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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10-06 (화) 20:00 3년전 700  

본문) 신 32:7-14, 막 8:1-9, 행 14:8-18

 

창조절 여섯째 주일이다. 조석간의 기온 차가 커지고, 단풍의 계절이 본격화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컬러풀(colorful)한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즐길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멋진 솜씨에 걸맞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우리 인간들의 내면세계도 함께 성숙하고 깨끗하고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름다움은 주어진 것도 좋아야지만, 그것을 즐기고 감상할 상대도 함께 품격을 갖출 때, 제 맛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일 말씀에서는 우리를 당신의 식탁에로의 초청하시면서,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소개받았다. 여러분은 이미 그 삶에 입문(入門)하셨으리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에 더욱 접근하도록 하자. 그의 초청에 응한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돌봄(Care)의 말씀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선은 돌봄의 폭, 즉 범위와 대상에 대하여 말한다. 성부 하나님의 돌봄을 담은 구약은 그의 친(親)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을 어떻게 돌보고 양육하셨는지를 집중하여 소개한다. 성자 예수님의 돌봄을 담은 복음서는 그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그들과 더불어 살고 있었던 주변의 이방인들까지도 포용하시면서 돌보셨음을 소개한다. 성령 하나님의 돌봄은 사도들을 통하여 복음을 접하게 된 순수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돌봄의 손길을 폈는지를 소개한다. 

 

다음은 돌봄의 내용(內容)이다. 성부 하나님의 돌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친자식으로 돌보셨음을 전한다. 즉 이스라엘에 대한 소유권(所有權)이 여호와께 있음을 선명하게 밝히셨다. 그리고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는 전체 세상 만민과 역사 속에서도 오직 자식 된 그들에게만 주신 여의주(如意珠)*가 있었다. 바로 모세와 예수란 인물들을 앞세워 온 세상을 살려낼 율법(律法)과 복음(福音)이라는 양대 기둥들을 안겨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상대하시는 모습은 마치 부모가 자기 자식을 다루는 모습들을 연상시킨다(10-14절). 그러기에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아버지인 하나님과 자식인 이스라엘 사이에 흐르는 깊은 애증(愛憎)이 축적되어 있다. 배신과 패역을 일삼는 자식 이스라엘을 향한 부모 하나님의 가슴앓이와, 그에 대한 대처 방식도 우리는 충분히 목격하게 된다. 

 

성자 예수님의 돌봄은 마가복음의 칠병이어의 기사 속에서 나온 내용인데, 그 특징은 그 돌봄의 대상이 이제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이방인들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곧 종족(種族)의 구별은 있으나 상황과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향한 메시아의 품성(品性)인 긍휼과 자비는 이미 온 세상 만민을 향하여 활짝 열렸음을 보여주셨다. 그 돌봄의 실체는 먹이심으로 나온다. 육체적, 영적 굶주린 무리들이라면, 그 누구나 그의 식탁에서 배불릴 수 있음을 알려주셨다(마11:28-30참조). 이런 열린 하나님의 가슴(품)때문에, 온 세계가 그에게 나아온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돌봄은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장애인을 일어나 걷는 자로 치유하는 강한 능력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우상숭배에 찌든 지역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설교(교육)의 내용으로도 나타냈다. 이런 사역들은 하나님의 선교가 치유(治癒)와 교육(敎育)의 차원으로 온 세상에 그 날개를 치게 되면서, 온 세계를 변화시켰고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무지한 자들을 깨우치게 된 디딤돌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135년 전에 이 땅에 온 선교사 두 분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이런 치유의 복음과 교육선교로 인하여, 오늘날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등의 명문사학과 일급 병원들이 세워지면서, 숱한 국가적 인재들을 배출하였고, 허약한 백성들의 건강을 치유하는 중요한 병원들이 되었던가! 그런 치유와 교육 선교의 가치는 진정 말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렇다. 하나님의 돌봄에는 분명한 특징들이 있다. 당신이 친히 택한 백성들에게는 어버이의 사랑 차원의 돌봄을, 그 영역에서 밀려나 있던 이들에게는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과 자비 차원의 먹이시는 아드님의 돌봄을, 우상숭배와 반신적 입장에 서서 살아온 이들에게는 치유와 설교와 회개의 복음을 통한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사랑이시고 구주이시며 소망이심을 입증하고자 하는 성령의 돌봄을 세상에 풍부히 제공했다. 이제 본문의 내용에 담긴 사정들을 보다 깊이 들여다보자. 

