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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주일

관리자 2022-01-25 (화) 08:25 2년전 429  

본문)  마 7:13~23, 미 6:1-8, 약 1:16-27


o 총회제정주일 : 설주일


o 세 분문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주현절 넷째 주일이다. 금주는 또한 우리 교회가 설맞이로 지키는 민속(民俗)주일이기도 하다. 설맞이라고 해도 오미크론 코로나의 전염병 때문에 모임이 활발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모처럼 흩어진 가족들과 친족들과의 사랑과 애정을 나누는 시기여서 반가운 때일 것이다. 부디 복되고 유익한 가족들의 설맞이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 때 모이면 아마도 가족들 사이에 서로 복을 빌고, 한 해의 행복한 삶을 기원하는 덕담들이 풍성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3월에 개최될 20대 대통령선거를 두고, 거론되는 후보들의 선택 때문에 상당한 대화 및 토론도 가능할 것이다. 사실 대통령 선거는 우리 국운과 백성들의 미래와 우리 가정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에, 누굴 뽑을 것인지의 선택은 정말 중요하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선택은 어떠해야할 것인지는 더더욱 중요하다. 


중요한 자세는 최고, 최선의 후보를 찾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모두가 허물 많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놈이 그 놈이다’(?)라는 비웃는 태도는 더욱 나쁘다. 선택과 그 책임은 오로지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선거는 ‘에러(착오와 과오)를 최대한 줄이는 선거’가 되어야 하겠다. 에러는 후보자 자신에게서도 있고, 선택할 우리들에게서도 있기에, 그 에러를 최대한 막아서 최상의 선택이 되게 해야 한다. 


다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번 선거의 흐름은 진보냐 보수냐의 싸움만은 아닌 듯싶다. 과격이냐 온건이냐의 싸움만도 아닌 듯하다. 가장 큰 싸움의 포인트는 거짓이냐 진실이냐, 나라 사랑이냐 권력 다툼이냐, 공익이냐 사익이냐, 그러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깊이 주목해야할 대목은 거짓 영들 세력인 무당들의 등장을 막느냐 못 막느냐의 싸움판이 커졌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제2의 최순실과 옛적의 신돈과 같은 승려의 집권 사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오늘 넷째 주일에 주시는 세 본문 말씀들은 이러한 우리의 시대적인 현실과 그에 대응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지한 태도와 신앙적 마음가짐에 대하여 집중해 언급하신다. 


성자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서는 우리들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한다. 멸망으로 인도할 크고 넓은 길,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취하려는 길, 하지만 그 길은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의 길인 그 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택하라고 강권하신다. 이를 위하여 성자께서는 거짓 선지자들,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삼가라고 적극 명하신다(13-15절). 


이런 성자의 입장은 그의 아버지 성부의 입장과 같다. 선지자 미가를 통해서 선포된 성부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제사(예배)는 정의를 행하고 인자(仁慈)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었다. 기본과 본질이 잘못된 자들의 언행을 경계하고 오직 정의와 공의와 자비를 펼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삶을 요구하신다(1,7-8절).  


성령의 입장도 그렇다. 야고보 기자를 통하여 성도의 철저한 자기 관리를 챙기신다. 그는 허약한 자기 자신에게 속지도 말고(16절), 자신을 속이는 자도 되지 말며(22절), 자기 마음도 속이려 들지도 말라(26절)고 권고한다. 거기에 빠지면,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에 빠져 들어서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모든 경건까지도 헛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도는 언행에 조심하고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아야만 한다(19-21절). 참 경건을 위하여, 사회적 약자(弱者)들을 돌보는 삶과 자기 청결의 엄격한 삶도 요구받는다(27절).  


1. 복음서 / 마 7:13-23 /  “ 좁고 협착해도 생명의 문으로만 들어가야 한다 ”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절대적으로 선택하여 들어갈 문(길)에 대하여 지시하신다. 바로 ‘좁은 문’이다. 비록 그 지시 형식은 ‘두 가지 길’이란 구약 신명기 전통을 차용하고 계셨지만(신30:15,19,렘21:8 참조),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양자 선택이 아닌 유일한 한 길인 ‘생명(生命)의 길’을 단호하게 지시하신다(13-14절). 산상수훈의 연장된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그 좁은 문에 대하여 설명하시는데, 듣기에는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는 문이다. 그 까닭은 그 길로 들어선 삶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힘들고 버겁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의 ‘좁다’는 말에는 환란이 따름을 말한다. 십자가의 그늘이 지워져 있다. 그렇지만 생명을 살리는 빛이 그 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강요받는 것이다. 


