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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후(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신년주일

관리자 2020-12-30 (수) 00:37 3년전 778  

본문) 요 1 : 29-34, 사 49 : 1-7, 엡 3 : 1-13 

 

성탄 후 둘째주일이자, 2021 신년(新年/신축년)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하였다. 서로 축복을 나누자. 그러면 올 해는 무슨 일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까? 위축(萎縮)감 대신에 기대(期待)감을 표하고 싶다. 작년 2020 경자년 한 해는 정말 기이하고도 낯설고 두려운 한 해였다. 온 지구촌이 코로나19 판데믹으로 인하여 모두가 위축당하면서, 모든 면에서 삶이 뒤로 밀렸다는 느낌들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교훈은 있었다. 그 동안의 삶의 연장으로는 미래를 희망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그런 반성과 교훈들을 망각(忘却)하지 않고, 그 대응책을 찾아 얼마나 새로운 삶의 방향을 치열하게 모색해 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머잖아 코로나의 시대도 지날 것이다. 하지만 보다 성숙한 우리의 모습이 나오지 못하고 이전의 낡은 것들로 되풀이 된다면, 우리는 또 다시 더 무서운 제2의 코로나를 만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제 코로나 백신에만 의존하지 말고, 우리 모두를 되살릴 새로운 유형의 삶의 방식(뉴모럴)들을 개발하고 생산해내야 한다. 

 

새해에는 그런 변화된 새 삶에 우리 모두가 눈이 뜨고 마음이 열리기를 바란다. 그게 바로 참 축복받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마음 자세는 무엇일까? 탐욕과 아집의 마음을 버리고, 세상과 이웃과 함께 공존과 공유의 마음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살아가는 마음이다. 즉 자기 중심에서 모두의 중심으로, 나만 잘되는 것에서 모두가 함께 잘되는 세상을 목표하며 사는 삶을 지향하는 일이다. 우선 하나님의 백성인 나부터 앞장서는 일이다. 

 

변화와 갱신이 가장 보람되며, 가장 진실하고 지속적일 수가 있으려면, 그 때가 언제인 줄 아는가? 바로 내 안에서부터 그 변화의 바람이 시작되어 자랄 때이다. 외부로부터의 바람도 중요하지만, 내 자신 안에서부터의 솟아날 때만큼 가치 있고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 자신부터의 변화와 갱신에 따른 성숙한 삶에 관심하며 노력하여야 한다. 그럴 때, 나는 진정한 살아있는 존재가 되리라. 그것도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야기된 것이면 더욱 고귀하다. 

 

이를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 경륜의 손길을 주목하고, 그 인도하심을 받아들이며 좇는 일이 지혜이다. 

우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성부 하나님을 보라. 그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두 가지 차원에 눈이 뜬 인물이기를 원하셨다. 첫째는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일이었다. 그래서 복의 저장소가 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다. 그런 후에 그가 받은 그 복을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주고 베푸는 자가 되는 일이었다(창12:1-3). 그 바람에 그와 그의 후손들의 평생의 시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현하는 삶이 된 것이다. 

 

세상의 무지랭이와 같았던 갈릴리 민중(民衆)들을 당신의 제자로 택하신 성자 예수님을 보라. 그들은 다만 의식주와 일용할 양식에만 매달려 살던 소시민에 불과한 이들이었는데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라는 새로운 차원의 삶의 소명(召命)을 부여하셨다(마5:13-16). 그들에게는 감히 세상과 이웃이란 큰 덩치를 끌어안고 살아가기에는, 분수에 넘치고 낯설고 버겁고 범접(犯接)하기에 난해한 소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명 때문에 그들은 어떠했나? 그들의 존재와 삶의 무게와 가치가 전 인류 최고의 수준까지 들리움을 받은 것이 아니었던가!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 하나님은 어떠하셨나? 그 성령 받은 무리들을 이끄셔서, 아브라함의 소명 실현을 세상에 펼치는 무리들이 되게 하셨다. 예수의 미션을 지구촌 모든 민족들의 삶과 가슴에 심게 하는 일에 목숨을 내걸고 나아가게 하셨다. 그래서 자신의 개인적인 멍에 대신에 하나님의 소명의 멍에로 매고, 유대교의 자기중심적 신앙의 완고한 장벽과 싸우며, 복음의 세계화를 위하여, 전 생애를 바치며 헌신한 무리들이 되었다. 그들이 선교의 요원들로 들어간 곳곳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실천되면서, 개인과 가정과 세상과 역사를 구원해냈다! 

 

사실 지금의 우리는 그런 선배들의 수고와 헌신의 열매들을 따먹고 산다. 우리의 웃음과 부유와 위치는 그들의 눈물과 수고와 피 흘림의 열매이다. 그 바람에 우리는 배부르게 되면서, 어느덧 가진 것들도 많아졌다. 뭔가 소유한 것들을 지키려는 보수적이고 소극적이며 방어적인 존재가 되었다. 아니 이전보다 훨씬 더 탐욕적인 존재가 되기도 했다.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져 들었다. 그래도 되는 것인가? 선배와 조상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우리는 외면해도 되는 것인가? 역사를 우리 대에서 끝내려는 행보를 보여도 되는 것이냐 말이다. 

