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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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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12-16 (수) 00:04 3년전 706  

분문) 사 40:1~11, 눅 1:57-66, 빌 4:4-7

 

대림절 넷째 주일이다. 절기의 끝 주일이다. 메시아의 강림(降臨)도 임박해서, 강단의 네게의 촛대도 모두 등을 밝혔다. 하지만 금년의 성탄은 최근 들어 가장 우울하고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맞이할 듯하다. 원인은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젼국의 확진자가 1,000명을 넘어서는 충격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정부와 방역 당국은 국민들의 거리두기 3단계를 고려하고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사람 만나기가 가장 힘든 때가 될 것 같다.  

 

우리 교회들의 형편은 더욱 힘겨운 때를 맞이하고 있다. 년 중 가장 바빠야 할 계절인 성탄과 년말연시가 이토록 초강경 비대면이 요구되고 상호접촉 금지조치가 강화되는 바람에, 각종 행사는 물론 제반 교회의 중요행사 진행에 차질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해서인가, 요즈음 그 어느 때보다, 전국적으로 교회발 코로나 확진자들이 급증하면서 개신교회가 코로나의 숙주(宿主)라는 세간의 비난들이 따갑게 들리면서, 무척 마음이 아파오기도 한다. 

 

초기에는 신천지가 비난의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우리 개신교가 그 자리를 차지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런데도 상당수의 개신교회는 정부당국과 방역당국과 맞서려는 듯한 행동도 서슴치 않고 있어서, 더욱 우려스럽다. 가짜 뉴스라고 보이지만, 정부가 교회를 탄압하기 위하여 마치 코로나 방역을 무기로 교회 집회를 계속 옥조여오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과장된 반응이다. 

 

그래서였나, 서울의 어느 교회에선 지난 7주간이나 집회를 계속하였고, 그 바람에 그 교회에서만 이미 확진자가 백 수십 명이 나오고 있어서, 큰 충격을 국민들에게 안겨주기도 한다. 무척 무모하고 지혜롭지 못한 처사이다. 그런 모임으로 무엇을 얻자는 것일까? 잃는 것이 훨씬 더 클 것이다. 정부는 어떻게 하든 생명을 보전하고 살리자며 통제하는 중인데, 교회가 그것에 반발하거나 무시하여 그런 무모한 집회강행을 한 행위는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그래서 과연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겠는가? 제발 모든 지(枝)교회들은 ‘공(公)교회 의식’부터 먼저 갖추어야만 한다. 내 교회는 독자적이기 이전에, 먼저 주 예수의 교회이며, 전체 세계 교회의 일원이며, 동시에 한국의 전체교회의 일원이기도 하기에, 내가 잘못하면 모두에게 욕을 돌리게 될 것이고, 내가 잘되면 모든 교회에 기쁨을 줄 것이라는 의식을 꼭 갖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공교회 의식이 없이 오직 ‘개교회주의’에게 천착하면, 결국은 모든 귀한 것들을 세상과 마귀에게 다 빼앗기고 말 것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교회의 세상을 향한 대응이 보다 더 지혜로워야만 할 때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복음과 진리에 어울리지 못한 어리석은 조급한 처신(?)으로 인하여 세상 현장으로부터 너무 많은 불신과 비난들을 당해왔다. 

 

교회라면 세상에 ‘우리에게 필요한 교회’요 ‘우리를 위한 교회’라는 이미지가 각인이 되어야 마땅한데, ‘자기들끼리만 좋은 집단’, ‘우리와는 상관없는 집단’이라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강림하실 주님의 탄식도 얼마나 깊으셨을까! 특히 ‘주께서 가까우셨느니라’(빌4:5)라는 시점인 금주 대림절 마지막 주일에 주신 말씀들을 접하게 되면, 더욱 그러하다. 대체 우리들은 이 절기를 어떤 마음가짐과 생각으로 맞이해야 할까? 

 

한 가지 지극히 평범한 질문을 드린다. 여러분은 곧 오실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마음과 분위기로 맞이하고 싶은가, 내가 좀 힘들다고 해서 우울하게 맞이할 건가, 보다 반갑게 맞고 싶은가? 어수선한 속내를 드러내고 싶은가, 따뜻한 마음을 드러내고 싶은가? 부담스럽게 맞이할 건가, 기꺼이 환영하면서 영접할건가? 뻔한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실상을 감안하면, 답하기에는 그리 간단치 않은 질문들일 것이다. 

 

그러면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의 세 분문 말씀에 나타난 내용 속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귀한 분을 기다리고 그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서 영원한 삶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시야와 마음가짐이 일반인들과는 분명히 달라야만 할 것이다. 시선은 오시는 분에게 집중해야하고, 마음은 그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 분에게 적합한 내 사고와 삶의 내용이 되도록 조율(調律)되어야 한다.

