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대림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대림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12-02 (수) 11:17 3년전 778  

본문)  사45:18~25, 눅1:26-38, 롬15:4-13

 

대림절 둘째 주일이다. 교회들은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두 번 째 촛불을 밝힌다. 촛불과 함께 코로나19로 힘겨워하는 우리나라에 주께서 특별한 은혜주시기를 기도 올린다. 곧 어려운 때일수록 국민들이 서로 돌보는 마음들이 더욱 일어나고, 분단된 남과 북에 평화가 정착되며,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는 나라가 되고, 정치도 국가와 백성을 돌보려하는 성숙한 정치가 펼쳐지며, 교회도 예수의 마음과 사랑으로 어둔 세상을 밝히게 되는 일이다. 

 

특히 지금의 우리나라는 모든 분야에서 격변(激變)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이 힘겨운 씨름이 낡은 옛 것에로의 회귀(回歸)가 아니라, 참 민주주의로 나아가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정치가 제대로 펼쳐지는 시대로 나아가도록 기도해야한다. 이를 위하여, 해방 후 지금까지 70년간 친일잔재-남북대결주의-재벌중심주의-친독재권력 등의 파벌적 이익들을 나누며 서로 강고하게 연계되어 온 카르텔, 보수정당-검찰-언론들의 결탁이 반드시 혁파(革罷)되어야 하겠다. 

 

지금 계속되고 있는 정치의 큰 갈등과 혼란은 바로 그 격변의 시기에서 피할 수 없이 맞이한 현상이다. 그나마 폭력적이 아닌 촛불혁명에 이은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기득권세력을 개혁하려는 집권층의 방식이라서 더욱 힘겹다. 성급한 이들에게는 집권층의 행보가 답답할 정도이다. 하지만 힘들어도, 이 고비를 잘 견디며 평화적으로 개혁을 완수해내야 한다. 그래야 후유증을 극소화시키고, 정치의 출애굽을 이루며 가나안 시대를 맞이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이 때 메시아 주님을 기다린다. 그 분이 오시면 어떤 세상을 열어주실까? 그 답은 복음서에서 찾는다. 그는 기다리던 자에게는 ‘마라나타’를 외치게 했지만,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미움과 트집과 저주와 악담을 당하는 최악(最惡)의 존재였다. 자기들의 이익과는 너무도 상반된 주도자였기 때문이다. 친(親)로마제국의 정치세력인 헤롯당과 친집권어용 종교세력인 사두개인과 율법을 자기종교과시로 변질시킨 극우 바리새인들의 협공(挾攻)을 온 몸으로 받으셨다. 

 

참 쓰라린 역사를 살고 있다. 아마도 주님은 지금의 대한민국에 오셔도 여전히 죽임당하셨을 것이다. 해방 후, 70년의 아성을 구축해온 극우 보수들의 맹렬한 반발과 독점과 배척으로 그는 또 다시, 4,3제주 양민압살에, 청계천 분신노동자 전태일의 대열에, 조작되어 처형된 간첩속에, 5.18의 금남로학살에, 팽목항의 침몰된 304명들 속에 하나가 되어 희생되고 말았을 것이다. 현재 보수 세력들로부터 총 공격을 당하는 대통령들의 얼굴에도 그 모습이 어른거린다. 

 

당시도 예수의 설 자리는 너무 좁았다. 그러기에 주님은 당신을 따르겠다는 자들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탄식하셨지 아니한가! 우리는 성서를 보는 눈, 예수님을 보는 눈, 그가 펼치려는 세상을 보는 눈이 보다 새로워져야 한다. 성서의 상황, 특히 예수 오심의 정황을 절대 낭만적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예수는 탄생 때부터 공권력의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도피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을 직시하자. ‘그가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폐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는 예수에 대한 시므온의 증언에도 주목하자(눅1:34-35참조). 동시에 그가 역사의 무대에 역할하시기 위해서는 해외피난도 하고, 갈릴리 나사렛 촌에 은둔하고, 가난한 민중 부모의 그늘도 필요했음도 주목하자. 그의 오심의 축하들도 근거리에서가 아닌 원거리에서만 풍성할 수밖에 없었음도 주목하자. 그가 왜 당신은 죽으러 오셨다고 자인하셨는지도 통찰하자. 우리가 기다리는 첫 번 째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었음을 제대로 알고나 기다리자는 것이다-! 

