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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08-25 (화) 11:57 3년전 793  

분문) 행 6:8~10, 마 10:16-23, 단 6:1-23 

 

오늘은 8월의 마지막 주일이자, 가을인 9월을 대비하는 주일이다. 교회력으로는 성령강림절기의 마지막 주일이자, 교회력의 새해가 되는 창조절기(創造節期)를 맞이할 직전 주일이기도 하다. 날씨는 아직도 늦여름의 기세가 강하여 낮에는 매우 뜨겁고, 밤이 되어야 다소 시원해지는 때이기도 하다. 그 어느 해보다 폭우 피해가 커서, 농작물의 풍작도 기대하기가 쉽지는 않으나, 그래도 대낮의 뜨거움은 농작물의 소출을 위해서는 매우 고마운 자원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이런 자연의 계절의 흐름과는 다르게,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체감하는 ‘영적 계절’(spiritual season)의 흐름이 너무도 급격하게 수상(愁傷)해졌다는 점이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너무도 차가워졌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교회를 범죄와 증오의 대상으로 볼 정도이다. 우리는 지난 주일의 증언에서도, 지난 8.15광복절의 광화문 태극기부대 시위사건과 그 주도세력인 전광훈의 사랑제일교회 행태와 그로 인한 부정적 영향력의 전국적 파급으로 ‘한국교회의 입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현저히 좁아지게 되리라’고 언급한 바 있기도 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국교회 내부의 분열상(分列像)이다. 교회의 책임과 지도력의 오류에 대한 책임 때문에 ‘우리가 잘못했다’, ‘죄송하다’고 고개 숙이고 사과하며 자중하는 교회들도 많지만, 반면에 특정교회와 목사에게 공격하는 정부와 그 정책에 책임이 있다며, 역공을 펴면서 정부의 비대면 예배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교회들도 제법 있기 때문이다. 그 뒤 배경에는 대형교회들이 있다는 점도 큰 문제이다. 자신들이 정치 이익집단임을 드러낸 것으로서, 부끄럽다-!

 

책임을 통감하는 교회들은 거의가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면서 정부 정책에 협조한다. 하지만 반발하는 교회들은 벌금을 물더라도 자기들은 대면 집회를 계속하겠다고 고집한다. 그들의 논리에는 정부에 대한 불신과 교회가 차별 받고 탄압 받는다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바람에,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이웃 사랑 측면보다는, 모이는 예배 자체를 고수하는 일이 자기 신앙수호의 전체인양-, 고집한다. 문제는 바로 그런 완고한 모습들이 바로 세상으로부터 더욱 교회에 대하여 절망하게 하는 일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물 속의 교회’로 만들고 있다.

 

이런 저런 복잡한 상황과 입장에 얽혀서, 지금의 우리 교회 공동체는 교단간, 교회간, 신도간, 친구간에도 만나기와 교제하기가 이전보다 매우 힘들어졌다. 거리는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워져야할 시간이 바로 이 코로나 시대인데-, 이제는 마음까지도 더 멀어지는 판이 되어가고 있어서, 난감한 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역설적으로 가짜와 진짜, 위선과 진리, 가라지와 알곡을 감별(鑑別)할 수 있는 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시선 두기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 내부의 관심사는 우리에게 닥친 영적 시련의 계절인 ‘겨울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초점이 모아질 수밖에 없다. 이 일은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뉴모럴(new moral) 수립 못잖게, 우리 교회들에게는 화급한 과제가 되었다. 세상의 희망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의 미움과 질타의 대상이 된 교회-, 전도와 선교가 막히고 오히려 외면과 박해의 대상이 된 우리 교회의 일그러진 상황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매우 큰 기도 제목이 되었다.

 

이런 우리네 어두워진 현실적 상황을 직시한 듯,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모두가 고난과 시련에 대처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생생하게 전하여 주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의 어려운 시기를 우리가 어떤 대응으로 뚫고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복음서는 예수로부터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세상을 상대하면서, 어떤 마음과 행동으로 대응할 것인지를 규범적으로 제시하는 일종의 선교자를 위한 행동 매뉴얼(manual)이다. 여기에서는 지혜와 순결이라는 쌍두마차를 굴리는 대응을 말한다. 도중의 포기는 절대 안 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여 염려말고 믿고 대응하라고 주문한다(19-20절). 

 

서신서는 예루살렘에 교회 운동이 본격화 되면서, 첫 번째 불어 닥친 박해의 계절에 교회의 첫 평신도이자 교포 출신인 집사(執事) 스데반이 그 고난에 대처한 모습을 소상히 전해 준다. 그는 복음서에 제시된 선교인의 대처 매뉴얼에 따라, 능력 있게 잘 대응하여 준 사람이었다. 곧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였고,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서, 선교의 금자탑을 쌓았다. 

