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창조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세계성만찬주일. 군선교주일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창조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세계성만찬주일. 군선교주일

관리자 2020-09-30 (수) 12:03 3년전 744  

본문) 사 55:1-5, 눅 10:38-11:4, 요일 1:1-7

 

창조절 다섯째 주일이다. 시간도 어느 덧 10월에 접어들었다. 주어진 가을의 아름다움의 향연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시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코로나19에 지친 우리 생명들을 위하여 베푸신 자연을 통한 위로의 무대가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밤하늘에서 별들을 보기도 쉬워졌다. 미세먼지 타량도 한층 잦아들었다. 이 또한 얼마나 다행한가? 힘들고 어려워도 그래도 우리는 살만한 세상에서의의 여정을 보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감사하며 살아가자. 

 

지난 주간에는 어느 공무원이 서해 해상에서 월북(?)하면서 북한 측으로부터 피살되는 일이 발생하여서 남.북 관계의 큰 악재(惡材)가 될 수도 있었는데, 김정은 위원장의 발 빠른 사과로 인하여 남북의 막힌 담이 터지고 있는 상황으로 전진하고 있어서, 이 또한 다행스럽다.  

 

오늘은 마침 총회가 제정한 군(軍)선교주일도 겸한다. 우리 한반도의 육해공군으로 나라와 민족의 방위와 수호를 위하여 헌신하는 우리 국군 장병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동시에 그들의 복음화와 정신력 증강을 위하여 헌신하는 군목(軍牧)들과 그들의 선교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군대에 군목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은 세계 안에서도 흔치 않는 일이다. 그만큼 군대의 힘은 무기만이 아니라, 정신력과 영적 힘의 밑 바침으로 된다는 것을 우리나라가 일찍부터 깨닫고 대비해 온 것이 아니겠는가-! 군선교의 활성화되도록 기도해야 겠다. 

 

또한 세계성만찬주일이다. 성만찬은 그 예전의 방식에서나 신학적 입장에 따라서 논쟁도 많고 교단들도 갈라졌다. 그럴수록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성찬에 대하여서 제대로 배워야한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성찬이 매우 형식화되어 있고, 성찬의 횟수도 빈곤하다. 이런 모습은 매우 잘못된 현상이다. 그 바람에 개신교도들의 교회에 모이는 열심도는 높지만, 세상에 나아가 예수로 살며 예수를 몸으로 드러나는 데에는 아쉬움이 크다. 예수 체중이 가볍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 개신교가 카톨릭이나 불교에 비하여 세상의 신임도가 훨씬 낮게 나오고 있다. 

 

본래 초대교회는 모이면 떡을 떼고 성찬을 나누었다(행2:42). 본래 주의 생명의 말씀은 ‘듣는 말씀’과 ‘먹는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이제는 이 둘의 균형 잡는 노력을 전력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듣기만하고 행하지는 못하는 교회의 현재의 모습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성찬은 주님의 몸과 피를 직접 취하면서 그와의 교제와 관계를 강화시키는 역동적 매체이기에, 우리는 더욱 성찬을 나누는 일과 그 의미를 깊이 체득하는 일에 더욱 매진해야 하겠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당신의 식탁으로 초청하시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초청에 응한 자들에게는 당신이 준비하신 생명의 양식으로 대접하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식탁을 통한 만남이 어찌 음식만의 대접이겠는가? 초청자와의 사귐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배부르게 되고, 즐겁게 되며, 영화롭게 된다(사55:1-2). 그 교제(코이노니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사랑받는 자녀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양식(糧食)이다. 모든 생명은 양식을 먹고 사는데, 하나님이 초청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양식은 어떤 것일까? 양식이라면 어떤 양식인가가 중요하다. 양식에는 성격상 두 가지가 있다. 땅의 양식과 하늘 양식이 있다. 땅의 양식은 육해공에서 공급된 물질 중심의 먹거리이다. 세상 인간들은 모두 이 양식으로 산다. 이 양식을 위하여 목숨을 건다. 주께서 지적하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영역의 것이 바로 땅의 양식이다.(마6:31참조)

 

하지만 하늘 양식은 창조주께서 주시는 영혼을 위한 양식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관심 없는 양식이지만,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들에게 먹지 않으면 죽게 되는 특식(特食)이다. 그들에게는 이 양식이 땅의 양식에 우선한다. 이 양식으로 만족해야 땅의 양식도 해결된다. 여기에서 배고프면, 매사에 배고파진다(마6:33참조). 특히 이 양식은 우리를 하나님과 사귐으로 이끈다. 

