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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남신도회주일

관리자 2020-09-15 (화) 21:24 3년전 711  

본문) 창 2:18-25, 막 10:1-16, 엡 5:21-6:4 

 

창조절 셋째 주일이다. 완연한 가을 분위기가 접어든 느낌이다. 코로나19와의 씨름도 제법 익숙해 진듯하다. 절실한 대응으로 이 위기를 함께 이겨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지난주일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맺어 준 소중한 관계로서, 남여의 관계-친구관계-자녀맺기 등을 말씀으로 들으면서, 우리 인간관계에서의 가장 기초적인 관계 맺기의 현황도 일별(一瞥)하였다. 축복이나 저주는 어떻게 오는가? 관계 맺기에서 온다.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은 창조절 셋째 주일이다. 오늘도 지난 주일이 이어서 관계(關係)맺기들 이야기가 이어진다. 지난 주일의 관계는 총론적이요 개괄적이라면, 오늘의 말씀이 제시하는 관계는 각론적이며 구체적이다. 그리고 단순한 가정과 가족 이야기가 아니다. 창조질서에 적합한 가정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침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세 번째 신도주일인 남신도회 주일이다. 우리 교우들 중에서 남신도들 만큼 사회와 관계 맺기가 활발한 사람들이 또 어디에 있는가! 

 

집에서는 남편으로서, 자식들의 아빠로서, 부모를 둔 자식으로서 역할 또한 무겁다. 게다가 이들은 직장에서는 동료와의 관계와 각종 이해관계에 얽혀서 매우 복잡하다. 교회생활은 어떤가? 교회 내의 여러 직분들도 적잖게 걸머지고 산다. 실로 감당할 책임들이 정말 버겁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 맺기는 건강하고 좋아야 한다. 어디 하나라도, 삐틀어지거나 꼬이기 시작하면, 삶이 무척 고단해진다. 위험해질 수 있다. 정말 위하여 기도해 줄 대상이다. 

 

그러면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어떤 관계에 대하여 말하는가? 먼저는 첫 사람들의 부부 맺기와 관계설정에 대하여 말씀한다(21-24절). 그러면서 복음서에서는 부부의 이혼(離婚) 문제가 곁들인 부부 관계의 성서적 이해를 말씀한다(막10:1-9절). 동시에 본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이와 재혼(再婚)하는 일에 대한 부분도 말씀한다(10-12절). 아이들과의 관계도 중요했다. 아이를 어떤 눈으로 보아야하며 상대할 것인지를 주님이 제시하신 것이다(13-16절). 아동들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 차원은 확실히 혁명적(革命的) 수준이다. 

 

에베소서에서는 또 다시 부부 관계를 말한다(5:21-33절). 특히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받고 사는 교회의 크리스쳔에게서의 부부란 인식은 세상 차원의 부부 인식과는 차별화되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가족관계 특히 부모와 자식관계까지 나아가서, 서로에게 유의할 사항들을 제시하여 주었다(엡 6:1-4). 결국, 가장 관계의 핵심은 부부관계에 있음이 드러났다. 

 

세 본문 공히 ‘부부는 둘이 한 몸’임을 강조되고 있다(창2:24,막10:8상,엡5:31). 그게 진리임을 말한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어서 하나 됨을 이룬 곳이 가정이며 부부이다. 그런 점에서 남편은 주도권을, 아내는 협력권을 함께 행사하여 공동의 성취와 유익을 이루어야 되는 사람들이 바로 부부다. 서로 경쟁하거나 견제하거나 비난하는 모습은 참 부부의 모습이 아니다. 부부 모두의 장점을 함께 모아, 가정과 가족의 역량을 극대화하며 살아가야할 곳이 가정이다. 그래서 받은 복이 자기 가정의 담을 넘어 이웃에게까지 가게도 해야 한다.

 

남자들의 선 자리가 매우 중요하다. 남신도들의 맡은 자리가 크다. 여러분들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부부의 관계가 튼튼하게 유지되도록 깨어 사셔야 한다. 아내한테 신뢰와 사랑을 받지 못하는 남편들을 상상해 보라. 집에서부터 행복하지 못한 마음으로 세상일에 뛰어들었으니-, 어찌 세상 일이 활발할 수 있겠는가? 외롭고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남편을 출근시키는 믿음의 아내들은 남편 살리기에 남다른 기도와 지혜가 발휘되도록 기도하기 바란다. 

