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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10-14 (수) 10:34 3년전 831  

본문) 출 3:1-8, 요 3:31-36, 히 4: 1-13

 

창조절 일곱째 주일이다. 가을의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룬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 풍경이 아름다워도, 코로나19의 기승과는 상관이 없는 듯하다. 유럽을 비롯한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곳들에서 코로나의 기세가 더욱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치는 경치이고 바이러스는 바이러스이다’라는 입장이다. 

 

지난 월요일(10.12)에는 우리 말씀목회연구원(牧會硏究院)에서 제2회 전국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 내건 주제는 ‘삶과 신앙을 묶어주는 절기목회’였다. 여기에는 현재 한국교회와 교우들이 처한 위기의 문제, 즉 삶과 신앙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따로 도는 현상의 문제를 고발성으로 담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 극복할 대안으로, 교회력을 좇는 목회와 설교를 제시하였다. 교회력이 안고 있는 영성의 힘과 훈련의 강도가 그 분열의 틈을 메꿔주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가장 신뢰하고 기뻐해야할 관계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의 관계가 아닌가! 그런데 믿기는 하지만, 뭔가 확실치 못한 것들이 들어 있다. 그게 무얼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도 나와 내 입장과 내 상식을 더 믿고 사는 까닭이 아닐까 싶다. 이래저래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의 엇박자도 오래 되었다. 그 점이 가장 아프다. 그 후유증과 부작용들이 너무 심각하다-! 그 문제 때문에, 우리의 하나님과도 관계도 불통이고, 세상과도 관계도 빛이 바래서 지낸다. 

 

결실의 계절을 보내고 있는데, 우리의 이런 온전치 못한 사이를 언제까지 버려둘 것인가?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아직도 아담의 육체적 유혹에서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내가 문제이다. 저 둘째 아들의 아버지께 회개하고 돌아감처럼, 내 삶의 방향을 그 분 중심으로 틀기만하면 금방 해결되는 문제를, 아직도 고집하거나 미루거나 외면하기에, 내 삶이 상쾌해지거나 거뜬해지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올 자식을 위하여 만찬을 준비하고 계신데 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는 내 운명(運命)의 문제이다. 그러기에 이 시간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최상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하여, 현재의 내 믿음 상태를 먼저 검진(檢診)을 해보자. 여러분은 다음의 두 사람 중에 누가 진짜 불쌍한 자로 보이는가? 아예 믿지 않는 불신자인가, 아니면 확실치 못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신앙인인가? 대답은 확실하다. 후자가 그 답이다! 믿고도 결국은 구원이나 영생에서 제외 당하게 될 사람이 바로 그 매우 불행한 인물이다. 

 

믿음에도 두 가지가 있다. 구원 받을 믿음과 구원에서 배제당할 믿음이 있다. 믿음이라고 무조건 구원에 이르지는 못한다. 물론 참 신앙은 사람을 구원하고 주변을 살린다. 하지만 잘못된 신앙은 자신과 모두를 파괴시키기도 한다. 그러기에 참 신앙의 분별이 필요하다. 마침 오늘은 바로 그 무서운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말씀들로 가득하다. 믿음은 믿음이로되, 제대로 된 구원 받을 믿음의 주인공이 되도록 돕는 말씀들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의 세 본문은 하나님과의 역사적인 대면을 하는 모세의 모습이 모델로 올라와 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에게 여호와는 당신의 히브리 백성들을 향한 확실한 해방 계획을 밝히신다. 곧 애굽에서 노예(奴隸)살이 하는 그의 백성들을 건져내어, 그의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땅인 가나안에로 인도하겠다는 의지를 전하신 것이다(6-8절).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대한 모세의 믿음과 신뢰 여부이다! 그게 흔들리거나 의심하면 이루어질 것은 하나도 없게 된다. 모든 것이 올 스톱될 수도 있었다. 

 

여기에서는 우리는 믿음이나 신뢰가 가지는 무게와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믿음과 신뢰는 단순한 개인의 영적, 정신적, 도덕적 차원으로 국한될 성격이 아니라, 그보다는 인물 개인의 운명은 물론, 세상 역사의 향방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폭발력도 가진 뇌관(雷管)과 같은 성격도 됨을 말한다. 사람들이나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도, 믿음이나 신뢰는 서로의 관계를 지탱해 줄 최후의 동아줄이다! 돈이나 권력으로 해결될 차원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다. 

 

특별한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한국유리 회장이시고, 우리 교단의 서울 수도교회 원로장로이셨던 고 최태섭 장로의 이야기이다. 그가 9.28수복 후, 서울에서 단무지를 군납하며 살아가려고 은행을 찾아 사업자금을 빌렸다. 다행히 납품으로 당시 5천만 원 정도의 큰돈을 벌었다. 그런데 전세가 급변하면서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 사태가 발생했다. 피난길에 오른 최장로는 그 와중에 은행을 찾았다. 빌린 돈을 갚기 위함이었다. 은행도 피난하려고 정신없는 차였는데, 돈을 갚으려고 찾아온 최장로를 은행 직원은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최장로의 단호한 모습을 보고, 직원은 서둘러 영수증을 써준 채 헤어졌다. 

