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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해외선교주일

관리자 2022-02-02 (수) 10:55 2년전 416  

본문)  눅 12:49~59, 렘 23:23-32, 계 1:8-1-5


o 총회제정주일 – 해외선교주일 


o 세 분문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오늘은 주현절 다섯째 주일이다. 총회는 이 주일을 해외선교주일로도 지킨다. 교회는 본질상 

선교 공동체인데, 그 선교의 영역은 한없이 다양하다. 국내, 해외, 의료, 직장선교 등등 그 분

야와 영역들이 한없이 다양하다.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말한다. 이런 중에 새해 

첫 번째로 해외선교가 올라있다. 그만큼 해외선교의 비중이 막중함을 생각하게 한다.   


선교의 출발은 아무래도 행1:8에서 주셨던 주님의 마지막 유훈(遺訓)에 있다. 거기에서 보면, 

지역 선교를 생각하게 하는 ‘예루살렘 선교’, 국내 선교를 생각하게 하는 ‘온 유대 선교’, 소외 

지역과 이질(異質)영역 선교를 생각하게 하는 ‘사마리아 선교’, 그리고 온 세계와 해외 만민들 

선교를 생각하게 하는 ‘땅 끝 선교’가 모두 그 말씀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선교의 기본은 무엇인가? 온 세상과 만민의 주권(主權)은 하나님께 있다는 점을 전하는 데 있

다. 또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일깨워주는 데에 있다. 그래서 세상 만민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참 주인을 찾게 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도록 일깨워 주는 일이다. 그를 

위하여 선교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먼저 해결할 과제가 있다. 


곧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聖靈)부터 받는 일이다. 그래서 자신을 파송하신 이의 마음

과 영이 성령이 주신 능력으로 충만 해야만 한다(행1:8). 그래야만 현장에 나가서 엉뚱한 소리

(?)를 하지 않고, 자신을 파송하신 분을 제대로 전하고 보여 줄 수 있게 된다. 그래야 복음의 

열매들도 제대로 맺게 된다.   


선교인(宣敎人)이란 말은 선교사(宣敎師)보다 훨씬 더 보편적 표현이다. 선교사는 특별한 부름

과 훈련을 받은 이로 구별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본질상 그리스도인들로 구별 받고 구

원까지 받은 이들에게도 예외 없이 부여된 과제는 바로 ‘선교하는 자’라는 본분(本分)이다. 그

것은 내가 받은 모든 하늘의 은혜와 은사들은 모두 나만의 것이 아닌, 모두에게도 함께 나누

고 공유해야 될 하나님의 것들임을 시인해야할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교인들은 먼저 인지해야 할 내용이 있다. 선교는 항상 미지의 것과 새 것들만

을 향한 것이 아니며, 또 ‘전혀 낯설고 모르는 세계만을 향한 영역들만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곳 

선교지에는 거짓과 어둠의 세력들이 있고, 싸워야할 영역들이 있다. 즉 이미 그곳에는 진짜 주인

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차지해서 그곳의 터줏대감 노릇하는 거짓과 가짜 주인들이 존재하기 때문

이다. 그들은 선교인들의 선교를 훼방하고, 무서운 위해를 가하기도 한다.  

      

이 점을 지적하는 까닭은 오늘 세 본문 말씀들이 그런 거짓 세력들과 위선적 세력들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의 불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선교인들이 선교에서 

넘어야 할 가장 큰 걸림돌은 모두 이런 거짓 세력들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교에는 이러한 

불의한 세력들이 있다는 점을 아는 것, 그런 세력들의 방해와 저지도 기필코 극복해야만 된다

는 것, 그래서 선교의 열매들은 반드시 거두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이런 장애 세력들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 안게 된다면, 그것은 선교인으로서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일이 되고 만다. 하나님 나라의 문이 그곳에서 차단되기 때문이다. 선교인들은 

이 점을 사전에 잘 알고 거기에까지 대처해야만 한다. 선교의 귀한 열매를 맺기 이전에, 이런

장애물들이 있음도 알고, 반드시 지혜롭게 이겨내야 한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만 받게 되면, 선교를 위한 싸움에서의 승리는 반드시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가슴 속에 어떤 불(fire)을 품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려고 하

셨는지를 확인해 보자. 세 본문들에는 모두 그 분들이 품었던 불에 대한 증언들이 담겨 있다: 


1. 복음서 / 눅 12:49-59 /  “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 


세례 요한은 일찍이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실 분으로 소개한 바 있었다

(눅3:16절). 그 점은 예수께서 불을 가지신 분으로서, 당신이 그 불을 전파할 분이라는 말이기

도하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예수의 그 불을 목격할 수 있는가? 바로 오늘의 복음서에서이다.     


