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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6.25민족화해주일

관리자 2021-06-16 (수) 08:31 2년전 516  

본문) 갈 3:23~29, 룻 1: 8-18, 요 4:7-26


강림 후 넷째 주일이다. 금주는 이번 금요일에 6.25사변 제71주년을 맞이하게 되면서, 우리 총회는 오늘을 민족화해(民族和解)주일로 지킨다. 비록 우리 남한은 세계의 일류 국가로 진입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조국 분단으로 인한 한반도 긴장상태는 우리 온 겨레의 마음의 발목을 잡고 있는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그런 해묵은 이념(理念) 대립으로 인한 우리 내부의 상호불신과 상처들을 아직도 해결 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놀라운 것은 우리 보수 측 정치계의 치열한 공격의 밑바닥에는, 남북화해와 평화 교류를 주도하는 현 정부를 친북(親北)정권 내지 종북(從北)정권으로 매도하는 강도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그것도 바로 전광훈을 비롯한 극우 기독교 보수 세력들로서, 그 세력이 기독교 보수교회의 영역 안에 제법 광범위하게 펴져 있다는 점이다. 사실 현 정부 들어 남북의 긴장이 얼마나 완화되었나! 그 혜택을 그들도 모두 누리고 산다. 그런데도 그들은 현 정권을 그토록 매도한다. 


대통령을 ‘빨갱이’요 ‘간첩’이라고 서슴치 않고 외쳐대며 저주하는 그들의 진심이 궁금하다. 정말 그렇다고 믿어서 그런지, 아니면 더러운 정치공세로 현 진보정권을 주저앉히려고 그런지 말이다. 아, 언제나 이 이념논쟁에서 우리가 해방될 것인가? 교회가 앞장서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이끌어야 바람직한데-, 현 교회의 역량이 너무도 미약하다-. 그게 한스럽다. 정치권이 아닌 민간들, 특히 교회가 평화운동과 교류와 화해운동을 주도하는 시절이 열리길 기도하자.


이런 중에 보수 야당에 30대 당대표가 화려하게 등장했다. 워낙 제1야당에 대한 기대치가 못미치니까, 그 출구로서 나이 중심의 세대 교체형 리더가 등장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의 정치 배경을 보면, 더욱 볼 것은 없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그를 지금까지 에워 싼 정치 환경에서 얼마나 출애굽하느냐를 보여주어야 한다. 저 아브라함처럼 자기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나이가 아닌 사고와 의식의 대전환에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가 이제 보여주어야 할 것은, 낡은 자기 당 중심의 정권교체 방안이 아니라 국민과 민족 통합을 위한 새로운 비전이어야 한다. 특히 양극화 극복의 대안과 이념대립의 극복을 위한 청사진, 그리고 민족 전체를 통합해낼 리더십의 신선한 비전들이 나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역시 정치판의 한 골목대장 정도로 끝나고 말 것이다. 진정 그런 인물이 아니기를 바란다.  


o 화해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참된 화해의 모습을 정치판이 아닌 십자가의 예수에게서 찾는다. 십자가의 예수는 도저히 하나 될 수 없고, 절대 화해될 수 없는 두 대상을 하나 되게 하려고 그 안에다 자신을 죽이셨다. 누구와 누구 사이였나?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러운 인간 사이였다. 오직 자신의 피와 죽음이란 희생을 제물로 내주시면서 이루신 일이었다. 그런 피와 죽음이 기적을 일으켰고, 하나 됨의 지혜를 보여주어서 이룩한 화해였다(고전1:23-25참조). 


이런 화해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과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셨다. 성령은 그 소식을 복음(福音)으로 받아들이며 믿게 되는 자들을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신다. 그러면서 그런 이들을 앞세워 교회(敎會)로 모이게 하시고, 화해의 복음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펼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신다. 이를 위해, 이 화해의 복음은 그 어디에서든 인종, 성별, 신분, 국경, 이념, 세대, 종교의 차별의 높은 담을 훌쩍 넘어 일하신다. 


o 그런 눈으로 오늘의 세 본문을 다시 보자. 삼위일체 하나님의 화해의 물결이 어떻게 미쳤는지를 전한다. 모두가 이전엔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하던 이방인들인 로루하마였고 그의 백성에서 제외되었던 로암미들(호2:23참조)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한순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을 입어서, 교회의 주역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핵심 인물이 되었으며, 예수의 진리와 영의 능력에 힘입어 자기 동네의 복음화의 주역이 되는 일까지 주도했음을 소개한다. 


곧 성령은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증언을 믿음으로 받은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셨다. 성부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의 옷자락을 붙잡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어머니를 좇아온 이방 여인 룻에게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과 메시아 예수의 조상이 되는 복을 베풀어 주셨다. 성자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에 마음을 연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예배의 길을 알려주시고, 마을 복음화의 주역이 되게 하셨다.


