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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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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11-24 (화) 23:32 3년전 620  

본문) 사 60:15~22, 눅 1:5-25, 갈 3:15-22

 

대림절 첫째 해의 첫 주일이다. 때는 소설(小雪)을 지나서 영하의 날씨에 넘나들기 시작했다. 이번 코로나19와 독감 증상이 비슷하다고 하니, 그 어느 때보다도 감기 조심해야할 때이다. 때맞추어 세계인이 기다리던 코로나 예방약인 백신들이 개발되어 생산되기 시작했다고 하니 환영하지만, 그래도 자기관리에 더욱 집중하셔서 끝까지 이 고비를 잘 넘기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노아와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차이에 따른 경고의 말씀들을 들었다.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보다는 본질과 기본이 튼튼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코로나 예방 백신도 그렇다. 혹 이번 백신으로 코로나19의 높은 산을 넘게 될지라도, 우리의 현재적 삶의 양태가 지속되는 한, 또 다른 악성(惡性)의 바이러스 판데믹을 마주할 가능성은 100%일 것이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현재의 우리의 삶의 양태와 문화가 근본에서부터 변화되어야만 한다. 

 

사익에서 공익 중심으로, 나에서 우리 중심으로, 대립과 갈등에서 협력과 평화 중심으로, 단독에서 더불어 중심으로, 독점에서 공유 중심으로의 과감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피조물 중심에서 창조주 중심으로 삶의 관심사가 옮겨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 코로나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그 어느 때보다도 새 윤리(뉴모럴)강령이 필요하고, 보다 차원 높은 영성 운동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물질과 탐욕 중심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교훈을 얻고 있잖은가! 

 

그래서 코로나 시대에 맞이하는 대림절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남다른 시각과 행동이 요청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기다리는 존재이다. 특히 성서의 백성들은 기다림에 능한 백성들이다. 사람들은 기다리면서 자기 삶의 목표도 점검하게 되고, 인내하며, 그 세계와 그 때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런 모습은 불신앙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앙인의 매우 차별화된 자세이다. 동시에 왜 신앙인들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게 되는 지에 대한 대답도 된다. 

 

노아가 당대의 의인(義人)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도 그렇다(창6:9). 그가 하나님의 심판 계시와 방주 건립의 지시를 받은 후, 아주 오랜 세월을 흔들림 없이 믿음으로 그 말씀을 좇아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잘 기다리는 사람들은 큰 것을 받는다. 기다림이 깊을수록 좋은 것도 받는다. 하지만 매사에 서두르고 급하게 대처하는 사람들일수록 그 대가는 허망하다. 가볍고 빈곤할 뿐이다. 나다나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란 단편소설이 주는 메시지를 잠시 회상하겠다. 

 

주인공 어니스트가 사는 동네엔 큰 바위 얼굴이 있었는데, 어니스트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은 언젠가 그 위인이 자기들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칭송받는 네 명의 인물들이 있었다. 부자 개더골드, 장군 올드 블러드 앤 선더, 유명 정치인 올드 스토니 피즈, 그리고 한 시인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그들 모두에게서 실망한다. 그의 실망은 그들의 내면의 부정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부자에게선 탐욕을, 장군에겐 지혜와 자비의 결여를, 정치인에게선 사랑을 찾지 못했다. 기대했던 시인도 그의 시에 담긴 사상을 생활로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그는 고대하던 인물을 만나지 못한 체 늙어갔으나, 그럼에도 큰 인물 기다림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그에게 발생했다. 그 시인과 다수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니스트 자신이 바로 그 큰 바위 얼굴과 닮은 자라는 칭송을 받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의 가슴에 담긴 간절한 오랜 소망과 기다림이 어니스트 자신을 그 큰 인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었다. 깊은 기다림의 사람인 그가 자신도 모르게 그 큰 바위의 주인공처럼 되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그 소설만의 이야기일까? 아니다. 바로 성서의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렇다. 기다림을 주제로 한 대림(待臨-Advent)절이 주는 절기신앙의 축복은 매우 놀랍고 엄청나다. 기다림을 잘 감당하고 극복해낸 사람들은 모두 복을 받는다. 반면에 바라는 것이 없이 얄팍하게 산 사람들이 얻을 것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따돌림을 받게 될 불행뿐이다. 기다림은 귀한 선물이다!

 

대상이 분명하고, 가치가 있고, 주의 나라와 영광을 구하는 기다림은 우리를 살려내기도 한다. 오늘 절기 첫 주일의 세 본문의 말씀들을 보자. 본문들에는 오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증언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오실 징조(徵兆)들과 그를 인간이 대망하게 하는 이유들을 제시한다. 본문을 자세히 보라. 메시아 오심의 무슨 여명(黎明)이나 동녘(dawning)이 보이는가? 무너진 세상을 되살리려 오실 메시아의 전조(前兆)들을 확인하고, 우리가 대응할 일들도 찾자. 