성자 예수님에게 있던 불을 보자. 그의 가슴에는 사람들 중에 의(義-옳음)를 위해 분기(奮起)할 

자들이 일어나지 아니함을 통탄해하시는 (열)불이 타고 있었다(57절). 그것은 당시의 모든 사람

들이 ‘세상이 그렇고,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나라고 어찌할 수 없다’라는 대세주의자(大勢主義者)

로 행세하면서 불의한 세상에 동조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당시의 대세였는가? 바로 당시의 국가종교인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의 행태에 

대한 묵인(默認)이었다. 그들은 모세가 전한 율법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들이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하도록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고, 도리어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삼아서 율법으로

는 결국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당시의 유대교는 율법

을 구원의 법이 아닌 심판과 사망의 법으로 퇴락(頹落)시키고 말았다.   


그런 모습은 본래 율법을 주셨던 성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다. 본래는 살리려는 법이었는

데, 그들이 그 법을 잘못 집행하면서 그 법이 사람을 짓밟는 법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러기

에, 그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 대하여 열불이 나 있었다. 그것은 법조문(條文)에 

매여서, 그 법이 안고 있는 살림과 회복과 구원하려는 의도가 완전히 고갈되면서, 하늘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실로 구원의 실종 사태였다. 


따라서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님은 그 대안(對案)을 전하고자 하셨다. 두 갈래들로 당신의 하늘 

선교를 진행하셨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을 살림의 법이 아닌 죽임의 법으로 만든 종교

집행자들과의 투쟁(鬪爭)이었다. 모든 복음서에서 나온 예수님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과의 논쟁

과 토론이 그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 요 8장은 가장 격렬한 유대 종교인들과의 투쟁사였다. 거기

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매우 격렬한 독설을 퍼 부으셨다.  


‘그 따위 수준으로 너희가 어찌 아브라함의 자손이랄 수 있느냐’라며, 법 집행자들을 격렬하게  

비난하신 것이다(요8:39-44절 참조). 주님의 이런 단호한 언행은 다 뜻이 있었다. 그 독설(毒

舌)로서 주님은 그들의 잘못을 만천하에 알릴 뿐더러, 중간에서 갈팡질팡하는 무리들로 하여

금 그들의 영향에서 확실히 격리(隔離)시키도록 유도하고자 하심이었다. 

 

또 다른 방법은 기존의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 법을 능히 뛰어넘을 자비와 긍휼의 법, 곧 사

랑과 섬김과 화해의 법을 전하고 심고자 하셨다. 하늘 아버지의 본심을 전하기에 목숨을 거신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종교로 인하여 죄인들의 자리로 밀려난 무리들과의 연대와 사랑과 도

움을 펼치셨다. 곧 죄인과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사셨다. 곧 심판자가 아니라 

의사와 치유자로 활동하셨다. 실로 선교사의 영원한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1) 주님은 당신의 이런 하나님 나라 운동이 어쩔 수 없이 가정과 가족, 그리고 모든 공동체에 

분열과 분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보셨다. 그 중에 특히 당신의 뜻과 비전에 공감하면서 당

신의 길을 따르는 이들을 응원하시는 말씀을 서슴지 않으셨다(49-53절 참조). 이는 그런 분열

이 외식과 무지에서 나오는 맹목적인 야합에 따른 모두의 몰사를 막아내고, 그들의 궁극적인 

평화와 화해를 도모하기 위한 기초 단계로서의 피할 수 없는 영적 과정으로 보셨기 때문이었다. 


2) 주님은 사람들에게 새 시대를 여시는 당신을 향하여 ‘줄서기’를 과감히 요구하셨다.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당신이 가져 올 불에 자신을 맡기고 그로 인한 고난의 세례까지도 기피하지 말 

것을 원하신 것이다. 위경인 도마복음은 이 부분에서 예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한다. ‘누구든지 

네게 가까이 있는 자는 불에 가까이 있고 내게서 멀리 있는 자는 그 나라로부터 멀리 있다’.   

☞ 그렇다. 나사렛 예수는 진정한 역사의 방화범(放火犯)이시다. 거짓과 위선을 태우고 진리와 

참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생명과 구원의 불길이 오직 그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의 가슴속에 있는 불을 옮겨 받지 아니한 자에게서는 진정한 미래를 기대할 수는 없다! 


2. 예언서 / 렘 23:23-32 / “ 내 말이 불 같이 아니 하냐 ” 


성자 예수의 가슴의 불은 본래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에게 있었던 불임을 보여준 본문이다. 

그것은 무슨 불인가? 바로 ‘말씀의 불’이었다(29절). 저 호렙산 가시떨기 앞에 선 모세에게서 

꺼지지 아니한 체 출애굽 선교의 소명(召命)까지 불러일으키셨던 그 불이었다(출3:2-4참조).    


그 불의 하나님이 지금 선지자 예레미야를 만나셔서, 불같은 분노를 드러내고 계셨다. 그것은 

당시의 만연했던 거짓 선지자들의 장난 짓들을 향해서 였다. 그들은 선지자란 이름을 이용하

여 자기의 꿈과 생각들을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것인 양 퍼뜨리면서, 백성들을 거짓의 세계속으

로 오도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여호와의 말씀이 훼손되고 유린하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질서가 무너져 국가가 대 위기에 빠져들었다(25-27절). 바벨론의 채찍을 맞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것도 다수의 거짓 선지자들의 행동들이 그 모양이어서(25-26,30절), 당시의 위정자는 물론 백성

들도 생명의 길이 아닌 멸망의 길로 빠져 들어가는 형국이었다. 그런 모습에 여호와께서는 지금 

대노하고 계셨고 응징하여 부셔버리겠다고 선언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않

느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29절). 이 말씀을 주신 상황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요즈음 우리네 모습을 연상케 한다.  


