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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청년주일 - 총회 순교자기념주일

관리자 2021-03-09 (화) 18:01 3년전 703  

본문) 요 16:25~33, 사 63:1-6, 롬 8:18-27 

 

사순절 넷째 주일이다. 완연한 봄 날씨가 열렸고, 곳곳에 봄꽃들도 만발하다. 가슴 설렌다. 매년 이 때를 택하여 우리 교회들은 청년주일로도 지킨다. 신도회 중에서 가장 젊은 세대를 생각하며 이들을 축복하고 성원한다. 특히 요즈음의 상황은 코로나19로 인하여, 가장 큰 피해와 시련을 당하고 있는 세대이기에, 이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은 학교에서부터 정상적인 학업도 받지 못한 상황이고, 취업문과 일자리도 절대 좁은 문이 되었으며, 그 기회나 선택의 폭은 그 어느 때보다 좁디좁다. 그 바람에 젊은이들의 미래를 향한 계획은 차질이 더욱 심해졌다. 연애, 결혼, 출산 등의 기피로 우리의 미래의 기반들이 붕괴되고 있다. 게다가 비대면(untact)시대인 요즈음은, 젊은이들이 교회출석이 급감하면서  영적 위기도 커졌다. 실로 첩첩산중이다. 이런 문제는 국가의 위기이자 교회의 위기이기도 하기에, 이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와 성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뜨겁고 간절해야만 하겠다.

 

이와 동시에 오늘은 우리 총회가 순교자(殉敎者)기념주일로도 지킨다. 순교자들은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그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희생했던 이들이다. 그들 때문에, 우리 교회가 있었고, 복음이 번성하여 이 세상과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이렇게라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들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믿음을 보전하고 지내올 수도 있었다. 바로 그들과 그들의 남긴 신앙의 유업을 기억하고 이어가자는 뜻을 모은 주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청년주일과 순교자 기념주일을 동시에 맞이한 우리 교회는, 이제 우리의 시선(視線)과 마음을 어디에다 두고 이 주일을 맞이하면 좋을까? 이렇게 정리해보자. 곧 마음을 어려운 환경에 방황하고 고통하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두자. 저들을 향한 관심을 배가하고, 기도와 협력으로 그들과의 연대의 지수들을 높이자. 물론 우리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 지난 주일에서처럼 불의한 군부에게 국권을 빼앗겨 그에 저항하며 몸부림하는 미얀마인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내 주변의 불우한 이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손길들을 향한 협력의 강도들 높여 가보자.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순교자 조상들의 뜨거운 의지와 인내에까지도 관심을 갖고 배우고 익히도록 하자. 거기에서부터 우리가 설 자리와 수행할 역할을 다시 찾아보자. 그런 후, 그런 것을 극복하고 이겨낼 은혜와 지혜와 능력을 주님께 구하면서, 우리가 나아갈 믿음의 길을 맞도록 하자. 

 

이러한 우리의 이웃과 함께 하는 영적 행보에서 우리를 이끄실 모델은 단연코 성자(聖子)이신 우리 예수님이시다. 인류사에서 그런 고통하고 길 잃은 이웃들을 위한 순교자 제1호가 바로 예수이시기 때문이다! 순교자는 본질상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자가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과 이웃과 세상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신 이들이다. 그 점에서 예수는 자신의 범죄 때문이 아닌, 잃어버린 하나님의 세계와 그의 백성과 온갖 망가진 피조물을 회복시키려고 이 세상에 성육(成肉)하셨고 그 속죄용으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여 역사의 제물(祭物)되신 순교자이셨다. 

 

o 우리가 왜 이런 고난 받는 이웃들과 함께 해야 하는가? 왜 그들을 향해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일에 대하여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가? 그 점에서 오늘 세 본문 말씀들 중에서, 특히 구약 이사야서 본문에 나타난 에돔(Edom)을 향한 하나님의 불타는 심판의 메시지는 우리를 매우 놀랍게 한다(사63:1-6참조). 

 

에돔은 누구며, 왜 하나님께로부터 진멸되기로 한 저주받은 족속이 된 것일까(사34:5-6참조)? 그의 기원은 창36장의 야곱의 형인 에서에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스라엘과 같은 혈족(血族)이요 친족(親族)이다. 그의 후손들은 나중에 보스라를 수도로 한 적은 왕국을 이루었는데, 포도주 산업으로 유명했다. 구약의 오바댜서(書)는 온통 에돔의 기사로 가득한데, 그 특징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적(敵)들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돔이 어찌 그런 존재가 된 것인가? 그것은 B.C 587년,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패망되고 온 도성이 파괴되어 참담한 신세로 떨어졌을 때, 에돔은 그의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서, 그곳 예루살렘에 버려진 형제들에게 매우 적대적(敵對的)인 태도를 취했다(옵1:11-14 참조). 매우 음흉했고, 피해자들을 약탈하며, 그들의 불행을 기뻐했다. 이런저런 행동으로 유다인의 가슴에 에돔은 너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심어 주었다. 

