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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세월호 7주기 추모

관리자 2021-04-07 (수) 08:13 2년전 571  

본문) 요 9:1~11, 행 26:1-23, 민 9:15-23 

 

부활절 둘째 주일이다. 최근 계속 내린 비로 인하여 온 산천(山川)이 연초록의 새 옷을 입고 있어서, 그 신선함이 그지없다. 마침 시작된 부활절기와 맞물려서 완연한 생명의 회복의 계절에 들어섰음도 실감케 한다. 미세먼지도 코로나 여파로 그 분량이 현격히 줄었다는 소식이어서, 불행 중 다행이 아닌가싶다. 코로나 백신보급도 진행 중이어서, 회복의 희망을 갖게 된다. 

 

금주에는 특히 세월호 참사 7주년도 맞는다(2014.4.16). 304명의 꽃다운 청소년들이 제주도 수학 여행길에 나섰다가, 진도 앞바다 맹골 수도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하여 해상구조도 받지 못한 체, 그것도 전 국민이 TV로 목격하고 있는 중에, 수장(水葬)되었던 그 날을 맞는다. 그 날, 그 참사의 모습을 어찌 우리가 잊을 수 있겠는가? 매우 유감인 것은, 아직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원인 규명이나 책임자 색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큰 틀에서의 그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역사적 큰 징벌은 있었다. 강고했던 정권이 뿌리 체 흔들렸고 나중엔 대통령도 탄핵되어 퇴진했으며, 촛불혁명이 일어나 정권 교체까지 이르게 된 일련의 일들은 분명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권에 내린 역사적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하여 유족들이 아직도 길거리로 나오고 있는 일은, 매우 유감이다. 정부와 국회는 어서 진상을 규명하고, 국가의 책임도 밝히며, 유족들의 원한도 풀어주어야만 한다. 

 

사실 세월호 사건은 여러 측면에서 우리가 못 보던 영역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 사건이 우리 국가와 백성에게 준 각성들과 메시지들이 무엇인지를 정리해서, 그것으로 우리의 미래를 보다 건강히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이 우리 국민들을 깨우는 디딤돌이었다고 평가받는 날이 오도록 하여야 된다.

 

그런데, 이런 뜻 깊은 작업들을 우리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주도(主導)할 수는 없을까? 이런 바램은 부활 신앙을 갖고 사는 이들에게 부여된 당연한 미션(mission)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보라. 부활의 주님과 그가 보내신 성령은 그를 믿는 자들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끝내는 분들이 아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빛과 생명이셔서, 그를 받은 사람들의 눈을 밝게 하고 가슴을 뜨겁게 하여,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곳을 향하게 하신다. 곧 어둠과 죽음이 자리한 곳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신다. 그 빛을 드러내기 위함이고, 생명을 채워주기 위함이다. 

 

부활절 둘째 주일인 오늘의 세 본문의 주제(concept)는 세상의 빛 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빛을 전파하는 일을 하나님의 소명(召命)으로 받아 세상에 파송(派送)된 사람들의 모습들이다. 본문들의 내용들 중에 중요한 부분들을 복음서 중심으로 정리해 본다 :

 

o 복음서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가 예수를 통해 보게 된 이야기를 전한다. 본문의 배경에 나타난 이는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다(9절).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빛의 능력으로, 평생을 어둠 속에서만 살던 그 맹인을 보고 살도록 눈을 활짝 열어주셨다(5절). 그 바람에 그는 ‘보는 자’가 되었고, 예수의 구주이심을 세상에 ‘말하는 자’로 나아간다. 그 후 그는 주변의 말할 수 없는 억압과 진실을 왜곡하려는 주위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증언자로 나아간다(요9장 참조).  

 

1) 여기에서 먼저 주목할 사항이 있다. 바로 장애인을 보는 시각과 태도이다. 시작은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서, 스승이신 예수께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罪) 때문입니까, 자기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1-2절). 

