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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추수감사절

관리자 2020-11-10 (화) 19:04 3년전 808  

본문) 사 40:27~31, 눅18:1-8, 계7:9-17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이다. 일기는 싸늘한 늦가을에 접어들었고, 낙엽의 천지를 맛보는 계절이다. 아름다움을 찬탄하기도 전에, 을씨년스러움도 느끼게 한다. 자연히 한 해의 결실이 무엇이며, 내 삶의 발자취는 어떠했는지도 되돌아볼 시간이다. 여러분의 올 해는 어떠하셨는가? 

 

특히 지난 주간은 온 세계가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에 관심이 집중된 때였다. 결과는 트럼프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바이든 시대가 열렸다. 미국의 권력이동은 온 세계에도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특히 조국 분단(分斷)해결의 숙원을 안고 사는 우리에게는 미국의 동행과 협력이 너무도 중요하다. 이에 미국의 새 대통령이 어떤 사람이냐는 문제는 우리에게도 큰 관심사이다. 이제는 바이든 정부와 새로운 차원의 대응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우리 남북 당국자들의 태도라고 본다. 남북이 서로 단합된 태도를 견지하면 미국은 결국 큰 협력자가 되겠지만, 미국에만 의존만하고 매달린다면 미국은 우리를 끝까지 얕잡아보고 이용할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그렇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라 믿는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제국들도 그 손안에 두신 분 아니신가(사40:15)! 하나님은 분명히 평화와 통일의 깊은 민족의 원한(怨恨)을 풀어달라고 매달리는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이런 때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한다. 어떤 마음의 감사여야 할까, 그것이 중요하다. 코로나로 인한 어두움과 그로 인한 개인적 피해들만 생각하면, 감사할 것은 찾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역경들 속에서도 우리를 생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희망을 잃지 않고 미래를 대비하고 찾아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면, 우리는 오히려 더 풍성히 감사할 수 있다. 

 

기억하자. 창조주를 향한 인간의 감사는 본질적으로 ‘거래(去來-deal)형’이 아니다. 그 보다는 고난과 역경을 넘어서게 하실 분에 대한 ‘믿음(faith)형’이어야 한다. 그럴 때, 감사는 생명력이 있으면서도 뜨거워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놀랍게 맛보게 될 통로가 된다.

 

신앙인 차원에서 다시 생각하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누리고 사는 영적 은사들은 무엇인가? 특히 그것 때문에, 그 어떤 난관 속에서도 내 생활을 유지하고 믿음을 견지하며 하나님과의 동행을 유지하고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자. 그것 때문에, 어떤 혼란이나 시련 속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희망의 끈을 간직하며 살고 있게 하는 영적 자산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의 말씀에서 찾아보자. 

 

오늘의 세 본문 내용을 보면, 대체로 지난 주간에 전하신 내용들의 보완(補完)이다. 곧 지난 주간에는 온 우주 만물의 주이시고 충만(充滿)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소개하는 말씀들이었다면, 오늘의 말씀들은 그런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어떻게 내 것으로 누릴 수 있는지 그 방법(方法)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들어선 이들에게 어떤 특권적 축복이 부여되는지도 알려주는데, 그런 말씀은 믿는 자에게는 커다란 약속이요 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힘)을 소유할 수 있기 위한 수단들은 무엇인가? 그렇다.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과 우리 사이의 소통을 위하여 개설해주신 기도(祈禱-pray)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받고 느끼게 하는 통로이며, 동시에 나의 마음과 뜻을 하나님께 올리는 교제의 통신망이다. 기도의 연락망, 이것이 살았느냐 죽었느냐는 문제는 내 신앙의 건강성과 생명력을 평가할 척도(尺度)이다.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가장 중요한 교육도, 바로 ‘기도하는 제자 만들기’였다(마6:9-13,7:7-11참조). 주님의 또 다른 제자인 나의 기도상태는 어떠한가? 

 

그런데 말씀이 제시하는 기도의 수준은 상당히 강렬하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나 평범하거나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가슴(마음)에 정당한 원한(怨恨-justice)을 품고 오직 여호와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앙망(仰望)하는 믿음을 안고 드리는 집요한 간구(懇求)를 말한다. 그것도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인 자녀들이나 그의 종들이 그런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당신의 명예차원으로 받으셔서, 속히 응답하시는 차원의 기도를 말한다(눅18:7-8참조). 

 

구약을 보자

바벨론에 포로 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내적 불만과 회의는 생각보다 깊었다. ‘하나님이 자기들 사정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정당한 권리도 지켜 주지 않는다’며 불만하고 있었던 것이다(27절/표준새번역). 이런 불만과 푸념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한계를 의심하는 불신의 마음들이 깔려 있는 것이어서, 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다. 

