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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 - 성령대망주간

관리자 2021-05-12 (수) 10:53 2년전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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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 17:1~11, 단 7:9-14, 고후 5:14-21

 

부활절 마지막 주일인 일곱째 주일이다. 그 동안 부활의 주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교회력으로는 이번 주간이 하늘에 오르신 주님의 분부를 받들어, 예수님의 제자들과 가족들을 비롯한 120여명의 무리들이 예루살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오심을 사모하며 기도하는 주간을 보낸다(행1:12-14절 참조). 이 점을 주목하여 여러분들도 깊은 기도드리면서 성령을 대망하는 주간을 보내기를 당부드린다. 성령으로 열릴 놀라운 새 세상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가하면 우리 총회는 이 주일을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주일(41주년)로 지킨다. 사실 광주의 아픔과 한은 아직도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진상규명이 여전히 미해결 상태이고, 실종자들의 발굴도 답보상태이다. 큰 유감이다. 하지만 이제는 미완의 문제 해결은 계속 진행하면서도, 그들의 희생과 저항의 정신을 승화시켜 나갈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부활의 변형된 몸으로 계속 이 세상을 일깨우는 주역이 되도록 밑받침을 해가야 하겠다. 

 

마침 미얀마 군부의 불법적이고 야만적 행동이 발생하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광주와 우리나라였다. 저들의 불의에 저항하는 그곳 백성들을 후원하고 그들의 이웃이 되는 일들을 앞장 서 행하고 있다. 5.18의 아픔을 잊지 않고 있음이다. 우리에게 5.18의 죽임당한 자가 그렇게 살아서 고통하는 이웃들 속에서 일하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5.18을 보는 우리의 시야를 또 달리 넓혀주는 영화 한편이 등장하였다. <좋은 빛, 좋은 공기>란 임흥순 감독의 이 영화는, 놀랍게도 광주의 아픔이 지구촌 반대에 위치한 아르헨티나에서도 발생한 군사 쿠데타와 그의 잔혹상의 흡사함을 전해 준다. 그곳의 참혹상은 우리의 수준을 훨씬 넘었다. 우리는 7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그곳은 3만여 명의 실종자들을 배출할 정도였으니, 마치 해방 후의 우리 제주4.3의 수준의 참혹함을 연상시킨다. 

 

가장 잔인한 짓은, 그곳 군부 세력들이 자기들의 죄악상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피해자의 자녀를 가해자 군인들의 자녀로 집단 입양시키는 폐륜적인 행위를 저지른 일이었다.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를 배출한 그 땅에서 그런 천인 공로할 만행들이 자행되었었다니-, 정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거대한 불의의 세력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끊임없이 준동해 왔음을 다시 확인한다. 참 구원자의 출현이 여전히 절실하다. 저들이 역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알게 되고,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알게 될 회개가 다시 일어나기를 기도드린다. 

 

그러면 성령강림 절기를 직전에 둔 이 주일에, 부활하셨던 우리 주님은 진정 어디에 계신가? 본래 보혜사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주님이시었기에, 주님은 그곳에서도 그 성령을 보내시는 일과 그 이후를 감당해낼 제자들을 지켜내기 위한 대비책 마련에 집중하셨으리라 생각된다. 마침 오늘 복음서를 보면, 주님의 그 마음이 하늘 아버지를 향해 올린 당신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祈禱)속에 다 들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본문을 보라. 주님의 관심은 이제 온통 당신의 제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주님에게 제자들은 누군가? 그들은 이제 당신이 떠난 세상에서 당신의 몸이 되어, 당신이 남기신 세상의 구원의 사역을 계승해주어야 할 자들이다. 당신의 남기신 자리와 몫을 이어주어야 한다. 그러니 주님에게 제자들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인가! 실로 주님에게 제자들은 당신의 제자답게 이 세상을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이끌고 살려내야 할 사람들이었다. 

 

일명 ‘고별 기도’라고도 말하는 주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는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있다 :

 

1) 하늘 본향에 오르실 당신의 지위와 영광에 대한 회복을 아버지께 요청하셨다.(1-5절).  

그 동안 예수께서는 인간되어 이 세상에 내려오시면서, 당신의 본래에 누리셨던 하늘의 영화를 포기하셨다(요1:14참조). 그러면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의 영생을 위하여, 부여하신 권세를 행사하며 지내셨다. 주님은 그 최종 작업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이룩하셨다. 그 후 주님은 본향 길에 오르시면서, 당신의 그 영화의 회복을 요청 드린 것이다. 

 

☞ 이 주의 기도에서 우리의 관심을 갖게 하는 부분이 있다. 주님은 영생(永生-eternal life)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이다. ‘안다’는 말이 중요하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아야 영생을 얻느냐’는 질문이 즉각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공부 잘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개념적이나 이론적으로 잘 알면 영생을 얻을까? 그 정도의 앎은 아닐 것이다.