 

☞ 제자들의 이런 질문은 자기들의 것이 아니라, 유대인 일반이 가진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평소 유대인들은 모든 질병들을 죄의 결과물로 인식했었기 때문이다(5:14,17참조). 하지만 이런 질문의 문제점은 장애인 당사자가 미래의 희망적인 삶을 추구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규명이 또 다른 고통만 안겨줄 뿐이라는 점이었다! 

 

☞ 그러면 예수님의 입장은 무엇일까? 주님은 그 맹인을 대하는 접근자의 관점이나 태도부터 변화가 필요함을 일깨우셨다. 곧 이미 늪에 빠져 도움이 절실한 자에게는, 탓하거나 책임추궁하려는 자세가 아닌-, 돕고자하는 마음이 우선해야 됨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런 입장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에게는 기본이었다. 제자들도 배워야만 할 자세였다. 아니, 파송 받아 선교에 임할 모든 복음의 전사들에게는 더욱 우선적으로 품어야할 기본적 품성이었다. 

 

예수님은 누구를 탓하고 책임 추궁할 답변이 아니라, 그 맹인이나 질문하는 제자들 모두가 함께 들어야 될 생산적이고 치유적인 답변을 준비하셨다. 사실 죄로만 따지면, 그 맹인이나 질문하는 제자들이나 누군들 자유롭겠는가-! 그러기에 이제 필요한 것은 수평적(인간적) 시각이 아닌, 수직적(하나님의) 시각에 따른 방안이었다. 곧 그 맹인을 통하여, 모두가 함께 치유와 해방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일이다. 그게 무얼까? 주의 답을 보자.

☞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3-5절). 

 

2) 그런 후, 주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다. 결국 그는 말씀대로 행하자, 밝은 눈을 얻게 된다(6-7절). 동시에 그는 새 인간, 새 시대를 향한 예수의 증인으로 파송 받아, 험난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주인공이 된다. 

 

o 사도행전에서도 흡사한 일이 드러난다. 부활하신 주님은 영적 맹인이자 과격한 율법주의자로서 당신과 당신의 백성들을 무참히 박해했던 바울을 다메섹 도상으로 빛으로 찾아주셨다. 정오였던 그 때의 빛은 해보다도 더 밝았다(13절). 그 빛과 주의 말씀을 받은 바울은 나사렛 예수와 그의 복음에 눈이 뜨게 된다. 복음서의 실로암 체험을 그가 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부활하신 예수의 종과 증인이 되어, 온 세상에 부활의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을 받는다(16절). 

 

☞ 본문은 그의 증인 사역 과정에서 옛적 동료들이었던 유대교도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당하고 송사(訟事)까지 받는다. 본문은 그런 자신을 변명하고자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의 처지와 신앙에 대하여 증언한 내용이다. 그 후 그는 로마 황제에게까지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에 오른다. 온 세계를 상대로 구원의 빛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使徒)로 거듭난 것이다.  

 

o 민수기 본문은 하나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을 어떻게 보호하고 지키시는 지 전하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시내산을 떠나기 전, 성막(聖幕)을 세우던 날에 그들에게 불과 구름을 보내신다. 하나님은 불(빛)과 구름으로 당신의 현존(現存)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셨다.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계속하는 저들에게 내내 그렇게 함께 하셨다. 밤에는 저들의 추위와 어두음을 해결할 불(빛)로, 낮에는 저들의 더위와 갈증을 해결하는 구름으로 함께 하신 것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임마누엘 신앙 중심으로 초석을 놓아 주신 것이다.  

 

3) 다시 다짐할 대목이 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살림의 빛을 받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 빛을 온 세상에 전하는 사명이 부여되어 있다는 주님의 선언이다! 우리가 누구인가? 바로 부활 예수의 빛과 생명을 받아서 살아가는 자들 아닌가! 그렇다면 이 분부는 바로 부활신앙을 보유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부여된 소명의 메시지임이 분명하다. 그 본문을 다시 보자.  

