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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1-20 (수) 08:39 3년전 751  

본문) 요 2:1~11, 왕하 4:1-7, 요일 5:1-12

 

주현절 셋째 주일이다. 지난 주간에는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올해의 국정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였다. 새해 들어 코로나 재앙으로 힘들어진 국민의 삶을 금년에는 어떻게 회복시키느냐에 관심을 갖고 그 청사진을 제시하는 일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교회는 어떤가? 교회도 년 초에는 목회자들의 그 해의 목회 비전을 교회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일도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인간은 들으면서 생각하고 반응하는 존재이다. 자기 지도자의 생각과 비전을 공유하며 산다. 그러기에 지도자들의 증언들은 중요하다. 다만 국가 지도자는 국가 경영과 국민 생활의 향상과 발전에 도움 될 만한 굵직한 내용들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목회자는 그런 삶을 살아갈 주체인 인간들의 삶과 마음에, 가치와 동력을 불어넣은 일을 감당한다. 그래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도록 이끈다. 이 둘의 균형은 인생을 살만하게 할 것이다. 

 

인간은 세상 속에서 사는 존재들이다. 세상살이란 것은 마치 요즈음 날씨와 풍향과 비슷하다. 늘 그날 같으나 순식간에 돌변한다. 예고된 대로도 되지만, 전혀 예기치 않게 부닥친 일들도 태반이다. 그런 세상은 우리에게 시작도 하게 하지만, 우리를 끝내게도 한다. 우리를 만나게도 하지만 우리를 헤어지게도 한다. 우리에게 보호와 안식도 주지만, 불안과 고통도 안겨 준다. 우리에게 풍요도 안겨도 주지만, 우리의 가진 것들을 빼앗기도 한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세상의 스펙트럼은 그만큼 크고 놀랍다. 문제는 우리의 중심을 어디에다 두고 사느냐에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흐름에 끌려 다니고 휘둘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변덕스러운 세상살이에 흔들림 없이 대처할 능력을 내가 갖추고 사는 지 여부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또 다시 예수를 본다. ‘예수가 있고 없고’가 세상을 사는 인간들에게는 너무도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증언, 곧 ‘아들(예수)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生命)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는니라’(요일5:12)라는 증언은 정말 주목할 만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살아있음을 말한다. 살아 있는 존재는, 마치 물고기들처럼, 흐름에 떠밀려 살지 않는다. 거센 흐름을 탈 줄도 알고, 또 거슬릴 능력을 보인다. 결국 ‘예수를 마음에 주로 모신 이들에게 생명이 있다’라는 증언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나온 말씀이다. 

 

첫째는 예수가 세상을 이기신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요16:33,하 참조). 그 만이 마귀와 그의 세상이 준 극렬한 유혹들을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말씀으로 이겨낸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마4:1이하). 그래서 그런 분이 내 안에 계시면 나는 한없이 부족하여도 승리자인 그리스도 때문에 나도 세상을 이겨낼 자가 되는 것이다(요일5:4-5절, 마4:1-이하 참조). 

 

둘째는 예수를 우리 안에 믿음의 주로 모실 때, 우리는 그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또 나 뿐 아니라 같이 하나님의 자녀 된 이웃들과도 형제자매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관계가 구축되기 때문이다(2절). 이것은 예수 때문에, 내 삶의 구조에 발생한 대변화이다. 삶의 대혁명 속에 들어간 것이다. 나 혼자 만으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유기적인 상황이 내 안에 새롭고 놀랍게 형성된 모습이다. 예수 때문에 말이다!!!

 

좀 더 새겨보자. 예수 믿게 되면서 우리는 하늘 가족의 소중한 신분증을 획득한다. 마치 시집장가 들어 시택과 처가에서 얻는 신분의 변화를 생각하게 된다. 명예만이 아니다. 거기에 걸맞은 책임과 권리도 얻는다. 아버지에게는 사랑과 순종을 바치게 되고, 그의 기업에도 참여하게 되며, 형제자매들에게는 사랑과 책임과 의무도 나누게 된다. 이것은 자의든 타의든 주어진 멍에요 소명이다. 삶의 놀라운 기반이며, 세상에서의 내 영역을 크게 확대하는 발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세상을 견뎌내고 이겨낼 삶의 지랫대들을 강하게 구축해 논 자산들이다.  

 

가족관계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부여되는 것들이 많다. 생각해보라. 남.여가 만나 부부가 되면, 자식도 생산한다. 부모가 된다. 그 순간부터는 그들은 더 이상 처녀. 총각이 아니다. 엄마와 아빠가 된 것이다. 신비한 직임이 부여된 것이다.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가족관계에 들어선 것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 사랑, 희망이 그들을 단단한 하나로 묶어주게 된다. 그 때부터 부모는 책임으로, 자식은 순종으로, 강고한 부모-자식관계에 돌입하여 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도 마찬가지다. 예수 없으면 모든 것이 나 홀로이지만, 예수와 함께 하는 하늘 가족의 삶에는, 모든 시련과 고통의 무게가 완전히 달라진다. 무게만으로는 이전보다 배가 되었으나, 마음의 짐은 훨씬 가볍다. 수고해도 힘들지 않고 겁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기쁘다(5:1-3절). 사랑과 섬김의 힘, 책임과 의무의 무게, 가치와 보람의 무게감이 그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무거운 손주를 업고도 즐거워하는 할머니들을 보라! 

