혔다 


5) 추가(追加)할 부분이 두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그들 조상(祖上)들과의 절친의 관계였다. 바로 여호와는 그들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셨다.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 후손들까지도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셨다. 그래서 그들을 통하여 그들 조상들과 언약하신 내용들을 성취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책임지시는 분이자 역사의 하나님이심을 보이셨다(37절 참조)!  


또 하나는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강대한 민족들을 쫓아내는 하나님의 능력을 잇달아 맛보게 하는 복을 주신 것이다. 그들의 상대는 약소국이나 민족이 아니라, 당시의 제국들과 강대국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하게도 하셨지만 그러나 결국엔 그들을 넘어서게 하시는 기이한 민족이 되게 하신 것이다(38절). 세상의 두뇌 집단의 면모를 그렇게 보이게 하신 것이다. 

여기에는 아브라함 후손인 십계명의 모세와 십자가의 복음을 주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 애굽을 넘어서게 된 이스라엘,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그곳의 주인이 된 이스라엘, 바벨론에 먹혔으나 페르시아의 우대 속에 귀환한 유대민족, 로마제국에 짓밟혔으나 결국엔 로마황제가 예수 그리스도교를 자신들의 국교로 공인하게 된 이스라엘, 2차대전까지 세계에 흩어진 민족이었으나 대전 후 아랍제국의 물리치고 수복하여 국가를 세운 이스라엘, 미국과 러시아등 세계 강대국의 두뇌 역할을 수행중인 이스라엘---, 참 불가사의한 민족으로 선택받은 것이다.  


6) 이런 크고도 기이한 하나님의 축복을 선택적으로 받게 된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태도를 취함이 마땅한가? 모세의 교육은 그 부분에까지도 이른다. 그들의 응답하는 태도는 저 어린이들과 같아야 된다(childlike, not childish). 오직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규례와 명령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과 후손들이 여호와께서 안겨 주실 그 땅에서 기리 살게 되는 복을 지켜내야만 한다(39-40절). 



3. 서신서 / 고전 3:18-23 /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알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고린도교회는 웬일인지 역대 목회자들에 대한 선호(選好) 문제로 내홍에 빠져 있었다. 개척자였던 바울, 후임자인 바나바, 영적 지도자인 게바(베드로) 등에 대한 선호 문제로 분열상에 빠져 든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교인들이 그런 움직임에 휘말리면서, 그들 믿음 생활에 적잖은 장애에 빠져든 것이다. 이런 소식을 접한 사도 바울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서, 그런 모습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며 어리석은 짓이기에 어서 중단되어야 할 일임을 지적하였다. 


1) 우선은 이런 목회자들이 가진 은사나 특성 때문에, 교인들이 서로에 대한 선호를 밝히며 분열상을 보이는 일은 마치 하나님의 것을 인간이 평가하려고 드는 행태와 같아서, 그 자체가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22-23절). 교역자에 대한 평가는 결국 하나님뿐임을 알아야 된다.  


왜 그런가? 바울-바나바-게바 등은 모두가 하나님이 친히 택하여 세우신 교회 일꾼들이기에 하나님의 소유이다. 물론 좁게는 그들 목회자는 교회에 속하지만(21절), 근본은 하나님의 소유들이다(23절). 그러기에 교인들이 선호도를 앞세워 모두가 분열에 빠져드는 일은 하나님의 선택에 인간이 집단적으로 평가하려 드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매우 비신학적이고 비신앙적이다. 따라서 그런 행태는 즉시 끝내야만 한다. 하나님이 헛것으로 아실 뿐이다(20절). 

   

2) 하나님의 사람들은 올바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선 사람은 오직 하나님과 그의 판단이신 말씀을 믿으려고 해야지, 자신과 자신의 입장과 뜻을 더 믿으며 관철시키려하면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뿐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시며 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의 나는 언제나 나보다는 그 분과 그의 말씀을 우선 선택하고 복종해야 참 지혜에 이른다.    


3) 바울은 주를 믿는 우리에게 먼저 ‘어리석은 자(어린이 같은 자)가 되라’고 권한다(18절).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인데, 자기 지혜를 고집하면 결국 하나님에 의해 자기 꾀에 빠지게 되고, 헛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19-20절).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의 최상의 지혜는 ‘자기는 낮추고 주님은 높이는 일’이다. 모든 것이 주의 몸 된 교회에 봉사하도록 주어진 공적 대상임도 알자. 주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내 삶의 내용과 신뢰의 토대가 될 수 없음이다.


o 오늘엔 무슨 신학교육을 받았는가? 어린이와 같은 마음과 자세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배웠다. 이런 마음은 창조주 하늘 아버지의 압도적인 능력과 그의 자녀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알수록 더욱 가능해진다. 주 앞에서 나의 어리석음을 고하며 주의 놀라운 지혜로 채움을 받게 해달라며 간구하자. 하나님 앞에서 내 판단을 개입시키면 안 된다. 자기의 것보다 하나님의 것이 나를 살리고 구원함을 믿자. 오직 주 앞에서 더욱 겸손하고 나를 낮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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