☞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누굴까? 지정된 사람이나 백성은 없다. 혈통이나 신분상이나 성별이나 능력에서 탁월하고 뛰어난 사람들도 아니다. 다만 누구에게나 베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믿음을 가지고 응답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지목(指目)을 받게 될 뿐이다. 바로 하나님과 화해하고, 이웃을 향하여 화해의 직분을 감당하고자 힘쓰는 사람들이다(고후5:18-20절 참조).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오늘의 말씀에서 분명히 만나게 된다.  


o 서신서의 주인공들인 갈라디아인들은 누구였나? 지금의 터어키의 앙카라 근교의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고 믿음으로서 성령까지 받았던 인물들이었다. 율법을 통하여 받은 성령이 아니었고, 오직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게 됨으로서 받은 성령이었다(3:5참조).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26절).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물)세례를 받으면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27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다른 종족이나 신분과 위치에 있는 그 어떤 이들과도 구별 당하지 않고 하나가 되었다(28절).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고, 하나님의 후사(상속자)가 되었다(29절). 바로 예수에 대한 믿음이 가져다 준 완벽한 보상(reward)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었나? 바로 개척자 바울이 선교지로 떠난 후, 유대교에서 침투해 온 적대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교인들의 구원의 교리들을 혼란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곧 바울이 전한 예수의 복음이외에도, 모세를 통하여 예전에 주신 율법(律法)도 준수해야 된다는 것과 함께, 그 표지(標識)로서 할례(割禮)도 받아야 된다고 강하게 교시하였기 때문이었다. 교인들이 크게 요동친 듯했다. ‘율법이냐 복음이냐’에 대한 교통정리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바울은 두 가지로 정리하여 그들을 일깨웠다. 첫째는 예수의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면서, 율법의 역할은 끝났음을 선포했다. 마치 학생들이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초등교사에서 벗어나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율법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수의 십자가 복음 속에 다 흡수되었을 뿐이다. 그러기에 예수 복음을 받은 자들이 새삼스럽게 율법을 다시 챙겨 살 필요가 없게 되었음을 믿고, 오직 복음에 충실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23-25절 참조). 


둘째는 그들이야말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며 하늘의 상속자(相續者-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heirs according to the promise/NIV)라는 것이다(29절). 그들의 구원은 할례란 육체의 표시가 없이도,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받게 되었음을 바울이 일깨웠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당시 할례나 율법이 없이도, 그가 오직 여호와의 약속을 믿는 그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실과도 흡사한 일임을 논증해 주었다(창15:6참조). 게다가 그들 갈라디아 교인들도, 아브라함처럼 주의 부름 앞에서 그들의 옛것들을 다 포기하고 말씀을 믿고 예수를 선택한 이들이었다. 그 점 때문에 그들이 성령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o 구약의 주인공 룻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이방의 모압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나중에 유대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왕인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후에는 예수의 조상도 되었다(마1:5). 성경66권의 한 몫을 차지한 위대한 주인공이 되었다. 어찌 이런 횡재(橫財)가 가능하였을까! 대체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발생하였단 말인가? 


도대체 그 많은 선민인 유대 여인들은 다 어디에 가고, 그토록 비천하고 무시당해 살아왔던 로루하마와 루암미와 같은 낮고 천한 이방 여인에게 그러한 영광스러운 배역(配役)이 할당됐단 말인가? 여기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어떤 규격이나 고정 틀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당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을 최우선하여 쓰시는, 하나님의 ‘은총(恩寵)의 선택(選擇)’을 접하게 된다. 이제 그 주요 흐름을 추적해 보도록 하자. 


1) 롯은 어느 순간, 자기 땅에 식량 이민 온 유대인 가족들을 만나고, 그들의 아들 기룐이란 남자와 혼인하면서, 유대인 가족의 일원이 된다. 하지만 생활은 즐겁거나 행복하지도 못했다. 이민 10년에 그들 유대인 부자(父子)들 세 명인 시아버지와 두 아들 모두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그 집에는 과부들 셋만 남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어머니 나오미의 결단은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고향 유대로, 며느리들은 친정 모압으로 돌아가자’