 

반면에 유다와 이스라엘은 누군가? 비록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범죄와 배신으로 잠시 버려진 징벌을 제국 바벨론으로 수모를 당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그들은 엄연한 하나님의 친 백성이며, 징벌 후에는 귀환하여 온 세상의 부러움을 받게 될 백성이었다. 에돔은 그런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통에 떨어진 유다의 모습만을 보고, 얕잡아보고 괴롭히고 폭행하고 약탈하는 행동을 자행했다. 그런 못된 짓을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이 다 지켜보고 계셨음을 모른 것이다. 그들에게 무엇이 남을까? 그들도 같은 운명을 겪게 되는 것뿐이다(겔25:12-14,35:1-15,시137:7참조). 본문은 그런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무섭고 적나라한 심판이 예고되어 있다. 

 

☞ 나중에 이 에돔은 B.C 300년경, 나바트인들에게 처절하게 망한다. 그리고 ‘이두매’라는 이름의 흔적만 남았는데-, 결국 이 <에돔 이야기>는 고통하고 시련가운데 있는 이웃들 향한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과 함께, 그에 대응할 우리의 자세를 다시 가다듬게 한다. 

 

☞ 그러면 고통하고 탄식하는 이웃과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야할 우리 교회들의 바람직한 자세는 어떠한 것일까? 복음서와 서신서가 제시한 내용들이 매우 유의할 대목들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백성들이 종말론적(終末論的) 삶을 살아가는 데 취하여야할 영적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서신서는 그 삶이 지향해야할 바람직한 방향(方向)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공한다. 피조물의 탄식하는 소리에 공감하며,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과 함께 사는 삶을 익히는 일이다. 

 

O 이제 복음서 본문을 다시 들여다보자. 복음서의 그 때는, 예수와의 사별(死別)로 인한 이별과 부활로 인한 재회동의 때를 앞당겨 반영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 때는, 부활하신 주의 승천과 그 후에 임하실 보혜사 성령의 강림까지도 대비하는 상황을 담고 있는 때였다(25절). 그런 상황에서, 주님은 당신 없이 제자들만 남아있게 될 세상에서,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셔야만 했다. 제자들에게는 유언처럼 경청해야할 대목들이었다.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제자들은 하늘 아버지와의 직접적인 교제(交際)를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26-27절). 그 동안에는 사실상 예수님 자신이 그 문제를 홀로 담당해 오셨으나, 예수께서 떠난 후에는, 제자들 스스로가 직접 하늘 아버지와 연결채널(Hot Line)을 가져야만 했다. 그 연결 고리의 실체가 무엇인가? 바로 기도(祈禱)였다! 기도가 절대 필요했다. 하나님과의 연결망이기 때문이다. 이 기도가 살아있으면, 상호의 정체성의 문제나 어떤 혼란도 문제가 될 필요가 없었다. 

 

그 기도만 활성화되면, 그들은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되고, 아버지와의 상호 친교는 물론, 하늘에 오르신 당신도 하나님과 제자들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통하여, 늘 사랑하는 제자들의 삶에도 개입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는데 협력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강조하셨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26절). 이 부분은 바로, 우리가 지금 모든 기도를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하게 된 절대 원인이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순간적인 존재에 불과한 내가, 영원자이자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영역에 참여하게 된 비밀통로이다. 우리가 기도의 신비성과 그 능력을 알면, 기도에 등질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도에는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확실히 교제할 수 있는 특별한 시스템이 담겨 있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면, 성부 하나님이 그 수신자와 접수자로 만나주신다. 그리고 내 기도에는 협력자요 중보자가 따라 붙는다. 성자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더 계시다. 내 기도의 협력자요 촉진자요 가교(架橋)자도 활동하신다. 성령 하나님이시다(롬8:26). 

 

기도-!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인가! 기도만큼 접근이 쉬우면서도 내 힘과 노력에 비하여 비교할 수 없는, 삶의 유익과 놀라운 변화를 안겨줄만한 선물이 있겠는가! 따라서 이 기도를 알고 예수의 이름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 누구나 하나님과의 즉각적인 교제가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즉각적인 사랑의 응답을 받게 되면서, 평화를 체험하며 존재의 불안에서 해소되고 외로움이나 근심걱정으로부터도 해방된다(33절). 