 

위기이기에 빠른 대처가 필요한 때였다. 이에 여호와께서 문제를 풀 선제적 조치를 취하고 나오셨다. 갈등을 해소하고 다가오는 밝은 미래를 맞이하도록, 선지자 이사야(제2)를 세우셔서,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백성들의 무지와 오해를 일깨워주는 일을 본격화하셨다(27-31절). 그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을 향한 접근 방법들을 보면, 매우 주목할 만하다.

 

1) 부르신 음성이 달랐다. 그들을 ‘야곱아(O Jacob)’, ‘이스라엘아(O Israel)’라고 부르시면서, 그들의 뿌리 의식인 역사성과 정체성을 일깨우고자 하셨다(27절). 이 호칭(呼稱)에 어떤 스토리가 담겨 있었기에 그랬는가? 크게 두 가지 차원의 여호와의 마음이 담겨 있음이 보인다. 

 

① 그들의 원뿌리인 족장 야곱이 여호와로부터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대변하는 새롭고 큰 이름의 주인공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그 순간을 회상(回想)하게 하시는 칭호였다(창32:3-32참조). 본래 여호와는 조상 야곱이 그의 형을 피하여 하란으로 가는 중에, 루스에서 노숙하는 중에 친히 찾아오셨고, 야곱에게 놀라운 사닥다리 계시를 주셨으며, 고단한 타향살이에도 함께 동행 하셔서 야곱을 크게 번성하게 하셨고, 귀향길에도 끝까지 책임져 주셨던 하나님이셨다. 

 

그 과정에서 야곱에게 최대의 위기가 있었는데, 바로 형 에서를 대면할 때였다. 그 때 야곱은 형의 너무도 강력한 힘의 위협(33:1참조)앞에 자기의 지난 20년 타향살이의 모든 수고가 다 좌초될 위기감에 휩싸이면서, 최후의 방패인 여호와 앞에 홀로 나아간다(32:24). 그곳 얍복에서의 밤샘 기도로 여호와께 자신을 보호해주시도록 강청(强請)했다. 예전에 자기에게 약속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붙잡고 드린 돌봄 요청이었다(창28장 참조)! 그래서 끝내 여호와로부터의 승리할 힘을 넘겨받으면서, 그 인증으로 새 이름까지 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 그 이름을 쓰신 까닭은 무엇일까? 야곱의 승리를 그들에게도 안겨주시겠다는 것이었다! 

 

② 이 호칭에는 포로기 후에는 남북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어, 하나의 이스라엘이요 유대인으로서 만날 것도 담고 있다. 바벨론 포로사건은 분명 이스라엘에게는 씻을 수 없는 불행이고 불명예였다. 하지만 그것은 의외의 선물을 안겨준 사건이기도 했다. 바로 솔로몬 시대 이후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서로 다투고 싸우며 불행한 역사를 살다가 약체 국가들로 전락하면서 다 같이 망했었는데-, 그래서 통일도 요원했었는데-, 그런 분단 극복의 숙원이 뜻밖에도 포로생활이 끝날 때, 자연스럽게 해결 받게 된 것이다. 고난이 안겨준 큰 선물이었다!

 

2) 그런 하나님이 지금 바벨론 포로기에서도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을 이끌고 계시며, 그 후도 야곱을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귀가시키셨듯이, 이들 포로 된 이스라엘도 유대 본토에로의 귀국하는 대역사도 친히 주관하실 것이다! 그런 놀라운 일을 쉬지 않고 행하시는 창조주이신데-, 어찌 그들이 감히 ‘피곤한 여호와’를 말하고, ‘무능한 하나님’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3) 착각하지 말자. 주 여호와는 힘과 능력 그 자체이시며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시다. 그에게는 피곤이나 지혜나 명철의 부족이란 있을 수 없다. 부족이나 결핍은 오직 인간들의 몫이지, 전능자용은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힘과 지혜가 부족한 인간들에게 당신의 새 힘을 부어주신다(28-30절). 따라서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통감하는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에게 나가면 된다. 

 

4) 그러기에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절감하면서 힘겨운 인생을 사는 이들은 이 말씀을 꼭 경청하라 - ‘오직 여호와를 앙망(仰望)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라’(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란 말은, 족장 야곱처럼 여호와를 일관되게 신뢰하는 자이다.

 

복음서를 보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꾸준히 가르치셨다. 그래서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생명과 능력의 젖줄인 하늘 아버지와의 교제가 제자들에게도 계승되도록 도우셨다. 그들에게 기도가 살아야, 하나님 나라운동이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의 기도문>이 기도의 내용에 집중한 것이라면, 본문의 기도 교육은 기도자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집중된 것이었다. 

 

1) 주님의 기도 교육은 비유를 통한 것이었다. 주제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1절). 비유 무대에 오른 주역은 도시에 사는 한 과부였다. 불쌍한 존재의 표상이었다. 그녀에게는 무엇인가 풀어야만 할 원한(怨恨)이 있었다. 그 내용은 확실치 않았으나, 그녀는 그 문제 해결을 위하여 그 도시의 재판장를 수시로 찾아가서,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원한이란 표현이 무려 4번이나 올라있는데(3,5,7-8절), 대체 어떤 원한이었나? 