 

그러면 하늘 양식의 실체는 무엇인가? 기본은 예수님 자신이다. 주님은 당신을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요6:48)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의 몸을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신 주님이 곧 자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양식이 된 것이다. 주님을 향한 믿음과 그의 삶을 좇는 일이 삶의 최고의 양식이 되었다. 물론 그의 말씀도 양식이다. 들으면 영혼을 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聖餐)도 핵심적 양식이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의 구약 예언서는 성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언약에로의 초대장이 올라와있다. 모든 목마른 자, 돈 없어 가난한 자 모두를 초대하신다. 나와서 좋은 양식을 먹고 배부르고 즐거움을 얻으라 하신다. 복음서는 그 양식의 공급자 자신인 성자 예수께서 두 자매로부터 초청을 받으신다. 여기에서는 주님의 양식을 먹을 줄 아는 자와 먹을 줄 모르는 자가 갈리는 모습이 드러난다. 복음서 후반과 서신서는 하나님의 교제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기도(祈禱)와 빛 된 삶의 행실(行實)이 강조되고 있다. 이제 그 세부 내용을 드려다 보자.

 

이사야서를 보자

본문은 바벨론 포로 귀환자들을 상대로, 마치 장터의 장사꾼의 용어로 호객(呼客)을 하듯이, 하나님께서 당시 모든 백성들을 동시다발로 초청하신다(암5:4,14절 참조). 그 주 대상은 모든 목마른 자들, 돈 없는 자들, 양식 아닌 것과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당신께 나아오면, 가진 것 없어도 그들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좋은 것을 먹게 되고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라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이런 백성들 초청은 그들의 굶주림과 목마름이 무엇 때문에 온 것인지를 깊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역대급(歷代級) 고생들은 모두 돈 없고 마실 물이 없어서가 아니었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서 불의하고 음란하며 타락한 생활에 빠져들면서, 징벌을 받게 되었기에 얻어졌던 결과였다. 그 바람에 그들은 무너지고 꺾어지면서 바벨론 포로생활의 혹한기를 70여년 보내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복역(服役)을 마쳤다.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 시점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그것을 분별해야 그들은 살게 된다-! 

 

이제 그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돈이나 물질적 양식이 아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를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의 허기와 갈증을 해소하고 배부름을 얻는 일이 중요하였다. 그 일은 돈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마음과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임하면 다 해결되는 일이다. 본문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하는 그의 백성들만이 들어야 될 명령이었다(마6:33참조). 다른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아무리 부요해도 헛것이다!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그와의 교제에 들어가야만 해결될 차원이었다! 

 

1) 그 초청 대상자들은 분명하다. 모든 목마른 허기증에 걸린 자들이다. 가난한 자들도 물론이다. 양식아닌 것에 돈을 투자하면서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에 수고하는 자들 모두이다(1-2절).  

 

2) 초대자에게 공급될 양식이 제시되었다. 초청자인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듣는 일이었다. 그러면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기름진 것으로도 즐거움을 얻게 된다. 즉 영혼(靈魂)들이 살아나기 때문이다(2-3절.상). 

 

3) 그 만찬의 결과는 무엇일까? 초청자 하나님과 응답자 그의 백성들이 영원한 언약(言約)을 맺게 된다. 곧 다윗에게 베푸셨던 확실한 은혜인데(3절,삼하7:16,렘32:40,마11:28참조), 여호와가 그를 만민의 증인과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아서 쓰시는 대상이 되는 일이다(4절)

 

4) 그 사역을 통하여서는 놀라운 차원의 새 지평이 드러날 것도 예고하셨다. 그가 알지 못하는 나라가 응답하며 나아오며, 그를 모르는 족속들이 그에게로 달려올 것이다. 즉 이방인들까지 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새 역사가 활짝 열릴 것이 예고된 것이다(5절). 

☞ 그렇다. 여호와의 식탁에 응답하고 그의 양식으로 배불림을 받은 사람의 삶의 수준은 완전히 세속의 인간들과는 다름을 확연하게 고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크신 품이 낯선 것들까지도 그의 것으로 들어오게 되었기에, 그런 변화는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 놀라운 예언은 예수와 그 제자들 시대에 성취되기 시작하였다. 

 

복음서를 보자

예수님이 주실 양식을 먹는데, 무엇이 중요한 양식인지를 분별하지 못해서 햇갈려 하는 사례가 발생하였다. 바로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사는 베다니 집에서였다. 그들 자매는 그 지역을 지나시는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다. 여자가 호스트가 되어 남성 일행을 초청하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만큼 마르다의 자신 있는 행보가 돋보이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주님이 초청의 주체가 아니라, 초청받은 대상이 되기도 하셨다. 

