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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한가위감사주일

관리자 2020-09-22 (화) 23:30 3년전 741  

본문) 욥 37:14-24, 마 14:22-33, 롬 9:14-26 

 

창조절 넷째 주일을 맞이했다. 지난 주간을 비롯하여 최근 날씨는 그 어느 때보다도 쾌청한 가을 날씨를 뽐내고 있다. 얼마 전만해도 초대형 태풍들로 숨죽였었는데-, 지금은 정말 옛 이야기가 되었다. 거리마다 코스모스가 반발하고, 각종 가을꽃들은 자태를 뽐내는 중에 가을 잠자리들의 날개치기도 활발하다. 단풍의 기운도 엿보인다. 밤하늘에는 어찌 그리 별들도 많은지-, 변신한 가을의 아름다움은 우리들 가슴속을 들뜨게 한다. 

 

한쪽에서는 코로나19의 위협으로 몸과 마음이 쫄아있어도, 그리고 한가위에도 고향도 못간 체 비대면으로 ‘동영상 성묘’가 유행을 하고 있어도, 날씨가 안겨주는 계절의 풍요로움은 우리를 설레게 한다. ‘구름 천국’을 펼치는 가을 하늘도 멋있고 웅장하다. 조석으로 가라앉은 기온도 반갑다. 늘 요즈음만 같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 세상이 어디 한결같은가, 일기도 한결같은가, 아니 인생살이도 한결같은가? 물론 그렇지 않고 또 그럴 리도 없다. 변화무쌍(變化無雙)-, 그것이 답이다. 한순간 내일은 어떤 돌변한 상황이 주어질지 모른다. 그런 중에도 그래도 이 정도 살고 있음은, 그 자체가 기적이며 은총이다. 오늘은 한가위 감사주일이기도 하다. 당연히 창조주께 감사해야 겠다. 생명과 생태계를 안겨주신 조물주께 감사함이 마땅하다. 내 생명을 전해주신 조상들께도 감사하자. 그리고 고단한 삶의 여정에서 내 평생의 동반자인 배우자와 자녀 등의 가족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자. 

 

오늘 주신 세 본문 말씀들은 어떤가? 우리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어떤 눈과 마음으로 보고 상대해야 할지를 전한다. 특히 삶에 어려움이나 난감한 일을 당하였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누구로 알고 믿으며 어떤 자세로 상대하여야 마땅한 지를 전하려한다. 그것도 그 어려움이 나의 과오와 범죄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일 때, 즉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것일 때, 그 때 우리들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지를 안내하려고 하신다. 

 

예컨대, 지금의 코로나 사태를 보자. 코로나19는 전체 인간들의 자연환경 파괴의 결과물로 인정되지만, 그렇다고 어느 특정인의 탓이나 어느 나라의 탓으로 치부할 수 없는 범세계적인 판데믹이 된 것이다. 그 바람에 우리는 마치 기상의 급변화로 인한 비바람과 태풍을 맞듯이, 주어진 코로나의 공습을 전 세계인이 그대로 맞고 있다. 오늘 말씀들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을까? 어떤 눈과 자세를 맞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를 찾아보게 한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코로나가 전 세계인에게 중대한 생명의 위협세력으로 등장하였지만, 그러나 그 최종적인 결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날 것이다. 곧 코로나로 죽는 사람은 죽을 것이고, 타격을 당한 사람들은 치명상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도 예상된다. 코로나 때문에 오히려 살아나고 더욱 번성하게 되는 사람들도 나올 것이다. 그래서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주도하는 인물들로 등장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코로나가 재앙이 아닌 복 덩어리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는 마냥 재앙이나 저주라고만 규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대처를 슬기롭고 지혜롭게 잘한 사람에게는 기회였고 축복이었다. 자신의 운명의 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킬 디딤돌이기도 하다. 하지만 준비가 덜 된 사람들이나, 대비에 허약하거나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코로나는 저주요 재앙이며 걸림돌이 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서 계시는가? 

 

중요한 것은 내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과 위협적인 세력들에 대비하는 삶의 내용과 태도이다. 패배하는 사람이나 승리하는 사람은 다 나름대로의 분명한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하늘 백성들이다. 천지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무리들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남다른 승리의 비법을 보유하고 있다. 그것이 중요하다. 오늘 본문들을 중심으로, 이제 그 승리(勝利)를 안겨주는 중요한 요인들을 찾아보자. 

