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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1-27 (수) 10:54 3년전 559  

본문) 마 11:2~15, 사 44:1-8, 행 5:27-42 

 

주현절 넷째 주일이다. 최근 날씨는 마치 봄날을 여는 듯, 따뜻하기 그지없다. 아마도 추위에 짓눌려 지내던 대지 속의 생명체들은 시절에 대한 햇 갈림이 컸을 듯하다. 밖으로 나가야할지 말지 말이다. 그 정도로 기후변화의 폭이 컸다. 그래도 만물은 조심해야 한다. 여전히 지금은 냉혹한 겨울이기 때문이다. 분별력을 상실하는 순간, 그는 즉시 큰 상해를 입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중자애(自重自愛)할 때이다. 코로나19의 위세 때문에, ‘방콕’하면서 답답하게 짓눌려 있다는 느낌을 주체하지 못해, 처신과 행동을 함부로 하는 순간, 소중한 인생이 절단될 수 있다. 며칠 전, 야당의 젊은 정치인이 성추행 사건으로 당대표 자리에서 퇴장당하는 일을 보면서, 때도 아닌데 낙엽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본 듯해서 안타까웠다. 겨울잠을 자야할 동물들이 잠을 설치고 나와 행세한다면, 어찌될지를 왜 모르는가?

 

최근에 올해 102세를 사신 김형석 교수의 인생담이 국민들 속에 잔잔한 여운들을 주고 있다. 그는 인생을 대략 3기로 분류했다. 30세까지는 인생의 시작과 준비단계이다. 삶의 기초와 기반을 닦는다. 60세까지는 일하고 건축하는 단계이다. 젊은이 시절로서 일하는 시기란 말이다. 그리고 90세까지는 그 동안 기반을 놓고 쌓아온 자신의 생의 결실을 거두어 드리는 시절이다. 그 이후의 삶은 그 열매를 누리고 사는 때라는 것이다. 매우 공감(共感)력을 준 증언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요즈음 주변에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90대 인생인 경우가 많아졌다. 인생 백수 시대가 코앞에 온 듯하다. 하지만 장수가 진정한 복(福)이려면, 나이만 가지고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 삶을 유지케 하는 건강과 여유, 그리고 그가 살아 있을 이유와 필요성이 함께 있을 때가 아니겠는가 싶다. 이것만 갖춘 것이라면, 인생은 제법 보람될 것이다. 

 

유대인은 특별히 인생의 창의성(創意性)을 추구하며 산 민족이다. 그 바람에 그들은 수천 년간을 지내면서, 인류사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삶의 창의성의 원천으로 ‘티쿤 올람’(Tikkun Olam)을 말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 “네가 세상에 옴으로 인하여, 세상이 더 나은 곳으로 바뀌었느냐‘를 묻는 말이다. 이것은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우리의 노래와는 결이 다르다. 나의 주체적 삶의 행보 여부(與否)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의 현장은 인생을 주체적 삶을 사는 이들과 끌려서 사는 이들이 버무려진 곳이다. 얼핏 보기에, 이 둘의 차이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역사는 이 둘의 힘의 역학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어 왔다. 그 차이와 갈림길은 숫자나 위세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흔드는 철학과 문화, 그리고 종교와 윤리로 좌우된다. 특히 그 핵심 인물이 가장 결정적이다.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신 까닭도 분명하다. 그를 앞세워, 그 동안의 주류 세력으로 행세해 온 어둠과 불의와 거짓된 죽임의 세력을 추방하고, 예수를 따르는 의와 사랑과 빛과 생명의 세력들을 역사의 무대 위에 새 주류세력으로 자리하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그것도 시간과 공간을 넘고, 국경과 종족을 넘어서, 온 세계 만민 누구에게도 공히 적용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장대한 대운동이였다. 

 

이를 확인할 말씀을, 우리는 이미 지난 주일에, 요일5:12의 말씀으로 받았다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 바람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에게는 그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운명(運命)이 되셨다. 그를 떠난 우리란 존재는 상상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 예수와 그의 말씀과 그의 성령의 역사하심이 이미 내 삶과 내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낮은 신분수준에서, 하늘에 속한 시민권을 보유한 영원한 존재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와 그의 놀라운 영향력에 힘입어, 세상에서 아무런 힘도 없던 우리가 지금은 제법 가치가 있고 차원이 높은 선한 영향력을 주변에 행사하면서, 역사의 새로운 주류 세력이 되어 산다.

 

이제는 더욱 자중자애해야 한다. 이제 살 길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아니하고, 우리를 부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까이 교제하며 더욱 사랑하고 살아야 한다. 세상 지식과 정보의 축적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일은 그 못지않게 계속 깊어가야만 한다. 공식은 없지만, 1:2정도 비율을 유지하면 좋겠다. 명심하자. 우리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복이 되는 분이다. 그의 크고 놀라운 세계를 맛보게 되고, 또 누리게 되며, 우리가 커지기 때문이다. 