-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을 위한) 빛이다‘(요:4-5절). 

 

☞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는 누군가? ‘예수 자신과 그의 제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그 빛을 밝히며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바로 파송(派送)의 행위, 곧 선교(宣敎)의 일임을 말한다. 곧 빛의 치유와 파송의 행위는 상호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주님의 지시 속에 묶어놓았던 것이다. 곧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7절)라는 주님의 명령 안에다 이 묶음을 담으셨다. 

 

☞ 실로암은 무엇인가? 이는 히브리어로 ‘운하(運河-canal)’를 뜻한다. 수로를 내어 양쪽에 분리된 물을 통(通)하고 하나 되게 한다.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도 담고 있다(7절). 여기에는 보내는 사람이나 보냄을 받은 사람, 모두가 포함된다. 운하의 기능은 대단하다. 세계엔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와 같은 큰 운하들이 있는데, 그 중요성은 상상을 넘어선다. 

 

최근 이집트 측의 수에즈 운하에 초대형 선박이 통과하려는 중, 폭(幅)의 문제로 통로가 틀어 막히는 대형 사건이 발생하였다. 비록 만5일 만에 회복은 되었지만, 그 사이에 발생한 물류대란으로, 422척의 선박들이 통행을 못했고, 화물수송지연으로 인하여 그 피해액이 하루 평균 약 96억 달라 였다고 한다. 물론 운하에도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중요성만은 분명 엄청나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맹인을 당신 자신의 능력만으로 간단히 치유하지 아니하고, 유독 침으로 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신 후, 실로암 못에 보내셔서 그곳의 물로 씻어서 보게 하셨을까?(6-7절) 큰 뜻이 있었다. 그를 구원자의 변열에 세우고자 함이었다. 그게 무엇인가? 

 

☞ 사람이 맹인에서 벗어나면, 그것을 개인적인 축복이나 행운으로만 누리면서 끝내기 쉽다. 주님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대신 그 동안의 자기처럼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과 세상을 향해 나아가- 마치 운하와 같은 존재가 되어-, 그들도 자기처럼 하늘의 복을 받도록 ‘전하고 돕는 선교의 인물이 되라’는 파송의 미션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3절). 이는 제대로 받은 복을 헤아려 이웃에게도 그 복을 공유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심이다(창12:1-2참조). 

 

잊지 말자. 하늘의 축복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동시에 받은 축복이 허망하게 소멸되게 하면 안 된다. 오히려 더욱 견고하고 확실한 축복이 되게 해야 한다. 그 방법은 바로 나가서 전하고 나누며 받을 것을 공급해주는 파송(派送)과 선교(宣敎)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이웃과 세상에 나누고 전할 때, 더욱 내 것이 되고 확대도 되면서 확실한 나의 축복이 된다. 

 

☞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굳게 약속하신 대상이 있었다. 그게 누군가? 바로 하늘의 큰 복을 받고,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들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자들’, 바로 그들이다(마28:29-30절 참조). 그렇다. <실로암의 소명자>에게는 그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의 지원 사격이 계속 이어지기에, 언제나 성령의 강한 능력과 놀라운 기적들을 충만히 맛보게 된다. 

 

o 최근 영화 코너인 넷플릭스에서 터어키의 마흐선 키르미지퀼 감독이 2015년도에 실화에 근거해서 제작한 영화, <기적의 학교>(The Miracle)를 보았다. 여러분을 그 현장으로 안내한다. 

 

☞ 중년의 교사 미히르는 어느 날 뜻밖에도 오지 산간에 있는 촌락으로 교사 발령을 받는다. 노상강도가 출몰하는 곳으로 알려진 먼 곳이라서, 가족들의 반대가 극렬했었으나, 미히르는 끝내 한없는 오지 들판에 있는 마을로 간다. 그곳엔 학교나 학생이 없었던지, 아주 오래였다. 그러기에 마을 사람들은 물론 지방정부도, 교사가 못 견디고 다시 떠나리라고 추측할 정도였다. 하지만 소명을 느낀 미히르는 사재로 학교를 세우고, 그곳에 기적의 새 역사를 열어간다. 

