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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8-04 (수) 07:32 2년전 492  

본문) 행 3:1~10, 겔 47:1-12, 막 1:29-39


강림 후 열한 번째 주일이다. 코로나19는 여전히 델타라는 변이된 이름으로, 온 세상에 창궐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고난의 시대에도 여전히 온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특히 이 코로나가 몰고 온 공세는 온 세상의 기존의 권력과 세력의 판도에도 커다란 지각변동을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허물어지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새롭게 떠오르는 나라도 있기 때문이다. 누가 일어나고 누가 몰락하고 있는가? 


역시 지금에 가장 돋보이게 된 나라는 놀랍게도 우리 대한민국이다. 지구촌 동방의 조그만 나라, 그것도 아직은 반쪽으로 갈라진 불구의 한반도 대한민국이 이 시련의 시대에 온 세계의 주목을 받는 나라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흔히 ‘K-방역’이란 이름으로 떠오른 우리나라가 지금은 정치, 경제, 사회, 의료, 문화, 예술, 스포츠 등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의 이목과 주목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그 바람에 한국산의 브랜드 가치가 덩달아 높아지면서, 그 동안도 수출에서 강세를 보여 왔던 분야들인 반도체 바이오 철강 조선 분야 등을 넘어, 거의 모든 품종에서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산’(Made in Korea)이라면 무조건 믿고 쓰는 시대가 온 세계 속에서 활짝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과분(過分)한 하나님의 축복이다! 


요즈음, 도꾜 올림픽에서 우리 한국 양궁의 탁월한 모습이 세계에서 화제인데, 그 중에 우리 20대 안팎의 젊은이들인 김제덕과 안산의 모습은 우리에게 커다란 격려와 자존심을 높여주었다. 특히 김제덕이 순간순간 외쳐댔던, ‘Korea Fight!!!“과, 안산 선수가 고비 고비마다 흔들리지 않고 강인하게 위기를 극복하면서 여자 금메달 3관왕을 수상했던 모습은, 지금의 우리나라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보게 한 부분으로 보여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그지없다. 


저들 두 젊은이들은 마침 영호남의 젊은이들의 합작이기도 한데, 그들의 호기(呼氣)와 끈기는 분명히 우리 민족의 저력이요 생명력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 확실하다. 때마침 이 시간 동안에 우리 남북정상 사이에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남북연락통신망을 잇는 반가운 소식까지 듣게 되었는데, 이를 보고, 어느 일간지의 시사만평에서는 김제덕의 그 ‘파이팅 코리아’의 외침과 맞물려 일어난 반가운 사건처럼 보도하기도 해서, 우리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부디 우리 대한민국에게 주어진 이러한 천재일우의 기회가, 얼마 후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통하여서도 탄탄히 이어져 가면서, 세계를 밝히고 선도하는 우리 코리아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계 통치의 경륜(經綸)과 그 방법(方法)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소개하는 내용들로 집중해 있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떻게 세상을 살리시는 지, 그러면서 누구를 통하여 당신의 능력과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지를 담아낸 말씀들을 주신다. 이런 내용들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리라 믿는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구약의 에스겔서부터 먼저 들여다보고, 그 후에 복음서와 서신서의 내용을 통하여 세부적인 하나님의 방법을 확인하려고 한다.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과 방법을 깨닫고 사는 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부딪친 숱한 장벽과 고난의 과정들을 능히 극복하고 이겨내는데 분명한 길과 지혜가 될 것이다.  


o 생명의 원천(源泉)과 공급(供給)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에스겔서의 선언 :

창세기 1장의 증언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관련된 총괄적인 증언이라면, 에스겔이 전한 본문의 내용은 그 창조의 손길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디로, 누구에게로 향하고, 그리고 어떻게 향하고 있는 지를 보다 세밀(細密)하게 전한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데리고 보여주신 당신의 처소인 성소(聖所)는 바로 온 세상 만물을 살리는 생명의 샘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었다(1-2절). 곧 성전의 문지방(threshold) 밑이 생명의 물을 보유하고 공급할 처소였다! 


1) 사실 생명의 역사는 언제나 물이 있는 곳, 수원(水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면서 그 물길이 나는 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생존하며 역사를 펼치고 살아왔다. 특히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공동체들에게도 이곳은 더욱 중요하다. 그들은 수원되신 성전 하나님을 찾고, 그곳에서 전파되는 생명의 말씀들을 양식으로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구별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물이 찾아가며 내는 길(way-direction)이 어디냐에 있다. 그 점에 관하여서도 본문은 몇 가지 차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방향들을 제시한다. 