 

절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이 두렵고, 우리 몸에서 태어난 후대들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기에, 절대 그럴 수 없다. 소명의 단절(斷絶)이 아니라 계승(繼承)으로 나아가야 모든 숙제가 풀릴 것이다. 무뎌진 소명의 칼을 이전 보다 날카롭게 갈아야 하겠다. 그래야 우리는 열린 이 새해도 설렘 속에서 맞이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세상에도 부끄럽지 않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 공경과 인간 사랑의 계명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은 계명 중의 최고의 계명이다(막12:33-34참조). 그 외에 다른 모든 계명들은 다 이 계명안에 속해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험난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맞이한 때일수록, 보다 선명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계명을 붙들고, 그의 말씀의 안내를 받아 그 분의 인도하실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오늘 주신 세 본문 말씀들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앙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나침판을 제공하리라. 

 

복음서는 세례 요한을 통하여, 우리가 ‘세상 죄를 지고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보게 한다. 그를 제대로 보아야 우리가 길을 찾고 헤매지 않는 든든한 인생살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약은 오신 메시아 예수가 어떤 분이시며, 그에게 속한 백성이 되는 이들을 세상의 빛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신 내용을 전하여 준다. 서신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면서, 그 위에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이방인도 같은 상속자요 지체요 약속의 참여자가 됨을 선언한다. 

 

복음서 / 하나님의 어린 양이 베푼 성령 세례를 받아야

본문은 세례자 요한이 자신에게 나아오시는 나사렛 예수를 보고, 예수가 누구신지를 직접적으로 증언한 내용이다. 요한은 예전에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라면서 ‘자기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 한다’(막1:7)라고 고백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그는 자신의 물세례를 베푸는 일이 오직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선제적 행위임을 강조하였다(31절), 요한의 증언들은 예수께서 왜 세상의 구세주이신 지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1)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29절). 이 증언에서 요한은 자신의 물세례 행위가 세상의 죄악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적인 죽음이 세상의 죄악을 제거하는 결정적인 백신(vaccine)이 됨을 선포한 것이다. 자신의 물세례는 다만 예수의 성령 세례로의 길을 여는 길잡이 임도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지고 가는’이란 말은 ‘아이론’(헬)으로서, ‘제거하다, 말살하다. 치워버리다’는 강한 뜻이 있다)

 

☞ 구약의 제물(祭物)용 양(羊)은 사람이 준비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친히 세상 죄를 치우기 위하여 준비하신 어린 양이셨다(29절,사53:10참조). 즉 하나님이 친히 세상 죄를 제거하기 위한 대속물로 택하신 당신의 종이셨다(마20:28,사52:13 참조). 그래서 예수는 회개한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열어주신 분이 되셨다(요14:6,히10:20참조).   

☞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사53장에 나타난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從)’의 모습을 보았다. 선지자 이사야는 일찍이 고난 받을 하나님의 종의 임재와 그의 구원의 행위에 대하여 매우 상세히 예고한 바 있었는데(사52:13-53:12, 특히 53:4-7 참조), 요한은 지금 그 선지자의 예언이 자기 앞에 오신 나사렛 예수에게서 성취될 것을 선포한 것이다. 

 

☞ 어린 양 예수의 모습은 하늘나라에서 까지도 확인된다. 계시록 기자인 요한이 성령으로 하늘에 올라서 그곳에 계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위치가 ‘어린 양’ 보좌에 계신 분오로 일관되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계5:6-14,7:14,12:11,13:8참조). 곧 속죄주의 영광을 본 것이다. 

 

2) 예수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증언했다(30절). 예수님의 선재성(先在性)은 요1;1절부터 줄기차게 증언된 바 있는 선포였고, 지금 세례 요한의 증언에서도 그 점이 다시 강조된다. 

 

3) 예수는 ‘성령(聖靈)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시다’고 증언했다(33절). 요한은 물세례, 예수는 성령세례를 각각 베푸는 분들이었다. 절묘한 역할 분담이다. 교회는 이 둘을 함께 요구한다. 모두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세례들을 어떻게 구분하는 일이 합당할까? 

☞ 그 차이는 이렇게 보인다. 물세례는 지상교회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자격증(입교인)이다. 하지만 성령세례는 크리스천(하나님의 자녀)됨의 영적인 인증서이다. 교인이라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 참 신자가 되어야 구원을 받는 것 아닌가! 머리로 믿는 신앙도 필요하지만 가슴으로 믿는 신앙은 절대적이다. 머리는 말과 생각을 보여주지만, 가슴은 믿게 하고 행동하게 하며 살게 까지 한다. 그게 바로 성령세례를 받은 이들이 보여주는 증표이다. 예수가 주신다. 