 

게다가 주님은 이 세상의 낡고 버려야 될 것들을 보호하려고 오실 분이 아니다. 그보다는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들은 낮아지며, 굽은 것은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져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하시려고 오신 분’이다(눅3:5-6). 그런데도 메시아의 오심이 기득권자들의 숱한 저항에서도 강행된 까닭은, 그의 오심만이 이 세계가 기존의 묵은 것과 낡고 쇠퇴한 것을 씻어내고 새 생명의 옷으로 갈아입을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 예수의 그 백성이고 그의 제자들이며 개혁교회의 일원이다. 이런 우리의 정체성은 영광스럽지만, 고난도 함께 짊어질 수밖에 없는 자리이다. 이런 차원 높은 정체성의 구현은 결코 자기 패쇄적인 태도에서는 불가능하다. 머리와 마음이 열려서 나와 다른 차원의 세례를 받아들여야만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다. 땅이 하늘을 영접해야 새 생명과 열매가 맺게 됨과 같다! 오시는 주님은 그를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강하게 명령하신다- ‘네 것을 내려놓고 내가 안겨줄 새 것을 받아들여라’ 우리의 열린 마음과 개방된 자세를 요구하고 계신다. 

 

둘째 주일에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보자. 여호와는 세상 모든 열방들과 땅 끝 백성들에게(20,22절)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유대인만의 주가 아니라 세계 만민의 주시며, 오직 당신만이 공의와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시니(24절)-, 이제는 우상숭배를 버리고 당신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으라며 공개적인 초청을 하신다. 이런 세계인들을 향한 여호와의 공개적 초청은, 바벨론이 패망 후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에게 베푼 평화적 귀환에 따른 특별한 배려와 그것을 본 제국의 수많은 나라들이 감동하고 부러워하는 배경에서 나왔다. 

 

이 역사적 해방운동을 주도하시던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당신이 이스라엘만의 신이 아니셨음을 천명하신 것이다. 그를 직.간접으로 접한 제국들과 그 휘하에 있던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까지도 품으시는 만민의 주요 구원자의 위치를 구축하고자 하셨다. 이 일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이었겠지만, 근본에 있어서 하늘과 땅과 그 안의 온 세상과 만민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에게는 이제야 당신의 세상에서의 제 위치를 확고하게 점하고자 하신 일이었다(18-19).  

 

복음서는 앞의 예언의 성취가 동정녀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되었음을 전하는 내용인데, 여기에서 강조점은 그의 영원한 지배(왕권)가 야곱의 집임을 밝힌 데에 있다(33절). 이 야곱은 족장 야곱만을 고정한 것이 아니라, 그와 그로 인하여 복을 받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인 주의 백성들에 대한 총칭이기 때문이다(창28:14). 따라서 오신 예수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이 그를 기다리는 모든 인간들의 영원한 왕과 구주로 오셨음을 밝혔다.

 

서신서는 이런 예수를 구주로 받은 교회들이, 서로 다른 구성원들 간의 현존하는 모든 다름과 차이와 장벽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서 하나 되어 주님의 참된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어떤 윤리와 자세가 필요한 것인지를 전하는 내용이다. 답은 십자가에서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으시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을 같이하며 서로 받는 일이었다(5-7절).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됨을 일깨운다.  

 

☞ 따라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별한 초청과 명령에(사45:20,22,눅1:30-35,롬15:7), 현장의 대응 여부가 중요해졌다. 물론 처음 받을 때에는 숱한 충격과 갈등과 도전들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순종하면, 그의 삶과 존재는 큰 자들이 되고 새 차원을 개시한 원조로 기리 빛나게 된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의 통보와 지시에 끝내 불순종하면 어떻게 될까를 추측해 본다. 

