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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0)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11-04 (수) 08:10 3년전 673  

본문) 사 40:12~26, 막 12:13-17, 엡 1:15-23

 

창조절 열 번째 주일에 접어들었다.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추수(秋收)의 계절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올 한 해는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판데믹으로 인하여, 온 세계인과 더불어 우리의 삶도 모든 면에서 피동적(被動的)인 대응을 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중에 맞이한 추수감사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내 삶의 내면적인 영역에서 코로나로 인하여 얻어내게 된 영적. 정신적 수확이나 발전, 성숙함 등이 그 주 대상이 아니겠는가!

 

추수 감사란 물질 수확의 의미만 담은 것이 결코 아니다. 당연히 받은 것들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은 옳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드리는 자 자신의 마음이며 내용이다. 감사는 거래가 아니다. 감사는 내 마음과 내 삶을 열어서 보여드리는 응답의 행위이다. 그것도 이전보다 더 진실하고, 보다 더 나아진 내 모습을 함께 보여드리려고 하는 마음을 담았을 때, 우리의 예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큰 기쁨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창4장의 아벨 이야기 참조)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신앙인이기에, 우리의 신앙이 이전보다 계속 진보하고 발전하며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다면, 그 점이 매우 귀한 예물이 될 것이다. 이전보다도 더 기도(생각)하고, 이전보다 더 말씀 앞에 서게(행동) 되며, 이전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에 대한 연민과 공조의 마음과 삶으로 성장했다면, 그런 추수절의 감사는 분명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산 제물이 되었으리라고 본다(롬12:1-2참조). 

 

하지만 오랜 세월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늘 그만그만하거나, 오히려 낡고 퇴락한 의식 속에서 창조주 아버지의 자녀답지 못한 퇴행적 인간상을 벗어나지 못한 삶이라면, 그런 추수절 마당은 피차 고통스러운 대면의 장(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침 지난 주일의 말씀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언행이 세상 일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품격과 내용을 갖춘 자들이어야 됨을 들었다. 옳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 자녀다워야 한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일까? 자녀들이 잘 자라는 일일 것이다. 그것도 자기의 자녀답게 모든 면에서 잘 성장해가는 일일 것이다. 몸과 머리와 마음과 삶에서, 자기의 닮음을 잘 드러내는 자녀를 볼 때, 그 부모의 마음은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역(逆)방향으로 자기 자녀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부모의 마음은 무척 아프고 비참해질 것이다. 자식에 대한 그 다음을 기약하기가 쉽지 아니할 것이다. 

 

불행한 인간들에게서 볼 수 있는 답답함이 무언지 아는가?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불행을 탓하는 일에는 신을 끌어드리는 일을 일삼는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제대로 믿지 않고서 불행하게 사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만 해소용 동네북(punching bag)이 아니다.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찾고 구하고 두드려서 만나야할 아버지이시다. 그러면 언제나 나를 만나주실 큰 품(bosom)이시다! 

 

유혹들도 있다. ‘그래도 내가 하나님을 오래 믿으면서도 그 분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더 알아야하고 더 배워야하느냐’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배우는 일은 평생의 진행형 과제이지 완료란 없다! 만일 자기는 하나님을 알 만큼 안다는 주장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자일뿐이다.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내 안에 자리한다면, 그 순간 나는 그저 낡은 자로 머물 뿐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크심과 원대하심과 무한하심을 더욱 뜨겁게 고백해야 한다. 죽도록 배우고 익혀도 그와 그의 세계를 담아낼 그릇은 한없이 협소할 뿐이다. 그러기에 이사야가 증언하잖은가?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다’(22절), ‘회오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草介)같다’(24절). 인간의 실존이 이러한데도-, 인간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이 너무 크셔서 우리를 한없이 자비와 긍휼로 상대하신다는 것 자체가 바로 신비요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확실한 것을 고한다. 인간의 크기는 스스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란 그릇에 절대자인 하나님을 담아낸 만큼 커질 뿐이다. ‘큼’의 원조인 창조주를 배우고 담는 만큼, 내 인생 존재의 크기도 결정된다. 그를 등지고 살면, 우리는 매사를 보이는 육체에 따라 판단하게 되기에(요8:15), 언제나 졸렬하고 편협하고 한쪽에 치우쳐서 살아가게 된다. 그 바람에 분쟁과 다툼과 분열의 패거리 속에서 피곤하게 살다가 갈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사는 자녀와 그 점을 무심히 대하고 사는 자녀의 삶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아는 자식은 아버지의 자식다운 품격과 삶을 좇으려고 노력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자식은 무책임한 삶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시선도 바로 그런 제대로 된 자식들을 집중하신다.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의 뜻을 구현하도록 전심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바로 그 점이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열심히 배워야할 이유이다

