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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2-17 (수) 00:25 3년전 578  

본문) 눅 9:51~62, 욜 2:12-17, 딤후 2:11-13

 

2021의 사순절(四旬節)기를 맞이하였다. 이때는 예수께서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방면의 활동을 마감하시고, 당신에게 부여된 지상 사역의 대미(大尾)인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갈보리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한 40일 여정에 오르신 기간이다. 이 과정을 밟으셔야 비로소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통치권을 영원히 행사하실 확실한 메시아로 오르시기에, 그의 마음가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단단히 대비해야만 했다.

 

그 순간을 누가복음은 첫 절인 51절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決心)하시고’라고 전한다. 여기서 ‘승천(昇天)하실 기약’이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를 말하는데, 그 시점은 바로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늘 아버지가 정하신 시점(時點)이었다. 피할 수 없는 그 때가 왔음을 아신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평시와 같았을까? 아니다. 천하의 주님이라도, 보다 강한 결심이 필요했다. 왜 그러셨을까? 

 

우선은 당신의 적대자들의 총 집합처인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그들을 상대하셔야만 했고, 그곳에서 모든 영역의 기득권자들로부터 온갖 모욕과 수치와 저주를 홀로 받다가 흉악한 십자가에서 참담한 죽임을 당해야만 했으며, 종국에는 죽음까지도 통과하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실로 최후의 잔은 오직 당신의 몫이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제자 나다나엘의 예수를 향한 증언은 매우 돋보인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이것은 온 세상 역사에서, 누가 거짓이고 누가 진짜인지를 판가름 지을 주인공은 오직 예수라는 것이다. 그것도 죽음을 통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예루살렘을 향한 행보는 진정,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행보였다(요1:29)

 

이런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그런 주님께 너무도 감사하면서 동시에 무한 두려움도 갖게 된다. 그는 진정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심판자가 되실 분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당신이 우리 대신 피고로 재판정이 서서 죄인이 되어 보셨으며, 우리가 받게 될 선고를 대신 받아 처형까지 당해보신 분이셨다. 대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분이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요 완벽한 심판자가 되고자 하심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특히 그의 심판은 편향되고 법조문만으로 재판하는 세상의 재판관들과는 결이 아주 다르다. 그는 피고의 형편과 처지를 제대로 알고 심판하실 완벽한 분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유일무이한 공정하고 의로운 심판자가 되셨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판단하실 그 앞에서 누가 자신을 피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렇다. 그는 심판을 당하시면서 세상 모두를 심판하신 분이 되셨다. 우리 모두 그 점을 기억하고, 그 날과 그 때를 잘 대비하도록 하자.

 

오늘은 그런 예수님의 행보를 좇는 첫 주일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에서 꼭 읽어야할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의 마음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품에서 탈선해 나온 죄인(罪人)들을 하나라도 더 품고자, 한 집단(集團)이라도 더 돌려세우고자, 당신의 가슴을 활짝 여신 그 마음이다. 그 마음 때문에 주님은 주변의 기대와는 달리, 전혀 의외의 행보를 하셨다. 그의 절기 첫 걸음을 유대가 아닌 사마리아로 선택하신 것이다. 정말 놀라운 행보였다. 

 

유대인에게 사마리아란 어떤 곳인가? 마치 ‘집나간 탕자(蕩子)’와 같은 존재였다(눅15:11 이하). 그들은 본래 12지파 반열에 있던 같은 동족 이스라엘이었는데-, 북방의 앗시리아의 침공을 통하여 그들과 강제 혼혈(混血)민족을 이루게 된 이들이었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은 그들을 상대 못할 불결한 이방인들로 취급했다. 가장 가까웠던 자들이 순간에 가장 먼 자들이 된 것이다. 사마리아인들 역시 그런 유대인들에게 등 돌리고 경계하면서 살았다. 

 

그 바람에 북쪽의 갈릴리와 남쪽의 예루살렘의 모든 왕래(往來)도 그 한 가운데 있는 사마리아를 피하여, 동편의 요단강 편(便)을 경유하며 다녔다. 가까운 거리를 두고 먼 곳으로 돌아다니는 처지가 된 것이다. 마치 지금 우리 한국인이 평양을 가려고, 휴전선을 놔둔 체 중국의 베이징을 경유해서 가는 꼴과 같았다. 게다가 그런 상황을 그 누구도 아파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런 금단(禁斷)의 벽을 흔들어 대셨다. 예수께서 그런 사마리아를 처음부터 주 관심대상으로 삼으셨음이, 다양하게 드러났다. 친히 사마리아를 방문하셔서 복음을 전하신 일(요4장),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칭찬하신 일(눅10:25-), 치료받은 10문둥이 중 찾아와 감사했던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신 일(눅17:16-), 그리고 최후의 유언에서도 사마리아를 선교할 대상으로 지목하셨던 일(행1:8) 등에서 잘 드러났다. 