 

참고로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역사적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개혁자 루터의 이야기이다. 서기1505년 여름 6월 2일, 당시 법학도였던 루터는 친구와 함께 학교로 돌아가는 중, 4마일 더 가야하는 슈토트테른하임(Stotternheim) 마을 부근에서 무시무시한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를 만났다. 그 천둥에서 나온 벼락에 옆의 친구가 즉사하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신도 땅에 고꾸라졌는데, 그 때 루터는 깊은 두려움 속에서 소리 질렀다.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소서, 그러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헤이코 오버만, 김기홍의 글 종합) 

 

결국 이 무서운 벼락 천둥 한 방은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갈랐다. 한 사람에게는 죽음을, 또 한 사람에게는 법학도가 아닌 수도사가 되어 후에는 인류사의 흐름의 변화를 견인한 대(大)종교개혁자가 되는 인물이 등장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 일이 누구의 작품으로 보이는가?  

 

인간은 오랫동안 궁금해 하였다. ‘왜 내가 아니고 너냐’, ‘왜 네가 아니고 나냐’,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냐’, ‘왜 우리가 아니고 저들이냐’, ‘왜 잘난 자가 아니고 못난 자냐’ 등등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궁금증과 의문들을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왔다. 그래서 얻은 것이 거의 없는 데도, 그래도 궁금증은 끝이 없었다. 

 

바로 그 점에서 오늘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성령의 답변을 전한다. ‘하나님의 자유하신 은혜로운 선택에 따른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질문자들에게 되묻는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20절). 그러면서 ‘하나님의 토기장이론’을 내세워 말한다(사45:9,렘18:4-6참조).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다(21절).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앞에 지음 받은 피조물은 순복하여야 마땅함을 강조하였다. 피조물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자기주장을 고집하지 말고, 조물주의 그 배치주권을 겸손히 인정할 때 나온다. 조물주의 주권에 저항하거나 비판하면, 결국 그는 긍휼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말 것이다. 

 

세 본문을 다시 본다. 욥기의 욥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혹독한 시련을 한 동안 겪고 있었다. 자신의 고난이 이해가 안 되고 너무 억울한 면을 생각하면서, 욥은 상당히 저항하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침묵하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에 마음을 드렸다. 복음서의 제자들도 갈릴리 바다를 건너면서, 뜻밖에 거센 풍랑을 만난다. 생존의 위기감에 휩싸여 고전할 때,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만난다. 그들은 거기에서 풍랑의 위험보다 더 심각한 장애가 자신들 안에 있음을 발견한다. 바로 그 주범은 자신들 안에 있던 의심(疑心)이었다. 

 

서신서에서는 하나님의 특정인 선택에 대한 교회 안에서의 의구심과 논쟁에, 바울 사도가 답변하였다. ‘왜 에서가 아니라 야곱인가’였다(롬9:12-13절 참조). 아마도 그들은 화끈한 남성미를 가진 에서가 아니라, 집요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듯 보이는 야곱을 하나님이 선택하신 일에 대하여 의구심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을 속과 미래까지 보는 하나님의 눈과 인간의 겉과 지금의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는 인간들과의 차이에서 나온 문제가 아니었을까.

 

구약 욥을 보자

참으로 원인을 알 수 없게만 보였던 욥의 시련의 현장에 오랜 친구들 네 명이 뛰어 들었다. 그들의 진상규명은 인과응보(因果應報)론에 집중되었다. ‘네가 남모르게 여호와께 악을 행하였기에, 그렇게 폭망(爆亡)했다’고 규정하면서, 어서 자백하고 회개하라며 욱박했다. 하지만 욥은 저항했다. 자신은 결코 이런 징벌을 받을 죄를 짓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어쩐 일인지 자신에게 이렇게 가혹하게 대하신다면서, 하나님에 이의를 달고 나온 것이다. 난감한 현장이었다! 

 

그러자 친구들 중 가장 연소한 엘리후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당사자 욥과 친구들 셋을 모두 질책(叱責)하였다. 욥에게는 자신을 의인으로 여전히 간주하는 일을 책망하였고, 친구들에게는 욥을 죄인으로 공격하는 일방적 행위를 책망하였다(32:1-10참조).   

 

그러면서, 엘리후는 지금 고난의 시점에서 욥에게 가장 요청되는 대응 자세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제시했다. 엘리후의 그 증언은 결국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욥과 친구들 모두가 잠잠해졌고, 여호와의 말씀도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엘리후의 입과 손가락은 열을 올리는 인간들이 아니라, 이 모든 사건을 위에서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였다. 조물주를 향한 경외와, 그의 정의롭고 공의롭게 응답해주심을 겸손히 바라는 일’을 내세웠다(23-24절 참조). 

 

1)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의 오묘(奧妙)한 일을 깨닫으라고 권한다(14절). 그 오묘한 부분을 엘리후는 하늘과 기상과 자연에서 황홀하게 펼쳐지는 풍광들, 번개와 구름과 바람, 그리고 풍성한 생태계를 앞세워 당신의 권능과 아름다움을 펼치시는 여호와를 생각하게 한다(15-18절).

