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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여신도회주일

관리자 2021-01-13 (수) 09:44 3년전 668  

본문)  마 12:22~32, 겔 37:15-23, 엡 2:11-22 

 

주현절 둘째 주일이다. 날씨가 차고 매섭다. 한강은 물론 바다 연안까지도 얼어붙게 할 정도로 추어서, 코로나19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더욱 힘들었다. 이런 중에도 우리 안팎에서는 매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잇달아 터지게도 했다. 

 

밖으로는 미국 국회의사당이 트럼프지지의 극우 세력들의 난입으로 난장판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안으로는 제2의 신천지나 전광훈 사태로까지 우려될 상주열방센터의 코로나 감염확산사태가 붉어지면서, 또 다시 우리 한국기독교의 부끄러운 민낯이 세상에 드러난 일이다.

 

이들은 모두 극단적인 기독교 극우세력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매우 과격하고 비상식적 비이성적이며, 반(反) 예수적이며 반(反) 생명적이다. 사실상 가장 반(反)기독교적 세력들이랄 수 있다. 세상엔 전문인 국제선교단인 ‘인터콥’(InterCP)이라고 알려진 상주열방센터는, ‘Back To Jerusalem’(BTJ)을 표방하면서, 가는 곳마다 극단적 선교정책 때문에, 현장과의 마찰이 심하다. 그들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 본 어느 선교사는 그들의 선교활동을 이렇게 비유하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흡사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기 전의 바울이 가졌던 잘못된 열정이 보이고, 후에 십자군 운동이 가진 극단적 문제점도 엿보인다‘. 복음을 위한 열정은 귀한 데-, 그것이 자기들에게 맞지 않으면 폭력적이 되거나 독선적인 것이 되는 일이 무섭다. 사울이 스데반을 쳐 죽이는데 함께 하듯 하는 것이다. 극우는 절대 의롭지 못하다. 진리를 헛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염병 퇴치를 위한 백신 개발에 오랫동안 헌신해온 빌게이츠가, 코로나19를 우리 인체의 DNA에 퍼뜨릴 백신을 만들어서 전 세계인을 통제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우리 대통령도 그의 하수인이라고까지 가짜 뉴스를 유포한다. 백신 혐오감을 퍼뜨린 것이다. 세상은 치료제 개발과 보급에 전력하는데, 그 교회는 그것을 마귀 짓으로 매도하며 거부한다! 도대체 왜 그 교회 선교는 세상의 역기능적인 행태에 빠져있는가? 진정 누가 더 사탄의 짓인가 궁금하다.  

 

여러분 부디 과격하고 극단적이며 비이성적인 주장들에 현혹되지 말라. 묘(妙)하게 그런 곳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는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사람 수가 많다고 그곳이 진리도 아니며, 구원의 처소도 아니다. 우리를 노예 삼는 곳인 경우가 압도적이다. 정작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성품을 보자. 예수님은 세상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향하여, 당신의 인성에 대하여 직접 소개하신 적이 있었다. ‘나는 마음이 온유(溫柔/gentle)하고 겸손(謙遜/humble)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9). 

 

그렇다. 인간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셨다. 그런 모습은 매우 일관되게 나타났다.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언제나 겸손하셨다. 이런 인성을 품고 사셨기에, 예수님에게는 늘 세상의 낮은 자와 곤고한 자들이 몰려들었다. 그것을 명심하고 성도들도 온유와 겸손의 사람으로 사시라! 지금의 교회도 보다 온유와 겸손해져야 한다. 과격하고 독선적이며 군림하려는 마음은 친(親)마귀적이다. 거기에는 마귀가 들어와 그를 사로잡아 그의 종으로 부리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에게는 온유와 겸손 대신, 냉정하고 불같은 성품은 없었는가? 아니다. 그 누구 못잖은 불같은 성품을 드러내기도 하셨다. 특히 위선자에게는 매우 날카롭게 질책도 하셨다. 사탄에게는 냉혹한 책망도 하셨다. 그럼에도 힘없고 나약한 민중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목자요 함께 웃고 울어주시는 따뜻한 이웃이요 친구된 동정인(同情人)이셨다. 

 

반면에 그에게는 천지를 창조하신 엄위한 초능력을 보유하고 계셨음에도, 그런 것들을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사용치 아니하셨다. 그것도 십자가상에서 당신의 목숨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그렇게 하셨다-! 바로 그 점이 사탄 마귀들에게는 예수가 두려운 이유였다. 자기들이 쳐 논 교만의 유혹의 그물에 걸려들지 아니한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예수가 두렵고 무서웠다. 그것이 사탄이 예수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 인정하게 된 이유였다. 

 

그러면 선교를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예수의 신적인 권능으로서의 능력과 기적들, 오직 하나님만이 표할 수 있는 제반 능력들을 예수께서는 어떻게 드러내셨는가? 그것은 당신 안에서 당신과 동역(同役)하시던 성령(聖靈)의 개입으로 가능하였다(28절). 