 

그런 예수의 사마리아를 향한 마음은 지금 당신의 마지막 길인 예루살렘을 향한 첫 행보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났다. 지금가면 다시 못 들릴 길목에서, 주님은 최우선해서 눈앞의 사마리아부터 방문하시고자 하셨다. 사람들을 보내어, 사마리아 영내의 통과를 요청한 것이다(52절). 그들이 당신을 받을지 안 받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허락하여 접촉이 되면 그들에게 하늘의 은혜를 전달하시려고, 그곳의 통과를 요청하셨다. 사마리아는 과연 어찌 대응하였을까-?

 

그렇다면, 잠시 생각해 본다. 주님은 어찌 그 시대 유대인 모두가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했던 사마리아에게 그토록 시선을 집착하신 것일까? 그가 무슨 특별한 매력을 가졌기 때문이었을까-? 몇 가지 결정적인 이유를 헤아려 본다. 

 

첫째, 이스라엘 전체의 주인이요 어버이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 마음에도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사마리아가 범죄로 인한 영적, 육체적 불구의 몸이 되었을지라도, 그래도 그들은 역시 이스라엘의 주이신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다만 탕자 같은 자식이요, 회복되고 치료받아야할 자식이었다. 당시의 유대인(히브리인)들이 아버지의 집안을 지키는 장자였다면, 사마리아는 회개하고 돌아와야만 할 탕자와 같은 자들이었다(눅15:11이하 참조).

 

둘째, 어버이의 마음은 집안의 자식보다도 집 떠난 자식에게 더 있기 때문이다(15:20절 참조). 어버이는 집나간 자식의 진정한 회개와 그로 인한 귀가를 애타게 기다린다. 그를 위하여 어버이는 탕자를 향한 마음을 24시간 열어놓고 지낸다. 오늘 구약의 요엘 예언서에 나타난 타락한 백성 이스라엘의 회개와 돌아옴을 바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호소와 마음은 바로 사마리아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방문하시려는 마음에는 탕자를 찾는 어버이의 마음이 가득하다. 그 핵심 내용을 확인하자.(눅9:52-53절 참조)

☞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리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시사, 너희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2:12-14절). 

 

셋째, 주님의 무너진 이스라엘을 향한 회복 의지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금 옛날 남북왕국처럼 정치적 분단 상태는 아니었을지라도, 예수 때에는 유대와 사마리아가 또 다른 차원의 분단 상태에 빠져 있었다. 주님의 눈에는 그런 대립과 갈등 구조에서 형성된 불구된 몸은 비단 사마리아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미워하고 적개심을 품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의 불구자였다. 그렇다면 언제 그들은 온전한가? 원래 하나님이 12지파로 묶어주신 한 공동체였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의 그들은 아디아포라(adiaphora/상대적 문제)의 문제를 두고 상대를 배척하고 미워하며 등지고 사는 바람에, 그로인해 그들의 국력은 정치. 경제. 종교, 인성 등 모두가 허약해져 있었다. 그것도 로마 제국의 식민 치하에서 그런 자신들을 붕괴시키는 짓들을 행하고 있는 바람에, 주님은 그런 이스라엘의 분별력없이 무너진 모습에 너무 아프셨다. 오직 양쪽을 다 포용할 하나님의 선교와 복음의 능력만이 그런 수렁에서 그들을 구원하리라 보신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문을 두드리셨는데, 사마리아 측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통과 불허(不許)였다(53절). 이유는 예수께서 자기 땅을 경유하여 예루살렘을 가시겠다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예수에 대한 거부보다는 유대인과 예루살렘이 싫어서였다. 이는 당시의 양측이 얼마나 냉전(冷戰)시대를 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 일이었다.

 

그러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그 소식을 들었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분노하며 예수께 요청했다- ‘주여 우리가 하늘의 불을 명하여 저들을 멸하게 해 주십시오’(54절). 제자들은 주님이 그토록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하시는 데에도, 그것을 외면하고 이토록 거부하는 것에 큰 분노를 느낀 것이다. 마치 자신들은 의로운 분노를 발하는 전사처럼 행세하고 나왔다.

 

예수님의 대답은 어떤 것이었나? 허락이었나, 만류였나? 동의였나, 반대였나? ---. 놀랍게도 주님은 마치 사탄을 꾸짖는 무서운 어조로 두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 ‘나는 너희가 무엇을 말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 인자는 사람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하러 왔다’(55절, 끝부분에 대한 다른 번역본에서). 그러면서 주님은 조용히 다른 마을로 제자들을 이끌고 떠나셨다. 

 

실로 큰 여운을 준 주님의 행보였다, 모든 일을 이해타산(利害打算)적이고 집단적 이익중심 차원에서 대응하고 사는 우리들 일반과는 차원이 확실히 다른 모습의 주님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주님을 자기 제자들부터 먼저 엄하게 다스리게 한 것일까? 그 정체가 무엇인가? 