 

그 정도로 영생을 얻는다면, 그건 값싼 은혜요 생명 없는 구원일 뿐일 것이다. 그러면 ‘안다’는 말은 어느 정도를 말할까? 이 말의 원어는 ‘기노스코’(헬)인데, 이는 듣고 배워서 아는 수준이 아니라, 함께 만나 사귐을 가지면서 얻게 된 체험적 지식을 말한다. 그러기에 이 용어는 부부간의 성행위를 나타내는 경우에 사용되기도 했다(마1:25참조). 어떻게 보면, 깊이 사귐을 통하여 상대를 제대로 아는 그런 지식이며, 그러기에 책임적 성격을 안고 있는 앎을 말했다. 

☞ 이 표현은 호세아 예언자의 외침인,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표현에서 확인된다(호4:6,6:3). 

 

그러기에 주님의 제자 양육은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삶을 알리고 보여주는 지식 전달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 구원까지를 겨냥한 영생(永生)을 심어주시려는 의지 속에 시행된 교육이었다. 그 영생을 위한 교육 과정이 어떻게 제자들에게 시행(施行)되었는지는 주님의 기도 속에서 이렇게 드러났다(6-8절 참조). 

① 주님은 제자들을 처음부터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자들이요 그러기에 아버지의 소중한 소유(所有)로 아셨다(2,6,9절). 

② 주님은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6절, 마6:9참조)

③ 주님은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들을 주셨다(8절). 

④ 그래서 제자들은 아버지의 이름과 말씀들을 받고,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줄도 알고, 당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줄도 믿었다. (9절, 행8:26-36, 롬1;17 참조)

 

☞ 그 결과, 제자들은 체험적 지식을 습득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알았고 그가 보내신 주님을 알게 되는 생명지식인들이 되면서, 영생까지 소유한 자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제자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기까지 하셨다(10절). 

 

 

2) 당신이 이 세상에 남기고 떠나시게 될 제자들의 보전(保全)을 아버지께 부탁드렸다(6-11절). 이제 주님의 최대의 관심은 세상이 아니라 제자들이었다. 그들 제자들은 이미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소유(所有)였고 영생을 얻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9절). 그러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제자들이 잘 보전되면, 그들을 통하여 세상은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무너지면, 세상을 건져낼 주축 세력이 붕괴되는 것이었기에, 주님에게는 그토록 제자들의 보전과 살리시기가 절실(切實)하셨다. 

 

☞ 여기에서는 특히 예수께서 제자들의 보전을 위하여 구하신 방법(方法)들이 돋보인다(11절). 

① 주님이 사용하신 ‘보전’이란 말은 ‘테레오’(헬)인데, 이 말은 ‘조심스럽게 돌보다’, ‘굳게 붙들다’라는 내용으로 사용되는 말이다(시17:8).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을 마치 질그릇같이 나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로 보시고 계심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다루실 때에, ‘보다 조심해서 눈동자처럼 다루어 달라’고 특별요청을 올린 것이다. 마치 요즈음 물건을 택배(宅配)로 보낼 때, 배달원에게 ‘귀중한 물건이니 (거칠게) 던지지 말아 달라’고 요청함과 같다. 

 

☞ 하나님이 그의 백성인 우리를 돌보시는 방법이 이렇듯 매우 진중하고 조심스럽다는 점을 기억하자. 성도인 우리도 조그만 함부로 하면, 못 견디고 깨어질 수 있고 떨어져 나갈 수 있다. 그러니 우리들은 피차 더욱 상대방에게 무례히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가깝다고 함부로 대하면, 큰 시험에 빠질 수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자.

 

② 주님이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하신 일이다. 여러분은 우리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완전 하나이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영원에서부터 하나이셨고, 창조시부터 지금까지도 하나이시다. 세 분 다 자신만의 절대 능력과 역할을 별도로 수행하시면서도, 그러나 서로에게는 언제나 하나 되어 협력하고 함께 하시며 성취와 기쁨을 함께하신 분들이시다. 그 하나 됨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자가 되셨다.

 

주님은 남은 제자들도, 마치 아버지와 당신의 하나 됨같이 서로 하나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셨다. 주의 돌봄과 은혜가 없으면, 그들 제자들은 언제나 깨어지고 흩어질 수 있는 무리들이다. 게다가 그들 곁에는 마귀와 귀신들이 상존한다. 마귀는 분리와 해체시키는 영이다. 그래서 되는 일이 없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어둠의 권세이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가 이룩되는 곳에는 창조와 번영과 생산과 충만이 나온다. 즉 하나 되면 천국이지만, 깨어지면 지옥이 시작된다. 

