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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9)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07-29 (수) 08:15 3년전 810  

본문) 롬 1:8~17, 사 1:1-8, 마 8:1-13

 

오늘은 강림 후 아홉 번째 주일이다. 때도 8월에 접어들었고 주중(7일)에는 입추(立秋)까지 들어 있어서, 더위도 막바지에 접어든 느낌이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코로나19의 팬데믹 공포가 현존하고 있어서, 아무래도 다가올 가을은 기대보다는 우려 속에서 맞이할 것 같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대체 언제까지 이 상황이 계속될까? 아니, 우리는 과연 코로나가 경고로 던져 준 메시지를 어느 정도로 소화시키며 살아오고 있는가?    

 

깨달음이 없고 삶의 갱신이나 변화가 없이 이 위기를 대충 넘긴다면-, 대체 코로나 이후에는 남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게 될까-? 본래 희망(希望)은 주어지기도 하지만, 내가 찾아야할 것이기도 하다.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저 저승사자처럼(?) 찾아온 코로나’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살리는 도구가 되게 해야 하겠다.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부분 큰 재앙이나 시련기를 통과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인물들이 많았잖은가!

 

그 중 이스라엘 족장 야곱의 아들 요셉은, 당시 7년간의 세계적인 대흉년인 판데믹이 배출한 전형적 인물이었다. 요셉은 판데믹을 만나면서 그가 품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발휘하여, 일개 나약한 광야의 목동(牧童)에서 대제국 이집트의 총리(總理)가 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그래서 당시 대흉년의 굶주림에 처한 숱한 백성들을 구원해 내고, 나라 경제도 살리며, 자기 가족들도 구하고, 나중에는 이스라엘 족속을 창출해내는 하나님의 대역사를 이루기도 했다. 

 

이런 흐름을 보면, 이 인류 역사는 세상의 원주인 되신 창조주의 손길 안에서, 어둠과 파괴를 주관하는 사탄의 세력과 그런 억압과 탄압으로부터 신음하는 무리들을 구하는 빛과 생명의 세력이 병존과 갈등의 구도 속에서 두 줄기로 흘러왔다(신30:19참조).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있다. 그 주도는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다. 하나님에 의한 강제적 사전 배치(配置)란 결코 없다! 즉 운명론적 선택론(예정론)은 없고, 오직 은총의 선택론만 존재할 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세상을 시험하고 연단하며, 경고하고 심판하시려고 종종 그런 어둠의 세력들의 활동들을 허용하는 때들도 많다. 이번의 판데믹과 시련들에도 그런 하나님의 마음과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인간을 미워하여 죽이시려고 그런 어둠의 세력을 흉기로 사용하시는 일은 전혀 없다. ‘하나님은 사랑’(요3:16,요일4:16)이시잖은가-!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전한 요나서의 교훈은 이미 그 점을 입증해 주었다. 

 

그러면, 복음(福音)과 선교(宣敎)가 설 자리가 어디인가? 바로 인간이 저주와 멸망의 자리에서 생명과 구원의 자리로 옮겨오도록 돕기 위한 경계선상이다. 당연히 전파자의 치밀한 대비가 요청된다. 그런 점에서 복음의 전파자인 사도 바울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외친 내용은 모든 복음 전파자들이 가슴속에 담아 두어야할 위대한 명제(命題)이다. 

 

그것은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으로 받으면서(합2:4), 바울 사도가 ‘믿음에 의한 구원론’의 주제로 설정했고, 후에 교회시대에는 종교개혁자 루터를 비롯한 모든 개혁자들의 교회개혁운동의 구원론 핵심주제로 삼으면서, 오늘의 세계 개혁교도들의 신앙고백이 응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말씀을 가슴에 담아두어 암송(暗誦)하며 지내도록 하자.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복음을 다시 본다

1) 전적으로 열린 복음이다. 이 복된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차별(差別)없이 접근하여 복음이 주는 혜택(惠澤)들을 누리도록 개방(開放)되어 있다(14,16절). 

 

2) 복음은 구원(救援)의 능력이 있다(16절). 하나님은 복음 안에서 친히 도움을 주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그의 의(義)로 인간을 만나시기 때문이다. 곧 복음을 믿고 당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과 은혜와 사랑을 맛보고 공유하게 하신다.  

 

3) 복음은 하나님의 의만을 나타낸다(17절.상). 여기에서 하나님의 의란 인간에게는 구원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오로지 하나님의 것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심을 다하여 잘못했고 용서해달라고 구하며 돌아온 자에게는 이전의 죄를 묻거나 체벌하거나 정죄하는 등의 보복을 일삼지 않으신다. 곧 돌아온 탕자를 받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눅15:22-24). 