 

첫째, 아무리 상대가 나에게 부정적인 대응을 보였더라도, 나는 그와 똑같이 폭력이나 위력으로 상대를 응징하거나 심판을 하려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그들의 거부에는 나름대로 보이지 않은 아픔에서 나온 까닭이 있고, 또한 그들의 양심에 따른 것이었기에, 마냥 힘의 제압으로 상대를 굴종시키려는 행동은 더 큰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뿐임을 보여주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 인내(忍耐)가 답이었다. 더 큰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둘째, 종교적 열정이나 의협심을 가진 자는, 비록 자기가 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한다는 입장을 가졌다고 해도, 그는 하나님을 오히려 더 불쾌하게 만들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 했다. 주님은 정죄하려는 당신의 제자들에게서 당신의 통과를 거부하던 사마리아인들보다도 더욱더 사탄에 가까이 있음을 보셨다. 따라서 주님은 사탄이 기뻐할 열심을 가진 제자들부터 다스리셔야 했다. 사랑과 인내와 겸손을 외면한 예수 따름은, 진정 무가치함을 알게 하려고 하셨다. 

 

그런 점에서, 그 다음에 소개된 ‘누가 진정 주님을 따를 것인가’를 묻는 사례들은 우리가 깊이 숙고하여야할 내용들이다(눅9:57-62절 참조). 제자들의 그런 무분별한 경우를 고려할 때,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은 더욱 자기에게 엄격하고 비타협적이어야 했다. 특히 주님의 세상과 인간을 섬기고 품으시려는 마음을 헤아리는 분별력이 없이, 제자 됨의 위세나 권리만을 내세우려하는 행태는 예수의 천국복음 증거에 커다란 암초(暗礁)임도 알아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동역자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의 글을 항상 묵상해야 하겠다(딤후2:11-13절). 서신서 본문은 바울의 고난 신학의 요약본이기도 하다(고후4:11참조). 여기에서 바울은 예수 따름의 승리를 향한 독특한 접근법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예수 따름에서 발생하는 고난이나 죽음은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는 점을 확인시키려고 그는 부활(復活)을 앞세웠다(11절). ‘우리가 주와 함께 참고 죽을 수 있는가’를 물은 것이다. 둘째는 반대를 참고 견디어내는 일의 필요함도 강조하면서, 12절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인내와 그 결과를 주목하도록 요구했다. 곧 우리가 주와 함께 왕 노릇하고 주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주님의 인내를 본받는 데에서 그게 가능함을 말한 것이다. 야고보-요한 형제의 무분별의 함정에 빠져들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끝 절(13절)에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접하게 될 사람은 오직 주님의 행동만을 좇아 사는 충성(忠誠)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을 약속하였다. 응답해야된다. 

 

☞ 이런 주의 말씀들을 받으면서, 잠시 우리의 현실을 살펴본다.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여러분은 우리 시대의 사마리아가 있다고 보는가? 있다면 그곳이 어디일까? 저 북한 땅이 아닐까-! 지금의 우리는 잠시 서로 다른 이념(理念)들에 물들어, 지난 5,000년 동안 같이 살아온 한 민족이라는 큰 굴레와 멍에까지도 외면하면서, 지난 70년간 서로 애써 딴 살림을 차리고 지내왔다. 부끄러운 일이다. 한반도에서의 사마리아를 보유한 우리의 모습을 다시보아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저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점점 현재의 분단과 대결구도가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거나 애써 고착된 현상으로 외면하려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되는가? 도대체 이 한반도의 참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눈과 마음도 과연 우리와 같으실까? 그럴 리 없다. 이 반도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는 이 분단을 통탄해 하시며 다시 하나 되게 하시려고 하신다. 기회만 되면, 북녘 땅에도 당신의 뜻을 전하고 싶어 하신다. ‘너희는 하나 되어야 서로 온전할 수 있다’고! 그 주님의 마음을 누가 전할까? 누가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할 건가? 

 

다행히 우리 땅에는 일찍부터 주님의 그 큰 음성을 듣고 응답하며 헌신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 한반도가 서로 하나 되어야 온 세상의 비추는 빛이 되리라고 믿고 외치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고 문익환 목사를 필두로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신앙공동체였다. 한국 정치와 교회가 그들을 빨갱이라고 외면하고 미워하며 등지고 살 때에도, 유독 우리는 ‘그들과 우리는 하나이며 또 하나 되어야한다’면서, 항상 우리 땅의 사마리아인 북한 선교에 앞장 서 왔다. 

 

마침 금년도 본 교단의 주제가 ‘주께로 돌이키사, 진리와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이다. 사마리아 선교가 잘 이루어지는 일도 우리가 주께로 돌이키는 운동의 핵심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힘과 지혜를 진리와 사랑으로 결집하면서 그 거룩한 힘이 저 북녘 땅까지 채우도록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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