첫째는 물은 성전에서 시작하여 세상으로 흐른다(1-2절 참조). 그래서 광야와 삭막한 대지를 비옥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세상으로 만들고 변화시키면서,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에게 구원과 기쁨을 선사한다. 창조주는 결코 만들기만 하시고 세상을 방치하신 분이 아니다. 생명들이 생존하고 번성하도록 당신이 책임을 지시고, 친히 물과 대지와 씨앗과 열매들을 제공하시면서 다양한 먹거리들까지도 공급해 주신다. 그를 위하여 햇빛과 비와 바람과 주야의 기온차(氣溫差)까지 주셔서, 온 세상 만물이 혜택을 누리게 하신다. 그 누구에게도 차별은 없다. 


둘째는 그 물은 항상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른다.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는 은혜의 물줄기는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한다. 여기서 ‘낮은 곳’이란 지형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밝히셨던 그 낮은 심령들을 말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사모하는 자)-애통하는 자-온유한 자-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마음이 청결한 자-평화를 만드는 자-의(義)를 위해 박해 당하는 자-예수 때문에 수난을 받고 사는 자들이 바로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이다(마5:1-12참조). 교만하거나 자만하거나 자기중심적인 자는 결코 설 곳이 없다. 


셋째는 생명과 은혜의 줄기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수용의 량(量)과 깊이의 차이는 허락하신다. 적어도 네 단계로 정리된다(3-5절). 첫째는 발목(ankie-deep) 수준이다. 둘째는 무릎(knee-deep) 수준이다. 셋째는 허리 수준(waist-deep)이다. 끝으로 사람이 못 건널 강 수준(river-deep)이다. 이들의 네 단계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세계를 보유한 분량과 품의 차이로 보인다. 어린 아이와 성인의 차이와 같을 것이다. 얕은 물에서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 하지만 품이 큰 물은 품고 있은 생명체들이 다양하고 굵고 크다. 자원들이 풍부하다. (찬송가 302장을 참조하라). 

☞ 평생을 얕은 물가에서 보내는 자들은 정말 유감이다. 담대히 깊은 데로 가보라! 전혀 다른 세계와 은혜와 축복의 자원들이 얼마나 넘치는 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어서 들어가 보라!


☞ 주님도 성령 받은 이들인 당신의 제자들이 뻗어나갈 영역들을 네 가지 차원으로 제시하셨다(행1:8참조)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이다. 한 곳에 머문 자들과 모두를 경험한 자들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땅 끝에서는 각자의 특성을 넘어선, 전혀 다르고 다양한 세상을 풍부하게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가 신앙에서 깊은 물 신앙으로 나아가야한다


2) 그 성소의 물 공급의 목적은 실(失)낙원을 복(復)낙원으로 회복시키려는 데에 있다(6-12절). 

성소에서 나온 물이 펼치는 시뮬레이션(simulation)에 따르면, 너무도 놀랍고 환상적이었다. 강 좌우편에 나무들이 무성했고(7절), 사해(死海)와 연안의 바다물이 이 흘러들어온 물로 인하여 되살아났으며(8-9.하절), 강물 속의 모든 생물들과 고기들이 번성하며 심히 많았고(9,상), 강가의 어부들은 크고 작은 고기들을 수확하면서 풍요를 구가하게 되며(10절), 염전(鹽田)산업도 발달하고(11절), 강 좌우에는 시절을 쫓아 얻게 된 다양하고 풍성한 유실수(有實樹)로 인한 풍요를 구가하며, 그것도 그 잎사귀가 약 재료가 되어 건강을 돌보는 정도였다(12절). 이 어찌 획복된 낙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 엔게디(염소의 샘/사해 서쪽의 샘)와 에네글라임(두 송아지의 샘/사해 동쪽의 샘) 사이의 그물 치는 곳은 그만큼 넓고 크게 고기를 잡게 될 바다 공간을 말한다(10절 참조).


o 에스겔의 환상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신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전한 복음서 : 


1) 그 표적의 실현 현장은 가버나움에 있는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이었다(29절). 회당에서 제자들과 함께 시몬의 집을 찾으신 예수님은 그곳에서 열병으로 누워 있던 그의 장모를 만난다. 그러자 주님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31절). 그러자 생명과 구원의 주이신 성자 예수의 능력의 힘이 그녀에게 흘러들어갔다. 그 순간 그녀를 괴롭히던 열병이 떠나면서, 그녀는 즉시 기운을 회복하여 예수 일행을 섬기기 시작했다.   


☞ 열병(熱病)든 시몬의 장모의 치유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여인의 고단함과 허약함에 대한 단순한 회복 차원을 넘어, 예수로 인한 사위 시몬의 가정 포기와 같은 돌변한 태도에 대한 속앓이와 함께, 그 원인 제공자인 예수에 대한 경계심과 분노 등등도 포함된 ‘마음 앓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시몬의 제자 사역에는 가정적인 문제로(?) 어려움이 예상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로 인해 본 장모치유는 모든 장벽을 일거에 해소할 전기를 마련한 것이 분명하다. 즉 장모의 즉각적인 섬김이 그런 시몬의 내적 장애를 넘겼음을 의미한다. 