 

4)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 증언했다(34절). 오직 예수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다는 뜻이다. 동시에 예수만이 온 세상의 구주이심도 증언한 내용이다. 이 증언의 수용 여부는 인류를 둘로 가르는 분기점이 되었다. 구원과 저주로 갈라 논 것이다. 본래 ‘증언’(마르튀스)이란 말엔 순교자란 뜻이 있다. 예수가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목숨을 건 각오에서 나온 의지의 고백이 담겨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언서 / 이스라엘에 구원을, 이방인에겐 빛을 안겨주신 하나님의 종

본문은 하나님의 친 사랑과 돌봄에서 벗어나 있던 주변 이방 백성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전달될 것을 고하신 예언의 말씀이다(1절). 그 방법은 당신의 택한 종을 통해서 이루신다(3,5-6절). 그러면 신비로 가득한 여호와의 종은 누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 여호와는 당신의 외침을 들을 대상을 섬들과 먼 곳 백성들로 삼으셨다(1절,상). 지중해의 섬들과 온 주변 세상 모두를 향한 여호와의 공개적인 선포를 전하려 하셨다. 그들 선정이유는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새로운 것)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시려 했기 때문이었다. 

 

2) 그리고 여호와가 당신을 대리하여 그들 이방인들을 상대할 그의 종에 관하여 설명하셨다(1,하-3절). 그는 태(胎)에서부터 부르셨고 복중에서 그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그의 입을 칼같이 만들고, 그의 능력의 그늘 속에 숨기셨고, 그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들어 화살 통에 감추셨다(1-2절). 여호와는 그를 ‘나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고 밝히셨다(3절). 그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셔서, 이스라엘이 그에게 모이게 되는 이시다(5절). 참 절묘하다. 대체 누구인가? 아기 예수에 대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시므온의 증언이 생각난다(눅2:34-35참조). 그렇다. 우리 교회들은 이 고난 받은 종을 예수로 고백한다. 

 

3) 그의 역할이 예고된다. 야곱의 지파들을 회복시키고, 그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서 당신의 구원을 땅 끝까지 베풀게 하신다(6절). 그것은 온 세상의 이방인들에게는 정말 최대의 복음(福音)이다! 자기들도 머잖아 이스라엘 못잖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친히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백성이 될 것임을 통보 받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 핵심 주역인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4) 놀라운 복음이 추가되었다. 여호와의 택하신 자들에게는 세상 안에서도 놀라운 신분의 변화들이 발생할 것도 예고되었다(7절).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계신 이유 때문에 남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여러 백성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자, 권세자들의 종살이하는 자들에게는 도리어 세상의 왕과 관원들이 그들을 향해 일어나 경배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완전 새판의 예고다. 이런 현상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복음 사역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취되게 되었다. 

 

서신서 / 선교를 통하여 이방인에게 비추게 된 구원의 빛

본문은 사도 바울의 옥중(獄中)서신이다(1절). 그런데 본문에는 그의 고난에 대한 불편함이나 원망 같은 감정은 없다. 반면에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비밀이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밝히 공개된 일에 대하여 감격하면서, 그런 주의 놀라운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일을 자기 같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위탁해 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7-8절). 걱정하는 교회 성도들도 영광스러운 일이니, 자기의 투옥의 환란에 낙심 말라 권하였다(13절). 

 

바울이 깨닫게 된 그리스도의 비밀은 어떤 것인가? 이 비밀은 ‘뮈스태리온’이란 원어로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한다. 어떤 지혜인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간의 완전한 연합이 성취됨을 의미한다. 이런 일은 인간들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오직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서로를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지혜로서는 가능해졌다. 그 바람에 이방인들도 예수의 십자가 복음과 그의 교회 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며, 함께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6절). 이방인을 빛으로 세우리라는 예언도 성취가 됐다. 

 

이런 놀라운 일은 창조 이래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었고,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령께서 바울에게 이방인을 위한 교회들을 세우게 하시고 그 안에서 되어가는 일을 보면서, 그 영원하신 예정된 뜻을 계시(啓示)로 깨닫게 되었음을 말한다(3-4,5,7,9-11절). 

 

결론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사랑의 날개를 다시 펴자. 이를 위해 우리는 세상 죄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멍에를 다시 걸머지자. 그 십자가 복음에 순복할 때,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게 되고, 내가 받은 사랑과 은혜를 헤아리면서, 아브라함처럼 세상의 불행한 이웃들에게도 복을 끼치며 살아갈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자. 겸손히 성령의 세례를 깊이 구하면서, 내 힘과 의지가 아닌 주의 힘으로 살아갈 새해가 되게 하자. 복음을 위해 자신을 비우는 자를 주님이 높혀 주심을 체험하며 살아가자(사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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