 

자기만의 하나님이기를 고집하며 이방인을 배제하는 입장을 이스라엘이 택하면, 그는 우물 속에 개구리가 된다. 동시에 이방인 이웃들에게도 복을 전하는 민족을 이루겠다던 여호와의 조상들에게 주셨던 약속들(창12:3)을 거부하는 자손들이 되고야 말 것이다. 또한 전능자의 영광스러운 초대도 받고서도 불응한 열방들은 영원자의 긍휼과 자비를 받을 기회를 저버리게 된다

 

마리아가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라는 천사의 통보를 자기 개인의 유.불리를 따지면서 끝내 불응하고 말았다면, 그는 지금의 여인, 곧 성모(聖母)란 흠모받는 위치가 아니라, 영원히 불행한 여인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명심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여부가 이토록 그 존재 가치를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만든다. 

 

성령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서로 다른 출신의 교우들을 향하여 계속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태도를 로마 교회가 보였다면, 그런 무리들은 주님의 대속의 은혜로 세워진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저버린 행위이고, 또 온 세상 만유의 주로서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태이었기에, 결국 그들도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로부터도 배재당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 교회가 만일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품으시는 그 품, 모든 차이와 다름을 하나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품을 잃게 되면, 그곳은 주님의 교회로서의 정체성에서 이탈(離脫)된 곳이 분명하다. 본문들을 더 살피자

 

순종해야할 이스라엘, 돌아와야 할 열방들

고레스 황제로 인한 유대인의 귀환 사건의 파장은 생각밖에 컸다. 단순히 유대인만의 귀환이 아니라, 주변의 제국과 이방 국가와 백성들까지 당신의 백성들로 품으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뜻이 본격화되는 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흐름을 주목하시면서, 온 세상 백성에게도 은혜를 받을 기회를 부여하셨다. 이스라엘은 물론, 고통 받는 모든 열방들에게도 복을 주고 싶어 하셨다. 그 때를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로 보셨고, 당신 자신을 ‘세상 만민의 주요 역사의 주’로 세상에 알리실 때로 보셨다. 그 일로 모든 열방이 당신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얻어서 그 일에 감사하고 자랑하며 살 기회를 열어주셨다(23-25절 참조)

 

1) 이를 위해 주님은 당신에게 창조주로서의 주권이 있음을 선포하셨다. 당신은 천지를 견고하게 지으시고 거기에 사람이 거주하도록 의를 베푸신 당사자이심을 강하게 고하셨다(18-19).

2) 그 근거로 여호와는 모든 열방(列邦)들 집단을 당신께 나오도록 초청하신다. 그들끼리 진짜 자신들을 구원할 신이 누군지도 서로 의논도 해보라고 하셨고(20-21절), 그래도 나 외에는 구원을 베풀 신은 없을 터이니(21-22,24절), 당신께 돌이켜 와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셨다(22절). 여호와는 한걸음 더 나아가, ‘땅의 모든 끝’의 백성들까지도 청하셨다(22절). 이런 여호와의 초청은 후에 성자이신 부활하신 예수의 제자 파송에도 이어지는 대상들이 되었다(행1:8참조). 

3)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의 의(義)가 자기를 건지시고 고쳐주신 일을 자랑만하면 되었다(25절) 

 

야곱의 집을 다스리실 왕으로 오신 메시아

메시아 예수의 탄생은 그냥 한 인간의 출생이 아니었다. 첫 아담의 잘못을 정상으로 되잡아줄 제2아담의 출생이었다. 완전하고도 온전한 인간, 그러기에 죄악과 불의에서도 자유한 의의 인간, 그러면서도 제일 아담의 혈통 때문에 온갖 죄와 저주의 멍에로 탄식하는 인간들을 구원해내셔야 하는 구원자의 출생이었다. 뜨거운 환영도 받지만, 무자비한 미움과 배척도 받아야 했던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었다. 그 바람에 그를 중심삼아, 인류가 구원도 받고 심판도 받게 된 초유의 인간의 탄생이었다. 인간만이 아니라 역사와 세계질서도 갈라놓은 주인공이 오셨다