 

2) 번역본들은 그녀의 원한을 정의(niv), 권리(새번역), 복수(앙갚음/avenge.kjv)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말은 그녀의 정당한 권리가 심각히 침해당하여 누려야할 정의가 크게 훼손되었음에도, 자신의 부족한 힘과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그 복원이나 회복이 불가능하기에, 그것을 바르게 재판해 줄 마을의 재판관을 찾아서 호소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2-3절). 결국 그 여인의 방법은 통했다. 안 되던 것이 해결되는 승리를 맛봤다. 주님은 그 방법을 지목하셨다. 

 

3) 과부는 재판장이 해결해 줄 유일한 인물이다는 믿음을 가졌다. 사실 그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는 점에서 로마정권이 임명한 이방인 재판관으로 보인다(2절). 그런 판사에게서 정의로운 판결에 대한 기대는 그만큼 어려웠다(6절). 그럼에도 그녀는 낙심하지 않고,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달라’며 집요하게 매달렸다(3절). 그 방법이 통했다! 재판장은 자기가 여자의 강청을 외면하면, 자기가 크게 괴롭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4-5절). 상대방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기가 곤경에 몰릴 것을 더 염려한 것이었다. 의외의 출구 방안이었다! 

 

4) 주님은 강조하신다. 우리의 기도에는 원한(?)이 있어야 한다. 욕망을 해결하고자 하는 기도가 아니다. 반드시 빼앗긴 아픔, 되찾고자 하는 간절함, 매달리며 물러나지 아니하는 끈기와 응답받고자 하는 열망, 그래서 하나님과 세상의 공의를 세우고자 하는 정의와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마6:33참조). 저 얍복의 야곱처럼 말이다! 그런 마음과 자세로, 해결자인 하늘 아버지를 기도로 번거롭게 해드리는 태도가 필요하다(5절,7절). 

 

☞ ‘번거롭게 하다’(휘포피아조)라는 말은 ‘눈을 멍들게 하다’ ‘명예를 손상시키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명예가 걸린 문제로 간주하심을 말한다. 특히 당신의 택한 자들의 원한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신다(7-8절). 나에게는 무슨 원한을 품은 가슴의 기도가 있는가?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원한을 해결해 달라며 여호와께 끊임없이 매달리고 사시는가?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지 아니함은 그의 능력의 고갈 때문이 아니다. 나에게 야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다.

 

계시록을 보자

천상의 또 다른 찬양대가 소개되고 있다. 그들은 본래의 천상의 존재가 아니라 지상에서 오른 변화된 무리들이었다. 흰 옷을 입었고(9,13절), 손에 종려가지를 들었으며, 보좌와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외쳤다(10절). 그러자 모든 천사와 장로들과 네 생물들이 화답송인 아멘송을 불렀다-‘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1-12절)

 

1) 그 찬양대는 지구촌 열방에서 올라온 수많은 큰 무리들이었는데(9절), 그들의 흰옷 유니폼은 지상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그 생명의 희생으로 이룬 죄 씻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늘의 영광중에 영생이 주어진 존재임을 입증해주는 예복이었다(13-14절, 막9:3,16:5참조). 동시에 그들은 지상에서 발생한 대 환란에서도 인내와 믿음으로 이미 승리한 존재들이었다. 

 

☞ 요한을 안내하던 장로 중 하나가 그런 자들이 하늘에서 받게 될 기업들이 어떤 것들일지를 다음의 네 가지로 소개하여 주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15-17절). 

① 하나님 보좌 앞에 거한다(15절,상, 엡5:25-27 참조)

② 하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15절,중 히7:25,벧전2:9참조) 

③ 보좌의 하나님이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 그 바람에 지상에서 겪었던 주리고, 목마르고,  상하던 시련들로부터 해방되어, 참 안식과 영광을 누리게 된다(15절,하. 21:3,요1:14참조).  

④ 영원한 목자 어린 양의 돌봄을 받는다. 그는 승리자들을 생명(영생)수로 인도하시고, 보좌의 하나님은 모든 아픔과 서러움의 눈물을 씻어주신다(17절,사49:10,마24:7,히11:37-38참조). 

 

결론이다

기도를 주심에 감사드리자. 생명줄 기도를 게을리 하며 살아온 일을 회개하자. 신앙의 변질은 기도의 힘을 잃는데서 나온다. 가슴의 기도, 원한을 품고 드리는 기도의 제단을 다시 쌓자. 기도해야 나도 살고, 우리도 살린다. 야곱의 기도로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드리자. 우리 주변은 우리의 기도를 요구하는 일들이 많다. 이 계절이 기도의 열매들을 거두는 때가 되게 하자. 승리의 기도자를 위하여 마련해주신 하늘 영광의 세계까지 믿음 속에서 맛보며 사는 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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