 

구약 다니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극렬한 시기와 질투를 받아 믿음의 변절을 요구 받는 시점에 다다른 다니엘이, 결국 어떻게 끝까지 살아남아서 자신은 물론 그들의 부끄러운 민족의 역사까지도 살려내는 일에도 기여하게 되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곧 다니엘은 목숨 걸고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자. 사자들 속에서 살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義)를 드러낸다!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예수께서 복음 전선에서 일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달하신 말씀이다. 그들이 현장에서 어떤 시련의 장벽을 만날 것인지를 예고해주며, 그 때에 대응할 마음과 자세들도 담아주시고, 절박한 위기에서의 행동도 지침(指針)으로 내려 준, 복음 선교자들을 위한 매뉴얼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매뉴얼을 숙지(熟知)하여, 막상 위기에 봉착했을 때 우왕좌왕하지 말고 보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도록 훈련해야만 한다. 그럴 때,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개입과 지도를 받게 되고, 그로 인하여 훨씬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주님의 이 매뉴얼을 깊이 가슴에 담아 두자. 그래서 이 시련(試鍊)의 계절에도 더욱 풍성하게 거두게 하시는 성령의 동역자들로 살아가자. 

 

1) 주님은 당신의 종들을 상대할 세상을 어떤 곳으로 보셨는가? 양과 이리의 관계처럼 보셨다(16절). 상극(相剋)이랄 수 있는 상호관계로 보셨다. 약자와 강자, 어린아이와 어른, 먹이깜과 포식자 사이로 보셨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훤히 헤아리시는 주님이 왜 양 같은 제자들을 늑대 같은 세상을 향해 보내셨나? 너무 무모하신 것 아닌가! 무슨 묘책이 있어서 그러셨나? 

 

잠시 역(逆)으로 생각해보자. 만일 양이 아니라 이리와 맞먹을 힘을 가진 또 다른 이리나 더 큰 힘을 가진 동물들을 그들에게 보내셨다면 어찌 되었을까? 선교가 가능할까, 구원의 역사가 가능할까?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온통 싸움질만 계속되고, 함께 구원을 이룬다는 생각은 100% 불가능할 것이다. 바로 주님의 선교파송 전략의 절묘(絶妙)함이 거기에 있었다! 

 

약자로 강자를 변화시키는 방법이 주님의 방법이었다! 강자의 변화와 구원은 곧 전체와 집단을 건져내는 지름길이기에 더욱 그러하셨다. 그것도 가슴과 평화로 말이다! 낮아져야 높아지는 방법으로, 죽어야 사는 방법으로, 섬겨야 왕이 되는 방법으로, 주어야 얻게 되는 방법으로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게 하셨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헌신의 방법이며, 소금으로 들어가고, 빛으로 나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의 외침은 이러했다.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갈6:14).

 

2) 그러면 이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양에게 필요한 마음과 자세는 무엇일까? 전략과 대책이 무엇인가? 바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들기같이 순결한 자세’이다(16절.하). 지혜(知慧)와 순결(純潔)이란 쌍두마차에 올라야만 선교가 가능함을 지침으로 주셨다. 매우 어려운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만큼 특별한 융합(融合)적 이중성이 필요한 일이 전도요 선교임을 일깨우신 것이다. 

 

☞ 본래 ‘뱀같이 지혜롭다’라는 말은 고대 중동에서 ‘신중하고 분별력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영리한 처신이 절대 필요하고, 순결(아케라이모이-악인의 죄악에 물들지 않는 것)까지 보전해야만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선교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간교한 속임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도 담겨 있다. 그렇다. 복음과 선교는 꼭 지혜와 순결의 산물이어야 한다.

 

3) 두 번째 필요한 마음과 자세는 당국에 체포되고 끌려가는 상황에서도, 그들 상대로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이다(13-14절). 이유는 주의 성령께서 그들 속에 계셔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선교인들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말하시고 견디게 하시는 성령을 절대 믿고 의지해야만 한다. 그들의 확실한 믿음만큼, 그들 속에 계신 성령이 자유하게 말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복종시키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4) 경계하고 조심할 사람들도 네 종류로 열거(列擧)해 주셨다(17-19, 21-22절). 첫째 그룹은 기존 종교인들이다. 그들은 복음 선교자들을 공회에 넘겨주고 자신의 회당에서 채찍질할 자들이다. 둘째 그룹은 총독과 임금들 같은 권력자들이다. 그들을 체포하여 사람들 앞에서 심문할 자들이다. 셋째 그룹은 형제와 부모와 같은 친 가족들이다. 가족의 고발로 순교에 이르는 일도 발생한다. 넷째 그룹은 예수 믿는 자를 미워하는 세상 사람들이다. 전도자의 선 자리가 그 어떤 인간에게도 머리를 둘 수 없는 사면초가(四面楚歌)임을 명심하게 하신 것이다. 

 

5) 선교자 자신의 구원(救援)도 언급하셨다. 위의 모든 인간들의 미움과 공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휘포메이나드-중간에 포기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 자에게 주어지리라’하셨다(22절). 

 

6) 박해지를 피신할 것도 권하셨다(23절). 선교사들을 박해한 곳들과 박해자들에 대한 심판은 오시는 주님을 통하여 냉혹히 가해지리라고 예고하셨다. 본문은 그 때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A.D66-70년의 참혹했던 유다 전쟁에서 일차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본듯하다. 

