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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인권-성서주일

관리자 2020-12-09 (수) 07:52 3년전 651  

본문)  삼상 2:1-10, 눅 1:39-56, 히 11:1-3,8-16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날씨도 상당히 춥다. 특히 코로나19의 악화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접어든 바람에 마음까지 움츠러들게 한다. 확진자가 매일 500-600명대를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고 있고, 자칫하면 금방 1,000명대를 넘어설 것이라는 방역당국의 경고도 두려움을 준다. 따라서 웬만한 영업장은 밤 9시까지는 문을 닫아야 하는데, 이로 인한 자영업자들과 소상인들의 이번 겨울나기는 최악의 상황에 접어들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서로 위로하고 감싸주는 일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이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이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함께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더욱 열심히 찾아보며 힘을 모을 때로 보인다. 

 

이런 중에 국회는 이번 주간에 또 하나의 획기적 장벽 넘기를 시도한다. 바로 "고위공직자 범죄 수사처"(일명,공수처) 설치법을 통과하려는 일이다. 이 기구가 설치되면, 지금까지 모든 수사권과 기소권을 장악하며 국가 권력의 무소불위의 자리를 점해온 검찰이 심판도 받을 대상이 되면서, 권력의 균형을 기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두고 보수야당과 검찰과 언론의 반대가 거세다. 대체 왜 그렇게 반대할까? 뭔가 두려운 것이 있지 않다 싶다. 진정 새 시대가 기대된다. 

 

이런 때에 우리 한국교회는 인권(人權)주일과 성서(聖書)주일을 맞는다. 사실 인권 문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항이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 생명의 주이시고, 모든 생명 보호와 안전을 위해 은혜와 자비를 무한히 베푸시는 사랑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권의 주(主)이시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관심해야할 중요한 부분은, 인권 보호를 위한 하나님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접근 방법(方法)과 그 방향(方向)이다.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 인권이 완전히  보장되고 보호되는 나라가 있을까? 있다면, 그런 나라의 인권정책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실재로 그 어느 곳도 완전한 곳은 없다고 본다. 즉 인권보호법이 필요가 없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세상에 차별과 차이와 배제를 조정할 능력이 그만큼 현재의 인간 사회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서의 하나님은 이 인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하시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웃고 먼저 기뻐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일을 통해서 그런 인권보장의 세상을 여신다. 이게 하나님의 독특하신 방법이다. 그를 위하여 하나님은 거의 편애(偏愛)에 가까운 애정과 관심을 세상의 밑바닥 인생들에게 쏟으신다. 그들 문제와 응어리가 해소되지 못한다면, 나머지 잘 사는 사람들이 아무리 만족하고 편안해도 그런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고 불평등하며, 인권에 문제가 있는 사회라는 입장이시다. 

 

창조주의 이런 입장은 마치 장애를 가진 아이를 슬하에 둔 부모의 심정과 같다. 아무리 자녀들이 많아도, 모든 자녀들이 잘 나가고 있어도, 부모는 문제의 그 아이가 편안해야 편안하다. 그 아이가 웃어야 함께 웃는다. 동시에 모든 가족들과 특히 형제자매들이 그 아이와 따뜻한 연대와 사랑의 협력을 해야만 안심한다. 부모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언제나 그 부족한 자식에게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멍에를 함께 진 가족이어야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성향이 세상 일반과는 천양지차라는 데에 있다. 세상의 경향은 어떤가? 거의 대부분이 가진 자 위주의 법들이다. 그들의 소유, 기득권, 권리, 영역을 자본주의적 사고로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보호법들이다. 모두가 거기에 자신을 맞추려한다. 그러기에 한번 낙오되거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은 회복이나 격차 좁히기가 힘겹다. 요즈음처럼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는 세상에서는 현재의 대부분의 법(法)들은 ‘절망에 이르는 법’인 경우가 압도적이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50년이 되어도, 지금 여전히 밑바닥 노동자들은 매일 평균 3명이나 일터에서 죽어 나간다. 1년에 무려 1,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사고사를 당하는 것이다! 떨어져 죽고, 깔려죽고, 휘말려죽고, 과로로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각종 사고로 죽는다. 사용주들이 안전을 위하여 조금만 더 투자하고 배려한다면, 확연히 줄일 수 있는 사망자들이 오늘도 죽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피해도 끊임없다. 이런 피해에도 사용주를 향한 제재는 미미하다. 이 모든 것은 대부분의 법들이 사업주-기업인 위주에 치우쳐 있고, 노동자들의 안전과 보호에는 너무도 허술해 있기 때문이다. 약자들을 위한 법과 의식의 개혁이 절실하다-!