 

신명기를 보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종종 이전의 일에 대한 기억과 회상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다가오는 새 역사를 대비하면서, 이전의 좋은 것들은 잘 계승 발전시키고 잘못된 일들은 중단하게 하신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각 가정마다 이루어진 세대교체(世代交替)와 환경변화(環境變化)로 인한 역사와 전통의 단절로 인한 혼란을 예방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깊은 배려에서 나온 요구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앞 세대, 즉 출애굽과 광야세대는 온통 하나님이 주도하신 역사였다. 가나안 이주세대가 맛볼 수 없었던 불기둥 구름기둥이 이끄셨던 세대였고, 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란 특별 식량으로 먹고 살아온 세대였다. 하지만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가나안은 그럴 필요가 없어진 새로운 문화. 새로운 환경, 땅의 풍성한 소출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한 곳이다. 그러기에 이 앞 세대와 뒷 세대의 정신과 생활의 거리 간격은 너무도 클 수 있었고, 자칫하면 대화가 단절되고 서로 자기 쪽만 보고 살아갈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런 세대의 간격을 좁히고 극복하게 하시려고, 가나안 세대에게 특별 명령을 하셨다.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가 대답하리라’(7절)고 명하셨다. 

 

☞ 이런 질문하는 훈련의 시작은 그 후, 이스라엘 교육방식의 핵심이 된다. 하부루타교육방식(질문-기억-생각-토론 등의 진행방식)의 뿌리가 된 것이다. 우리의 주입식 교육방법과는 천양지차가 된다. 인간은 질문하면서 성장하는 존재임을 하나님께서 일깨우신 것이다.

 

1) 그런데 이런 질문 요구의 원인은 인간들 사이의 세대나 환경 차이 극복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를 오늘에 있기까지 한 주역이 인간 조상들이 아니라 인도자이신 하나님이셨음을 선명하게 하고자 함이었고, 그러기에 그들 후세대들도 그 하나님과의 섬김과 교제를 이 가나안에서도 중단 없이 이어가야 됨을 강조하고자 함에 있었다. 

 

2) 옛날을 기억하고 역대를 생각하며 조상들에게 물으면, 무슨 대답이 나올까?(7절). 두 가지가 예견되었다. 하나는 하나님이 세계 만민들 중에서 자기 이스라엘을 어떤 존재로 구별지어 다루셨는지를 알게 될 것이고(8-9절), 또 다른 하나는 (자기들은 틈만 있으면 하나님을 거스리고 대적하였음에도) 자기들을 보호자 하나님께서 얼마나 애지중지(愛之重之)하시며 돌보시고 양육하시며 인도하셨는지를 선명하게 알게 되리라는 점이다(10-14절).  

 

3) 먼저 하나님이 세계 만민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는 차이부터가 달랐다. 민족들에게는 당신의 천사(담당)를 통하여 그의 돌보심을 드러내셨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당신이 직접 나서서 관리하시고 돌보셨다. 즉 여호와가 그들의 분깃이었고 기업이 되셨으며 몫이 되신 것이다. 부모-자식 관계처럼 맺어진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그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신의 이스라엘에 대한 소유권(주권)을 주장하셨던 것이다(8-9절 참조). 

 

4) 여호와의 이스라엘 돌보심의 극치는 광야 40년 교회생활을 통하여 온전히 드러났다. 황무지 광야의 짐승들이 부르짖는 곳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다(10절). 독수리가 자기 새끼들을 그의 날개를 펴며 받으며 업는 것 같이 돌보셨다(11절). 그때 그들과 함께 하고 인도한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셨다(12절). 그들은 항상 높은 지경으로 인도하셨고, 밭의 소산과 반석의 꿀과 기름을 빨게 하셔며, 소와 양의 젖과 기름, 바산의 숫양과 염소고기, 최 양질의 밀을 먹이시고,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다(13-14절). 

 

☞ 후손들은 조상들로부터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배려와 돌봄의 증언을 들어야만 했다. 

우리도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돌보심을 전해 줄 수 있어야 할 터인데, 그게 무엇일까? 

 

복음서를 보자

마가복음은 두 건의 예수님의 공동체 먹이시는 기사들을 올렸다. 하나는 오병이어 기사로서(6:30-44절),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큰 무리들(약5천명)을 먹이시고도 12광주리나 남긴 사건이다. 또 하나는 칠병이어로 큰 무리들(약4천명)를 먹이시고도 7광주리를 남기신 이야기이다. 공통적인 것은 이 두 이야기들이 모두 예수께서 주시는 말씀(가르침)을 듣고자 전국 처처에서 모인 자들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다른 점도 보인다. 후자의 경우는 그 대상이 매우 불쌍한 사람들이며, 그것도 멀리서 온 사람들이라는 점이다(2-3절 참조). 이들은 춥고 배고프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 많았음을 말한다. 물론 영적 기근자들도 많았다. 동시에 주님과 함께 한 시간이 벌써 3일간이나 지났으며, 그것도 먼 거리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방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7:24,31절). 목자의 심정이 가득한 주님에게는 그들에 대한 연민과 배려심이 매우 뜨거웠다. 