 

구약의 예언서는 포스트-바벨론 시대를 맞이할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세 가지 차원의 내용을 준비시키시는 여호와의 말씀들이 소개되어 있다. 복음서는 메시아 강림의 예비자로 온 세례 요한의 출생을 소개하면서, 그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이 세상에 펼쳐질 것인지를 담고 있다. 서신서는 바울의 옥중의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의 기대감에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어떠한 성숙한 영적 자세를 주변에 보여주어야 할 지를 전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들은 모두가 옛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고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유효한 말씀들이기에, 이제 본문의 말씀 전체에 흐르는 요지를 중심으로 그 안에 메시지들을 일별(一瞥)하며 되새겨보려고 한다.

 

예언의 말씀 / 죄의 멍에는 벗고 위로와 소망의 옷을 입혀야 

 

1) 하나님은 당신의 대변자인 소리(voice)에게 지시하신다. ‘너희는 위로(慰勞)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절). 그 위로의 선포를 하되,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감정이 아닌 의지에도 호소되게) 말하라고 하셨다(2절,상). 

그렇다면, 왠 위로인가? 여태껏 수형자(受刑者)와 같은 생활을 2-3세대에 걸쳐 해왔었는데, 왠 위로인가? 그들의 심판자이셨던 여호와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셨다. 그들은 그간 여호와께서 부여한 죄 값을 율법의 배상법에 따라 갑절이나 받았고(출22:4,7,9참조), 이제는 노역(부역)의 때도 끝났기 때문이며, 죄악의 멍에에서 자유함을 받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2절). 즉 그들의 수형 생활은 고난 속에서도 죄를 씻어내는 의미가 큰 기간이었으나, 이제는 출감하여 자유인으로서의 새 생활, 새 품격에 걸맞는 생활인이 되어야할 때임을 통보하신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빠른 자기의식 전환이다. 죄수시절을 빨리 잊어야한다. 그곳의 우울,침잠,분노,회의,좌절 등의 감정의 포로에서 속히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 최근 어린이 성폭력 주범으로 오랜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조00씨의 거처 문제가 국내에 큰 화제이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의 새 출발 준비가 안 된듯해서 큰 걱정이다. 자신을 새롭게할 과정 없이 출소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 곧 포스트 바벨론 시대를 살아가려는 하나님의 백성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들 속에 묵은 부정적 감정들을 씻어내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새 세상과 축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도록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을 일차적으로 집중하신다. 옛 것인 죄의 멍에는 어서 벗고, 앞의 것인 약속의 말씀에 의한 위로와 희망의 옷은 입어야 됨을 강조하였다. 이 정리를 산뜻하게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 벌써 1년 가까이 진행 중인 지금의 코로나19 판데믹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지구촌에 그 어떤 대 전쟁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참상과 후유증을 지금 지구촌이 겪고 있다. 문제는 이 사태를 어떤 눈으로 보느냐, 그리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그 이후의 삶들이 결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창조주의 창조질서를 망가뜨리고 그의 경고를 외면하고 탐욕적 삶으로 살아온 것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지금 우리가 받고 있다는 영적 안목이 절대 필요하다. 치료약이나 백신이 우리를 구해 줄 것이다는 믿음보다도, 우리의 친환경적 삶,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가려는 변화된 삶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하늘의 위로는 자신의 잘못된 삶을 통감하며 새로운 차원의 성숙한 삶을 원하는 이들에게 부여될 것이다. 

 

2) 여호와는 당신의 오실 길을 평탄케 하고 예비하라고 명하신다(3-5절). 옛 바벨론에는 자기 신(神)들의 상을 모시고 다니던 화려한 길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호와는 이제 그의 백성들을 친히 이끌고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오셔서, 여태껏 맛보지 못한 새 차원의 세상을 활짝 여실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백성들은 마중하고 길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그 내야할 길은 광야이며 사막이라서 제대로 된 길이 없다. 평탄치도 못하고 고르지도 못하다. 그런 거친 길이어서 오가는 모든 일행들은 많이 고통하게 된다. 조심해야할 어린이와 젖먹이들도 많다(11절 참조). 따라서 백성들의 협력이 절실하다. 어떻게 할건가? 방법은 이것이다. 

 

-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것이 평지가 될 것이요’(4절,49:11-참조)

☞ 이런 방법은 물론 육체적인 피와 땀과 눈물의 헌신적 노동이 뒤따른다. 하지만 그 열매는 놀랍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들(사람들)이 함께 환호하며 일치가 된다(5절).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며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행동의 지표이다. 낮은 자는 우대하고, 강한 자는 겸손히 섬기면서 서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서로 하나 되어 지상에 천국을 이루어가는 방식이다. 이런 모습은 원시교회에서 성취되기도 하였다. 불공평과 불균형에 빠진 세상을 향한 선교과제이다. 