 

교회에 관련한 참 가슴 아픈 일들이 계속되고 있어 유감이다. 지난 주 만해도 대전의 비인가 국제학교의 교육시설에서 127명의 확진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네트웍이 전국적이라서, 그들을 통한 확진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확산될 지가 염려스럽다. 광주에까지 크게 확산된 상태이다. 대체 왜 이러나? 선교의 다양한 시도는 비평할 수 없다. 하지만 이웃과 세상의 생명을 해치면서까지 대면을 강행하며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하려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일 수 없다. 그들은 이미 이익중심 집단이지, 모두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는 예수 중심의 단체가 아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 줄 아는 인간’(Homo Symbious)이 돼야 한다, 그래야만 역사의 주류세력으로 생존할 수 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우리가 역사와 세상의 주류세력으로 사느냐 못 사느냐의 갈림길이 예수와 그의 세계를 어떻게 수용하느냐 여부로 결정되는 일임을 밝혀주고 있다. 복음서는 세례요한의 한계를 넘어서, 완성자인 예수 그리스도 차원을 수용해야 함을 말한다. 예언서도 이스라엘의 왕이요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참된 지식과 믿음이 진정한 복과 은혜가 됨을 말한다. 서신서는 예수로 실족한 백성이 아닌 예수로 충만하여 역사의 주류로 진입하는 새 주의 종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우리도 이 말씀을 잘 가슴에 새겨서, 축복된 길로 나아가자. 

 

복음서 / 세례 요한을 넘어 나사렛 예수에게로

헤롯의 잘못된 행위를 책망하다가 투옥당한 요한이 뜻밖에도 예수께 자기 제자들을 보낸다. 예수의 정체가 너무도 궁금해서였다. 자기는 분명 나사렛 예수가 ‘오실 이’라고 판단했었는데, 그가 세상에서 행한 일들을 들으면, 왠지 차이가 보이고 궁금한 것들도 생겼기 때문이다. 자기가 기대했던 메시아는 단호한 심판자였는데(3:7-12), 그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이었다. 그러기에 질문도,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였다(2절).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메시아 사역이 진행되는 모습을 알리는 것으로 응답하셨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고 요한에게 알리라’,(4-5절). 이런 경고도 덧붙이셨다. 

1)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失足)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절). 무슨 말씀인가? 예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맞추러 오신 이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이들이 예수에게 맞추어야할 이로서 오신 이셨다. 그러기에 예수께 맞서려는 자는 당연히 예수로 실족하게 된다. 요한이 기대한 심판은 바로 그런 자에게나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를 영접하고 그의 말씀에 복종하면, 그는 용서와 구원을 받아 새 차원의 인생을 살 존재가 될 것이다.

 

2) 무엇보다도 세상은 심판에 앞서서, 메시아의 진정한 사랑과 돌봄을 먼저 받아 보아야했다. 그런 사전의 배려가 없이 죄인들에게 사나운 매질과 정죄만 가하는 것은 사랑이신 메시야의 입장에는 어긋난 일이었다. ‘선(先)자비, 후(後)심판’이었다! 따라서 지금 세상에 필요한 메시아는 죄인들을 향한 정죄와 저주의 주가 아니라, 용서와 치유와 회복의 주이심을 명백히 하셨다. 세례 요한은 그런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를 그런 이로 인정하고 시인해야만 했다.  

 

3) 요한의 제자들이 그곳을 떠난 이후, 예수님은 요한에 대하여 공개적인 평가를 하셨다(7절). 한마디로 요한을 극찬(極讚)하셨다. 전혀 당신에 대한 의심을 보낸 자에 대한 평가답지 않았다. 요한의 한계도 명확히 지적하면서도, 그의 가치와 사역에 대한 충성과 그 사역이 안겨 준 효과가 무엇인지도 차분히 말씀하였다(9절 하-14절 참조). 

☞ ① 세례 요한의 위치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였다(9절). 그것은 그가 모든 선지자와 율법 시대를 마감하고 복음 시대를 여는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13절). ② 주의 사자로서, 주의 길을 예비한 충성된 주역이었다(10절). 그의 위탁 받은 역할과 사명으로는 그는 진정 ‘오리라 한 엘리야’였다(14절). ③ 실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다(11절,상) 

 

4) 요한 사역의 결정적인 효과는 ‘그 때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주님의 평가 속에 있다(12절). 이 뜻은 눅16:16 내용이 해설에 도움을 준다-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즉 요한의 회개운동 이후, 천국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열려 졌고, 그중에 이방인-세리-창녀 같은 각종 죄인들까지도 그가 전한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들어가게 되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그의 등장을 통하여, 그의 선발대원인 요한이 그토록 외쳤던 천국이 과연 어떤 곳이고 무엇인지를 친히 확인시켜 주셔야 했다. 이는 요한의 회개운동(물세례)이 결국 예수의 성령운동(하나님 나라운동)까지 견인시킨 기초 운동이었음을 새삼 확증한 것이다. 