1) 모 대통령 후보와 그 부인의 주변이 무당(巫堂)과 주술사(呪術師)들이 깊이 개입하여 조정

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우리를 걱정하게 한다. 게다가 그들이 수만 명이 이른다고 하는 말도 

있는 데, 그들이 이번에 대선에서 권력을 장악하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가 심히 걱정된다. 

제2의 최순실 사건과 고려 말기의 신돈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닥쳐오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   


2) 지금은 거짓 뉴스가 홍수를 이루면서,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남의 꿈과 헛된 망상을 

무차별 받아들여서 진리는 막고 거짓은 퍼뜨리는 모순의 극치에 빠져 들고 있다, 그들에게는 나라

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자신들이 권력의 탈환만 이루어지면 된다. 사실 정권교제란 종종 이루어 

져도 괜찮다. 하지만 그 권력이 무능력자들에게 가면 국가에 재앙만 온다. 막무가내 교체를 부추기는 

권력 카르텔인 보수 언론과 검사와 재판부의 횡포를 엄중히 경계해야만 한다. 


3) 그 후보가 북한에 선제공격과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는 데다가, 때마침 북한도 계속하여 위협

적인 무기실험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 심각한 현상이다. 그는 사드 배치와 핵무장 등을 주장한다.

북한의 극단적인 호전성과 외통수를 유발하는 언행을 거침없이 밷는다. 되돌릴 수 없는 전쟁광을 

보는 듯하다. 실로 군대도 모르는 자의 극단성이 나라의 미래를 외골수로 몰아가고 있다. 


4) 게다가 우리 내부의 보수 세력들, 곧 기독교 극우세력들은 형편이 이런 데에도 그를 축복하며 

앞장서 지원하고 있다. 참 선지자가 아니다는 증거이며, 모두 거짓 선지자임을 스스로 입증한다. 

실로 큰 영적 위기이다. 정말 제2의 예레미야 시대, 곧 바벨론 포로기 직전의 형국으로 우리를 빠

져 들게 한다-! 이를 어떻게 막아야하나? 우선 여호와의 가슴의 거룩한 불이 우리에게 붙어야만 

한다. 그 불이 거짓 선지자를 치고 백성들을 오도하지 못하도록 타오르게 해야한다.  


-대안은 하나님의 불이 이런 괴물들의 등장을 쳐 막아 주시는 일이다. 불같고, 방망이같고, 바

위 같은 파괴의 능력으로 저런 불의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도록 매달리는 길만 있다. 


3. 서신서 / 계 8:1-5 /  “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게 한 제단(하늘)의 불 ” 


포악하고 무자비하며 타락한 세상이 결코 제 맘대로 날뛰도록 그대로 두지 않은 심판자가 있

다. 바로 하늘 보좌에 계신 이의 제단에 있는 불이다. 한 천사가 그 불을 땅에 쏟아버리자, 이 

세상은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으로 몸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지구촌이 대자연의 

재앙들이 잇달아 터지면서, 무자비한 하늘의 심판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5, 6절 이하).     


그런 중에 매우 중요한 모습이 보인다. 이런 세상 심판의 배경에, 탄압받고 고통하던 지상의 성도

들의 탄원의 기도들이 큰 위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 기도들의 모음이 하늘 보좌로 상달되면서, 

난폭하고 타락한 세상이 엄중한 하늘의 심판대 앞에 선 피고(被告)로 만든 것이다(3-4절 참조).  


이런 모습은 지금의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들이다. 코로나19 대재앙을 비롯한 지구촌 전역에서 

범람하는 대자연의 역습(逆襲)들(지진,산불,이상기온에 따른 주검들,각종 질병들)은 이미 우리

가 세상의 끝자락 깊이에 서서 살아가고 있음을 자인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창조주

의 질서에 대한 인간의 반역의 결과이기도 하다. 게 중에 특히 조물주의 말씀에 순복하는 이들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탄압과 박해에 대한 하늘의 응징차원이라는 점은 확실히 놀라운 증언이다.   


o 이런 성서의 증언들은 우리에게 위로도 되고 아픔도 된다. 땅에서 자행되는 인간들의 모든 행

위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 느러날 뿐이다. 모두가 그 앞에서 노출되고 폭로될 뿐이다. 실로 거짓과 

위선, 허위와 가짜의 설자리는 없다. 심판과 정죄를 피하지 못한다. 


우리의 설자리는 분명해야 한다. 의와 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순복의 삶은 어떤 환란과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견지되어야 한다. 기도와 의의 불길이 내 가슴에서 하늘로 오르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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