 

인간과 세상 구원을 위해 찾아오시는 주님을 위하여, 세례 요한처럼 전위대로 부름 받은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어떤 마당을 마련해야 하겠는가? 오늘의 말씀들 속에서 주님 맞이를 위하여 우리의 마음가짐과 행동거지를 찾아보자. 오늘 본문들은 주님을 찬양하는 내용들인데, 여기에는 매우 큰 특징이 있다. 모두 생존의 밑바닥 인생들, 삶에 절박한 현실에 짓눌려서 탄식하며 신음했던 인생들이 그 동안 자신들을 짓눌러왔던 삶의 멍에들이 해결되면서 터져 나온 기쁨과 찬양이 올라와 있다. 그러기에 그 울림이 매우 크다. 

 

그들의 증언에는 하나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압도적이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 가장 그늘지고 밑바닥에서 탄식하고 신음하던 이들을 기쁘게 하시고 웃게 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 은혜를 받은 이들의 외침들이 가득하다. 이제 그 놀랍고도 신비한 정체를 확인하자. 구약의 한나가 그 주인공이고, 복음서의 마리아도 그 주인공이다. 서신서의 재 소환된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부인 사라도 그런 처지에 사람들이다(창21:6참조). 이제 이들을 웃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들여다보자. 잘 보면, 우리에게도 그 은혜가 미쳐올 터이니까 말이다! 

 

역사의 판을 새롭게 짜시는 하나님

본문의 배경을 성찰하면, 나약했던 한 여인을 통하여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 축(軸)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있음을 보게 한다. 그러면 어찌 하나님은 그런 여인을 앞세워 큰일들을 도모하셨는가? 

 

1) 본 찬양의 주인공인 한나를 보자. 그가 누군가? 그는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의 두 아내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다른 아내인 브린나와 달리 자식을 낳지 못해서, 깊은 서러움을 받았던 여인이었다. 남편의 애정은 분명했지만, 자식 없는 처지 때문에, 브린나의 무시와 하대에 무척 괴로운 나날을 보냈던 슬픈 여인이었다(삼상1:1-8참조). 

 

2) 한나는 기도로 여호와께 매달렸다.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여호와께 아뢰고 통곡하며 서원을 드리며 간구했다- ‘주의 여종에게 자식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0-11절). 결국 그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가 그에게 자식을 주셨는데, 그가 바로 사무엘이었다(20절).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며 이스라엘 왕조의 문까지 연, 이스라엘 최고 지도자이자 대선지자인 사무엘이 그런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 후에도 한나는 무려 3남 2녀를 추가로 받은 다복하고 당당한 엄마가 되었다(2:21참조). 

 

3) 한나의 찬양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한나의 노래에는 단순한 개인적 승리와 기쁨만의 간증은 아니다.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역사를 새롭게 이끄신 하나님의 놀라운 변화의 손길을 증언하면서, 그 은총과 자비를 찬양하였던 것이다(1절).대체 하나님의 손길은 어떤 것이었나? 

 

☞ 인간들이 오랫동안 세워놓은 질서인 교만한 자와 오만한 자 중심, 풍족한 부자 중심, 귀족의 힘 있는 자 중심, 인간에게 군림하는 자 중심의 질서를 심판하신 것이다. 대신에 그들에게 오랫동안 눌려 살았던 무리들인, 가난하고 배고픈 자, 낮은 자, 무시당한 자, 힘없는 약자, 못가진 자들, 넘어진 자에게도 일어나 빛을 발할 기회를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도 차지하게 하시는 대혁명을 주도하신 것이다(5,8절 참조). 실로 높은 산은 깎고 낮는 골짜기는 메우는 공평의 세상을 여시는 주님을 한나가 만난 것이다(눅3:5).  

 

4) 여기에는 더욱 주목해야할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본문은 가난한 것, 무능한 것, 힘없는 것, 못 가진 것을 예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불공평하고 가슴 아픈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런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풀고 돌보시기를 원하시는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믿고 바라보며, 도움을 구하는 마음과 행동이 훨씬 더 중요함도 강조한다는 점이다. 한나의 새 출발도 바로 그 믿음의 행동에서 나온 것이고, 또 얻어낸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을 향한 공경이 없이 부자된 이들은 오히려 더욱 교만하고 악행에 빠져들기에, 이 신앙부분은 절대 중요했다-! 

 

5) 그런 신앙의 자세로 여호와께 나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참 모습을 보게 하신다. 그의 절대 완전하신 거룩성을, 오직 주밖에 없는 절대성을,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신실성을 누리며 살게 하신다(2,9-10.하). 동시에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생사여탈 및 행복여탈(生死및幸福與奪)권도 보유하신 분으로서(6-7절), 악인들과 교만한 자의 힘도 제압할 능력을 행사하신 분이심을 찬양한다(8-9절)

☞ 한나의 이 노래는 미리암(출15:21)-드보라(삿5:1-31)-시113편-마리아의 노래로 이어진다!

 

가난하지만 믿음이 부요한 그릇에 성탄하신 예수

본문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는 통보와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이미 여섯 달이 되었다’(36절)란 통보를 받은 처녀 마리아의 그 다음 행보를 전한다. 그녀는 즉시 약 100여km정도의 먼 거리에 위치한 유대의 친족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한다. 놀라운 만남이 노파와 소녀 사이에 일어났다.