 

오늘은 우리 총회가 제정한 여신도(女信徒)회 주일이다. 여신도가 여신도다우려면, 교회의 모성적(母性的) 기능을 충실히 감당해 주는 일이라고 본다. 생명의 양육에는 부성적인 역할과 함께 모성적 역할이 중요한데,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모성적 기능이란 아무래도 생명을 돌보고 배려하고 채워주는 따뜻함과 너그러운 마음과 손길이 잘 발휘되는 데에서 나타날 것이다. 부디 예수께서 품으신 온유와 겸손으로, 서로 하나 되는 교회를 만드는 신도회가 되시라. 

 

세상은 지금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하여, 서로 하나 되지 못하고 높은 담을 쌓고 지낸다. 그게 손해와 불행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함정과 오류를 극복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성경은 답을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평화이시다’는 것이다(엡2:14절). 교회는 그의 능력으로 그런 세상을 열어야 된다고 말한다. 오늘 주현절 둘째 주일의 전 말씀들은 분열된 세상과 인간에게 화해와 통합을 일구는 길을 열어주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 주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복음서는 성자 예수를 통하여 귀신에게 빼앗겼던 인간의 실존이 제 모습을 회복하는 내용을 전한다. 동시에 그 거대한 어둠에 세력에 대한 주님의 싸움도 함께 전한다. 예언서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남북으로 분열되었던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로 통일을 이루게 될 것을 예고 받는 내용을 담았다. 서신서는 성령 하나님이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통합한 새 사람으로서의 교회가 등장하는 모습을 감격하며 전한다.  

 

복음서 / 임자 만난 귀신, 그 꼬리를 내리다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지상 사역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선포하고 가르치고 치유하는 일들로 예수는 실낙원한 이 어둠의 세상에 구원의 생명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셨다. 복낙원의 작업에 시동을 거셨다. 그러자 그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초긴장한 세력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첫째는 인간성을 짓누르고 살았던 귀신 자체다. 둘째는 그들의 앞잡이로 지내던 인간 세력들이다. 그들은 거짓 뉴스를 만들어 방해에 앞장섰다. 

 

주님의 대응은 어떠하셨는가? 귀신들 상대에는 전혀 어려움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지난 주일의 예수의 광야시험에서(마4장 참조), 나사렛 예수는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악령인 자기들은 도저히 직접적으로 상대를 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존재임을 확인했고 또 시인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귀의 술책은 거기에서 끝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세월 자기들의 앞잡이로 지내왔던 위선적 종교인들을 내세워, 예수와 그의 사역을 비방하고 역선전하여 부작용을 확산시키면, 효과를 더 얻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런 사이비(似而非)들에게 그의 공격과 저주를 집중하심이 확인된다(25-32절). 그들의 뒷소리하는 행태를 방기하면, 당신 사역의 훼손은 물론, 구원의 문도 자연히 크게 닫히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과정에 담긴 메시지를 찾아보자. 

 

1) 메시야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귀신 들려서 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를 만나 귀신이 쫓겨나는 바람에 정상인이 되었다(22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확연히 갈렸다. 하나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는 반응이었다(23절). 그 말은 ‘그가 진정 메시야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반대의 반응이 그 여론을 덮쳤다. 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이라는 주장이었다(24절). 잔치 상에 재를 뿌리는 것 이상의 훼방꾼들이 등장한 것이다. 예수님이 가만히 계실 리가 없었다-!

 

2) 예수님의 그들- 바리새인들을 향한 반론의 요지(要旨)는 이것이다. 

☞ 예수와 마귀가 공존 공생하는 현장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25-26절). 그것은 어둠과 등의 빛의 공존불가의 원리와 같다. 둘이 만나면, 반드시 어느 한쪽은 상대를 밀어내야만 한다. 누가 밀어내고 누가 쫓겨날까? 당연히 강한 세력에게 약한 세력은 밀린다(29절). 지금 귀신이 퇴출되고 사람이 회복됨은 예수가 ‘더 힘 센 분’으로 그들 가운데 오셨음을 말한다(29절).  

 

☞ 그들의 말에는 억지가 있고 예수의 사역과 명예를 훼손시킬 악한 목적이 있음을 지적하셨다(27절). 그들 유대교에도 악령 추방자들이 있었다. 자기들 경우에는 ‘악령의 힘으로 귀신 쫓아냈다’라는 식의 비방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에게는 그냥 귀신이 아니라 귀신의 왕 바알세블의 힘으로 악령추방을 한다고 억지를 부린다. 가짜 뉴스이며 자기모순들이었다. 

 

☞ 그들은 지금 예수께서 악령 추방하신 일이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행하시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왜곡 선동하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위험천만한 무지의 소산이다. 실제로 귀신에서 해방된 인간은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있는데(28절), 그들은 성령의 행위를 바알세불의 힘으로 매도했다. 실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최악의 신성모독이었고 성령 거역이었다(31-32절). 