 

예언서 / 참 이스라엘 – 의혹자가 아닌 증인이어야 

본문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와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이신 당신이 그들에게 진정 어떤 신(神)인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일깨워 전하신 하나님의 자기 소개문이다. 어찌 보면, 여호와의 일방적인 자기 계시 같지만, 그만큼 하나님 자신의 마음은 그들에게 당신의 참 마음과 모습을 전하여 알리면서, 그들을 바르게 세우시는 것이 시급하였음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오랜 포로생활로 인하여 마치 고아나 버림당한 자와 같은 심정이었다(사40:27참조). 매사에 자신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밑바닥이었다. 목말랐고 매 마른 땅과 같았으며 잡초만 가득한 가슴이었다(3-4절 참조). 그런 모습은 미래의 이스라엘의 모습과 위상을 생각하면, 최악의 상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기에 이제는 그들이 다시 소생해야만 했다. 매 마른 사막이 옥토가 되는 대혁명이 필요한 때였다.  본문은 그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예언으로 전하신 내용들이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친히 만들고 모태에서부터 지으셔서, 당연히 도움이 되실 분이다(2절)

2) 어떤 도움을 주시는가? 그들의 빈곤한 삶을 풍요롭게 하시며, 당신의 영(靈)과 복(福)을 그들의 자손에게 부어 주신다. 시냇가의 버들처럼 이스라엘을 탁월하게 하실 것이다(3-4절).

 

3)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여호와의 이스라엘 사랑을 보게 된 주변의 열방들과 이방 민족들이 자기들도 여호와께 속한 백성이 되고 싶어서 전력을 기우린다. 여호와께서도 그런 자들에게 마음을 여신다. 이스라엘에게 베풀 은혜를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하심도 예고하셨다(5절).  

 

4) 이스라엘의 왕이요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로서, 선포하셨다(6절,상).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내가 영원한 백성(이스라엘)을 세운 이후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알린 자가 누구냐. 따라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너희는 나의 증인(證人)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6-8절 요약). 

 

☞ 하나님의 이 선포는 나약한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었고, 그 성취의 때를 기다리게 하였다. 그 때가 예수의 성육신과 그의 성령의 강림으로 인한 교회 시대를 맞이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바로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새 역사의 교회 공동체가 세계사의 신 주류로 등장하게 된다.

 

서신서 /  예수로 실족한 이들 & 실족하지 아니한 이들

원시 예루살렘교회는 예수에 대한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다수의 무리들과 예수가 자기 생명이 된 소수의 무리들의 강한 충돌의 한복판에 있었다. 즉 예수로 실족한 이들과 예수로 구원받은 이들의 강한 마찰이 당시의 예루살렘과 원시교회 사이에서 발행한 것이다. 

 

1) 당시의 공회(公會)는 예수의 이름이 온 예루살렘 도성에 가득해지자 초비상에 걸렸다.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라는 뉴스를 믿는 자들이 급증하자. 가해자였던 그들은 그 상황을 큰 위기로 간주한 것이다. 그래서 공권력을 동원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체포해 공회 앞에 세웠고, 금지한 예수 이름을 내세워 죽은 예수의 피값을 자기들에게 돌리려 한다면서 질책하였다(27-28절). 실패한 주류 세력의 퇴락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2) 사도들은 두려움 없이 담대히 맞섰다. 자기들의 행위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에서 나온 것임을 천명하며, 그들에게 죽임당한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를 높이사 모두의 임금과 구주로 삼으신 까닭은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 아니라, 범죄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게 하시려는 데에 있음을 역설하였다(29-32절). 사도들은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시려고 하셨으니, 그들도 이제 저항하지 말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라며 정면 대응했다. 

 

3)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겠는가! 만일 그 때 모두에게 존경받는 율법사인 가말리엘의 지혜로운 중재 역할이 없었더라면, 사도들은 목숨부지(扶持)도 못했을 것이다(33-39절). 결과는 사도들이 채찍질을 당하고, 예수 이름 언급을 금하라는 압력을 다시 받은 후에 석방됐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능욕을 오히려 기뻐했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쉼 없이 전하고 가르쳤다(40-42절). 교회를 통한 역사의 새로운 주류 세력이 그렇게 인간 세상에 등장하고 있었다. 

 

결론이다

여러분은 정말 축복 받은 이들이다. 비록 어떤 종류의 고난과 시련을 당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품격 있게 몸과 마음을 보전하고 유지할 수 있는 영적 지랫대를 이미 보유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존재의 중심이 되셨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도 세례요한처럼, ‘과연 당신이 그 분입니까’라고 묻고 싶을 때도 있을 수 있다. 그 때는 물으시라! 하지만 나의 판단이 그 분의 것과 맞지 않더라도, 나를 그에게 맞추려고 끝까지 순복하라. 그러면 더 큰 은혜가 임할 것이다. 부디 예수께 실족하지 말고, 그의 걸림돌도 되지 말라. 그러면 그 분이 우리 앞길, 아니 영원한 영광의 길을 활짝 열어주실 것이다. 끝까지 주의 증인이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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