 

예언서를 보자

본문은 지난 이사야 1기였던 1-39장과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미 포로기 중반 이후의 상황에 들어가서(40-55장), 하나님이 포로기 이후에 그의 백성들에게 행하실 일들을 예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제2 이사야라고도 부르는데, 그의 예언의 주 대상은 포로기에 깊숙이 들어와 살던 ‘신진(新進) 세대’들이었다. 

 

그들은 오래 지속된 바벨론 포로생활에도 제법 익숙해져 있고, 동시에 본국에의 귀환의 의지나 신앙도 희미해져서 자포자기 마음(?)도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에게 심각한 문제는 조상 때부터 믿어왔던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이란 신(神)에 대한 회의가 깊어진 것이다. ‘강대국 바벨론의 신들에 굴복한 여호와가 아니냐’,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식의 반발적 회의론이 확산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면, 더욱 문제는 심각해진다. 정작 곧 이어질 환국(還國)이라는 카이로스가 올 때 부딪칠 상황이다. 어떨까?

 

하나님이나 백성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마음과 의지가 이미 패배의식에 빠져 있는 무리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본문은 바로 이런 때를 예방하고, 다가올 귀환을 대비하고자,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 선지자를 앞세워 당신의 민족의 혼과 신앙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하신 것이다. 방향은 형벌이나 책망이 아니라 위로와 새 출발이었다(요8장의 간음녀를 향한 예수의 태도처럼). 신에 대한 재교육 강화였다. 여호와가 누구시며, 무엇을 행하실 것이고, 그 동안의 역사를 이스라엘은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지를 하나씩 일깨우시기 시작하였다. 

 

본문은 그 점에 집중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대체(代替)불가능한 신이요 비교(比較)불가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신으로 강조하면서, 그 하나님이 안고 계신 두드러진 특징들을 촘촘히 소개하였다(18,25절). 그리고 그들이 이제껏 한 번도 보거나 듣지도 못했던 새로운 하나님의 일의 내용들도 예고(豫告)하였다(43:16-21,48:6-8참조). 그 주요 내용들은 이러하다 :

 

1) 어떤 인간이나 존재도 하나님의 능력과 솜씨를 대체할 수 없다(12-14절 참조). 

2) 어떤 제국이나 세상 권력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며, 티끌이나 먼지 같고 빈 것  같을 뿐이다(15-17절 참조). 

☞ 유대가 바벨론에 무릎을 꿇었던 이유는, 하나님 여호와가 바벨론의 신들보다 허약해서가 아니라, 바벨론을 채찍삼아 범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그런 과정에서 제국 바벨론으로 하여금 유대의 신인 여호와를 접하면서(다니엘 이야기는 그 견본), 그들도 여호와만이 온 세상의 참 신임을 온 제국들에게도 알리고자 하심이었다(단6:25-27 참조). 

 

☞ 그런 중에 여호와는 바벨론을 폐하시고 페르시아(바사)를 세우시면서 그 왕인 고레스를 당신의 종으로 사용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온전히 해방하셨다(44:28,45:1-4 참조).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스스로 입증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이때부터 여호와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구원의 길을 열어가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인 ‘여호와의 종’의 등장을 예고하시면서, 이스라엘과 함께 온 세계 만민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품기 시작하셨다(42:1-4,49:1-6,52:13-53:12절 참조). 나중에 에티오피아 내시 장관이 바로 그 부분을 읽다가, 물세례를 받기도 하였다(행8:34).

 

3) 어떤 신들이나 인간 손으로 만든 우상들도 하나님의 형상에 비길 수 없다.(18-20절 참조)

4) 이런 대체불가하고 비교 불가한 전능자 하나님의 존재와 품성에 대한 각성과 신앙을 갖는 일에는 우리 모두가 당연히 전력을 기우려야만 한다(21-26절 참조). 

☞ 당시 유대를 지배한 바벨론 사람들은 인간의 운명이 신적(神的)인 세력으로 하늘의 군대인 천체만상(天體萬象)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유대인의 주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그 천지의 세력들을 직접 만드셨고 휘하(麾下)로 다스리셨다. 역시 비교 불가한 전능자이심을 강조한 것이다. 26절의 말씀을 주목하자 -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창1:14-18,시147:4 참조). 