2) 시몬의 집은 당시 모든 사회적 약자들이 하늘의 생명수를 맛볼 수 있는 처소가 되었다(33-34절). 예수가 바로 그곳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믿는 자에게는 예수가 바로 모든 것의 중심이시다. 역사와 생명과 복과 회복 모두의 중심이 바로 예수이시다. 그를 믿고 의지하며 그에게 나오는 모든 자들은 바로 예수 그로 인하여 새 생명, 새 정신, 새 삶을 받는다.


3) 우리는 기도(祈禱)하시는 예수님을 만난다(35절).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아 하늘 아버지와 교제하시면서 나누는 기도가 바로 예수님의 삶의 원천이셨다. 아버지와 잇대어 존재를 공유하는 선(線)이었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의 동참하여 하나님과 직통하는 통신망을 구축하자


4) 주님은 당신을 더 필요로 하는 자들을 찾아 나선다. 주님 자신이 보유한 소명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傳道)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8절). 주님은 결코 자기 사람들에게만 안주하지 않으셨다. 실낙원으로 귀신 휘하에서 탄식하고 고통 하고 사는 또 다른 당신의 사람들을 해방하시고자 계속 잃은 자를 찾아가셨다. 그들 자신과 가정과 회당과 온 갈릴리 마을들 전부가 복낙원을 이룰 때까지 당신의 선교를 계속하셨다. 


o 가장 낮은 자를 일으켜서 세상의 판을 바꾸시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를 전한 서신서 :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경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려고 출입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구걸하고자 나와 있던 한 앉은뱅이를 만나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켜 세운 놀라운 일과 그곳의 반응을 담아낸 내용이다(1-8절). 그러면서 주의 성령은 이 일로 인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와서, 그들과 그 도성 예루살렘이 다시금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으로 회복되게 하려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왜 예루살렘을 선교의 일차 대상으로 삼으신 지, 그 원인을 알게 된다(행1:8참조)


1) 이러한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고 뛰게 되는 초자연적 기적은 그 현장 목격자들에게는 충격과 놀라움이었으나,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이런 모습이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은 스승 예수께서 자기들 앞에서 숱하게 보여 주셨던 표적들이었고, 또한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강하고 거룩한 힘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2) 우리는 여기서 세상의 판을 바꾸기 위하여 취하신 하나님의 선택을 주목하게 된다. 고침 받은 자의 특징을 살펴보자. 그는 당시 세상에서 ‘그 시대 가장 불쌍하고 저주받은 존재’로 각인된 존재였다. ‘가장 낮은 자’의 모델이었다. 그런 그가 수많은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현장에서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킴을 받아, 한순간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고 하며 성전에까지 출입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 것이다(6-8절 참조). 


3) 실로 이 사건은 명명백백한 백주에서 발생한 대형 사건이었고, 그것도 그들이 십자가에 죽였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발생한 사건이었으며, 그것도 무시당하던 예수의 제자들이 주도한 일이었고, 또 가장 밑바닥 인생이 변화되어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지경이었기에, 그 소식은 결국 온 예루살렘 도성에 이 가장 쇼킹한 놀라운 뉴스가 되어 퍼져나가게 되면서, 그토록 예수와 복음에 완고한 예루살렘 성이 뿌리 체 뒤흔들리고야 만 것이다. 


4) 결국 완고한 율법의 도성 예루살렘이 변하기 시작했다. 철벽같은 유대교에 금이 가고, 예수의 따뜻한 복음과 성령의 능력이 그 도성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최초의 세계교회가 탄생하는 대역사가 그 열매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곳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신 주님이 이제 앉은뱅이 종교인 유대교에 매인 이들의 손들을 붙잡아 일으켜 주신 것이다. 그것도 가장 불쌍하고 낮은 자 하나를 통하여, 죽었던 영혼들을 일으키신 대역사 드라마였다. 


o 그렇다. 가장 낮은 자를 들어서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고 복음의 성지로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죄악의 늪에서 손잡아 일으켜 세우신 바로 그 주님이시다. 우리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먹고 사는 이들이며, 그의 흐름을 따라 모이고 나누며 전하고 사는 선교인들이다. 주님은 당신의 영의 역사에 응답하는 이들을 통하여, 앞으로도 더욱 세상을 새롭게 해 가실 것이다. 


이 생명 역사에 동참하고 연대하며 그 역사의 흐름을 잇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에 힘써야만 하겠다. 그게 우리의 생명선이기 때문이다. 물 가 신앙인에서 떠나자. 무릎 신앙인과 허리 신앙인을 거쳐,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닌 오직 은혜와 능력의 강물의 힘에 의하여 살아갈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그런 사람이어야 이 후의 시대를 감당할 인물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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