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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9)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10-28 (수) 08:24 3년전 859  

본문)  사 6:1~8, 요 8:12-20, 계15:1-4

 

창조절 아홉째 주일이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밤낮의 기온차도 커졌다. 때마침 독감예방주사 맞기를 두고, 묘한 긴장감이 돈다. 일부 독감예방주사를 맞고서 사망하는 사례들이 나오기 때문에, 주사 맞기가 두려워진 것이다. 반면에 정부 입장은 확고하다. 그들의 사망은 그들이 안고 살아온 기저질환에 따른 것이지 독감예방주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코로나19로 인한 위협이 큰 때이기에, 더욱 예방주사는 서둘러 맞아야한다고 국민들을 설득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민들이 당국의 그 권고를 믿느냐 못 믿느냐의 문제가 제기됨이 무척 이채롭다! 

 

그 뿐 아니다. 최근에는 태아(胎兒)의 낙태법 제정의 찬반 문제를 놓고도, 정부정책과 시민사회와 종교와의 갈등과 대립도 뜨거워지고 있다. 모태의 태아도 생명이기에 칼을 대는 일은 불가하다는 생명 우선논리를 가지면 간단할 것 같은데-, 삶의 현장에서 야기되는 임신부들의 다양한 사례(형편)를 고려하면, 금지냐 허용이냐 하도 문제도 그리 간단하지는 못한 듯하다. 

 

또 있다. 이런 와중에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가 지난 21일에 시민결합법을 통한 동성커플의 권리 보호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와서,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성소수자 보호’에 새 걸음을 내딛게 하였다. 이 법은 동성결혼 합법화의 차선책으로서, 법적 혼인관계 밖에 있는 커플에게도 입양과 상속 등 혼인관계에 따른 권리를 인정하는 법적 장치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10여 개국에서는 동성커플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으나, 동성애 허용을 염려하여 포괄적 차별금지법까지도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한국교회로서는 이런 흐름에 저항이 더욱 격렬해질 듯하다.

 

사실 인간 사회에서 누가 누구를 지지하고 반대하는 일은 너무도 흔한 일들이다. 하지만 자칫 그런 행위들이 정치적 결사체로 번지고 확대되면, 뜻밖에도 자신들의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린치나 테러를 가하는 집단폭력과 만행이 자행되기도 하기에-, 무척 조심해야할 일들이다. 요즈음 정치적 극우(極右)들이나 종교적 극우들이 처처에 등장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제3세계에서 유입해오는 난민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려는 내부의 극우세력들이 준동하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전광훈류의 파괴적인 기독교 극우세력들이 등장하여 나라의 질서를 흔들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뉴욕 퀸즈 너머에서는 일련의 중국계 미국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트럼프에 대하여 ‘four more years’를 외치며 거리행진도 한단다. 중국인 중심의 미국의 태극기 노인 그룹들이다. 이유는 트럼프가 중국 공산당 시진핑 세력에 대하여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어서, 그를 적극 지지한다는 이유에서다. 무척 흥미로운 모습이다. 모두가 자신의 존재와 인식의 편향성과 그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모습들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기 태도와 입장 표명에는 더욱 조심하자. 특히 상대방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데에는 더욱 깊이 기도부터 하고 입을 열어도 열어야 한다. 공격하는 데에는 나의 협소함과 편협함이 담겨 있고, 나의 이기심과 자기 취약성에 대한 은폐성이 담긴 경우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인정하고 격려하며 축복하는 등의 긍정적인 언사와는 달리, 부정적 언사는 극도로 조심하여야만 한다. 특히 기도하는 성도들은 생각과 언어의 품격이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스스로의 다짐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한다. 사실 어느 누군들 멋진 이야기와 품격 있는 말을 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 데도 지켜지지 못하는 것은 그의 입술과 마음을 통제할 영혼의 탱크(tank)가 비어있거나 더러운 것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상 속에 들어 있는 대로 내품는 존재이다. 그러면 내 마음의 탱크에는 무엇을 채워야만 그게 가능할까? 부정이 긍정으로, 저주가 축복으로, 비난이 찬양으로, 파괴가 생산으로, 저질이 품격으로 어떻게 나를 선보일 수가 있을까? 거듭나야 한다. 시야가 변하고 보는 눈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변해야 가능하다. 그것은 나약한 나를 압도(壓倒)할 큰 분의 개입이 있어야 된다. 

 

오늘의 말씀들은 이 부분에서 두 가지로 큰 도움을 준다. 하나는 그런 변화된 새 차원의 세계를 맛본 인물들을 소개한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압도당하는 극적인 체험을 하면서 자신의 입술의 부정(不淨)을 발견하고 나오자, 그 죄악을 소멸 받는 은혜를 입게 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온 세상에 전하게 된다(1-7절).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도 그 대상들이다. 어둠이 아닌 예수란 빛을 좇았기에 생명을 취한 자들이었다(12절). 계시록의 하나님 앞에서 모세와 어린 양의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된 무리들도, 바로 그 인물들이었다(2-3절). 

