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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5-25 (화) 11:11 2년전 539  

본문) 고전 9:13~18, 사 52:7-10, 눅 10:1-16

 

성령강림 후 첫 번째 주일이다. 날씨도 초여름의 기운이 확연하다. 초목들도 연초록의 어린 티를 벗어나서 훌쩍 큰 청소년 티를 보여준다. 나무 그늘이 형성되어서, 어느 덧 사람들이 그늘을 찾아들어가는 시절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성장한 자연의 모습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성장한 우리나라의 모습과도 비교가 된다. 이번 우리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통하여 드러난 우리나라의 국격과 변화된 위상을 통하여 그런 우리의 성장한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태껏은 우리의 필요만을 위하여 미국을 찾아갔던 방문들이었는데,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곧 차세대 에너지원이자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선도하고 있는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산업 분야에서 미국이 우리의 도움과 협력을 절실히 요청하는 모습을 온 세계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그동안의 미국 일방적 관계에서 한미(韓美)가 쌍방적인 새로운 협력 구도 속으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된 모습은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우리나라의 위상과 역량의 제고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얻어낸 우리의 열매이기에, 더욱 반갑다. 하나님께서는 위기를 기회로 돌린 우리 대한민국에게 다시없는 좋은 위로의 선물을 안겨주셨다고 보인다. 이젠 정말 세계가 필요로 하는 우리나라가 되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지난 주일에 우리는 성령이 오셔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과 생명의 말씀으로 받도록, 앞장서 활동하셨음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성령은 설교와 전도처럼 말씀을 전하는 무리들을 세우셨고, 또 그 주신 말씀을 일용할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서 먹고 사는 무리들인 그리스도인들과 그의 공동체인 교회도 만들어 세우셨음을 확인했다. 그러면 강림 후 첫 주일인 오늘은 성령의 어떤 내용을 전하실까?

 

오늘은 성령으로 말씀을 전하고 받은 이들이, 그 후에 어떤 일(work)과 생활(life)을 하게 되었는지를 말한다. 본래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 세상과 역사를 여시는 영이다. 그 모습은 강림 때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the Wonders of God)을 알리는 데에서 잘 드러났다(2:11절). 그 소식을 듣는 자들은 모두가 충격 속에서,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성령이 접촉한 주 대상은 유대인 디아스포라였다(5-10절 참조). 그들은 우선 뿌리가 이스라엘 사람들로서, 십계명을 비롯해 율법 세계에 대하여서도 기반을 든든히 보유하고 있었다.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는 경건성(敬虔性)도 깊었다. 본토 히브리인들과 달리 이방인들에 대한 정서적 유연성도 잘 갖추고 있었다. 성령이 주신 복음과 깨달음을 자기들의 나라로 돌아가서 그곳의 현지 언어들로 전하기에 아무런 애로사항도 없었다. 실로 성령 시대에 복음의 세계화와 예수의 주되심을 전하기에는 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적합한 자들이었다. 그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큰 일’이었다.

 

성령의 그런 디아스포라에 대한 선택적 시도는 그 효력(效力)이 원시교회에서 매우 완벽하게 나타났다. 원시 예루살렘 교회는 거의가 하나님의 크신 일을 들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에 의하여 움직여 갔다. 물론 교회의 주축은 12사도들에 의해 주관되었으나, 교회의 봉사와 구제, 나눔과 선교, 국내외 복음전파와 교회 세우기 등은 거의 이들에 의하여 집행되었기 때문이다. 행 9장의 사도 바울의 등장 이전까지도, 이들의 활동은 정말 뜨거웠다(4-8장 전반). 

 

☞ 사도행전을 보라. 바나바의 등장(4:36), 초대교회 7집사 피택(6:5), 스데반 집사의 활동과 순교(7장),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와 에티오피아 내시 전도(8:26-), 사울의 소명(9장)등은 모두 성령 충만함을 받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의 활동(活動)들의 보고서(報告書)들이다. 그들의 목숨 건 선교들이 유대 현지는 물론, 땅 끝까지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성령과 함께 말이다. 

 

o 오늘 주시는 말씀은 성령 받은 이들이 필연적으로 끌어안게 된 행위(行爲-action)와 일(work)들에 집중한다. 일(work)은 말(word)과 함께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매체이다. 그러면 성령 받은 이들에게서 나타난 일은 어떤 것들이었고, 그 내용상의 특성(特性)은 무엇인가? 

 

대체로 우리가 일을 말하려면 ‘돈벌이’와 노동이라는 개념부터 생각한다. 일은 돈 벌기 위하여 하는 행위이고, 먹고 살기 위한 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모두 ‘육체를 위한 것’이어서, 자연히 염려와 근심이 따른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바가 여기에 해당된다(마6:25참조). 세상이 주는 온갖 희로애락이 바로 이 일들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일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도 있다. 일은 일이지만, 목적이나 방법이 아주 차원이 다르다. 돈 벌기 위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유 때문에 수행하는 일이 있다! 곧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는 일’이다(마6:33). 이 일은 소명(召命)이자 사명(使命) 때문에 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일은 육체의 유익이나 수입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드러내려는 영적(靈的)인 일이다.