 

여러분, 직시하시라. 올해도 이 세상은 우리를 결코 편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시련이나 고통들의 공세에도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알아야한다. 오히려 가볍게 날려버릴 지혜와 힘이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 안에게는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생명과 지혜 되신 예수를 우리 속에 온전히 모시고, 그의 영과 동행하는 삶을 견지해야 한다. 그와 함께라면 우리는 문제없다. 아무 걱정도 두려움도 없다. 반드시 극복해낼 것이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의 말씀들은 모두, 인간을 향한 세상의 공세가 어떤 것으로 어떻게 밀려오고 있으며, 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극복해 냈느냐에 대한 안내들을 제공한다.

 

복음서에서는 혼인 잔칫집에서의 포도주가 떨어져서 초래된 난감한 문제를 마침 그곳에 와 계신 예수를 통하여 너 나은 내용으로 해결 받게 됨을 전한다. 구약에서는 세상 떠난 제자의 아내가 부채 때문에 어린 아들들을 채권자의 종으로 내보내야하는 절박한 처지를 엘리사를 통하여 처리해 주는 내용을 담아 전한다. 서신서는 그런 비정한 세상의 제반 문제들을 해결할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사랑과 순종을 통하여 열려있음을 제시해준다. 

 

복음서 / 예수의 첫 표적 – 물을 포도주로! 

예수께서 메시아로서의 첫 표적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일이었음을 전한 기사는, 요한이 매우 의도적으로 그의 복음서에 편집한 내용이다. 이 기사로 그는 예수가 진정 누구신지, 그리고 무엇을 보여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인지를 전하려고 하였다. 특히 요한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표적이 그를 좇는 제자들에게서 믿음(신앙)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기록을 하였다(11절). 

☞ 요한복음의 이런 시각은 다른 복음서의 것들과는 사뭇 차이를 보인다. 마태는 예수의 교육으로 시작하였고(5-7장), 마가는 하나님나라의 선포로 시작하였으며(1:1-28), 누가는 고향에서의 배척을 당하심으로 시작한 일에 비하여, 요한은 그의 메시아로서의 첫 사역이 제자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킨 표적(標的)으로 나타났음을 전한 것이다. 이제 그 주요 사항을 살펴보겠다. 

 

1) 갈릴리의 가나는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13km지점에 위치한 곳이다. 그곳의 혼인집에 예수께서 어머니와 함께 초대를 받으신 것이다. 제자들까지 동행했었기에 행차는 컸을 것이다. 그런데 그 혼인집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 잔치의 핵심 용품인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다(1-3절). 평시 결혼식은 한 주간 정도 계속되지만, 이곳엔 하객 맞기에 준비가 미흡했던 것 같다. 

 

2) 그 ‘포도주가 바닥났다’는 소식은 어머니를 통하여 긴급으로 예수께 전달되었다(4절). 하지만 예수의 첫 반응은 아주 냉랭(冷冷)하였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절). ‘당신의 때가 아니라’는 등의 낯선 대응으로 외면하는 듯하셨다. 보통 예수께서 말씀하신 때라면, 당신의 십자가의 대속물로 죽임 당하신 때로 알려지는데, 지금 그 시간은 그런 때랄 수 없는 시점이 아닌가? 그 때의 시간은 이제 막 시작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하신 ‘그 때’는 과연 어떤 때를 말씀하신건가? 

 

3) 우리는 그 궁금증을 어머니 마리아의 대응과 예수님의 이어진 행보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뜻밖에도 어머니는 그 집 하인들에게 급히 당부하였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 무슨 말인가? 어머니는 예수의 ‘당신의 때가 아직 안되었다’라는 말씀의 진의를 다른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곧 ‘지금의 이곳 현장은 내가 포도주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고자 하여도, 내 지시를 그대로 좇아 행할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그 말씀을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역할은 그 장애를 제거하고 그 때를 여는 일이었다! 예수의 말씀 후에 나온 행보를 보면, 더욱 그러했다. 

 

4) 예수의 ‘내 때’는 밝혀졌다. 곧 당신을 믿고, 그래서 당신의 말씀대로 복종할 때, 그래서 당신이 열어주실 새 차원의 변화된 삶과 세상, 곧 새 하늘 새 땅을 맛볼 수 있게 된 때였다! 

 

5) 예수님은 복종할 준비가 된 하인들에게 잇달아 명하셨다. ‘모든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7-9절). 그 명대로 행하자, 물은 이미 최상의 포도주였다!  까닭을 알지 못한 연회장은 신랑에게 ‘이 좋은 포도주가 어찌 이제야 나오느냐’며 추궁할 정도였다. 