 

3)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은 당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결단해야 한다고 요구하셨다(30절). 즉 예수 문제에 관하여는 중간자적 입장은 없음을 선언하셨다. 

 

에스겔서 / 한 목자 아래서 통일될 유다와 이스라엘

성부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 에스겔에게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들어야할 희망의 메시지를 알려주셨다. 그것은 오랫동안 흩어지고 갈라졌던 민족들(12지파)이 머잖아 당신의 손 안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예언이었다. 특이한 두 막대기 포개기란 퍼포먼스까지 행하게 하시면서 그 놀라운 일이 구체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각인까지 시키셨다(16-19절 참조). 

☞ 그런데 사실 그들이 분열된 지도 오래되었고, 포로생활도 오랫동안 해왔던 이스라엘-유다 백성들에게서의 통일문제는, 그들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아닐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포로에서 해방되어 본국과 귀향하는 일이 더 우선적인 관심사일 터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해방도 중요하지만, 분열 상태가 해방 후에도 계속되는 일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 동안의 그들의 고난과 포로 됨은 그들 12지파가 남북으로 분열되고 불구되면서, 여호와를 향한 신앙의 탈선과 그로 인한 삶의 망가짐으로 인한 징벌의 열매가 곧 포로생활로 연결되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민족을 위한 회복의 계획에는 우선적으로 그 동안 분리되었던 남북의 민족들이 하나 되는 일까지 포함하셨다. 그래야 하나 된 이스라엘은 새롭고도 역량을 행사할 이스라엘로의 온전한 출발이 가능하다고 보신 것이다(21-23절,하)

 

☞ 이 예언의 성취는 예상 밖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고레스가 페르시아를 건국하면서 제1의 사면권을 유다 백성들의 본국 귀환령으로 행사하자, 그 동안 바벨론에는 물론 여러 곳으로 끌려가고 흩어진 모든 유대인들이 마음을 모아 본국에로 귀환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취되었기 때문이다(사49:5-6참조). 덤으로 얻은 것치고는 너무 큰 선물을 획득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섭리였다. 그 때부터 그들은 하나가 되었고, 그 후로는 전 인류(人類)의 하나 됨을 향해 새로운 행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다만 영원한 목자 그리스도의 오심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서신서 / 십자가의 예수가 생산한 ‘한 새 사람’ – 교회 공동체

에베소서는 바울 사도의 옥중서신이다. 그곳에서 그는 에베소 교우들에게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모인 교회란 곳이 진정 어떤 곳이며, 어떻게 세워진 곳인지를 일깨우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내용에서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아닌, 그들 모두를 품은 제 삼의 새 사람으로서의 예수의 몸체(성체)가 곧 교회임을 일깨우는 말씀을 전한다. 바울의 교회론(敎會論)이다. 

 

1) 본래의 이방인은 어떤 존재였나? 육체로는 이방인, 무할례자,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 약속의 언약에서는 외인,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었다(12-13절).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며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19절). 그러면, 이렇게 극적인 대변화를 견인하게 된 요인(要因)은 무엇 때문인가?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때문이었다(13절). 예수의 십자가는 그의 온유함과 겸손함의 극치이다. 자신의 희생인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높은 담을 허무셨고, 원수된 것까지도 소멸하셨다(14절). 원수된 양쪽의 담을 공고히 하는 계명의 율법마저 폐하였다(15절,상).  

 

3) 그래서 예수는 온 세상의 평화(平和)가 되셨다(14절). 이방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모두에게  평안(平安)을 전하셨기 때문이다(17절). 예수 때문에 서로 다른 둘은 한 성령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18절). 그는 영원한 모퉁잇돌이시다(20절,사28:16,벧전2:4-6참조). 서로 다른 이들이 그 안에만 들어가면, 하나가 되고 연합되며 조화와 일치를 맛보게 하는 놀랍고도 기인한 존재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의 교회는 예수의 그러한 몸체임을 대변한다. 

 

4) 교회는 예수의 몸이기에, 평화 공동체여야하며 화해와 관용의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로 인한 화목을 세상에 실천하여야 한다. 자신들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전 위에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여야 한다(20절). 예수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야만 한다(22절). 

 

결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회복과 통일과 일치의 주이시다. 분열과 대립과 싸움은 마귀의 행태이다. 마침 우리나라는 분단을 넘어 통일로 가야 하겠고, 교회도 분열을 넘어 일치를 이루어야 할 때이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당신을 내어주신 예수는 모든 마귀의 권세를 제압하고 물리칠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따라서 우리의 하나 됨의 운동은 예수 대장을 모시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담대히 진행되어야 한다. 예수의 모퉁잇돌의 영성을 이어받아야만 하고, 주님의 평화의 영도 충만히 받아서, 교회와 성도들의 역량을 총결집해서 화해와 일치의 세상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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