 

이사야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오셔서, 당시의 버림당했던 예루살렘을 어느 순간 세상에서도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될 존재로 거듭나게 하실 대변혁을 알린다. 복음서는 그런 역사의 대변혁을 이끌어내실 분인 메시아 예수의 등판을 위하여 그 선발대로 온, 세례 요한의 탄생을 전한다. 서신서에서는 그런 예수의 복음이, 모세의 율법의 담을 넘어서, 족장들에게 주신 오랜 언약과 연계(連繫)되어 온 세계 성도에게 생명을 안겨주고 있음을 고한다. 

 

메시아 대망(大望)의 기조(基調)가 된 이사야 예언

바벨론 제국이 패망하고 고레스가 바사(페르시아)란 새 제국의 황제로 등장하자. 이스라엘은 본국에로 귀환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능력이 전무했다. 그 일은 역사의 주이시자 그들의 주권자인 여호와의 몫이었다. 본문은 그들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선지자 이사야를 앞세워 펼쳐 보이신 하나님의 가슴 설레게 하는 은총의 약속들이다. 

 

포로였된 유대는 마치 쫓겨났던 여인이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상황을 접하면서 새로운 영광을 누리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49:21,50:1,54:6참조). 전반부(15-18절)는 도성 예루살렘의 재건과 번영이 약속되었다. 후반부(19-22절)는 그 때의 영광이 자연계와 지상의 차원을 넘어선 우주적인 스케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담지(擔持)한 새로운 세상이 될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 

 

1) 예언의 내용은 매우 직선적이다. ‘전에는 완전 버림받은 슬픈 인간이었으나, 이제는 세상이 우러러보는 존귀와 영화를 누리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의 대변신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의(義)가 드러날 때에만 가능하다. 특히 그 때 발생한 상황의 변신에는 중요한 특징(特徵)이 있다. 다시는 옛것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눅16:26참조)! 그래서 선지자는 반복하며 강조한다. ‘다시는 옛 것은 지나고 새 것만 남으리라’(18-20절)

 

2) 그러면, 이들은 언제 ‘버림을 당하고 미움을 당했으며 모두에게 외면당한 신세’로 지냈던가(15절)? 바로 바벨론에 대거 포로로 끌려가, 무려 70년 가까이 피지배 민족의 설음 속에서 눈물로 세월을 보냈던 그들의 엄혹했던 때를 말한다. 사실 그 포로생활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징벌로 받았던, 일종의 복역(服役)의 때였다(40:2). 그 때에는 하나님이 겉으로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신 듯하셨으나, 사실은 투 트랙으로 일하고 계셨다. 

 

한편으로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바벨론 왕의 신하로 들어가게 하셔서, 그곳 제국의 대왕들과 신하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어떤 하나님인지를 계속 보여주게 하셨다. 다른 한편으로는 포로 된 백성들이 눈물과 참회로 자신들과 조상들의 범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돌봄과 회복의 때를 고대하게 하는 마음을 갖도록 이끌고 계셨다. 

☞ 백성 중에는 ‘여호와가 어디 계시냐’라고 볼멘소리들도 없지 않았으나(40:27), 여호와는 그들을 위하여 진정 졸거나 주무시지도 않으셨다(시121:3-4 참조). 오히려 그들의 <포스트 바벨론 시대>와 <새롭고도 영원한 이스라엘>을 향한 계획 수립에 전념하셨다. 오늘의 본문인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은 거기서 나온 것이다. 무능한 신에게선 상상 못할 일이다!

 

3) 버림당한 자의 회복과 번영은 오직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뜨거운 사랑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보이실 때, 나타날 자연스러운 현상들이었다. 

-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들이 이제는 온 세상 모두의 선망(羨望)의 대상이 된다(15절).

- 이방 세계의 협력과 배려를 꾸준히 받는다. 그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를 본 것이다(16절). 

- 그들(외면자)의 공궤(供饋)를 받고(16절), 최상의 합법적인 우대(優待)를 받으며(17절), 

  강포로 인한 억울함이나 황폐와 파멸이 없이, 오직 구원과 평화의 주거생활을 즐긴다(18절). 

- 여호와가 친히 그들의 빛과 영광이 되시기에, 슬픔은 사라지고 모두가 의인이 되며 영생의 기업도 상속하고, 모두가 조상의 위치와 강국을 이루는 영향력의 인물이 된다(19-22절). 

 

4) 그렇다면, 이런 놀랍고 영광스러운 완전한 변신이 이루어질 때는 언제일까? 그 답이 본문의 마지막 대목에 나와 있다.-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22절,하). 그 바람에 이스라엘은 이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며 사는 종말론적 무리가 되었다. 언제가 그 때 일까-?  

