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사순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3.1절 기념주일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사순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3.1절 기념주일

관리자 2021-02-24 (수) 12:41 3년전 633  

본문)  눅 15:1~10, 렘 31:10-14, 벧전 2:18-25

 

사순절 둘째 주일이다. 게다가 3.1절 제 102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하다. 봄이 본격 열리는 때이기도 하다. 마침 해외(海外)로부터 화이자와 아스트라제네카 등의 코로나 백신들이 들어와, 우리 국민들 모두가 면역을 위한 접종(接種)을 하기 시작하는 때이기에, 새 봄과 함께 코로나의 공포로부터도 해방되는 뜻 깊은 계절이 되었다. (정정 - 3.1절 제72주년을 102주년으로!)

 

우리 민족사의 금자탑을 이룬 3.1기미 독립선언운동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잠시 우리나라가 선 자리를 생각해 본다. 당시 우리를 정복했던 일본이 지금도 우리나라에게 가하고 있는 억지(抑止) 행동들을 보면,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오류(誤謬)와 악몽(惡夢)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반성을 모르고, 역사를 두려워할지도 모르고 있다. 피해국인 우리 대한민국은 이미 그들을 넘어서서, 온 세계 속의 대한민국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잠시 둘러보자. 지난 한 해 인류는 코로나19로 엄청난 시련기를 보내고 있지만, 그런 중에도 우리나라는 뜻밖에도 그 코로나로 인하여 세계 안에서 여러모로 돋보이는 면모들을 선보여 왔다. 탁월한  K-방역, 성숙한 민주주의의 모습, 반도체 및 전자제품과 제조업체들의 도약, 영화.예술산업과 BTS를 비롯한 K팝스타들의 활약, 손흥민을 비롯한 걸출한 스포츠 스타들의 탁월한 활동들, 이런 것들은 이미 한국이 세계 최정상에 올라 있음을 과시할 정도가 되었다. 이미 <한류>란 이름이 세계화되었고, 덕분에 한국어 사용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진 세상을 이루고 있다. 대견하다. 

 

그 중에서 보다 묵직한 소식은 우리 한국이 세계경제 대국들의 모임인 G-7에 진입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소식이다. 이는 아시아에서 중국을 제외한 최상위 경제대국으로 오랫동안 자리해 온 일본이 우리에게 밀리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어서, 반가운 소식이다. 그것도 그런 역전의 계기가 일본이 몇 년 전, 우리의 반도체산업의 성장을 꺾으려고 핵심부품 수출을 통제하는 공격을 하면서, 그 결과가 너무도 기이(奇異)하게, 한. 일 경제력의 뒤집기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때 일본의 경제제재가 왜 실패하였는가? 큰 틀에서는 위기에 처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이요 함께 하심이며, 교만하고 패쇄적인 거짓 집단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오신 심판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참으로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체험을 이 코로나 시대를 기점으로 해 온 것이다. 그런 구체적 과정을 조금 더 복기(復棋)해 본다.

 