 

이 일은 바로 성령이 부여하신 일들이다. 이 일은 우선 ‘자기 포기(抛棄)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를 때 가능한 일이다’(마24:16참조). 그러기에 이 일을 하려면, 자기에게 있는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내놓고, 최후에는 소중한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기도 한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은혜를 나누고 주려는 삶을, 최상의 가치로 알기 때문이다. 나눔, 자원, 섬김, 헌신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 여기에 모인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그런 새로운 일을 하게 된 자들이다. 주의 몸 된 교회란 공동체에 속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 곧 주고 베푸는 일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여 살아간다. 

☞ 생각해보라. 주님 앞에 서면, 우리 마음은 언제나 무장 해제가 된다.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하나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다. 따라서 평생을 충성하고 바치면서 살아와도 고개를 숙이면, 언제나 가슴을 친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어찌 신비(神祕)롭지 아니한가! 세상에 어디에 가서, 이런 놀라운 내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세상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힘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영적인 일들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하는 자들이 필연적으로 안게 될 또 다른 문제, 곧‘생계(生計) 문제에 관한 일’에 대한 성경의 지침도 알린다(고전9:12,눅10:7), 그 점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영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도 일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으로 먹고 사는 것이 정당하다, 하지만 사도 바울 같은 해결 방법이 있음도 밝힌다. 

 

o 먼저 서신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일을 보자. 바울은 먼저 사도인 자기에게 부여된 권리와 자유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자신이 성전과 제단의 일을 하는 자로서, 율법과 주님의 말씀에 따라, 성전에서 나오는 것(십일조와 양식)으로 먹고 사는 일에 합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했다.(13-15절, 민18:8-19,21-31, 신18:1-5, 마10:10등)

 

1) 하지만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러한 권리를 전혀 이용하지 않고 지냈다고 말했다(15절). 무보수 자비량(自備糧) 선교만 행하여 왔음을 밝힌 것이다(18절). 그러면 그는 평소 무엇을 먹고 살아왔나? 천막(天幕) 제조업자로서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해결해왔고, 여유분은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며 살았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그 증인이었다(행18:3). 그러면 바울은 왜 그런 자급자족형 선교방법을 취했었는가? 

 

2) 사실 그는 일부 사람들로부터, ‘예수를 직접 보지도 못한 자로서 사도 행세를 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었다(9:1참조). 그런 여건에서 그가 교회에서 생활비를 수령하는 일은 자칫 그가 밥벌이를 목적으로 목회하고, 교회도 개척하며, 선교도 한다는 등의 거짓 뉴스공세에 빠져들 것을 우려했다. 그러기에 바울은 아예 처음부터 생계비 받을 권리를 포기하고, 자비량 선교를 위해 텐트 제조를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의 사도권 보호는 물론, 자기가 증언해 온 복음의 효능성까지 의심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3) 더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 그에게서 복음 전하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요 의무이며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친히 부여하신 사명이기에, ‘부득불 해야만 할 일’이었다(갈1:15-16). 만일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자기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복음 전파에 전력한 것이다(16절).

 

4)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생계비 받을 권리를 포기하는 일도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그러한 권리 포기가 복음 전파에 기여(寄與)하는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상(賞-reward)을 받게 될 일로 본 것이다(15,17절 참조). 그 일은 곧 그리스도의 비천과 희생에 동참하는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고후11:7-8-12:8참조)

 

o 구약에서는 성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아름다운 일’로 인정받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무엇인가?(7절) - 본문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그들의 목자이신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이스라엘이 본국으로 귀환할 과정을 미리 전한 내용이다. 

 

☞ 본문은 마치 그때의 일을 생중계하듯이 기록해 놓았다. 특히 본문은 그 역사적인 귀환의 감격스런 장면들에 흥분되어, 소리치며 전하는 파수꾼들(=전령자)의 모습을 집중한다(사40:9-11참조). 왜 그런가? 그들의 외침이 지금껏 죽은 자와 같이 짓눌려서만 살아왔던 전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되살리고, 들끓게 하는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1) 그 상황을 더 살핀다. 그 외침을 듣는 모든 백성들은 일제히 여호와께 큰 소리로 노래한다(8절,상). 특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에 살던 자들이, 더욱 기쁜 소리를 내며 노래한다(9절,상). 그것은 자신들을 향하여 베푸신 여호와의 크신 위로와 구속하심 때문이었다(9절). 특히 여호와께서 그들과 열방들이 다 보는 눈앞에서, 제국의 왕인 고레스에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도록 명령하시는 역사의 주(主)로서의 위용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었다(10절). 