 

반면에 또 하나는 예수와 그의 말씀에 전혀 동의하지 못하고 등지고 사는 무리들이다. 그 바람에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영적 장애에 빠진 어둠의 자식들이다. 신령한 것은 보지 못하고 살며, 오직 육체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고 사는 무리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천박한 말을 일삼고, 쉽게 상대를 정죄하며, 심판하려고 덤비고 저주를 일삼았다. 유대교의 핵심인 바리새인이 바로 그들이었다(13-15절). 

☞이 두 부류의 인간들을 주목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내 모습을 성찰하는 기회가 되게 하자.

 

구약을 보자

52년간의 장기통치를 해 온 유다 왕 웃시야가 세상을 떠나자(B.C740-735경), 국가적 위기를 깊이 느낀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갔다. 그렇다면 왕 웃시아는 누군가? 그는 남부 유다의 왕으로서 세속적인 정치는 잘 했으나, 산당에 있던 우상을 제거하지 못한 나약한 태도를 견지하자 여호와는 그의 말년을 나병(癩病)환자가 되게 하는 바람에, 아들 요담으로 대리통치하도록 했던 비운의 왕이기도 했다(왕하15:1-7참조). 

 

하지만 당시 유다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유다에게 매우 불리한 형국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유다는 흔들리는 갈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웃시아 손자인 아하스 때에, 아람(시리아)과 북왕국 에브라임(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하자, 그때 유다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7-8장 참조). 반면에 앗수르 패권에 위협을 느끼던 남부의 애굽과 불레셋이 동맹하자, 겁먹은 유다가 그들 동맹에 가담하는 사건도 발생하기도 하였다(31:4-5절 참조). 

 

그 바람에 유다는 제자리를 잃고 헤매게 되었다. 나라의 실질적 주인인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시키면서, 한때는 앗수르에 매달렸다가 또 다른 때는 반(反)앗수르 동맹에 매달리는 등의 엇박자로 인하여, 온 나라는 외세 의존세력으로 전락했고, 앗수르 제국에게 공격의 표적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모습은 진정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반역(反逆) 행위였다(31:4-5, 7:4-9,28:16,30:15 참조). 이사야의 소명은 그런 우려와 염려를 감지하신 하나님이 그런 나약한 왕과 백성을 깨우쳐서,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면서 국난을 극복하도록 일깨워주시려는 길라잡이로 삼기 위함이었다. 좀 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성전에 나아간 이사야는 그를 찾으신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모습에 압도된다(1-4절). 

-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했다. 옷자락만으로도 하늘 성전 공간을 넘어선 분임을 말한다. 

- 그를 모신 스랍들(히,셀라핌-청결 대행자)의 모습도 경이로웠다. 날개만 6개가 있었는데, 둘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었고, 둘로는 자기 발을 가리었으며, 둘로는 날랐다. 

- 그들의 찬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때의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하늘)에 충만하였다. 

- 화답(和答)하는 자(스랍)들의 소리도 컸는데, 문지방의 터가 요동쳤고 연기(영광의 구름,출40:34,왕상8:10)이 성전에 가득하였다. 

2) 그 장면을 목격한 이사야는 그 찬양에는 합류할 자격이 없는 자신이 그런 영광의 주를 뵙게 된 일에 대한 극심한 모순과 두려움에 빠져 들면서, 자신이 죽을 죄인임을 자백하였다.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를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감히) 뵈었구나-’(5절)

☞ 우리는 이사야가 자신의 입술의 부정함을 자책하는 증언에 주목해야 한다. 함부로 말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품위와 품격을 담지 못한 언사를 행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접촉이 불가함을 확실히 우리에게도 알리고 있음이다. 특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자들의 입술은 자기 증언에 모순되지 않고 부정하지 아니하도록 더욱 깨어 살아야만 하겠다. 

 

3) 하늘의 응답은 뜨거웠다. 스랍 중 하나가 제단의 핀 숯을 가지고 날아와서, 두려움에 떠는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선언했다 -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6-7절).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문을 열어주신 것이다

 

4) 감격과 감사와 감동이 충만해지는 순간, 이사야의 귀에는 적합한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절.상). (여기에서의 ‘우리’는 하늘보좌회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왕상22:19-22참조). 준비가 된 영혼은 주의 부르심에 주저하지 않는다! ‘저요-!’라며 응답한 것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이때부터 이사야는 하늘의 음성에 귀와 마음을 닫고 지내는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경고를 전하는 종의 길에 오르게 된다.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그의 뜻만을 선포하였다. 

☞ 이런 모습은 예수를 믿고 따라나선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요8:12,12:36 참조).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체포되어 끌려온 여인을 두고, 유대교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무모한 짓을 자행했던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요8:1-9참조). 