 

이런 문제의 주인공이 그 오실 자리로 선택된 곳이 나사렛 동네의 동정녀 마리아였다(27절). 비록 요셉이란 젊은이와 약혼은 한 사이였으나, 아직 그와 관계하지 아니한 동정녀를 엄마로 택하신 것이다(34절). 더욱 놀라운 출생사(史)는 그런 그녀에게 예수(구원자)란 생명을 잉태케 하신 주역이 성령이셨다는 점이다(35절). 이 성령은 원래 세상과 인간 창조의 주역의 한 분이셨는데(창1:2참조), 지금 그의 몸에 오셔서 지구촌에 처음인 ‘흠 없는 새 인간’을 탄생케 했다. 실로 역사적인 새 창조의 시작이었다! 

 

예수는 완전한 신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 탄생하셨다. 이점은 예수가 처음부터 죄와 악에게 완전히 자유롭고, 또 그 우위를 점하게 된 요인이다. 인간의 씨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도 취할 수 있는 요인이다. 그는 신적 존재이기에 그의 행위 속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계속 나타났다. 동시에 그는 인간이기에 인간의 나약한 사정과 아픔에 깊이 공감(共感)하시면서, 연약한 이들을 돕고 먹이며 가르치고 일깨우셨다. 그러면서도 그는 불의하고 위선적 거짓 세력과는 불같이 다투고 책망하셨다. 

 

누가는 이 무관의 제왕인 예수의 세상적 지위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32-35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이(메가스)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다윗의 왕위를 이은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리실 분이시다(삼하7:12-16 참조)! 야곱의 집의 왕되심은 무슨 왕이실까? 아브라함이 받았던 축복, 곧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이웃들에게 전하는 축복을 받은 공동체를 이끄시는 왕이심을 말한다. 곧 배타적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원의 축으로 세워 성취케 하는 왕국임을 말한다. 예수는 부족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게 하는 영원한 왕이다.

 

그의 위대하심은 인간들이 어리석어서 쳐논 모든 높은 장벽들을 그의 십자가 사랑으로 무너뜨렸다는 점에 있다. ‘모퉁이 머릿돌’이 되셔서, 원수를 친구로, 강자가 약자와 함께, 부자가 가난한 자와 더불어, 유대인이 이방인과 하나 되어 살 수 있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일이었다. 그 바람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화해와 생명과 협력을 사랑하며 사는 인물이 되었다. 교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세계인들의 실질적인 구주가 되신 것이다. 

 

그 예수를 본받아 우리도 서로 받아야

성령과 교회를 사는 시대의 최고의 윤리는 주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빛 되어 사는 일이다. 세상 일반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저 노아처럼 말이다! 이런 삶의 훈련의 장으로 우리는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 모였다. 똑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가 다 다른 점만 지닌 이들이 모였다. 똑같은 것은 하나뿐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요 구주이시다’는 고백이다. 그러면, 이렇게 다른 이들이 어떻게 서로 하나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될 수 있을까? 그 과제를 풀 대답을 오늘의 서신서에서 찾는다.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정리하겠다. 

 

1) 예수를 본받아야 한다(Imitatio Christi)(5절). 죄인과 부정한 모든 인간을 되살리시려고, 그들에게 의사(醫師)요 치유자(治癒者)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도 이웃에게 정죄자와 심판자로 나가지 말고, 의사와 위로자로 나아가면 된다. 이 일은 나와 너만을 생각하면 불가능하지만, 예수만 생각하고 나아가면 충분히 가능해지는 일이다. 

 

2) 이 귀한 예수를 우리에게 안겨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우리는 인내와 겸손으로 서로 뜻을 같이하고 서로를 받아 들이자(4-7절). 차별과 배제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뜻을 모으자. 이웃과의 교류와 연대와 연합의 영성을 강화하자. 주님은 마리아가 하늘의 음성에 순복하듯이 주의 뜻에 복종하는 사람과 교회에 찾아오시리라.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