 

둘째는 보혜사 성령(聖靈)께서 떠나간 당신을 대신하여 제자들에게 보내시는 일이었다(32절). 주님은 당신의 떠나심에 대한 제자들의 불안을 해소하고자, 당신 대신에 오실 보혜사 성령의 오심의 유익(有益)성을 열심히 강조하셨다(16:5-7,13-15절 참조). 그 주요 내용은 이랬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이런 말씀 후, 주님께서 제자들이 다 흩어지고 당신 홀로 남게 될 때가 왔음을 밝히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당신과 함께 하신다고 고백하셨다(32절). 이 증언은 보혜사 성령이 당신과 끝까지 그와 함께 계실 것이기에,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당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심을 그렇게 드러낸 말씀이었다(요19:28-30,막15:34참조). 그렇다. 성령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을 끝까지 도우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아,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가-!  

 

결국, 주님은 이 두 가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핵심적 영적 자원들을 마치 최후의 승부수처럼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면서, 33절의 말씀을 끝으로, 당신의 제자들을 향한 긴 고별(告別)설교(13:31-16:33)를 마감하셨다. 33절은 바로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승리(勝利) 선언이다.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平安)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患難)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overcome)’(33절)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가? 주님이 세상으로부터 당한 온갖 도전과 공격과 시험들, 심지어 십자가의 치욕과 굴욕과 죽임 당함까지도 포함해서 결국 승리하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당신이 이 두 가지 영적 자산들로 인하여 취하신 결과물이었다는 내용을 밝힌 것이 분명하다. 그게 주님께서 얻어낸 승리의 방정식이라면, 우리들에게도 승리에 적합한 조건들이 아니겠는가! 

 

☞ 그렇다면 우리의 세상을 향한 대응의 영적 자원들도 하나님께 기도(祈禱)하는 일과 성령의 도움을 받아 사는 삶이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도의 방향이고 그 내용이다. 과연 어떠한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야할까? 그 점에서 바울 사도의 로마서 증언은 우리에게 아주 커다란 도움을 준다. 그 내용을 확인해보자. 

 

o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그 경계선(境界線)에 선 존재들로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 자리에서 방황(彷徨)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의 영광을 대망(待望)하면서, 현재의 혼란을 분별하고 고난과 시련을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로 보았다(18절).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다음의 세 가지 부류의 생명체들의 탄식(歎息-groan)들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있어야할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생명체들로부터 터져 나오는 소리들에 민감하게 깨어 들을 수 있고, 그들의 탄식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그게 정상적인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 탄식들은 무엇인가? 

 

첫째는 피조물(被造物-the creation)의 탄식이다(19-22절). 그들은 원래 창조주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던 생명체들이었다. 하지만 첫 사람들의 타락으로 그들과 함께 에덴에서 추방되면서, 탈선한 인간들의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은 거기에서 나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복락원의 길, 창조질서의 회복의 문은 오직 그들만이 열어줄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갈5:5, 빌3:20절). 

☞ 코로나19의 판데믹은 피조물의 탄식의 절규를 접하게 한 실체이다. 그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출현(교회 공동체)으로 희망은 갖고 있었으나, 여전히 힘은 겹고 갈 길은 멀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the children of God)의 탄식이다(23-25절). 성령의 첫 선물로 성령세례를 받은 무리들의 등장했으나, 그들을 애워싼 삶의 어두운 환경과 저항하는 대적의 강한 힘 앞에서 그들 역시 속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며 탄식을 한다. 자신을 향한 하늘의 소명도 알고, 보이지 않은 소망 속에서 구원도 얻었으나, 대장 주님의 오심을 인내 속에서 고대해야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인류사에서 타락한 세상에 승리한 유일한 예수의 다시 오심만이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성령(聖靈-the Spirit)의 탄식이다(26-27절). 보혜사 성령의 탄식이란 어떤 성격의 것일까?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변경을 요청하는 간구는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택하신 자녀들을 통하여, 피조물과 만물의 회복과 구원을 원하신다는 것을 성령이 이미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령은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는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더욱 그의 마음을 쏟으신다. 하늘 아버지께 제대로 된 기도들 올릴 수 있도록,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한 자녀들로 온전히 서도록,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 아, 얼마나 감사한가! 

 

o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우리를 다시 잘 알자.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낙원의 닫힌 문을 열고 함께 낙원에 다시 들어가도록 선택 받은 대상들이다. 잃은 자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끌어안자. 이웃 사랑이 식지 않도록,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성령의 강한 동행과 도우심을 간구하자. 힘을 내자. 아무리 세상살이가 힘겨워도 우리의 앞길을 밝다. 주님의 이 당부의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추스르자.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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