 

2) ‘그런 놀랍고 경이로우신 능력의 하나님께 누가 할 말이 있겠느냐’고 되물으면서, 그런 천지를 주관하시는 조물주의 행위에 대하여 어떤 인간도 왈가왈부(曰可曰否)할 수 없음을 역설하고 나온 것이다(19-20절). 그러면서 폭풍 후의 맑은 하늘과 황금 빛 같은 햇살로 고통의 시절을 잊게 하실 크고 두려운 능력을 보여주실 여호와를 기대하도록 권고해주었다(21-22절). 

 

3) 그의 결론이다.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의 정의와 공의의 손길은 인간 스스로 찾을 수 없으니,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경외하며 기다리라고 권하였다(23-24절).  

 

복음서를 보자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상상력이나 이성과 상식의 영역으로서는 도저히 계산이 되지 아니하는-, 그러기에 오직 천지와 만물과 육지와 바다를 만드신 하나님만이 가능하실 장면을 만난다. 바로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시는 모습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그 바다가 본래부터 당신의 것임을 주장하실 분만이 선보일 영역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물위를 걷는 예수의 모습을 매우 비중 있게 전한다(마태-마가-요한복음). 그러면서 우리는 이 마태의 증언에서 뜻밖의 첨부된 사연 하나를 만나게 된다. 곧 베드로의 실패담이 추가된 것이다. 이 부분은 순간에 찾아온 위기를 대응하는 데에, 우리 안에 있는 장애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게 하는 뜻 깊은 내용이었다. 좀 더 확인해 본다. 

 

1) 주님에게는 바쁜 일정을 마치시고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고, 머물고 쉬셨다(23절). 그 시간 제자들을 태운 배는 바다위에서 풍랑을 만나서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였다. 밤 사경쯤인데,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경악한 제자들은 ‘유령이다’고 외쳤다(26절). 주께서 말씀하셨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절)

 

2) 베드로가 주님께 말했다-‘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절). ‘오라’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기 시작했다(29절). 잠시 후, ‘주여 나를 구원 하소서’라며 베드로가 외쳤다. 물속에 그만 빠지게 된 까닭이다(30). 주님이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셨다-‘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疑心)하였느냐’(31절). 둘이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도 그쳤다. 모두가 예수께 엎드려 절했다 -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2-33절). 

 

☞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들이 있다. 

① 주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항상 함께 하신다. 위험한 때에는 즉시 손을 내미신다. 명심하자! 

② 누가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는가? 믿고 구하는 기도와 그의 손길을 의심 없이 붙드는 사람이다. 그렇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발생한 시련이 문제가 아니라. 주께 구하지 않고 또 그가 내미는 손길을 의심하여 붙잡지 않는 일이다. 의심은 임무수행의 최대의 적이다. 주의 도움은 나보다 강한 자로부터 나를 지키시려는 데에서 나온다(시18:17,62:2-3,144:7참조). 

 

서신서를 보자

바울은 하나님의 인간 선택에서의 차별하시는 일을 두고, 하나님의 불의나 허물이라고 비판하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14절,19절). 피조물의 조물주 비판은 그 자체가 불의요 중대한 범죄이다. 하나님은 조물주로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불가침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그 점을 근거삼아 하나님은 귀한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구별하신다. 당신의 진노나 긍휼을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하여 인간들을 진로용으로도 사용하기도 하고 긍휼용으로도 사용하신다(21-23절). 

 

하나님은 인간들이 차별하고 따돌린 영역에서, 당신의 백성을 불러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들로도 불러내신다. 이것은 다 자유롭고 공정과 정의를 기반으로 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선하신 주권을 행사하신 까닭이다(24-26절). 그런 의로우신 하나님에게 인간의 얄팍한 판단으로, 비판하며 대들려고 하는가? 절대 불가하다. 순복과 아멘이 답이며, 전능자의 선하신 뜻이 우리 중에 이루어지도록 기도로 응답해야 된다. 

 

결론이다 

시절이 매우 수상한 때이다. 이런저런 원인분석을 많이 한다. 그러면서 뜻밖에 편 가르며 상대를 정죄하기도 한다.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특히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태도는 세상과는 아주 달라야 한다. 욥의 경우를 배우고, 실패한 제자 베드로의 경험도 주목하자. 내가 판단하기 어렵고 난감한 때일수록, 우리는 역사의 주이시고 만물의 주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과 이끄심을 겸손히 기다리고 찾으며 그의 의와 공의가 실현되도록 기도하자. 그렇다. 생명의 주님은 그를 온전히 바라는 자들과 함께 계셔서, 어떤 위기들도 기회가 되게해 주신다. 아,은혜롭고 픙성하신 우리 하나님을 생각하니, 추석이 더욱 풍요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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