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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신학교육주일

관리자 2021-02-09 (화) 10:31 3년전 599  

분문) 막 2:23~3:6, 창 2:1-3, 롬 14:1-12

 

주현절 끝 주일이자 사순절(四旬節)을 앞둔 직전 주일이다. 절기로는 ‘얼었던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와 경칩(驚蟄)를 앞두고 봄 준비를 채비하는 기온이 계속되고 있다. 반갑다. 게다가 이 달부터는 우리에게도 코로나19 판데믹을 이겨낼 예방 백신이 국민들에게 투여되기 시작된다고 한다. 부디 이번 접종을 통하여 좋은 일들이 새롭게 시작되기를 기원한다. 

 

그런데 판데믹을 벗어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 이후의 세상을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맞이하느냐는 문제 때문이다. 지금처럼 그대로 맞이하느냐, 아니면 그 동안의 삶을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보다 새롭고 성숙하게 맞이할 것이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전을 통해 새 메시지를 얻어내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교훈을 좇지 못하면, 우리는 코로나보다 더 악한 또 다른 판데믹의 공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살기 위해서 변해야한다. 우리는 이번 판데믹을 마치 세례 요한처럼 맞이해야 한다. 그래야 오실 새 시대의 흐름을 심판의 주가 아니라, 위로와 긍휼의 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변해야하고 어떤 존재로 준비해야할까? 이 점에서, 마침 오늘 우리는 매우 의미 있는 신학(神學)교육주일을 맞이한다. 하나님 교육, 인간의 뿌리 교육이 되는 신학교육은 더욱 중요하다. 이 교육에는 신성(神性)만이 아니라 인성(人性)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잘되어야 나라와 가정과 교회와 그 안의 공동체들이 든든해지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교육도 교육 나름이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 교육의 큰 흐름이 너무 기능적이고 머리 중심적으로 흐른다는 점이다. 혼과 가슴과 정신을 키울 교육이 너무도 빈곤하다. ‘나 홀로 교육’에는 앞서 가지만, ‘함께 하는 교육’, 소위 ‘우분투 (Ubuntu)교육-곧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더불어 살 상생교육에는 너무도 취약하다. 

 

요즈음 법원의 판결들을 들으면서, 우리 국민들의 상식과 가슴과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판결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정말 인성 교육의 위기를 심각하게 느낀다. 가습기 피해자 재판에서 가해자들을 무죄 판결하는 일은 아주 대표적인 일이다. 저들 판사들은 머리가 좋고 공부도 잘해서 그 자리에 앉았으나, 현장에서 고통하는 백성들의 억울함과 아픔에는 너무 무지하다. 법규는 알지만 정신이 실종되었음 보여 주었다. 그래서 좋은 세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법부의 문제만이 아니다. 모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신학교육의 문제도 심각하다. 왜 그런가? 신학교육을 졸업한 이들은 대부분 한국교회를 이끌 지도자들이 된다. 그런데 현재의 신학교육은 대체로 비 삼위일체적인 편협한 신학, 발전하지 못한 완고한 보수신학, 이단적 신학, 문자주의적 신학, 너무 정치화된 신학, 학문으로서 너무 수준 낮은 신학, 하나님 나라운동을 외면하고 공교회 의식이 너무 희박한 교회주의적인 신학이 교회의 큰 암초가 되어 있다. 

 

이런 신학에 깊이 물들어 있는 교회에 오래 몸담고 있으면, 왜 위험한가? 그 안의 신도들의 인성과 생활문화에도 심각한 폐해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최근 코로나 확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는 일부 교회들의 문제점들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저들은 교회의 지도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자기 교회 때문임에도, 그들은 정부를 탓하고 협력하지 않는다.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게 정상적인 주님의 교회인가-?

 

이 땅에 성육하신 예수님은 진정한 선교사이면서 동시에 참 교육자인 랍비이셨다. 무지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참된 복을 누릴 인생이 누구인지, 어떤 인생으로 살아가야할 것인지를 집중해서 가르치셨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이나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만나서는, 아주 날카롭게 마주하셨고 그 답안이나 대안까지를 제시하셨다. 진정한 진리와 지식을 위한 치열한 싸움꾼으로 평생을 사신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그런 예수를 다시 만난다. 

 

오늘 세 본문을 보면, 안식일에 관련된 논쟁과 그에 따른 메시지, 그리고 참된 안식을 향해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의 성숙한 신앙 윤리를 말한다. 창세기는 안식일의 기원에 대하여 다시 보게 해주며, 복음서는 당시의 종교인들이 얼마나 안식일을 잘못 교육시켜서 신도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은혜로 받지 못하고 아예 안식일의 노예가 되어 살게 하였는지를 보게 한다. 서신서는 안식을 누려야할 교회가 서로에게 어떤 행동을 기조로 삼아야 할 것인지도 일깨워 준다. 