 

그들에게는 간음사건으로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그곳에 끌려 온 여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직 예수를 궁지에 몰아서 넘어뜨리려는 일에 그 여인을 제물로 끌어드린 것이다. 그런 안타까운 사정을 예수께서 왜 모르셨는가? 따라서 예수는 그들 송사자들 보다는 오직 그 여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집중하셨다. 그 바람에 송사자들과 예수의 충돌과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 내용을 중심으로 양측 입장을 보자. 

 

1) 유대인 송사자들과 예수의 양측의 논쟁은 그 판단의 기준이 확연히 달랐기에 나온 것이다. 예수님이 그 점을 제대로 지적하셨다. 

☞ ‘너희는 육체(肉體)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15절). 

 

그러면 송사자들이 ‘육체를 따라 판단했다’는 예수님의 지적의 근거(根據)는 무엇인가? 

① 그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모세의 율법인 신22:22-24를 자기 편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곧 함께 악행한 남성은 빠지고, 나약한 여성만을 현행범으로 재판하려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의로운 심판이려면, 당연히 간음한 남.여 모두가 함께 심판을 받아야했다. 

②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잘못된 태도를 관철시키려는 도구로 율법을 이용하고 있었다. 정직하지 못한 말씀에의 태도가 문제였다. 율법을 정죄와 심판의 무기로 삼아, 약자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을 드러낸 것이었다. 

③ 그런 육체에 따른 판단은, 나중에 반드시 자기들도 그대로 받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마7:1-5참조)

 

2) 그러면 예수께서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15,하)하신 말씀의 배경은 무엇인가? 

① 주님은 폭력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던 그 여인에게 우선 필요한 부분에만 집중하셨다.

② 우선은 그 자리가 아무리 불공평하고 억울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분명히 간음죄를 범한 죄인이었다. 주님은 그 점에 대하여서는 가감 없이 지적하셨다(11절.하 참조). 

③ 동시에 주님은 그녀에게 인생의 새 출발과 기회를 부여되는 것이 우선적인 것임을 아시고, 만물의 심판자의 권한으로(롬11:36), 그에게 새 삶에 필요한 선물들 두 가지를 선사하셨다  - ‘나도 너를 정죄(定罪)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罪)를 범하지 말라‘(8:11절). 

 

☞ 예수의 이 여인을 대하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왜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며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셨는지를 인정하게 된다(12절, 12:36참조).

☞ 이런 ‘회개와 사죄 받음, 그리고 주님을 향한 새 인생 출발’이란 공식적 측면에서 보면, 앞에서 이사야의 경우와 이 용서받은 여인의 경우가 그 맥락을 함께하고 있음도 확인한다. 

☞ 곧 성부 하나님의 입장과 성자 예수님의 입장이 서로 하나였음도 확인한다(16-19절 참조). 

 

서신서를 보자

성령의 도움으로 하늘 영광의 자리에 오른 요한 장로는 그곳에서 옛적의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성격의 하늘 찬양대를 만나고 그들의 찬양도 듣게 된다. 그들은 보좌를 지키는 본래적인 영적 존재인 스랍들의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계속되었던 종말론적 위기들을 끝내 극복해내고 하늘에 오른 인간 승리자들인 의인(義人)들이었다. 

 

그들의 노래의 핵심 메뉴는 땅의 체험에서 맛보았던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였다(3절). 그들은 지상에서 제국의 박해와 인간 우상들의 공세와 거짓 신들의 숱한 유혹들에 무릎을 꿇지 않고, 오직 주의 의롭고 거룩하심을 의지하여 목숨을 순교의 제단에 바쳤던 의인들이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들을 죽인 지상의 원수들에 대한 원한과 보복을 요청할 수도 있을 터인데-, 그곳의 그들은 전혀 달랐다. 일체 자기 자랑과 수고도 말하지 아니했다. 다만 오직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공적만을 찬양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3-4절). 

 

☞ 이 점은 무엇을 말하려는가? 앞의 두 본문 내용들과 다를 바 없다. 악을 선으로 이겨내고, 입술의 저주나 부정한 언사 대신 하나님 찬양과 감사로 시련과 시험들을 이겨낸 의로운 자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준 내용이 아니겠는가! 내 신앙을 성찰할 때다

 

결론이다

신앙 개혁은 외부와 환경 변화를 통하기보다는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하여 시작되는 것이 옳다. 내가 변해야 가정도 변하고, 교회도 변하며, 세상도 변한다. 물론 그 반대 흐름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다 변해도 나는 못 변하거나 누락될 수 있다. 그것이 치명적인 위험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사야처럼 엎드릴 때이다. 제자들처럼 오직 예수만 좇을 때이다. 하늘의 의인들처럼, 오직 주님의 구원과 의로우심을 주제로 나누고 고백하며 전하며 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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