 

그래도 그를 환영한 자는, 촌장의 1급 장애아들 아지즈였다. 그는 말도 거의 못했고, 팔도 굽어졌으며, 다리마저 꼬여있던 젊은이였다. 아이들에게도 항상 놀림의 대상이었다. 다만 그의 정신의 건강이 희망이었다. 그가 학교와 선생과 배움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표명하는 것을 지켜본 선생은 이 아지즈를 과감하게 학생으로 받아들이되, 반장으로 발탁하여 아들들의 조롱을 차단하고, 그의 성장을 적극 도왔다. 자연히 그는 주위의 시선을 모으는 인물이 되었다. 

 

그런 아지즈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 형들처럼, 자기도 장가가고 싶은 마음을 간절히 품고 있던 차에 그에게도 결혼할 기회가 열렸다. 도시에서 잠시 만난 어느 노인이, 그의 아버지 촌장을 보고, 아들 있으면 자기 딸을 주겠다고 했다. 물론 장애가 있다고 밝혔으나, 조건은 정신만 괜찮으면 좋다는 말에 혼인이 성사된 것이다. 신랑 집에 온 신부는 그 신랑 아지즈와 그 가계에게는 너무도 과분한 규수였다. 모든 면을 다 갖춘 아름다운 신부였다. 장애 신랑의 아내요 엄마요 딸로 시집온 것이다. 신부는 충격을 참고 신랑과의 거리 좁히기에 힘썼다.

 

하지만 신부에게 더욱 힘든 일은 주변의 질시와 조롱이었다. 견디기 힘들어하는 아내를 본 신랑 아지즈는 심한 갈등 속에 동네 절벽에 가서, 자살을 시도한다. 다행히 선생의 개입으로 그 위기를 넘겼으나, 그들 부부는 얼마 후 그 마을에서 사라진다. 새 삶의 출구를 찾아 나선 것이다. 교사도 얼마 후 그 마을을 떠난다. 촌장은 교사에게, 자기의 일곱 번째 아들을 보낸다며 송별한다. 

☞ 그리고 7년이 훌쩍 지난 후, 그 마음엔 고급 세단 한 차가 들어온다. 온 마을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곳엔 교사 미히르 부부가 내렸다. 조금 후엔 멀쩡해진 아들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내렸다. 그 뒤에는 며느리가 어린 딸 아기를 품에 안고 내렸다. 감동의 순간이었다. ‘내가 수술했느냐’고 묻는 촌장 아버지에게, 아들 이지즈는 답했다. ‘아니요. 저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o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는 그를 믿는 자들을 부활하게 하시고, 또한 부활의 영도 부어주시면서, 부활 능력인 빛된 삶을 살면서 기적의 주인공(miracle-maker)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모두 그런 이들의 승리담을 담은 책이다! 우리들 역시 실로암에서 맹인의 눈의 씻김을 받은 자들이고, 동시에 파송 명령도 받은 이들이다. 나의 파송의 현장들을 점검하자. 제대도 된 증인 사역자들로 살아가는 지를 확인하자. 제대로만 들어섰다면, 기적은 일어난다. 얼마든지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기적을 맛보게 된다. 절대 흔들리지 말자.

 

예수님이 길가의 맹인을 마음에 품듯이, 미히르가 아지즈를 품듯이, 우리도 주변의 또 다른 아지즈들을 품을 수 있는 안목과 따뜻한 가슴의 선교자가 되자. <기적의 학교>의 주인공인 미히르 처럼 우직한 파송자가 되자. 그 학교 학생이 되자. 부활신앙에는 꼭 큰 기적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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