 

안식일(혹은 주일) 성수 문제는 어찌 그 때만의 문제이겠는가?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한 굴레요 멍에이기도 하다. 분명히 우리를 위해 하늘이 준 위대한 선물인데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서 어떤 이에게는 정죄(定罪)의 도구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은혜(恩惠)의 도구가 된다. 대체 어떻게 맞이해야할까? 그것에 대한 올바른 안식일 교육이 오늘도 매우 필요하다. 

 

또 참된 안식을 위하여 교회란 공동체에 함께 모인 이들의 성숙한 상호윤리도 꼭 필요하다. 신자들 관계는 잠깐의 관계가 아니고 평생 관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욱 성숙(成熟)한 인성으로 만나야 한다. 그러면 그 지침은 무엇인가? 상대에 대한 요구 차원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내 자신의 관리 차원이 보다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들의 전반적인 지침은 믿음이 강한 자, 인생의 선배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자기 관리에 대한 말씀으로 집중한다. 

 

따라서 오늘은 두 가지 차원으로 말씀을 정리해 전하겠다. 첫째는 안식일의 기원(起源)과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다시 살피고, 그 안식일을 상속(相續)하게 된 우리들이 어떻게 그 날을 복되게 받들 것인지를 말씀드리겠다. 둘째는 그러한 안식을 바탕으로 종국에는 영원한 ‘하늘 안식’에까지 이어가기 위하여, 함께 지금의 교회란 같은 배에 동선(同船)한 우리들 사이에 상호 필요한 성숙한 생활 윤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전하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의 안식>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물이요 기념물임을 주목하자. 창 1장에는 인간 창조를 포함한 아홉 가지 피조물들을 6일간에 걸쳐서 완성해내신 하나님의 작업들이 굵직하게 소개되었는데-, 안식(安息)은 그런 일들을 마치신 후인 일곱째 날에 나왔다(창2:1-2절).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감동과 충만한 기쁨이 있다.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사랑이 결집되어 있다. 어찌 당신 홀로만 그때를 기념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들을 상대로 하여, 그 날의 안식을 복(福)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셨다(창2:3절 참조).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와 안식에 가장 특혜(特惠)와 수혜(受惠)를 입게 된 존재는 역시 창조의 마지막 대상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만들어진 인간이었다(창1:26-30 참조). 바로 그 점을 창조 과정에서 성부와 함께 그의 아들로 그 현장을 친히 주도하시며 입법(立法)도 하신 성자 예수께서 이렇게 확증해 주셨다(요1:1-2 참조)-‘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27-28절).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안식’이란 주님의 이 지적은, 그만큼 인간 존재는 안식과 불가불리의 관계에 있음을 일깨우신 말씀이기도 하다. 안식이 없는 인간은 기계요 도구일 뿐이다. 일(노동)과 쉼(안식)의 균형을 상실한 인간은 정상적일 수 없음을 말한다. 문제는 어떤 것이 참 안식이냐는 점이다.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푹 쉬는 것만이 진정한 안식인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일부일 뿐이다. 원래 안식의 본질에는 영적(靈的) 차원까지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영적 차원의 것이란 무엇인가? 바로 안식의 주인이신 조물주의 즐거움과 기쁨과 영광을 공유(共有)하는 일이다. 곧 신의 안식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 일이 왜 그리 중요한가? 이런 안식에의 참여는 우리 존재를 세상과도 차이 나게 해주고, 존재를 가볍게 해주며, 특히 영혼의 활력과 자유를 누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힘겨움이나 피곤으로부터도 자유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라. 진정한 안식처를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참 안식이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물질이 답일까, 권력이 답일까, 성적 쾌락이 답일까, 아니면 좋은 자연환경들이 답일까? 속임수일 뿐이다. 평소 불안과 심판의 그늘에서 지내는 자들에게 육체의 일시적 쉼은 참 안식일 수 없다. 그것은 꿈이며,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범죄한 영혼에게 안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그가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매우 특별한 규례를 부여하시면서, 보다 안식을 지속적으로 누리도록 조치하셨다(출20:8,22:31참조). 이 규례는 주변국과 주변의 종교들과도 철저히 구별하는 일이었다. 모세의 십계명에도 인간들을 향한 첫 계명으로도 안식일 준수를 명령하셨다. 그 날을 성별하여 세상살이에서 지치고 상처받고 범죄한 인간을 당신이 만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회복시키려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일차 수혜자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안식일 계명을 백성들에게 심는데 실패하였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 되게 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그 대신 그 계명을 문자대로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서, 사람들을 감시하고 정죄하면서 의인(義人)인양 행세까지 하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성경에도 무지하여, 안식일에 대한 이해도 빈곤한 상태에서 백성을 지도했던 점이었다(막2:25-26참조). 그 바람에 그들은 은혜의 안식일로 죄인을 양산하고 있었다. 무지한 백성들을 돕지 못하고, 그들을 심판하는 자들이 되었다.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한 사건을 통하여 참 안식일이 어떤 날인지를 가르치셨다. 곧 안식일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온전히 고쳐주신 사건을 통하여, 주님은 모두에게 안식일의 준칙 사항을 제시해 주셨다(막3:1-5절 참조). 이 말씀은 우리 모두도 절대 경청해야할 대목이다. 