 

1)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에 대한 돌봄이 절대 필요하다는 뜻을 전하셨다. 그 돌봄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일이었다(1-2절). 그대로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도중에 기진할 자도 보였다. 

2) 여러모로 난감(難堪)한 형편이지만, 방안(方案)이 거론되었다(4절). 

 

3) 주님의 방법이 제시되었다. ‘너희가 가진 먹을 것이 무엇이냐’를 물으셨다. 거기에 모아진 것이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였다(5,7절). 주님은 일행을 다 앉게 하신 후, 손에 든 떡을 들고 축사(祝辭)하셨다. 그 후 제자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무리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6-7절). 

4) 신비(神祕)의 나눔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결과가 나왔다. 무려 남자만 4,000명 이상 되는 일행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그러면서도 남은 조각이 무려 일곱 광주리나 되었다(6-9절). 

 

☞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사랑과 긍휼이 담긴 진정한 나눔에는 신비가 따르고 기적이 발생한다. 없는 것을 탓하는 곳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코로나19 시대는 가난한 자들에게나 힘없는 자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계절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겨낼 비법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7병2어를 대하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실천하는 곳에는, 여전히 빈곤의 권세는 물러나고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서신서를 보자

본문은 이방인의 도시 루스드라(Lystra)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성령께서 어떠한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전한다. 바나바와 바울이 전도차 그곳에 머물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장애인 하나를 만났는데, 그가 바울의 증언을 경청하면서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포착되자, 바울은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나라’고 큰 소리로 명령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즉시 일어나 걷게 되었다(8-10절)! 그 파장이 얼마나 컸겠는가? 이 일은 행3장에서 있었던 베도로-요한 사도에 의하여 발생한 사건과 흡사했다. 이 일은 두 가지 큰 선교적 반응들을 가져왔다. 

 

1) 기득권 가진 우상 세력을 굴복시켰다(11-13절). 루스드라는 B.C 6년경에 로마의 식민지로 흡수된 곳으로서 로마의 변방도시였다. 그러기에 그곳에는 정치적 힘을 가진 로마인과 헬라인, 그리고 원주민이 얽혀서 살고 있었다. 그곳을 지배하는 우상은 올림피아신들 중에서 가장 높다는 신인 ‘쥬피터’(제우스)였고, 그의 대변자처럼 간주된 헤르메스가 있었다. 그런 그들이 바나바와 바울에 의하여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자가 일어나 걷는 모습을 보자, 그들은 원주민들의 방언으로 ‘신들이 자기들에게 내려오셨다’고 외치면서,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간주하면서, 소와 제물을 가지고와서 그들에게 경배하려고 한 것이다(11-13절). 

 

2) 두 사도들은 옷을 찢으며 그들에게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그들의 경배를 저지하였다(18절). 자기들이야말로 그들과 똑 같은 인간들에 불과하지만, 이번 치유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의 선물이기에,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14-15절). 

 

3) 그러면서 그들의 관심을 창조주 하나님께 향하도록 설교를 했다(14-18절). 바울의 이방인을 향한 첫 번째 설교가 그곳 루스드라에서 시행된 것이다. 그의 설교의 요지는 이랬다. 지금까지의 하나님은 모든 민족이 자기들 방식으로 살게 방임(放任)하시면서도, 당신의 살아계시고 그들을 돌보시는 선한 일은 계속해 오셨음을 증언하였다. 그것은 당신의 창조물들인 하늘의 비와 땅의 결실들을 안겨주셔서, 그들이 음식을 나누며 기쁘게 살게 하셨음을 일깨워 준 것이다(16-17절,시104:13-15,145:15-16,렘5:24참조). 자연신학과 보편적 은총에 담긴 창조주의 행위를 복음의 내용으로 전한 것이다. 그 결과 상황은 진정되었고 제사행위도 억제되었다(18절).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그곳 루스드라 라는 박토(薄土)에 떨어진 것이다. 

 

결론이다

사랑의 하나님의 인간 돌보심은 끝이 없다. 특히 그의 말씀의 초대에 응하며 그 앞에 나아간 무리들을 향하여서는 당신의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아끼지 아니하며 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 주신 분이 아니신가! 그의 돌봄과 사랑을 기억하고 잊지 말자. 그의 은혜에 관한 추억의 성을 쌓자. 후손과 이웃에게 증언할 수 있도록 주님의 축복들을 가슴에 축적해가자. 특히 우리는 이방인 출신으로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다. 더욱 겸손하고 간절한 자세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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