 

2) 그런 파수꾼의 외치는 행위를 지켜본 선지자는, ‘그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우냐’라며 탄성을 발한다(7절). 그러면서 그들이 맡은 업무의 의미를 이렇게 부여했다 : 

☞ 그들이 ① 복음(福音)을 가져오고 또 전한다. ② 평화(平和)를 공포한다 ③ 구원(救援)을 공포한다 ④ 시온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통치(統治-주권)가 시작됨’을 공포하였다고 본 것이다! 

☞ 이는 모두 우리 기장 교단이 핵심적인 선교이념으로 줄기차게 추구해 온, ‘정의(正義), 평화(平和), 생명(生命)’과 일치하는 주제들이 아닌가!

 

o 복음서(福音書)에서도 성령 받은 이들에게 주어진 일이, 온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것’임을 말한다. 본문은 예수께서 70인을 따로 선정하여 현장에 파송하시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 파송 내용과 비슷하고(눅9:1-6), 창세기 10장에 나타난 인류의 모든 종족들(당시는 인류를 70여종으로 봄)을 향한 선포라고 보면 좋을 내용이다.)) 하지만 예수 공동체가 시작한 선교는, 본래부터 예수가 주와 메시아로 들려진 후에야 시행된 것이었다는 점에서(24:46-47,행1:6-8절 참조), 부활 이후의 선교에서야 비로소 일어날 수 있었던 내용을 앞당겨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 중요한 선교 지침(指針)들을 더 살펴보자. 

 

1) 선교할 파송자는 상호 협력과 보완의 구조(構造)인 2인 1조로 하였다(마6:7참조). 

2) 그들에게는 기도의 제목이 부여되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2절). 이는 복음 전파와 구원의 역사는,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 연속되어야할 과제로서, 끊임없이 투입될 하나님의 일꾼들이 필요한 업무이었기 때문이다. 

 

3) 전도에 대한 주님의 시각이 무엇인지가 드러났다. 제자 파송을 ‘어린 양(羊)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으로 인식하셨다. 전도는 일종의 천적(天敵-양과 이리)과 강자(强者)와 같은 대상들을 끌어안는 행위로 보신 것이다(3절). 이는 전도는 세상적인 힘의 논리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희생과 섬김으로 해결해야 할 ‘영적 전쟁’임과 함께, 피하지 않고 반드시 이겨내야만 할 ‘진짜 전쟁’임도 일깨워 주셨다. 그러기에, ‘전도는 세상 권세인 원수를, 함께 구원 받을 친구로 만들려는 치열한 사랑의 행위’이기도 하다.

 

☞ 이 시각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을 죽인 자들의 도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엄히 요구하셨다(눅24:49,행1:4). 그것은 원수의 도시, 예루살렘을 극복하지 못한 세계 선교는 결코 힘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그 맥락이었다(마5:43). ‘적을 아군으로, 원수를 친구로’ 삼는 일이 세계의 구원종교인 기독교가 감당해야할 결정적 일이 된 것이다! 

 

4) 이제 남은 과제는 승리를 위한 선교의 전술(戰術)이다. 어린 양이 이리를 이기고 원수를 친구로 만들 전술이 과연 무엇인가? ‘비들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움’이다(마10:16참조). 순결(純潔)과 지혜(智慧)가 바로, 치열한 선교를 승리로 이끌 최상의 전술이었다. 순결은 하나님 앞에서 취하고, 지혜는 인간들 앞에서 취할 모습이다.

 

☞ 선교는 인간적인 자신감이나 간교한 속임수로는 안 된다. 간사함이나 무례함도 안 된다. 사람을 향해서는 영리한 처신이 필요하고(5-6절 참조), 하나님에게는 절대 신뢰로 나아갈 때, 가능한 것이 전도이다(7-11절 참조). 전도자는 반드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유지를 생명처럼 여겨야만 한다. 성령의 절대적 도움 속에서만 되는 것이다.

 

5) 이런 치열한 선교는 그 파송자이신 하나님에게도 당연히 마음을 쏟으시는 일이다. 헌신자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마음을 갖고 계신다. 그러기에 전달된 말씀을 듣고 돌아온 자들에게는 무한히 은혜를 베푸시지만, 거부하고 악행을 보이는 무리들에게는 분노하시고 엄중한 심판을 내리신다(13-16절). -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2절). 

 

☞ 그 소돔보다 더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될 대상들이 누구였나? 평소 예수님의 은혜를 크게 입었던 대상들이었다.-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등이다(13-16절). 우리도 모두 부디 조심하자. 우리도 ‘좋았다 마는 대상’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o 성령은 말씀을 주시고, 변화를 안겨주시며, 우리의 삶을 새롭게 이끄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이미 성령을 받으셨다면, 여러분은 지금 예수와 복음 때문에 예전과는 다른 새 일, 그것도 ‘하나님의 큰 일’을 행하며 지내고 계실 것이다. 그 점을 중시(重視)하고 확대(擴大)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생명 다하도록,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분들이 되시기 바란다. 지금은 ‘입’이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일’로서 답을 드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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