그 제재 앞에 우리 국민은 어떻게 대응하였나? 제 2의 3.1정신인 극일(克日)정신으로 하나 되어,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함께 강한 결속과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매진하면서,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의 경제의 틀을 탈(脫) 일본화(化)하는 전기(轉機)를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공격자였던 일본은 스스로를 우리에게서부터 떨어져 나가고, 위안부 등의 고질적인 역사 왜곡을 강화시키며,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억지 주장을 계속하고, 분별력을 잃은 우리 한국에 대한 중상. 비방. 매도를 지속하면서, 실속 없이 자만과 오만의 함정에 수렁에 빠져 허덕이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허술한 코로나 방역, 망령처럼 그들을 괴롭히는 후꾸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유출에 대한 후유증들, 계속되는 지진과 천재(天災)재해의 공습들 등에 시달리면서, 결국은 나라가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허약해져버린 바람에, 우리 공격의 선봉자이던 수상 아베가 밀려나고, 야심찬 그들의 자랑이 될 도쿄 올림픽 개최마저 포기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바람에 세계는 해방 후 처음으로 20세기 해양 제국이었던 일본의 수치와 몰락하는 딱한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이 어찌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성서와 역사 현장에서 제국(帝國)들의 무수한 몰락을 접해왔다. 교만한 나라와 백성은 역사의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가차 없는 심판 앞에서 급속이 몰락하는 것을 목도해왔다. 지금도 제국들의 세력들은 재편되어가고 있다. 미국의 민낯과 허약함도 드러났다. 일본도 기세가 꺾였다. 중국과 러시아도 불안하다. 이것은 지난 한 해 온 세계를 흔들어댄 코로나19의 결과였다. 코로나는 단순한 바이러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일꾼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의 교훈 속에서, 우리가 절대 잊지 말 것이 하나 있다. 그 때에 우리는 ‘잃은 자’요, ‘버림당한 자’였고, 그것도 ‘자기 집을 빼앗긴 참담한 못난이 신세’였었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우리를 그 폭력배로부터 구해 줄 자가 없었다. 그때 우리가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란, 3.1절에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으로, 하나님과 온 세계 양심을 향하여 우리의 억울함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달라고 호소할 뿐이었다. 요즈음의 미얀마의 외침처럼 말이다. 그게 상달되어, 지금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설 곳은 일본의 몰락에 환호하거나, 우리의 도약을 뽐내는 곳일 수가 없다. 그 대신 그 어떤 주변의 제국들의 요구나 눈치에 의존하지 말고, 오직 역사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의 기뻐하시는 백성들로 자리를 굳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세상사의 허망한 흥망성쇠의 부침(浮沈)에 빠지지 않고, 영원히 견고하도록 붙들어 주실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역사의 하나님은 내내 못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었다! 

 

오늘의 세 본문들은 목자와 양들의 관계에 관하여 정교하게 말씀하고 있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들을 향한 목자의 특별한 마음을 알린다. 예언서는 그런 목자의 품에 돌아와 그의 품에서 살게 된 양들이 받아 누릴 선물들을 고한다. 서신서는 숙명적으로 주님의 양된 멍에를 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켜내야 할 마음과 행동거지가 무엇인지를 전하여 준다. 

 

지난 첫째 주일에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잃은 양인 사마리아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행보를 확인했다. 그 주제는 오늘 둘째 주일에도 이어진다. 비유로 주신 말씀들이지만, 잃은 자를 되찾으려고 사력을 다하시는 목자 예수님의 마음과 행동을 재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울림이 크다. 양들의 행복도 분명해진다. 목자와 다시 멀어지지 않도록, 그 곁을 지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큰 틀에서 몇 가지 흐름들을 구별하여 전하고자 한다. 

 

첫째, 예수님은 여전히 당신이 품으신 소명(召命)인,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9:13)에 충실하셨다(눅15:1-2절 참조). 

☞ 이는 유대교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라면서, 예수님의 행동을 헐뜯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비난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들이 죄인들이라면서 멀리하였던 세리들과 죄인들과 식탁의 교제(交際)를 계속하셨다. 주님은 그 이유를 다음의 두 가지 비유들을 통하여 전하셨다(4-7,8-9절). 당시 백성의 목자의 위치에 있었던 그들이야말로 정말 들어야할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다 이해될 수 있는 비유였다.

1) 목자에게는 양들를 향해 절대 책임과 무한 관리의 의무가 부여되어 있음을 알리셨다(4-7절). 그런 목자의 마음과 태도가 언제 어떻게 드러나는가? 양을 잃게 되었을 때였다. 그때는 목자가 비상에 들어간다. 집나간 양이 헤매다가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감지하고, 울안의 99마리를 둔 체, 들판에 나아가 그 1마리를 위하여 그곳 전체를 샅샅이 뒤진다. 그래서 혹 시체라도 찾아야 돌아온다. 잃은 양 자신의 고통보다 더한 목자의 힘겨운 책임의 무게를 본다. 