 

☞ 교회나 가정은 반드시 하나 되어야 한다. 나라와 민족도 하나 되어야 한다. 그래야 승리하고 번성하며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들은 항상 ‘서로 하나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와 한국교회는 분열과 흩어짐으로 극심한 갈등과 상처가 깊다. 그 바람에 보유하고 있는 우리 내부의 엄청난 힘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이 기도를 늘 반복해야 한다. ‘우리도 서로 하나 되게 하소서’(11절,하)

 

☞ 주님의 이 기도는 당신의 직계 제자들에게 응답되어, 그들 제자들은 주님이 승천한 이후에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하나 되어 예루살렘 마가요한의 다락방으로 모였다. 그곳에는 제자들과 예수의 가족들, 그리고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일련의 추종자들 120여명으로 모였는데, 그들은 역시 하나 되어 기도하며 새로운 성령강림의 시대를 뜨겁게 기다렸다(행1:12이하-). 

 

o 구약 다니엘서 말씀은 지난 주일에 증언된 계시록 5장에 이어서 나온, 하늘 왕국의 질서에 관한 소개를 전하는 내용이다. 대략 두 편의 내용들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심판장 되신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장면이다(9-12절). 다니엘이 본 하늘 보좌에 앉으신 그 분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이셨다(9.13절). 그의 놀랍고 영광스러운 모습들이 실감나게 소개되었고(9-10상.절), 그 주변에는 그를 섬기는 자가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선 자들은 만만이었으며, 심판에 필요한 책들이 펴 놓여있었다(10절,하, 계5:11). 당시의 제국(帝國)들에 대한 심판이 있었고, 또 있을 것인데, 그 때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11-12절). . 

 

-또 하나는 인자(人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보좌 앞에 계신 이의 앞으로 인도되었는데,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는데, 그 권세는 영원하고 그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였다(13-14절). 이는 그리스도(예수)의 위치와 그의 영광스러운 통치자로서의 역할에 관하여 알린 내용이다. 

 

o 서신서는 성령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 체험적 지식(知識)인 ‘기노스코’를 가진 자에게 드러난 삶의 변화와 특성이 무엇인지를 생생히 전해준다(요17:3참조). 사도 바울이 모델이다. 

 

☞ 한마디로, 그는 삶의 축(軸)이 완전히 자기중심(自己中心)에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해 있었다. 동시에 인간과 만물을 보는 시야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 어떠한 사람을 향해서도,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척도인 육신(肉身)을 따라 알지 아니하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에게는, 그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의 사랑과 은혜가 부여되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14-16절 참조). 

 

그 상황은 그의 수용 여부에 따라서 결정되는 일이 아니라, 그 훨씬 이전에 그리스도가 먼저 그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의 죄를 대속(代贖)하려고 죽임당하면서 그의 죗값을 치르셨음을 말한다. 선교(宣敎)와 전도(傳道)는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를 먼저 알게 된 자들이 감격하여 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상,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되는 존재였다(14-15절). 그런데도 그 사랑을 거절하거나 외면하면 어떨까? 그것이 곧 정죄요 심판에 떨어지는 길이 아니겠는가? 출구는 하나뿐이다.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일이다! 그러면, 그는 이전 것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피조물’(被造物-new Creation)이 된다(17절).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의 선제적(先制的)인 사랑 행위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화해(和解-카탈라케/헬)의 손을 내민 행위로 보았다(18-19절). 그의 인간을 향한 화해의 악수는 절대 쇼가 아니다. 이 화해의 마당을 마련하시고자, 당신의 외아들을 제물로 내어주셔서 성사된 일이기에, 이 악수는 진실하며 참되다! 마음을 다해 당신의 사랑을 받으라고 요청하신 일이다! 그러니 어찌할 것인가? 사도는 우리에게 간곡히 요구한다. ‘하나님과 화목(和睦)하라’(20절). 물론 인간들과의 화해도 절대 필요하지만, 하나님과의 화해부터 시작하면 거기에서 해결될 일이다. 

 

☞ 우리는 이제 손수 평화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뜨거운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 당신이 앞장 서 그 동안 막혀 있던 낙원에 이르는 길을 활짝 열어놓고 초청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더 이상 등 돌리면 안 된다. 왜 죽으려 하는가? 오직 회개와 겸손함으로 그 앞으로 나아가라! 

 

o 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알게 되어 영생을 취한 무리들의 모임체이다. 우리는 이미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었고, 자신보다는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을 좇아 살아야할 위치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이런 절대 질서를 굳게 지키자. 그런 질서를 목숨을 걸고 지켜나가는 우리가 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義)인 화해와 평화와 일치를 이룰 사람들이 되리라. 이런 삶을 다짐하면서, 사명 감당위하여 성령의 강림을 대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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