그러면 넓은 문의 사정은 어떤가?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길은 멸망(滅亡)으로 인도하는 문인데,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들어가기가 편하고 쉽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문은 들어온 사람들을 어디로 안내하는가? 멸망이다. 저주와 지옥이다. 그런 점에서 이 ‘넓다’는 말은 자기 속임이 들어있다. 거짓이 들어있다. 감언이설(甘言利說)의 술수가 들어 있다. 지금 후보자들이 쏟아내는 엄청나게 숱한 말들처럼 말이다.  


그러면 이런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이설(異說)들 속에서 우리를 지켜내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지혜로운 선택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 분별력을 취하기 위한 주님의 다음의 가르침들을 보자. 


1) 가장 경계해야할 대상은 거짓 선지자들이다(15절). 주의 말씀은 결코 불신자들이나 불경건한 자들을 탓하지 않는다. 양의 옷을 입고 신자들 속에 들어오고 속으로는 신자들에게서 노략질하려는 이리의 근성을 가진 위선적 지도자들이다. 성경을 끼고 예배당에 와서 갑자기 예배하는 모양을 보면서, 그를 신자라 반기면 안 된다. 그런 위선자에게 공개적인 안수기도를 해주는 목사들도 호의를 가지고 대하면 안 된다. 과거에 박정희, 전두환 때에도 그렇게 한 인물들이요, 이번에도 그런 행태를 보여준 교회 지도자들이다. 그런 열매가 참 좋지 않다.  


2) 그들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려는 자들이다. 그들이 비록 한 때, 한 곳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도 쫓아내며 적잖은 권능을 행사했어도, 결국은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이중적 행태와 거짓된 행태로 인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는 질책을 면치 못할 자들이다(22-23절). 예나 지금이나 이런 하나님과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 선지자들이 날뛰고 있음을 우리는 극력 경계해야 한다. 그들에 동의하면 우리도 죽는 것이다. 


3)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그런 주변의 위선적 행태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오직 정직, 실천, 순종의 모습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21절). 그리고 좋은 나무와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하여, ‘지금 여기에서’, ‘지금 나부터’ 주님이 보여주신 말씀을 좇아 사는 나무가 되도록 전력하는 일이다. 우리의 목표는 건강한 나무가 되는 것이다. 나쁘고 부실한 열매가 아니라 아름다운 열매와 좋은 열매를 생산하는 나무되기이다(17-20절). 


4) 이런 의로운 영적 싸움은 물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믿고 흔들림이 없이 지속해가면 반드시 이루어낼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지 아니한 설교자들의 가르침을 경계하여야 한다. 재미있고 흥분시키는 설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예수의 말씀과 인격과 삶을 전하려는 설교자를 좇아야 한다. 그러면서 내 자신도 전 생애가 예수의 선포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도록 전력을 쏟아야 하겠다. 사정이 이러기에, 좁은 길인 것이다.  


2. 구약 / 미 6 : 1 – 8 /  “ 정의를 행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라 ”


이사야와 아모스 선지자들과 거의 동 시대에 활동했던 예언자 미가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목격하면서, 백성들이 여호와의 뜻을 성실히 좇지 못해서 발생하는 불행한 현실을 통탄해 한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왕과 제사장등의 지도층 인사들이 그들의 역사와 그들의 조상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여호와의 축복과 공의를 잊고, 위선적 예배자로 전락한 모습을 보면서, 그런 원인이 과연 여호와에게 있는 지, 백성에게 있는 지를 따져보도록 송사해보라고 했다(1-2절) 


1) 그러면서 송사(訟事)의 판이 마련되자, 정작 상대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 말은 피고석의 여호와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그 내용들은 다음의 몇 가지 주요 내용들이었다(3-5절 참조).   


① 여호와께서 원고의 입장이 되셔서 ‘네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했는지를 말해보라’고 따지고 드신 것이다(3절). 그러면서 여호와께서는 오히려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짐과 죄악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이 크셨음을 쏟아내셨다(사43:23참조).  