 

☞ 이 비유의 배경은 이렇다. 팔레스틴의 목초지는 대략 남북을 잇는 중앙고원 지대로 형성되었는데, 평균 높이가 해발 500m에 이른다. 따라서 일단 양이 목자를 떠나 길을 잃게 되면, 사고 당하기 일쑤다. 목자가 서둘러 찾아나서는 이유이다. 

그래서 그들 목자들은 평소에도 서너명이 그룹을 져서 한 조를 이루어 공동(共同)목양을 한다. 그룹 내에 잃은 양이 나타나면, 그 양의 목자는 동료 목자들에게 나머지 양들을 맡기고, 잃은 양 찾기에 나선다. 그래서 온 들판을 샅샅이 뒤지면서 끝까지 찾아낸다. 시체라도 찾아야 한다. 버려두는 일은 상상 못한다.(겔34:15-16,요6:38참조). 나머지 목자들은 당연히 떠나간 목자가 잃은 양을 데리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응원한다. 그 끝에 돌아오면, 그곳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모두가 크게 기뻐하면서, 함께 즐거움을 나누리라(5-7절).  

 

☞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비유’도 배경이 있다. 한 드라크마는 한 데나리온의 가치이며 노동자의 일일 임금 수준이다. 가난한 이들의 방 구조는 창문이 없거나 하나 정도여서, 대체로 어둡다. 바닥이 떨어뜨린 드라크마 찾기엔 당연히 비상이 걸린다.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을 떨게 된다. 특히 10드라크마는 시집올 때에 받은 반지 값이다. 여인은 그것으로 머리를 장식했다. 그런데 떨어뜨려 잃은 것이다. 찾았을 때 마음은 잃은 목숨을 찾은 느낌이었으리라.

 

2) 목자에게는 오직 당신만이 ‘잃은 양들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생명줄’이라는 강한 책임감이 있다.(7,10절 참조). 아이에 대한 부모의 마음처럼. 본래 목자와 양은 한 가족이며 공동운명체이다. 목자는 양들에게 처소와 초장과 온갖 보호망을 제공한다. 양들은 목자에게 일자리와 번영과 기쁨을 제공한다. 서로를 신뢰한다. 양은 목자의 음성에 민감하다. 목자에게 자기 영혼관리까지 맡긴다. 그러기에, 잃은 양이나 택한 백성은 목자인 예수의 음성에 반응하는 것이다. 

 

3) 잃은 양이란 누구인가? 복음서를 보면,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을 총칭(總稱)한다(1-2절). 어리석고 연약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힘이 없어서 차별받고 구별당하며 밀려나서, 일반적인 삶의 영역에도 이름과 얼굴을 내밀기가 어려운 사람들을 통칭(通稱)한다. 그러기에 불쌍한 무리들이어서, 선한 목자인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불어 일으키는 무리들이다. 반면에 그들이 혹 돌아오면, 말할 수 없이 하나님께 큰 기쁨을 안겨 줄 대상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대상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라는 점에서, 하나님이 더욱 안타까워하시며 찾아 나선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면 살아 돌아온 양들에게는 어떤 목자의 영접이 준비된 것인가? 채찍인가, 위로인가? 무언가? 

 

둘째는 하나님은 돌아올 탕자들(잃은 자)을 위해서는 마음껏 누릴 축복의 보고를 마련하셨다(렘31:10-14절). 왜 응벌의 채찍이 아닌, 분에 넘치는 위로의 축하마당을 주시는가? 그것은 잃은 자를 찾으시면서, 그 잃은 양의 고통과 함께 찾으려던 목자의 아픔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코 다시는 빼앗기지 않으시겠다’는 마음을 담았고, 돌아온 자들에게 당신의 신뢰 속에서 재범의 길을 차단하려 함이다. 