 

4)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오직 당신 자신의 긍정(Ja)만을 드러내신다. 부정(Nein)도 드러내실 때도 있으나, 그것은 심판자의 냉혹한 속성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 사전 약속에 대한 신실성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롬3:22-26,사42:10,46:13참조). 이런 하나님의 긍정은 오로지 믿음을 통하여 포착될 수 있는 것이며, 믿음 안에서 삶의 현실로 나타난다. 이 하나님의 긍정을 접하면서 인간은 변화되고, 모든 불의한 상황들을 극복하며 넘어서게 된다. 의인(義人)은 누군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긍정에서 얻어진 의를 힘입고 사는 사람들이다(17절,후). 

 

그러면 이런 놀라운 복음이 어떻게 현장에 전달되어서, 의인들을 생성(生成)할까? 성령 하나님과 그가 택한 종들(둘로스/dulros.헬)에 의해서이다. 예컨대 오늘 서신서의 바울과 같은 주의 종들이 전달한 복음에 의하여, 이 지구촌 곳곳에서 의인들이 생성된다. 둘로스는 오직 주인의 뜻만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친 이들이기에, 그게 가능하다. 둘로스는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다. 자신의 미래를 오직 주인에게 의탁하고 사는 종이다. 주인이 살면 자신도 살고, 죽으면 자신도 죽는 줄 안다. 절대 떨어지지 아니하게 주인에게 매인 자이다. 

 

주님은 바로 그런 자(둘로스)에게 당신의 복음 전파를 위탁하셨다. 그들이 나아갈 때, 자신의 권능도 당연히 드러나게 하신 이유이다. 지난 주,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둘로스들로 간주하며, 그들과 당신의 모든 것을 함께 하고 계심을 확인한 바 있었다. 곧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눅22:28-30상)란 말씀에서였다

 

문제는 그 복음을 듣고 응답하는 인간에게 있다. 비록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으로 모두에게 복음을 전했으나, 그 반응은 하나가 아니라 둘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첫째는 그 복음을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곳이었고, 둘째는 그 복음에 적극 반응하며 거기에 의탁하며 살고자 하는 곳이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각자의 몫이다. 생각해보라. 가축을 물가에까지는 데리고 가서 마실 기회는 줄지라도, 마시는 몫은 역시 가축 자신의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늘과 땅처럼 다르게 나타났다. 오늘 세 본문 중에서, 구약 이사야서의 이스라엘과 복음서의 유대인의 모습은 복음에 대한 부정적 대응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적나라하게 소개한 곳이라면, 복음서에 나타난 이방인들의 긍정적인 대응 모습은 복음을 통하여 제시된 하나님의 의가 아멘 하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생동감 있게 잘 대변해 주었다. 이제 잠시 본 내용들을 살펴본다. 

 

서신서를 보자

그리스도의 신실한 둘로스(종)인 바울은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로마에 있는 교회공동체에게 그들을 찾아가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편지로 담아서 보냈다. 교회사가들에 의하면, 당시 로마의 인구는 100여만 명이었고, 그 중에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대략 5만여 명에 가까웠다. 그 중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약 40년경에 로마에 이주하여 들어왔으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다수 얻어서, 제법 규모가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낸 상황이었다(행28장 참조). 

 

그들 유대인들 사이에는 한때, 유대교도와 그리스도인 간의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자, 이에 분노한 황제가 유대인 모두를 로마에서 추방하는 일도 발생하기도 하였다(A.D49).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로 피신하여 바울을 만나게 된 사연이 있었다(행18:2). 아마도 바울은 그들 부부를 통하여 로마와 교회사정들을 많이 듣게 되고, 로마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선교비전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바울이 로마교회를 찾아 만나고 싶은 마음은 크게 2가지였다. 

 

1) 당신이 보유한 신령한 은사들을 전해주어서 그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고, 서로간의 교제를 강화시켜서 피차 안위함을 확보하고자 함이었다(11-12절). 

2) 활발한 전도 활동과 열매를 기대하였다(13,15:14-24참조). 로마는 세계 최대 국제도시로서 각 나라와 민족들이 다양하게 얽혀 사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구원의 복음이 전파하면, 인종적 문화적 차별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계인들에게 확산시키는 데 큰 기폭제가 될 수 있었다. 바울은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돌로스로 선택 받았다(나는 모든 종족과 계층에게 빚진 자이다/14절)는 의식으로 충만하였다. 

☞ 결국 바울의 꿈의 로마 선교는 성취되었다(행28장). 지난 강림 후(6)에서 확인한 바 있다!