 

그 후 최장로는 제주도와 부산으로 피난처를 옮기면서, 원양어업주식회사를 차리려고 그 거래은행을 찾아서 2억 원 정도의 융자를 신청했다. 담보가 없어서 무모하기 그지없던 신청이었으나, 최장로는 자기에게 있던 그 은행 영수증을 은행장에게 보여주면서, 신용보증을 재요청하였다. 내용을 살피던 은행장의 얼굴이 바뀌었다. ‘바로 당신이었군요! 서울에서 내려온 직원을 통해 당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 당연히 돈을 빌려드려야 하지요. 당신 같은 이에게 융자해주시 않으면 누구에게 해주겠습니까?’ 

 

은행장은 중역회의를 거쳐 2억 원의 융자를 해주었다. 담보할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그는 그 후 하는 일마다 신용과 정직으로 일하면서, 한국유리란 거대 기업까지 일구어내었다. 그는 재수 좋은 사람이 아니라, 정직과 신용으로 사업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했음을 고백했다. (최태섭. <사랑에 빚진 자>.p 74-79참조)

 

인간 사이에서도 신뢰와 믿음의 힘이 이렇게 큰 것인데-, 하물며 오직 믿음으로서만 인간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하시는 하나님과의 믿음의 견고성 문제는, 아주 절대적인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깨어질 뿐이다. 바로 그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복음서). 당신을 좇는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영생이냐 진노냐를 결정할 승부수(勝負手)로서의 믿음을 선택하도록 요구하신 것이다(36절 참조). 

 

히브리서 저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앞에서 믿었던 자들 중에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못하여 결국엔 하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선배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듣거든 항상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오직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신 말씀에 믿음과 순종함으로 우리의 삶을 결산하실 이 앞에 설 수 있게 하라고 뜨겁게 권하였다(11-13절 참조). 

 

구약을 보자

미디안의 목동이었던 모세의 호렙산에서의 하나님 체험은 역사의 큰 분기점이었다. 모세를 찾은 하나님은 세상 역사의 무대 위에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를 보다 생생히 보여주실 기회를 스스로 만드셨다. 불꽃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자기소개와 당신의 의도가 밝혀질 때마다, 광야의 목동인 모세는 오직 두려움에 떨었다. 무엇보다도 모세를 앞세워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해방의 행보를 통보받게 되자, 모세의 두려움과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1)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의 때는 모세가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면서 광야 서쪽에 있던 하나님의 산인 호렙에 이르렀을 때였고(1절), 만남의 장소는 그곳에 있는 불이 붙은 떨기나무 속에 계신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고 찾아 나오시면서 이루어진 곳이었다(2-4절). 

 

☞ 왕자 출신인 모세의 목동에로의 변신의 모습이나 40세의 혈기왕성한 젊은이에서 80세의 노인 모세의 변신의 모습도, 하나님이 쓰시기에는 더욱 필요한 모습이었다. 인간 자신의 힘과 능력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오직 주의 능력에만 의지할 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 떨기나무는 아카시아 종류의 가시덤불(thom bush)로서, 당시 이스라엘의 처지를 상징한다. 여호와께서 그 안에서 만나신다는 것은 고통 하는 노예민족 히브리인과 함께 하고 계신 하나님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만나셨다(4-5절 참조). 

 

2) 두려움에 떨며 엎드린 모세에게 하나님이 자기소개(self-introduction)부터 하셨다. 첫째는 그들 조상들의 하나님이셨다(6절). 그들 조상들과 맺은 언약(言約)의 불변함과 연속됨을 강조하신 것이다. 둘째는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그 근심을 아시고 친히 내려오신 여호와이셨다. 그래서 그들을 애굽의 학정에서 건져내시고 약속한 땅에로 인도하시며 풍요로운 땅으로 데려가실 분이심을 알리셨다(7-8절). 

☞ 이 여호와의 이런 모습은, 후에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성육하심(인간되심)하신 성자 예수님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어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3)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세가 이전에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했던 여호와와 그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그의 의지에 찬 약속(말씀)에 대한 신뢰만 남았다. 지금까지의 목동의 직업을 버리고, 예전의 실패경험도 잊고, 노인이란 세대의 나약한 처지에 메이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을 부르시는(9절-이제 가라) 여호와와 그의 말씀을 온전히 믿느냐 여부가, 그의 모든 미래를 결정 짓게 할 뿐이었다. 그게 어찌 모세의 미래뿐인가? 우리 모두의 것이다

 

복음서를 보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큰 과제(課題)가 있다. ‘예수를 누구로 아느냐’는 인식의 기저(基底)가 제대로 갖추어 있느냐의 문제이다. 예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라는 인식만을 갖고 있는 한, 그에게 예수의 말씀은 생명의 살리고 구원하는 지침으로 받지 못한다. 예수의 말씀과 자신의 삶은 따로 돌 뿐이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이시고, 위로부터 오신 이인 계시자이다’는 입장이 분명하면, 이야기는 아주 달라진다. 베드로의 고백이 가능해진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요6:68). 우리의 입장은 어떠한가-?