 

5)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이런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약함이나 무능을 놓고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특히 이스라엘과 이방 국가들 모두를 적절히 들어서, 당신의 의와 사랑과 구원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의 도구들로 사용하시는 그의 능력과 섭리에 눈이 떠야만 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어느 한 편의 주(主)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창조주는 온 세상 만민과 만유의 주이시며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주의 독보적인 모습을 복음서에서도 만난다. 

 

복음서를 보자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과 헤롯당에 속한 자들로부터 한 질문을 받으셨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14-15절). 저들 두 그룹의 연대가 놀랍다. 바리새인은 반로마적인 종교세력이고, 헤롯당은 로마권력의 전위대였기 때문이다. 평소 절대 연대가 불가능한 그들이 어찌 예수를 향해서는 하나가 되었나?

 

이유는 평소 불편한 예수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그룹의 지략가들을 내세워 예수에게 보냈다(13절). 자연히 협공(挾攻)의 성격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양자택일의 답변을 강요하는 질문 하나를 한 것이다. ‘쌍끌이 어망’에 예수가 걸려들기를 노린 것이다.  

 

예수가 ‘바쳐라’라고 하면, 바리새인의 그물에 걸릴 것으로 보았다. 나사렛 예수야말로 ‘친(親)로마적이고 반(反)민족적인 자‘라면서 예수를 ’위선자‘로 총공격하며 그 여파로 예수를 백성들에게서 고립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예수가 ’바치지 마라‘라고 하면, 헤롯당의 그물에 걸릴 것으로 본 것이다. 예수가 국가의 납세 거부를 선동한 자라며, 현행범으로 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음모(시험)을 모를 리가 없는 예수님은 어떤 대응을 하셨는가? 

 

주님의 답변은 이랬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17절). 이 답변이 나오자, 그들 모두는 큰 놀라움 속에서 예수를 떠나고 만다! 무슨 연유에서 그랬는가? 첫째는 그들의 양자택일 요구에 따른 답이 나오면, 모두에게 상처와 논쟁과 피해만 남는다. 하지만 주님의 답변에는 상처 대신에, 자신들에 대한 성찰부터 하게 한다. 남에게 돌 던지기 이전에, 자기 행위와 그에 따른 양심의 부끄러움부터 일깨우는 울림을 준다. 사실 바리새인에게는 납세정신이 부족했고, 헤롯당원에게는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물)을 외면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주님의 이 지혜와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 세계를 얻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는다.

 

서신서를 보자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교회를 위한 간절한 기도문을 전하고 있다. 당시는 이단 영지주의의 그릇된 구원론이 위세를 떨치는 상황이어서, 그의 기도는 더욱 신학적이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셔서,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의 뜻을 헤아리는 마음의 눈도 밝아지기를 구했다(17-18절). 

 

1) 성령이 열어주실 충만한 영적 세계는 어떤가? 주의 소명(召命)을 분별하게 하고, 그로 인한 영광의 풍성한 상급(기업)도 알게 하며, 믿는 자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도 알게 된다(18-19절). 그 뿐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는 능력은 죽은 자를 살리고 하늘의 영광에 앉게 하며, 그 능력과 권세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이름(생명) 위에 뛰어나게 하신다(20-21절),

 

2) 무엇보다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그의 머리(head)와 몸(body)으로 삼으셨음을 증언한다(22-23절). 이 점은 바울의 교회론의 핵심이다. 교회는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시면서 당신의 이름과 존재와 능력과 모든 것을 이 지상에 남기신 표지(標識)인데, 그것은 주님이 교회를 당신의 지위와 주권을 대변하는 현장으로 세우셨음을 말한다(엡4:15,골2:19참조). 곧 지상의 교회는 하늘에 오르신 주님의 충만하심을 대변하는 유일한 주님의 머리요 몸이다-!

☞곧 주님은 만물 위에 계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만물 안에 계셔서 교회의 몸이 되셨다. 명심하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23절). 

 

결론이다

우리의 미래와 운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 결코 세상과 육체에 의하여 결정되지 아니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의 자녀와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내 인생의 크기와 규모도 그 분을 아는 지식과 폭에 따라서 결정된다. 아는 것이 없으면 작은 사람으로, 아는 것이 많고 크면 큰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의 충만이 내 마음에 항상 머물도록 간절히 열망하며 살자. 우리 교회도 그의 충만으로 가득하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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