 

물론 성경이 기록된 시대의 가족환경과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의 가족환경은 크게 변하였다. 하지만 형태는 변해도, 가족과 부부 사이에 흐르는 기본 관계나 질서는 여전하다. 그 이유는 이런 가족관계 모두가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만드신 창조질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질서는 꼭 존중되어야 한다. 행복과 구원이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창조주가 우리 가정과 부부, 가족관계에 부여하신 깊고도 신비한 내용들을 잘 배우고 익히며 살아야 된다. 그게 지혜요 자산이다. 무식하여 모든 관계를 잃게 되면, 평생 열심히 벌어두고 쌓아둔 것들 모두 한순간에 날릴 것이다. 행복과 재물을 멀리서 찾으려 말라. 부부와 가족에게서 먼저 찾으라. 기초가 든든한 사람이 장거리 선수요, 인생 승리자이다. 주의 말씀과 교회가 이를 돕는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이런 제반 관계를 더욱 익혀보자

 

창세기를 보자

본문은 첫 인류인 남여의 결혼(結婚)의 기원을 다룬다. 시작은 사람에 대한 조물주의 사랑과 배려에 나왔다. 사람(아담)의 홀로 사는 것을 좋게 보지 않게 보신 것이다(18절). 그래서 그의 짝을 만드셨다. 서로의 빈 공간을 채워주고, 하나 되어 창조주의 새 역사를 이루어잘 존재를 디자인하고 제조하신 것이다. 이게 바로 ‘내 짝은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고백할 이유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지난 주일에 확인한 바 있다. 남녀는 서로 만나서 결합하고 협력하는 삶이 될 때, 창조주의 온전함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즉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조물주는 1/2밖에 되지 못하게 하셨고, 그 나머지 1/2은 서로 만나야 비로소 하나가 되도록 창조하셨다. 그러기에 남녀는 서로의 돕는 배필(配匹)을 만나기까지는 항상 불완전하다. 사실 인생은 짝을 만나면서 부터이다! 결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여호와께 은총을 받은 자가 결혼도 한다(잠18:22절). 

 

1) 돕는 ‘배필’이란 용어를 썼다(18,20절). 영어표기는 ‘helper’이다(NIV). 이는 성령을 소개하는 내용 중에 하나로 사용될 정도의 비중 있는 표현이다. 에베레스트 등반 시에 자기 생명을 지키고 안내하는 현지 안내인에게 부여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부부는 서로 상대를 ‘내가 도와야 할 사람’으로 인식해야한다. ‘나를 살릴 사람’이란 마음으로 서로를 받으면, 그 부부는 절대 성공한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를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이용(利用)할 사람으로 접근하면, 큰 불행을 만나고 파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신성한 결혼에 대한 모독이다!

 

2) 배필을 만들 때의 신비한 장면도 나왔다(21-22절). 남자를 잠들게 하신 후(마취의 기원),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것에 살로 채워서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이 점은 남여가 빼와 살의 만난 존재란 말이다. 서로의 보완으로 정상적 인간이 되게 하셨음을 말한다. 그러면서, 본질적으로 남여는 닮음과 감쌈과 균등성을 가진 존재임을 말한다. 

 

3) 인간은 낯선 것에 힘들어 한다. 하지만 닮은 것에는 마음을 연다. 자기와 다르지만 닮은 신비한 이성으로서의 여자가 자기 앞에 등장하자, 남자는 즉각 환호로 반응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23절). 그래서 남녀의 동거(同居)가 이루어졌고, 결혼생활에 들어갔다. 그 둘의 혼인 주례자인 창조주의 선언이 있었다-‘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창2:24,막10:8-9,엡5:31). 오늘 말씀의 핵이다!

 

4) 부부가 된 그들의 결혼 생활은 서로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공유한 자연스러움이었다(25절). 

5)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돌봄과 배려도 튼튼했다.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고 관리할 권세도 주시면서, 그들의 삶에 외로움이나 핍절함이 없도록 넉넉히 채워주셨다(19-20절,잠31:11참조). 

 

복음서를 보자

사람이 자기 배우자를 버리는 문제(이혼문제)를 두고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 온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렸다. 그들의 질문은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느냐’면서 타당성 문제를 제기하였다(1-2절). 당신을 시험하는 것을 아신 주님은 모세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되 물으셨다. 그들은 모세의 신24:1,3의 근거를 들어, 증서를 써주고 버리기를 허락했다고 답하였다. 

 

곧 그들의 모세 인용에는, 남편이 아내를 임의(任意)로 좌우하였던 당시의 사회적인 경향을 이용하여, 자기들도 아내 교체의 정당성이나 가능성을 확인받으려고 한 듯하다. 당시에는 그런 가부장적 부부관계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건강한 부부관계를 파괴하는 창조질서의 심각한 훼손을 불러올 완악함이 각 가정과 종교에까지 자리하고 있었다(5절). 그런 간계를 간파하신 주님은 창세기에 나타난 제대로 된 부부관계를 말씀하면서, 그들을 일깨우셨다(6-9절). 

 

1) 우선 창세기에서 불러들여 인용하신 말씀이다. 

-‘창조 때에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고, 결혼하면 그들은 부모 곁을 떠나서 한 몸이 된다. 둘이 한 몸을 이룬 것이다(창2:24). 그런 짝 지음은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기에, 사람이 감히 나누지 못 한다’. 하나님의 뜻은 원칙적으로 부부의 이혼이 불가함을 천명하신 것이다. 