 

‘그 때’의 문을 연 세례 요한의 탄생

요한은 이사야에게 ‘예고한 그 때’를 열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사람이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새 인류 창조의 문을 열고, 그 앞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냄 받은 주의 사자였다. 그에 대한 예고는 이미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통보되었고(말3:1), 와서는 그리스도의 앞길을 평탄케 하고자 ‘외치는 자의 소리’로 활동하였다(눅3:4). 본문은 그런 그의 탄생을 소개한다. 

 

1) 그는 아비야 제사장 반열의 후손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상 아비야는 바벨론 포로 귀환 시에 돌아온 4개열 중의 여덟 번째 제사장이었다(5절,대상24:10). 그의 부모는 하나님 앞에 의인들이었고, 모든 계명과 규례를 흠 없이 준행한 인물들이었다(6절). 하지만 늙도록 자식을 두지 못해, 늘 간구하며 살아온 제사장이기도 했다(13절,상 참조). 

 

2) 사가랴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13절)는 통보를 받게 된 현장은 그가 제사장 직무 수행을 위하여,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던 향단 우편이었다(8-11절). 당시 제사장 각 반은, 한 주씩 해마다 두 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제비뽑기에서 뽑힐 때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던 규례가 있었는데-, 마침 사가랴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고, 그 분향 단에서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과 통보를 받은 것이다! 

 

3) 천사는 요한 탄생을 알리는 소식이 ‘좋은소식’(Good News)라고 말하였는데(19절), 그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이유들 때문이었다. ①부모의 오랜 간구에 대한 응답이었고, ②부모에게는 물론, 모든 이들에게도 큰 기쁨을 줄 것이었기 때문이다(13-14절). ③모태로부터 성령 충만을 받아서 태어났고, ④평생을 나실인으로 살면서 주의 큰 자가 되어, 수많은 이스라엘 자손을 주께 돌아오게 할 인물이기 때문이다. ⑤무엇보다도 어버이의 심정을 품고, 주 앞에서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시키는 주의 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15-17절). 

 

4) 그 과정에 해프닝도 있었다. 기도는 오래했으나 정작 응답이 오자, 의심부터 한 사가랴의 행보에 경고용 벌칙이 내려졌다.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아빠 될 사가랴 제사장이 벙어리가 된 일이다(18,20절). 그래도 상황은 진행되었고, 임신5개월 된 늙은 엄마의 찬양도 터졌다(25절).  

 

복음을 위해 율법이란 휘장을 걷어낸 일

예수의 복음이 온 세계에 구원의 능력이 되게 하는 작업에서 최대의 장애는 유대교의 율법이었다. 이방인 중심의 모든 초대교회들은 한결같이 율법 문제로 내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는 금과옥조(金科玉條)의 강력한 신앙과 삶의 규범이었지만, 이제 세계인을 품어야할 예수의 복음 앞에는 율법이 주역이 아닌 조역이어야만 했다. 자리 교체에 따른 진통은 피할 수 없었다. 본문의 갈라디아 교회도 그 상황을 피하지 못했다. 성령은 사도 바울을 이 문제의 해결사로 내세우셨다. 

 

1) 바울이 이 문제 해결책으로 접근한 방법은 모세보다 430여 년 전에 존재한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주셨던 언약들에 대한 우선권 강조였다. 수백 년 후에 주어진 모세의 율법으로는, 훨씬 이전에 족장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그 언약에는 절대 손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후손들이 자기 조상의 유언에 감히 손댈 수 없음과 같았다(15,17절). 

 

2) 바울은 특히 예수의 탄생이 이미 첫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로도 통보되었던 점도 지적했다. 곧 '네 아들 이삭을 모리아에 바치라'하셨던 여호와의 명령에 아비인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믿음을 보이자. 여호와가 그에게 특별히 주신 약속의 말씀이었다 - 곧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8절). 여기에서 ‘씨’(seed)는 단수 명사로서, 그리스도 예수를 지칭했던 것이었다(16절).

 

3) 예수가 그런 위치에 계신 분이었기에, 이제 아브라함과 예수 사이에 있었던 율법은 예수의 복음 앞에 길을 비켜 주어야했다. 구원의 길은 율법이 아닌 믿음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율법은 예수가 오시기까지 주의 백성들을 돌보는 안전망이며, 인간들을 예수께 인도하도록 돕는 후견인일 뿐이다. 주인이 오면 종은 당연히 주인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마땅하잖은가?

 

결론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가 오실 세상의 모습을 미리 약속하셨고, 당신이 친히 예수란 인간으로 오셔서는 그 약속의 성취된 모습까지도 다 보여주셨다. 비록 예수가 온 세상의 구세주가 되시는 데에는 장애들이 많았으나, 그럼에도 성령께서는 택하신 그의 교회와 사람을 앞세우셔서 주님의 약속하신 그 영광을 모든 믿는 자들이 누리게 하시려고, 지금도 계속 일하신다. 주님은 꼭 다시 오신다. 누가 그때 그의 영접을 받게 될까? 분명 그의 오심을 믿고, 견디며, 기다리는 자들일 것이다. 여러분이 바로 그들이 되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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