 

1)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그런 깊은 마음을 머잖아 포로기를 종료하고 귀환 길에 오를 이스라엘에게 전하려 하였다. 비록 바벨론 포로생활의 고역(苦役)이 그들의 죄 값 때문이었으나, 그러나 그 목적은 그들의 멸망이나 버림이 아니라, 그들에게 더 나은 미래(未來)를 안겨 주시려는 데 있었음을 알리고자 하였다. 여호와는 그런 상황의 대전환의 증인으로 주변의 이방인들을 호출해 세우시는 방법도 동원하셨다. 10절의 ‘이방인’과 ‘먼 섬’은 바로 증인될 자들이다. 

 

2) 이런 고난과 역경을 발전과 성숙의 대 역전으로 승화시킬 능력은 오직 역사의 주이신 여호와께만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여호와는 본래 ‘흩으셨다가 다시 모으기도 하시는 목자’이시기 때문이며(10.하),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시는(파다/자유케하다) 주이기 때문이고(11절), 당신에게 돌아온 사람들의 삶을 마치 물댄 동산처럼 만들어 그 마음을 근심에서 떠나 기쁨을 얻게 할 분이시고(13절), 당신의 복으로 당신의 백성을 기리 만족시킬 능력자이기 때문이다(14절).    

☞ 이게 복음이다! 본 축복의 놀라운 약속들을 친히 이루시는 여호와가 바로 우리가 지금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특히 회복된 잃은 자들(돌아온 탕자처럼)을 징벌 대신 영접하시고, 더욱 위로와 포용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한 희망이다. 이제 남은 과제(課題)는 잃은 자의 몫이다. 목자에게 회개하고 돌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다시 맺은 소중한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일이다. 

 

셋째는 목자에게 붙들려 돌아온 탕자(잃은 자)의 마음가짐은, 전심을 다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목자의 마음과 뜻에 일치시키며 사는 일이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라. 사지(死地)로부터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에게서, 무슨 자기 것들이 있을까?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우리를 부른다-‘사환들(slaves)아’. ‘종들아’. (☞ 물론, 이 호칭은 당시 노예출신 성도들을 향한 것이지만, 그 적용대상은 오늘 그의 백성된 우리 모든 그리스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1) 돌아온 자들에게는 삶의 새로운 윤리가 당연히 부여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은 것과 같다. 무엇부터 일까? 두 가지이다(눅9:23 참조). 우선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그러면 나는 사라지는가, 무(無) 대책인가? 아니다. 훨씬 더 적극적인 대책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주인의 마음과 뜻에 일치시키므로서, 잃어도 함께 잃고, 얻어도 함께 얻는 삶을 취하게 된 것이다. 주님과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나누며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영광도 함께 고난도 함께 하는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빌1:20-21,29참조). 

 

2) 또 하나는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성도는 온실에 머무는 자들이 아니다. 하늘에다 본향을 두고 사는 이들이다. 이 세상살이를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복음 전파와 잃은 양 찾는 선한 일을 위하여,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다(벧전1:13,1:17,2:21 참조). 불의한 행동은 피하지만, 선행에 따른 고난은 인내와 기쁨으로 감수한다(2:20, 3:14, 4:14, 마5:10참조). 그래서 자신들은 세상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보여주며 살아간다. 

 

3) 목자의 대속적 삶의 리듬을 좇아 살아간다(21-25절). 형제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각오 속에서 사는 것이다(마16:25,요15:13,고전10:24참조). 성도는 선행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이들이고, 그에 따른 고난도 기꺼이 수용한다. 왜 그런가? 그 고난이 영혼의 죄악의 흔적을 씻어내고, 신앙의 성숙과 사랑 실천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런 고난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상속할 기본 조건임도 믿기 때문이다. 

 

☞ 우리는 잃은 양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주의 품에 안기게 된 무리들이다. 얼마나 지고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인가-! 그러기에, 우리의 주되신 예수처럼 고난 받을 준비를 잘 하고 살아가야 된다. 그 분이 우리에 앞서서 가시는 곳은 함께 따라가자. 그곳이 사마리아든, 광야든, 세속의 현장이든-. 자신이 당할 고난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도록 더욱 대비하며 살자. 그때에야 비로소 모든 열린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내 소유가 될 것이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