6) 물이 포도주로! 이게 가능한 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구원자로 오신 예수에게는 그런 물 같은 낮은 세상을 포도주 같은 높은 차원의 세상으로 변화시킬 표적(능력)을 그렇게 보이셨다. 

☞ 이 표적은 세상의 대변화를 예고한 내용이다. 옛 계약(율법)에서 새 언약(복음)중심으로 옮겨갈 것이다. 의인 중심과 정죄의 율법 세상에서 죄인과 용서 중심의 은혜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예고한 것이다. 죄인들이 숨을 쉬고, 구원의 기쁨을 되찾을 세상의 도래를 예고한 것이다.

☞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일은 질적 변화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외형의 변화는 참 변화가 아니다. 인간의 질적인 변화에서만 가능하다. 예수가 품질을 변화시킬 분임을 밝히셨다. 물이 포도주가 되면 가치도 변한다. 폐품과 골동품이 천양지차이듯, 예수는 우리 인생의 품질과 가치를 최상위로 높이실 분이다. 겉모양도 변하는데, 그것은 질적 변화에 자연히 따라온 선물들이다. 

 

열왕기서 / 길은 있다 – 있는 것을 극대화(極大化)시키기

선지자 엘리사가 죽었던 제자의 아내의 방문을 받았다. 오랜 빚을 갚지 못하자, 채권자가 찾아와서 두 아들 모두를 데려다가 그의 종으로 삼겠다고 통보했다면서 울부짖은 것이다(1절). 율법에도 허락된 내용이었다(출21:2). 자식과도 헤어질 직전이었다. 참 비정한 세상이었다! 

 

1) 엘리사는 그녀에게 매우 의아스러운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것도 매우 점진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우선은 그의 집에 있는 것을 물었는데, 대답은 ‘기름 한 그릇뿐’이었다(2절). 그러자 밖에서 모든 이웃들에게 빈 그릇들을 빌릴 수 있는 대로 다 빌리라고 지시했고, 빌린 후에는 두 아들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름을 그곳에 부어 채우라고 지시하였다(3-4절). 

 

3) 이 황당한 지시(?)에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까? 하지만 여인은 선지자의 지시대로 좇았다. 두 아들을 앞세워 그대로 순종했다. 어찌 되었나? 빌려온 그릇에는 기름으로 다 찼고, 더 채울 그릇이 없다는 보고와 함께, 쉼 없이 흘러나왔던 그 기름이 그친 것이다(5-6절). 

 

4) 선지자가 또 지시했다. ‘그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7절). 절망과 어둠의 늪에서 벗어나 생명과 구원의 장으로 나온 것이다. 어떤 메시지가 담긴 이야기인가? 

☞ 세상이 아무리 냉혹하고 절망스러워도,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피할 길이 있고, 또 마련이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1절, 7절 참조) 

☞ 그것도 내게 전혀 없는 것을 만들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축복하시는 방식에 의한다. 그런 점에서 이 기사는 구약의 오병이어 기사랄 수 있다(요6:1-13참조). 

☞ 하나님을 향한 믿음, 그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 죽임의 세상을 이겨낸 요인이었다! 

 

요한일서 / 세상을 이기는 자 – 예수의 하나님 아들이심을 믿는 자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시다’라는 점을 믿은 데에 있다. 이 점은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며 완성지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그 고백이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들을 맺게도 하고, 이웃 사랑의 근거와 내용들도 형성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처럼 그리스도가 예수임을 부인하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일 수 없다!

 

1)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에 대한 특성을 깊이 있게 말한다(1,4절). ‘믿는’ 것은 현재이나, ‘난’것은 완료형이다. 이것은 믿음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의 결과요 그 증거임을 말한다. 난 생명은 나준 생명을 몸으로 알고 사랑하며 좇는다. 천부적 선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그렇다. 그는 예수의 주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게 되고,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에 응답할 줄 안다. 예수 안에서 맺은 이웃들을 형제자매로 여기고 사랑한다. 

 

2)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모두 세상을 이긴다(overcome 4-5절). 그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세상을 이기신 예수가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하늘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복종심이 있고, 안에서 돕는 보혜사 성령의 능력이 그를 보전해 주시기 때문이다(6-10절 참조). 그에게는 예수와 엘리사처럼, 세상의 시련과 도전이 결코 무겁지 않다. 가볍게 떨쳐버린다(3절). 그렇다. 예수 없는 자는 세상에 백전백패한다. 하지만 예수 있는 자는 백전백승의 주인공이 된다(12). 

 

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자체 증거가 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영생(永生)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는 점이다(11절). 성령-물-피가 증거한다(6절). 이런 믿음이 있나? 

 

결론이다

세상의 시련을 피하려고 할 것 없다. 담대히 예수와 그 사랑을 의지하며 맞서기 바란다. 승리는 믿는 자의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것이다. 세상의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이다. 우리 안에 예수가 맺어주신 소중한 관계망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그런 관계가 더욱 풍성해지도록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예수는 모든 것의 주이시며, 온전함과 풍성함의 주이시다! 그를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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