 

서신서를 보자

이 선교 매뉴얼에 따라, 기독교 선교 역사에 아름다운 금자탑을 쌓아올린 선교사요 첫 순교자가 나왔다. 바로 유대인 디아수포라(교포)로서 초대교회의 집사들 중의 하나였던 스데반이었다. 그는 또 다른 집사인 빌립과 함께, 복음 증거 사역에도 놀라운 업적을 이룬 인물이었다. 

 

1) 그는 아마도 B.C 63년도에 폼페이우스가 전쟁 포로로 로마에 끌고 갔던 유대인 후손의 일원으로서, 후에 자유의 몸이 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와 정착해 살다가 사도들의 복음 증거를 듣고 그리스도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으로 보인다. 특히 원시교회에서 헬라파 지도자였고(행6:5), 그리스어를 탁월하게 구사하면서 대화와 토론까지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2) 그렇게 자유민으로 예루살렘에 들어 온 무리들은 북아프리카의 구레데, 알렉산드리아, 터어키의 길리기아(바울의 고향인 다소가 포함됨)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처음에 이들은 해외 교포라는 상호 동질감 속에서 자기들 고유의 회당 공동체를 운영하다가,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의 집중적인 접촉을 통하여, 대거 그리스도인이 된 무리들이었다(9절). 

 

3) 그들 중에 특히 이 스테반 집사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일반인에게 행하기도 하였고(8절),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게도 되면서 주변에 그 누구도 그를 당할 자가 없을 탁월한 복음의 일꾼이었다(10절). 그의 설교 역시 탁월했다(6:8-7:60참조). 하지만 그에게 닥친 시련은 너무도 가혹했다. 교회에 대한 공권력과 유대교의 박해가 극심하면서, 그는 결국 집단 투석(投石)으로 죽게 된 순교(殉敎)의 제물이 되었다(7:54-60절 참조). 

 

4) 그의 죽음의 열매는 컸다. 주의 복음이 해외로 급속히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8:1참조). 동시에 그는 악화된 영적 겨울을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맞이하고 견디어낼 것인지도 잘 시범(示範)해 주었다. 어려울수록 성령과 동행(同行)하는 자가 되도록 우리를 일깨워 준 것이다.  

 

구약을 보자

본문의 주인공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의 일원으로 끌려가, 그곳의 왕 다리오의 총애를 받아 그곳의 대표 총리가 되는 영광을 안기도 하였으나-, 그곳 본토인들의 극렬한 시기를 받으면서 사자 굴속에 던져지는 최악의 시련도 겪게 된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신앙으로 승리를 취한다. 

1) 다리오는, 요즈음의 북한 김정은 체제와 유사하게, 전국에 고관 120명과 총리 3명을 둔 체제를 유지하였는데, 그 중에 마음이 민첩(敏捷)한 유대인 다니엘이 왕의 총애를 받아 전국을 다스리게 된다(1-3절). 이를 시기한 총리들과 고관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공적 업무에서 흠을 찾지 못한 그들은(4절), 그가 유일신 신앙으로 사는 점을 이용하여, 그를 저주 앉힐 교책(狡策)을 제시한다. 즉 30일 내에, 왕 이외에 어떤 신이나 그 누구에게도 무엇을 구하면, 그를 사자 굴에 던져 넣는 한시적 특별법을 만들어, 왕의 제가를 얻어 공포한 것이다(5-9절). 

 

2) 결국 ‘하나님의 법이냐, 인간의 법이냐’라는 선택의 기로에 선, 다니엘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퇴근 후에, 그는 윗방에 올라가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그곳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祈禱)하며 감사(感謝)를 드린 것이다(10절). 이 일로 그는 현행법으로 체포되었고 즉시 사자 굴에 던져졌다(16절). 그 결과는 어떠하였던가?

 

3) 살아 있었다! 온전한 몸으로 살아나왔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그를 지켜주셨기 때문이다. 결국 의인이 구원 받고 죄인들이 망하게 됨을 입증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이 일은 먼저 하나님의 의를 믿었던 다니엘의 신앙의 열매였고(23절), 그를 아끼며 그의 구원을 여호와께 호소했던 다리오 왕의 밤샘 금식과 기도와 소망에 대한 응답이었다(14,16-20절 참조).

 

결론이다

우리의 위기는 무엇일까? 피난처는 어디일까? 결코 외부의 핍박과 싸늘한 시선에 있지 않다. 그런 모든 공격과 시련에도 흔들림 없이 견디어내고 극복할 투철한 신앙이 우리들에게 없음이 위기일 뿐이다. 기억하자. 성령은 우리가 더욱 고난과 힘겨운 시절을 통과할 때에 더욱 동행하시고 함께 하신다. 저 제자들-스데반-다니엘의 신앙을 배우자. 그 분과의 신뢰와 동행이 이어지고, 그 분이 일하시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는 모습이 우리가 이런 영적 혹한기에 확보해야할 확실한 에너지요 지혜이다. 아-, 다시 불어 올 창조주의 회복의 영을 간절히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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