 

구약을 보자

본문은 복음과 축복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한 이스라엘이 어떤 대가를 치루고 있는지를 상세히 전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은 자식으로 양육한 민족이었는데(2절), 당시의 이스라엘은 그런 아비를 무시하고 대드는 패륜아(悖倫兒) 수준의 패역 질을 하였다. 율법 상으로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대드는 것은 돌로 쳐죽일 만한 수준의 중죄(重罪)였다(신21:18-21). 그것도 유다 왕국이 거의 4대에 걸쳐서(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 이어진 국가적 범죄 상태여서, 그들을 향한 여호와의 장탄식은 백성이 겪는 고통보다 더 깊었다(1-2). 

 

1) 그 원인을 선지자는 주인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연고라고 지적하면서, 그러기에 그들은 마치 임자와 구유를 알고 주인을 따르고 복종하며 사는 소와 나귀만도 못한 자들이라며 탄식한다(3절). 선지자는 그 모습을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부패한 자식이다’고 규정하면서,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떠났다고 증언했다(4절). 그러면 그 때에 유다는 어떤 상황에 빠져든 때였을까? 앗수르 제국의 왕 산혜립의 거센 침공으로 온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었었다(B.C 701년/36-37장 참조)

 

2) 그 때의 참상(慘狀)을 선지자는 이렇게 전했다.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했으며, 전신에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맞은 흔적들뿐인데도, 치료마저 전혀 받지도 못했다(5-6절). 어디 그뿐인가? 땅은 황폐하였고, 성읍들은 불에 탔으며, 토지는 이방인 손에 뺏겨서 넘어갔고, 그들 손에 파괴 당해 황폐해졌다(7절). 실로 잔인한 지옥의 참상이었다-!

 

3) 다만 하나님이 남기신 최후의 손길은 있었다. 시온성 예루살렘이 포도원의 망대나 참외밭의 원두막처럼 겨우 남아있었다(8절). 그것들은 비록 소돔과 고모라 수준(창19:24-25)은 면하고, 일시적인 햇볕가리개였지만, 유다에게는 하나님께 돌아올 마지막 기회의 상징물이었다!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하나님의 친(親)백성도 못되는 이방인과 사회적 소수자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삶의 문제를 끌어안고 예수께 나아와서 엎드려 도움과 은혜를 구함으로서, 그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 받게 된 사례들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러한 일련의 행동들을 믿음에 의한 것으로 보시면서, 그 믿음에 놀라워하시고 칭찬도 하신다(10절).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탄식도 하시고, 동시에 그들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능력)에 발생하였음을 선포하시고, 동시에 ‘믿음으로 구원 받는 시대’가 온 세상에 열렸음을 고하셨다(11-12절). 

 

1) 예수님을 찾은 첫 사람은 나병환자였다. 그는 종교에서나 사회에서나 가족에서도 퇴출된 인생이었고, 완전히 배제당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오직 예수만이 자기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고(2절.막1:40),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할 용기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를 에워싼 수많은 무리들을 뚫으면서, 그는 거침없이 예수 앞에 나와 엎드려 간구하였다. 그의 믿음은 주님의 의를 이끌어냈으며, 치유로 그를 그 무거운 질병에서 해방시켰다(3-4절). 

 

2) 예수님을 찾은 두 번째 사람은 가버나움에 주둔 중인 로마 백부장이었다. 그가 주님을 찾은 이유는 그의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께서 찾아가 고쳐주겠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다만 말씀으로만 해 달라.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다’고 만류하였다(5-8절). 예수님은 그 백부장의 믿음에 충격과 감동을 받으셨다. 이스라엘에도 없는 큰 믿음을 그에게서 보신 것이다. 주님은 그의 믿음대로 되라하셨고, 그 즉시 하인은 나았다(10,13절). 

☞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새 질서가 성립되었음을 선포하셨다. 최우선적 조건은 하나님의 의를 도출해 낼 믿음이지, 혈통이나 기득권이 아니다. 믿음 없으면 유대인도 당연히 버림받는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 뿐이다(11-12절, 롬1:17)  

 

결론이다

예수님과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세상에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시대가 활짝 열렸다. 인간적인 족보나 계보, 업적이나 공로, 탁월함이나 우수함, 줄서기나 자랑거리 따위에 의한 구원은 없다. 다만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으로 구원의 문이 열릴 뿐이다. 

 

하지만 명심하자. 그 믿음은 생각이나 입술만의 것이어서는 안 되며, 돌로스(종) 의식(意識)과 거기에 따른 전적인 복종의 삶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 때에만 우리의 믿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며, 우리를 에워싼 역경들을 끊어내고 세상을 이길 능력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성령의 도움을 구하여, 코로나 이후까지도 승리해갈 진실한 믿음의 전사로 거듭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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