 

호렙산의 모세는 바로 그 분 앞에 섰다. 여호와께서도 모세에게 최선을 다하여 당신을 위(하늘)로부터 오신 이로서, 만물 위에 계시는 분으로 당신을 드러내셨고(31절), 만물이 다 당신의 손에 있음을 전달하여 주신 것이다(35절). 주의 일에 부름 받은 우리들도 이 계시자를 홀로든 집단이로든 대면(對面)하는 생생한 경험이 있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 우리는 정령 햇갈리지 말아야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옷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께서 친히 보내신 그의 독생자이시다. 그는 성령으로 태어나 오신 분이시다(마1:20). 성령의 보고(寶庫)이시다(34절,페플레로타이). 육신으로는 땅에 속한 우리와 같지만, 그러나 완전히 차원이 다른 분이시다. 그는 구원을 목적으로 저 떨기나무 같은 만물과 인간 안에 오셨으나, 그러나 만물과 인간 위에 계셔서, 모두를 참되게 다스리시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히 지시하신다. 따라서 그를 모신 존재냐 여부는 우리 운명을 결정짓는다.-‘영생이냐, 진노냐’(35-36절).

 

서신서를 보자

서신서는 수많은 믿는 자들이 그들의 믿음의 행보에 실패함으로서, 결국 하늘의 안식(安息)에 들어가지 못한 일에 대하여 깊은 유감(遺憾)을 표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전히 그들과 같은 믿음의 행진 대열에 참여하고 있는 후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서는 그런 실패를 반복하는 일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좇아 살아서 안식에 들어가도록 응원을 보낸다. 

 

1) 이곳에서는 안식(安息/Rest)에 대한 증언이 핵심이다. 안식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공관복음)와 ‘생명’(요한복음)과 같은 차원의 영적 세계를 말한다. 그러면서 창조주께서 그의 최후의 작품으로 창조해 두신 곳이다. 그의 사랑하고 택하신 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곳이기도 하다. ‘제7일의 완성체인 창조물’로서, 모든 대망(大望)의 총괄 개념이다(3-4절). 세상의 수고로부터 완전히 해방됨을 누리게 되는 상태를 담고 있다(쉰다-카타파우신). 

 

2) 이 기자는 어떤 사람들을 위험한 대상으로 보고 있는가를 선명히 밝힌다. 곧 전도자들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살면서도, 그 말씀을 자기 삶(행실)과 결부시키지 못한 체,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이중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2절). 기자는 그들의 실패 요인들을 분석해서 전하여 준다. 첫째는 받는 말씀에 대한 불순종(不順從) 때문이다(6절). 그 바람에 주어진 시간(오늘이란 시간)을 주신 말씀을 향해 마음의 부드러움을 잃고 완고(頑固)하게 살고 있다(7절). 

 

3) 그들의 착각을 불러온 요인은 무엇인가? 아마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풍요로움(세상 물질적 풍요와 형통 따위)에서 안식이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한 연유로 보인다(8절). 그런 점에서 후대의 우리 믿는 자들도 크게 각성해야 한다. 안식과 구원은 물질과 풍요에 있지 않다-! 

 

4) 다행히 안식(Sabbath-Rest)할 때가 우리에게는 남아 있다. 지금은 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이며 그 때를 대비한 유예기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은 불순종이 아닌 믿음과 순종으로 자세를 확실히 해야만 하고, 어떠한 시험과 시련에도 안식의 약속을 흔들림 없이 붙잡고 나아가야 한다.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면서 우리 삶의 결산을 마지막으로 평가하실 주님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5)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되새김하자(12절). 살아있고(living), 활력이 있으며(active), 몸과 온 지체를 찔러 쪼개고(sharper),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꿰뚫어보시고 판단하신다(penetrate & judge). 이 말씀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리라. 

 

결론이다

다시 말씀에 마음을 열자. 모세처럼 두렵고 부담되며 감당하기 벅차도, 우리는 만물의 주이신 주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자. 의심과 불신은 하나님의 주되심과 그의 능력과 말씀을 무시하는 행동이 되기에, 그의 배척의 대상이 될 뿐이다. 믿다가 실족하여 안식에서 제외당하는 것만큼 비참한 존재가 어디에 있겠는가? 신실한 믿음과 순종으로 최후에 그곳에 이르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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