2) 나오미의 그런 결단은 비참한 자신의 삶에 대한 탄식과 절망감에서 나왔다.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의 죽음을 자신들의 보호막이 사라진 것으로 보았고, 특히 외국인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모압 땅에 홀로 머물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게다가 과부된 두 며느리들의 미래를 자신이 감당할 능력도 없었다. 귀국해서라도, 늙은 자기가 유대의 계대혼인(繼代婚姻)법에 따라, 그들의 신랑을 생산하여 며느리들에게 안겨 줄 여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3) 무자식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옛 사람들은 후손을 본질상 가족이나 씨족의 일원으로 보았다. 비록 자기가 세상을 떠나도, 후손들 속에 계속 살면서 자기 삶의 의미가 성취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무자식(無子息)’은 자신의 사회적 사망(social death)로 인식되면서, 버림당한 일처럼 간주하였다. 다만 그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출구 하나는 있었다. 곧 ‘기업(基業)무를 자(kinsman-redeemer)’를 생산해서 자신에게 입양(入養)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 자격은 남편이나 시아버지의 친족 가운데에서 죽은 남편의 혈통을 이어줄 의무를 지닌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었다(2;20,3:12,4:1-2참조). 이 문제는 천국의 ‘유업을 이을 자’와도 연계된다(갈3:29). 


4)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둘째 며느리 룻이 첫째인 오르바와는 달리, 자기는 어머니 가시는 곳에 함께 가겠다고 완강히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이유는 한마디로, 시댁에 와서 알고 믿게 된 여호와를 향한 신앙 때문이었다. 언제 그토록 놀랍고 깊은 믿음의 씨앗이 룻에게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뜨거운 고백 앞에 시어머니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내용을 들어보자. 


-‘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세요.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 바랍니다’(16-17절). 


5) 롯은 허약한 남편을 잃었고, 인간적으로 의지할 것이 보이지 않는 시댁의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시댁을 통하여 만나고 섬기게 된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다. 그래서 인간의 어두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어머니보다는 그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신의 전체 미래를 맡기는 결단을 하였다. 그에게는 이런 여호와를 두고, 다시 친정과 고국의 우상 문화와 환경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새 고향임을 고백하였다. 그러니 하나님의 ‘꿀 보상’(報償)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O 복음서도 마찬가지이다. 죄인의 구원을 기뻐하시는 주님에게는 인간 사이의 과거의 불행이나 세상 문화의 차별이나 상호간의 대립이나 갈등의 어떤 높은 장벽들도 정말 아무 것도 아님을 알리셨다. 특히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의 관계처럼 과거사로 얽힌 자신들의 대립 구도도 하나님의 위대한 은총(恩寵) 앞에는 한갓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 대신 당신의 은혜와 구원은 모든 인간들에게는 아무 차별 없이 분배되어야함을 확실히 보여주셨다(9-10절). 


1)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많은 장애들에 시달리며 산 인생이었다. 유대인에게 자기는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인종차별), 남자에게 자신은 여자라는 것(성차별), 일반 여자 중에서도 자신은 상대하는 남자가 다섯이나 된다는 것(죄 의식), 자신들은 예배를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그리심 산에서 드린다는 것(영적 열등감)등의 장벽들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왔다. 그런 인간들이 쳐 논 그물망에 걸려서, 신음하고 탄식하며 살아온 인물이었다. 


2) 반면에 그에게 다가가신 예수님은 윤리적 접근이 아니라, 영적 접근을 통하여 그 여자가 처한 멍에를 뛰어넘을 대안들을 제시하며, 그녀의 진정한 새 출발에 도움을 주셨다. 그녀에게 예수를 알게 되는 일로 인한 영적 충격을 안겨주셨고(10,19,26절), 예수가 그녀의 영혼 속에 부어주실 신선한 생명(生命水)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셨으며(11,14절), 하나님을 찾고 만나게 될 새로운 장소와 방법을 일깨워 주심으로서(20-24절), 그녀의 새로운 출발을 이끌어주셨다. 


3) 비록 주님과의 짧은 대화였지만, 그 여인에게는 일생을 바꾸어낼 소중한 만남이자 소통이었다. 자신의 천박했던 존재를 소중하게 보게 하셨고, 자신은 버림당한 자가 아니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라는 소망과 기쁨을 안겨 주셨으며, 남자나 이성들이 줄 수 있는 육체적 만족과 의존감을 뛰어넘어, 새롭게 바라보고 좇을 선지자요 메시야를 만났다. 특히 예수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영적 예배의 요인인 영(성령)과 진리(말씀)에 대한 계시는 그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딸의 의식을 품고서(23절) 살아갈 벅찬 감동과 꿈을 품게 한 선물들이었다(21-24절). 그 은혜와 기쁨의 감동이 너무도 컸기에, 결국 그녀는 자기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마을을 예수께 오게도 하였다(28-30절 참조)


o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어찌 성서의 인물들에게 국한된 일이겠는가? 순수하고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 누구에게도 주어지는 은총이다. 부디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화해의 주역으로 살아가자. 그러면 미래는 우리 것이다! 이제 히브리 기자의 말씀으로 뒷정리하려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償)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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