 

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을 때, 첫 반응은 두 여인들의 태중에 있는 태아들로부터 나타났다. 엘리사벳 태속에서 이미 7개월 가까이 성장한 태아 요한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더니 기뻐 뛰면서, 엄마의 입으로 그곳을 찾아온 마리아와 그의 태아(1개월생) 예수를 향하여 외쳤다. ☞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42-44절 참조). 태중에서부터 자신의 주를 알아본 요한이었다-!

 

2) 그러면서, 주님의 탄생을 자기 몸에 믿음과 순종으로 수용한 처녀 마리아에게,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며 축복한다(45절). 이는 마리아가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절)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새 인류 창조역사에 자신을 드리며 순복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비천한 처지를 감안할 때, 동정녀 탄생통보 수용은 목숨과 함께 자기의 모든 것을 내건 결단(決斷)이었다. 이 고백으로 마리아는 자신 안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생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고(창15:6참조), 자신의 신앙이 이제 태동하는 여호와의 성취의 때를 위한 믿음의 원형(元型)이며 보범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3) 마리아의 찬미(Magnificat)는 이러한 성령의 축복 속에서 나온 화답송이었다(46-55절). 내용은 그의 조상 한나가 감동 속에 고백했던 그 내용과 같았다. 그는 능하신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심을 고백하였는데, 이는 자기와 같은 비천(卑賤)한 여종을 돌아보셔서, 만세에 복 있는 자로 일컫게 하신 일임을 고백한다(48-49장). 동시에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는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나, 교만한 자는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는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음을 고백했다(51-53절). 

☞ 마리아의 이 송가는 원시교회 제자공동체의 처신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곧 주의 백성들은 가난하게 살던지, 가난한 자와 연대하며 살던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여 살던지하는 등의 영향을 미쳤다고 보인다. 특히 누가는 그 점에서 매우 다양한 증언을 남겼다(눅6:20-26,12:13-21,16:19-31,19:1-10참조). 

 

4) 그뿐 아니다. 마리아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그 믿음을 계승한 모든 자손인 이스라엘에게는 끝까지 도우시고 긍휼을 베푸시며, 영원히 함께 하심도 찬양하였다(54-55절). 

 

아브라함 부부가 보여준 믿음의 차원

이 부부가 인류에게 보여준 믿음의 실상이 무엇이기에, 후대에 ‘믿음의 조상’이란 칭함을 받게 된 것일까? 그들은 믿음이 초월적 대상을 손으로 붙잡은 것과 동일한 효과를 안겨는 것임과 함께 보이지 않는 거룩한 존재를 증명할 증거물이 될 수 있음도 보여주었다(히1:1-3 참조).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주류가 아니었다. 아람인인 이방인이었고, 우상숭배의 조상 아래서 산 자였으며, 떠돌이 목동이었고, 고단하고 외로운 나그네였다. 99세까지 늙도록 자식도 없었다. 그런 그가 어찌 이스라엘의 원조가 되고, 인류사에 기리 그 이름을 남길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그가 믿음으로 여호와와의 관계 맺기에서 신실히 응답하면서, 여호와로부터 믿고 쓸 수 있는 존재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부부 중심으로 좀 더 살펴보겠다. 

 

1) 아브라함은 약속으로만 받은 기업을 위하여, 자신의 친척과 재산을 포기하는 ‘결행’을 하였다. 그에게서 주의 말씀은 가족이나 재산보다 더 귀한 것임을 보여드렸고(막10:29), 삶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지을 최고의 법임도 보여 주었다(8-9, 창12:1-4). 부인 사라는 경수가 끊어지고 나이 많아 죽은 자와 같은 육신을 지니고 있지만(창18:12), 기적을 이루실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써 잉태할 힘을 얻어서 ‘약속의 씨’(상속자/이삭)를 얻었다(11-12절, 창15:4, 21:1). 

 

2) 이들이 보여준 신앙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의 시선이 단순히 눈앞의 가나안이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차원을 넘어선 영원한 차원의 세상을 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곧 영원한 성과 천상의 본향(本鄕)을 바라보며 산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눈앞의 고난과 시련을 견디고 참아내면서 영원한 기업을 상속할 주인공들이 될 수가 있었다. 이 믿음의 힘으로 그들은 세상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소망 속에서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만 바라는 삶을 살 수 있었다(16절). 

 

결론이다

지금은 조상들의 믿음을 계승하여,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로 깨어 있어야할 때이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우리는 세상엔 나그네임을 기억하고, 세상의 헛된 소유와 탐욕과 부요에 빠져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낮은 자와 약한 자와 도움이 필요한 자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사랑과 관심도 그들을 향하여 흘러들어가도록 대처하며 살아야 하겠다. 낮은 데로 오시는 분을 본받아 섬김과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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