 

‘짝지어 주신’이란 ‘쉬네쥬크센’(헬)이란 말로서, ‘멍에를 같이 하다’는 뜻이다. 곧 부부는 하나님이 묶어주신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부여된 과제를 감당하기 위하여 일하는 공동(共同)사역자라는 말이다. 서로에게 속하는 공속(共屬)적 관계에 들어간 것이기에, 일단 부부되면 인간이 임의로 나누지 못한다고 선언하셨다. 이 선포는 부부관계 유지의 핵심이 될 하늘의 법이었다!

 

2) 그런데도, 현장의 가정들은 이 규정을 위반한 이탈(離脫)로 신음하고 있다(10-12절).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이성에게 재혼하는 남녀들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주님은 책임(責任)을 져야한다는 말씀으로 대신하셨다. 즉 하나님이 허락하신 법적 배우자가 아닌 남녀의 행음(行淫)에 의한 탈선적 행위이기에, 간음(姦淫)죄로 묻겠다고 예고하셨다.  

 

3) 아이들의 소중성과 존귀함이 이 남녀의 복잡해진 흐름 속에서 예수에 의하여 제기되었다(13-16절). 그것도 아이들이 당신에게 나아오려는 것을 제자들이 꾸짖는 모습을 보시면서, 주님이 크게 노(怒)하고 책망하시면서 나타난 일이다. 왜 주님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민감하셨을까? 

 

그런 제자들 행위가 마치 빛으로 나아오려는 사람들을 막아서는 행위와 같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빛이시다. 당시의 유대교나 사회나 어른 세상은 어둠이었다. 심지어 가정에서까지도 말이다. 그러기에 희망을 만들거나 찾는 일은 그만큼 소중했다. 그 시대에 희망이 될 대상이 있다면, 누구였을까? 그렇다. 바로 어린아이들(파이디온/6-14세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심성과 영성이 순수하고 보다 열린 심적 구조를 가진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큰 축복이며 바르게 성장할 절호의 기회였다. 제자들은 그 점을 못 보았고, 그저 이등 시민의 철부지들로만 본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기뻤다. 그래서 둘의 만남과 접촉을 막는 제자들을 그토록 책망하신 것이었다. 마치 마귀의 훼방을 물리치듯, 제자들의 행태를 물리치고, 아이들을 영접하며 안수와 축복을 베푸셨다. 예수 축복을 받은 아이들을 통한 복음의 밝은 빛이 역사 지평을 밝히고 있는 순간이었다.

 

서신서를 보자

여기에서도 부부관계와 가족관계에 집중한다. 특히 교회에 속한 크리스쳔 부부와 가족들이 가 가져야할 그리스도교적인 가치들을 기반으로한 부부와 가족관계가 정착되기를 요구한다. 

 

1) 크리스쳔 부부의 상호관계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던 차원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인 사랑과 복종의 관계를 부부 관계에 그대로 적용시켰다. 참된 부부는 말씀으로 변화된 윤리적인 생활에서도 성숙하게 대처해야함을 강조한 것이다. 

 

2) 아내는 교회가 머리인 주님께 복종하듯, 자신의 머리로 세우신 남편에게 복종하고 존경도 해야 한다(22-24,33절). 이는 주님은 교회의 머리요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는 성서의 근거에 근거한다(22-24, 창3:16, 딤전2:11-12등 참조). 

남편은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듯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25-28절). 이런 점은 매우 특별하다. 주님의 사랑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아가페’ 사랑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쳔 남편의 아내 사랑은 수준을 주님의 교회 사랑수준으로까지 목표하라는 것이다. 얼마나 혁명적인 발상인가! 

 

3) 이렇게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일, 곧 성서적 부부관계를 이룰 때, 큰 비밀(祕密)이 있음을 예고한다(32절).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차원에서 발생하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포함하는 표적들을, 가정과 가족(부부) 사이에서도 맛볼 수 있음을 암시한다. 

 

4) 자녀들은 어떠한가?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는 십계명 중 인간에게 부여된 첫 계명으로서, 땅에서의 형통과 장수의 복이 약속된 것이다(6:1-3). 부모들에게도 요구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여야 된다(4절). 

 

결론이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기초단위는 가정이요 가족이다. 가정이나 가족이 무너진 곳에서의 세상의 번영이나 안녕은 신기루일 뿐이다. 그런데 마귀는 가정과 가족의 파괴와 붕괴를 집중적으로 노린다. 요즈음 얼마나 가족 윤리와 가정 파괴의 소식이 많은가! 특히 부부가 이혼하고 또 재혼하는 과정에서 버림당한 아이들의 탄식과 신음이 하늘을 찌른다. 상처 받은 부모들로 인하여 죽임당한 아이들이 너무 많다. 지옥이다! 어디 그뿐인가?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사람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우리의 미래에 마치 시한폭탄처럼, 짙은 검은 구름들이 끼어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창조질서에 눈이 뜬 믿음의 가족들의 역할이 그래도 희망이다. 창조질서를 제대로 훈련받은 예수의 가족의 역할이 그래도 희망이다. 부부를 살리고 자녀를 잘 양육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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