② 무엇보다도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을 일찍이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종노릇에서 속량하셨으며, 모세, 아론과 미리암 등의 지도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음을 상기시켰다(4절, 출15:20-21,신7:8,삼상12:8 참조). 


③ 그뿐 아니다.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을 매수하며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유혹할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에게 ‘그들은 축복 받은 자들이다’는 점을 일깨우시며, 발람으로 하여금 축복을 하게 하셔서, 결국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신 주이심을 상기시키셨다. 즉 그들을 향한 여호와의 공의(公義)가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상기시키셨다(5절, 민22:12, 수2:1,4:19 참조)


2) 그럼에도 그들의 최대의 문제점은 여호와께 드릴 예배(제사)행위가, 번제물이나 장자를 제물로 드리는 일이나, 죗값으로 몸의 희생 등으로 대신할 일들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범죄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생각에 집중하지 못한 체, ‘댓가를 무엇으로 지불하면 해결되느냐’라는 등의 후속(後續)조치 찾기에 급급해 하고 있었다(7절 참조).  


3) 하나님이 그 점을 바로잡아주셨다. 후속 조치로서의 예배 행위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제적 조치로서의 믿음의 삶에 집중하는 예배 행위들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것은 여지껏 없었던 새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충분히 보이신 것이었다(8절,상). 그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그들이 오직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둘째는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일이다. 셋째는 겸손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일이었다(8절,하 참조).     

☞ 그렇다.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진심으로 원하시는 제물(예배)은 정의(正義)로운 삶이요,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며, 겸손함으로 하나님과 매사에 동행하는 삶이다(롬12:1-2). 이런 삶을 살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당연히 그런 이들의 것일 수밖에 없다.   


3. 서신서 / 약 1 : 16-27 /  “ 자기 절제와 사회적 약자 돌봄으로 참 경건을 이루자 ”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걷도록 부름을 받았다. 좁은 길에 들어선 이들이다. 이 일들은 간단하지 않다. 극복해 내야할 부분들이 많다.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봐야할 대목들이 많다. 자칫하면 좁은 길(문)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속지 않고 사는 일이다(16절). 본문에는 속지 말라는 경고들이 세 번이나 중복되곤 하는데, 이는 그만큼 자칫하면 에러를 낼 신앙생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뭣에 속지 말아야하는가?  


1)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16절). 야고보 기자는 모든 유혹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지적한다(14-15절 참조). 창세기를 보면, 자기의 욕심에서 나오는 자극과 꾐이 있었다(창3:6참조). 그것이 인간의 의지와 결합하면서 죄를 낳았던 것이다. 그러면 자기의 속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야 한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들이 다 그에게서 내려오기 때문이다(17-18절, 마7:11,요일1:5참조).    


2) 행함이 없이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22-25절, 약2:17, 마7:26, 롬2:19참조). 의지를 가지고 실천하면 자기 것이 되지만, 듣기만하고 끝나면 곧 잊어버리고 남의 것이 되고 만다. 그러기에 복을 받는 자는 듣고 실천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3) 또 있다. 스스로를 경건(敬虔)하다면서 말을 절제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안 된다. 그런 경건은 헛되기 때문이다(25절, 벧전3:10,시141:3참조). 따라서 하나님을 향하여 진실한 경건을 취하려거든, 그는 세속 일반과 구별된 선행(善行)을 취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약자(弱者)들로서 환란을 겪고 사는 고아와 과부들을 돌아보며 사는 일이다(27절). 


4) 특히 경건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자기 조절 능력을 겸비해야만 한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한다(잠29:20,전5:2-3). 성냄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19-20절). 단호히 버릴 것과 취할 것도 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惡)도 내버려야 한다. 대신 마음에 심겨진 말씀은 겸손과 온유로 받아야 한다(벧전2:1).  


o 좁은 길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아 생명을 취하기 위해 살아가는 이들의 숙명의 길이다. 그래서 좁고 협착하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부러워하는 유혹을 잘 극복해야 한다. 건강한 나무와 좋은 열매를 맺는 삶에 집중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힘써야 한다. 정의를 구하며 인애의 마음으로 살자. 자신을 믿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살자. 언행에 주의하고 참된 경건을 위하여 사회적 약자 사랑에도 헌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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