 

☞ 우리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안식일을 어떤 날로 맞아야할까?(3:4절 참조) : 

그것은 안식일에 ‘선(善)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안식은 무조건 놀고 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육신의 일과는 차원이 다른 영적인 일, 곧 착한 일이나 선한 일에 헌신하고,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교회 내외의 다양한 봉사와 복음 전도와 세상에서의 약한 이웃들을 돌보는 일들은 매우 좋은 사례들이 될 것이다. 

 


둘째, 교회를 안식 공동체로 온전히 세우려면, 절대 남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 몰려 든 성도들의 차이들과 서로 다름에 주목하였다. 그들은 인종과  나라와 빈부와 학력과 경제력과 신앙의 경력과 경륜 등에서, 그리고 기타 모든 영역에서, 같은 것보다도 다른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을 주목하였다. 다만 그런 다양한 차이와 차별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로마교회란 한 배에 동선하였음을 주목하였다. 

 

어찌 그게 가능했나? 그것은 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피로 만드신 구원의 교회란 배를 타고, 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지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까지도 함께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함께 배를 타고 항해 중인 멤버들 사이의 관계 유지이다. 항해는 순간의 문제가 아니라, 전 생애를 요하는 다소 긴 시간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 때 서로 다른 이들이 하나가 되어 살기란, 정말 순교자적 자세가 필요했다. 깨어지기 쉬운 그릇과 같다. 

 

실재로 로마교회 안에는 걱정스러운 일부 소란이 있었다. 예컨대 고기를 먹는 사람과 먹지 않은 사람 사이의 갈등, 포도주를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 사이의 논란이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다(롬14:1-2,6절). 그런데 이런 차이는 대부분 자기가 믿는 신앙 때문에 생긴 차이가 대부분이었다. 절대 계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믿음에 따른 양심이나 확신에 따른 상대적인 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런 일에 서로 수용 못하고 거칠게 비판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곧 규정이 되어 있는 규범(diaphora)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adiaphora)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런 차이를 자체 해소하지 못하고 큰 소리가 나오고 갈등하는 모습이, 함께 안식할 공동체를 크게 훼손할 위기의 요소가 된 것이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다음과 같이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 주의를 줄 대상은 주로 고참(古參)들이며 선임자였다. 대부분의 비판이나 문제 제기들이 그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1) 먼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야지, 그의 의견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명했다(1-3, 10절). 본래 신앙고백에는 등급이 매겨진 것도 아닌데다가, 각 사람은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 앞에서 책임을 질 몸으로서,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응답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7-9절 참조). 저 다니엘의 친구들처럼, 각 사람은 안식일이나 축일 때문에 고기나 포도주를 금하거나 포기할 수도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단1:8-13참조). 

 

2) 각 사람의 행동에 대한 최종 판단권은 그의 앞 뒤 사정을 온전히 아시는 하나님의 몫임을 명심해야 한다. 각 사람은 머잖아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하여,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는 권세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물론, 모든 사람 자신은 스스로 자기 양심(良心)에 거슬려 행동해하는 부끄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10-12절, 고전8:7 참조). 

 

3) 남에게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두는 등의 죄 짓도록 촉발할 만한 것은 피해야 한다(13절.하 참조, 고전8:9 참조). 교회는 아디아포라(대수롭지 않음)의 사안을 두고, 저 바리새인처럼 남을 심판하려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런 문제는 정죄나 심판의 사안이 아니라, 교회의 건덕(健德) 차원에서 지혜롭게 처리하도록 상호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교회 공동체는 희년 공동체이자 안식 공동체이다. 하지만 깨어지기 쉬한 자체 취약성을 품고 있다. 서로를 품어야 한다. 우리는 함께 가야만 하고, 또 갈길 역시 아직 멀기 때문이다. 우리의 위대한 대의(大義),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받들 면 된다. 특히 소소한 견해 차이를 못 견디면 안 된다. 영원한 안식을 향한 항해 길에 오른 우리는 모든 차이 나는 자식들을 품고 사는 어버이의 마음을 품어야한다. 서로 다름을 아름답게도 볼 수 있고, 상호보완제로도 보아야 한다. 문제투성이인 나를 위해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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