 

3) 높은 산에 올라 아름다운 소식을 널리 전하고, 오시는 하나님을 ‘와 보라’며 외치라 하신다(9-10절). 하늘의 소리는 무엇을 외치는가? 그 소리의 과녁은 아름답고도 분명하다. 

 

☞ ‘인간(육체)의 것들은 한순간에 불과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만은 영원하다’(6-8절)는 것을 외치는 일이다. 그렇다. 천하의 바벨론과 페르시아(바사) 제국도 그 영광과 권세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 나라와 백성 속에 역사하시며 그들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는 시들거나 사라짐이 없이 여전히 창성하기 때문이다. 

☞ 역사와 세상의 승리자는 오직 여호와이시다(10-11절). 그 어떤 권세나 인간도 풀과 꽃과 같을 뿐이다. 오직 여호와 앞에 심판 받을 대상들일 뿐이다. 하지만 오직 주를 좇고 따르는 그의 백성들은 그의 돌봄과 양육과 편안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을 외치는 것이다.  

 

복음서 / 은혜 받고 은혜를 끼치며 사는 인간

 

4) 하나님의 뜻과 은혜에 온전히 응답하는 인간이 되도록 준비하라. 

세례자 요한이 드디어 태어났다(57절)! 오실 메시아와 그를 기다리던 모든 이들에게는 정말 필요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는 진정 그에게 부여된 요한이라는 이름값을 감당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 이름 ‘요한’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이 그 이름 안에 있다. 그래서 그랬던가! 탄생 과정에서부터 그의 존재를 좌우할 이름 짓기가 가족들 사이에 시비(是非)거리였고 놀라움이었다. 

 

탄생 후 8일째 할례식 현장에서 아기 이름을 아비의 이름에 따라 ‘사가랴’라고 하려하자. 엄마 엘리사벳이 ‘아니라 요한이다’라며 정정하고 나왔다(59-60절). 놀란 주변인들이 그 가계에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이가 없는데, 그렇다면 아빠 사가랴의 입장은 어떤지를 묻게 되었다. 그간 말 못하고 지낸 사가랴는 서판을 통하여 아기 이름을 썼다. ‘요한’이었다(63절). 부부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아들임을 수용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가문의 아들보다는, 주님의 뜻을 이룰 아들을 더 원했던 것이었다. 순간 아비의 혀가 풀렸고 찬양이 터지며,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 세례자 요한은 은혜로 왔고 은혜로 살았으며 은혜로 죽은 이였다. 모태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의롭고 신실한 제사장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보낸 이였고, 주의 손(능력)이 평생에 그와 함께하면서(66절) 오실 메시아 예수의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물세례를 베풀면서 회개한 영혼들을 주님께 안내하였고, 이스라엘 마지막 예언자로서 목숨을 다해 사역하다가, 헤롯의 미움으로 참수형으로 순교하신 주의 종이었다. 후에 예수님은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라고 평가하셨다(눅7:28).   

 

☞ 대림절에 적합한 최대의 인물은 분명히 세례 요한이었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다시 오실 주님을 위해 충성하며 사는 인물이 되게하자. 

 

서신서 / 주님을 기다리는 자의 표시를 드러냄 – 기쁨. 관용, 평화

 

5) 사도 바울은 권한다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獄中書信)이다.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을 당하며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몸의 고통스러운 상황과는 달리,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성도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한 관심에 집중하고 있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실 주님 앞에서, 자신은 이런 내용으로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표시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간이 아니라 꾸준하게 말이다. 어떤 표시들인가? 우선 그가 제시한 요구들을 살펴본다. 

 

☞ 항상 기뻐하는 것이다(4절,빌2:18,고후12:10,살전5:16). 관용(寬容)과 너그러움을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며 사는 것이다(5절). 아무 것에도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혹 문제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지 주님께 감사하면서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며 사는 것이다(6절,살전5:17). 

☞ 이런 믿음의 적극적인 자세로 나아가면, 하늘의 놀라운 선물이 그에게 주어진다. 곧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화가 주 안에서 임하면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7절). 

 

결론이다

나는 코로나 상황에 어떤 마음으로 대처하고 있나? 포괄적차별금지법 등에 대한 대응은 어떤가? 너무 육체적 대응을 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의 권면과 일치하며 사는가, 아니면 정반대로 사는가? 특히 관용과 따뜻함을 아예 내팽개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도대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한 내 고유한 싸인은 무엇인가? 명심하자. 사울 형의 율법적 대응은 전체를 잃는다. 하지만 바울 형의 복음적 대응은 모두를 얻게 된다. 내 자리는 어딘가? 주님이 가까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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