 

그곳에서의 예수님 접대는 두 갈레였다. 동생인 마리아의 예수 영접과 언니 마르다의 영접의 내용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달랐나? 마리아는 내실에 드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39절). 하지만 언니 마르다는 이 내객들을 위하여 음식 대접하는 일에 동분서주(東奔西走)하였다(40절.상). 그 일을 안 언니가 큰 불만을 나타냈다. 그런 불만의 불똥이 결국 주님에게로 뛰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절). 

 

동생의 철없는 행동보다는 그런 동생의 행동을 용납하는 주님에게 문제가 더 많다고 마르다가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귀한 손님에게 겁 없이 질책성 요구를 하고 나왔다. 주님의 반응은 어떠하셨나? 단호하셨다. ‘너는 많은 일(섬기는 일-디아코니아)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마리아는 이 좋은 편(말씀 듣는 일)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절) 

 

☞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을 상대하는 모든 제자들과 백성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할 중요한 대면(對面)의 질서를 배우게 된다. 곧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면(만남)은 주님을 만나서는  그의 말씀을 먼저 듣고, 그의 뜻을 분별한 후에 거기에 맞춰서 행동을 하는 일이다! 그러지 아니하면,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뜻과 입장을 앞세워서 주님에게 요구하거나 주입하려고 하는 모습이 나올 뿐이다. 매우 좋지 않다. 우리는 바로 그 점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 주의 기도(祈禱)가 이어서 나왔다(눅11:1-4). 기도도 내가 하고 싶어서하고 말고를 결정짓는 행위가 아니다. 주님이 우리 앞서서 우리와 언제든지 교제하고 싶어하시고 당신의 마음과 뜻도 전하고 싶어서, 미리 열어 놓으신 교제의 통문(通門)이다. 그러기에, 기도자들은 주님의 초청에 겸손히 경청하려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물론 내 마음을 주님께 전하고 올리는 것은 문제없다. 하지만 자세는 내 것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내 입장에 대한 주님의 응답과 허락을 겸손히 구하는 것이어야 된다. 여기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에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3절)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렇다. 주의 백성은 주님의 공급하시는 영육의 양식으로 사는 무리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주의 공급으로 받는 양식만이 우리 삶을 땅과 하늘에서 모두 유효한 존재가 되게 한다. 

 

서신서를 보자

여기에는 교회 내부에 침투한 이단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한 피해의 아픔이 반영되어 있다. 믿는 신조의 내용을 달리는 교인들이 등장하면서, 갈라져나간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신조란 무엇이었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하신 일을 거부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역사의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분리시켜 따로 상대하려했던 세력들이었다. 

동시에 영육의 분리로, 썩을 육체로 인한 선한 행실의 무용론을 내세웠다. 한번 영의 각성으로 구원 받은 이는 영원하기에, 세상의 일에는 더 이상 구애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성도들의 세상에서의 삶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에 등을 돌린 것이었다. 실로 십자가 없이 편히 믿고 살 길을 활짝 연 것이다. 그 바람에 탈선하고 배교하는 이들이 계속 나온 듯하다. 

 

사도들이(‘우리가’-.3-5절) 나섰다. 그러면서 영지주의 집단의 공세를 차단시키면서, 동시에 생명이신 말씀의 젖을 먹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명심해야할 5가지 지침들을 제시하고 나왔다 : 

 

①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태초 이전)부터 말씀으로 아버지와 함께 존재하신 분이시다(1-2절) 

②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육신의 옷을 입고 성육(成肉)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1-2절)

③그의 성육하신 몸은 제자인 우리들에 나타나 보이셔서, 우리는 모두 그를 친히 듣고 보고 만진 목격자들이며 증인들이다. 이 증언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직접 누렸던 성부와 성자와의 교제의 기쁨을 듣는 자들과도 나누고자 함이다(3-4절)

④하나님은 진정 빛이시다. 그에게는 거짓이나 어둠이 전무하다(5절). 

⑤교제에 들어간 이들은 거짓과 가짜에 현혹되지 말고, 빛 가운데 살아서 예수의 피의 은혜를 훼손 없이 누리고 살아가야한다.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실 것이다(6-7절).  

 

결론이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들이다. 삶의 우선순위의 질서가 선명하고 분명해야 한다. 마리아의 영성을 취하고 살아야 한다. 마르다의 착각에 빠져 살면 안 된다. 주님과 그의 말씀을 앞세워 살면, 모든 일에 근심걱정 없이 형통하며 살게 된다. 하지만 주님을 뒤로하고 세상일과 나의 뜻을 우선하게 되면, 우리는 즉시 길을 잃는다. 헤매고 방황하며 판단이 흐려진다. 지속되면 부작용이 커진다. 주님을 부담으로 알지 말고 기쁨으로 삼고 섬기자. 이단 주변 유혹에 조심하면서 살아가자. 매일의 삶을 기도로 시작하고 말씀으로 행동의 지표로 삼으며 성찰하며 살자.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